<위인의 의의>
성서조선아,
전토(全土)를 방황하면서
한 사람이라도 위대한 사람을 만나 보라.
위인이 아니거든 돌아오라.
범중(凡衆)은 네가 관계할 바 아니니라.
“산촌으로 가라! 거기의 초부(樵夫) 한 사람을 위로함으로 너의 사명을 삼으라”는
본지의 주지(主旨)를 기억하는 분은
그 모순이 큼에 의아를 금치 못할 것이다.
대체 위인이란 무엇을 일컬음인가,
얼마나 한 학식을 가진 이인가,
얼마나 한 사업과 경력을 쌓은 사람인가.
성서조선의 독자 될 만한 위인은 과연 조선에 몇 사람 될까.
염려하지 말라.
기자(記者)의 일컫는 바 위인이란 것은
산간의 초부, 그 사람을 가리킴이다.
현대 일본이 소유한 박학자(博學者)의 제1인자인 니토베 이나조 박사는
위인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리었다.
"위대한 인물은 그 행위, 그 언어, 그 인격의 힘으로써
타인의 마음에 현저한 변동을 초래케 하는 자를 이름이라"고.
저의 박학에 상응하여 심히 포용적이다.
예수도 위인, 가룟유다도 위인, 워싱턴도 위인, 장작림(張作霖)도 위인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소박한 정의와 적확한 실례가 아니고는 그 막연하고 공허함에 못견디겠다.
필자의 본 바 위인의 하나는 이러한 것이다.
업은 소작농이요,
학식은 국문성서를 겨우 해독하는 정도였다.
저는 몇해 동안의 생활에 조석(潮汐)같이 밀려드는
온갖 핍박과 조롱을 견디다 못하여
하루는 하일(夏日, 여름날)의 황혼에
버들 그늘에다 몸을 숨기고
예수를 하직하려는 기도를 시작하였다.
"차라리 금후로는 당신을 모른다고 하겠습니다'라고.
땀 흘리고 눈물 뿌려 따르던 주를 하직하고, 버들밭을 나설 즈음에
저는 기도의 친구 한 사람을 우연히 만났다.
삼엄비장한 인생의 순례에
저들은 다시 버들밭 속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를 시작하였다.
모순이라면 모순이고 미련하다면 미련하겠다.
저는 그후에도 여전히 성천강변(城川江邊)에서
신앙을 계속한다.
내가 너희더러 말하노니
여인이 낳은 사람 중에는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눅 7:28).
(김교신, 인생론)
첫댓글 감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