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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사로 보는 조선의 역사 1
태조 시대(1392~1398)
왕씨들의 수난
위화도 회군 이후 최영은 몰락했고, 이에 고려 조정은 이성계의 수중으로 돌아갔다. 회군의 주역이었던 이성계와 조민수는 각각 우시중과 좌시중이 되어 고려조의 황혼을 연출해가고 이었다. 원나라를 섬기던 구세력이 물러난 조정의 외교정책 전환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명나라를 섬겨 연호 홍무를 사용하고, 원나라 의복 대신 명나라 의복을 입도록 했다. 우왕이 강화도로 유배되자, 그 후사 문제가 조정에 닥친 가장 큰 일이었다. 이성계 일파는 기왕에 우왕을 신돈의 아들이라 하여 그 정통성을 부정한 터였다. 그리하여 이성계는 이참에 왕씨 종실 가운데 어리숙한 인물을 추대하려고 했다. 그러나 조민수의 생각은 달랐다. 조민수는 왕위를 우왕의 아들이 승계 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며 이성계 일파와 맞섰다. 여기에는 이성계를 견제하려는 속셈도 숨어 있었다.
이성계는 조정 신하들의 인심을 얻기 위해 이 일에 대해서 조민수에게 양보했다. 기실 우왕의 세자 추대를 목은 이색이 동조하여 이성계는 슬그머니 물러선 것이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이색의 영향력이 컸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우왕의 아들 창왕이 보위에 올랐다. 창왕은 우왕과 이인임의 외종 이림의 딸 근비의 소생이었다. 일설에는 조민수가 자기를 조정에 천거한 이인임에게 보은하기 위해 천왕을 천거했다는 소문이 나기도 했다.
강화도에서 여흥으로 옮겨진 우왕은 절치부심, 환궁할 꿈을 버리지 못했다. 재위 시절 예의판서를 지낸 곽충보에게 은밀히 연통을 넣어 이성계 제거를 간곡히 부탁했다. “그대는 나의 충신이었다. 이성계는 만고의 역적이다. 역적을 제거하여 나라를 바로 세워야 할 의무가 그대에게 있으니, 내가 환궁할 수 있도록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 그대를 다시 만나는 날 그대는 고려 조정의 중추가 되리라.”
곽충보에게 우왕의 뜻을 전한 인물은 최영의 생질 김저였다. 김저는 칼 한 자루를 내밀며 거듭 말했다. “이 칼은 왕이 하사한 것이오. 이 칼로 이성계를 제거하라는 분부이셨소.” “알겠소이다. 기회를 보아 거사하리다.” 곽충보는 거짓으로 동조했다. 그는 이미 이성계 일파가 되어 있었다. 위화도 회군 때 화원에서 최영을 찾아내 이성계에게 인계하여 공을 세우기도 했다. 곽충보는 칼을 증거물로 삼아 이 사실을 이성계에게 고했다. 이성계 일파는 흥분하여 우왕을 여흥에서 강릉으로 옮겨 가두고, 창왕을 폐하여 서인으로 삼아 강화도로 쫓아버렸다. 그리고 제20대 임금 신종의 7세손인 정창군 요搖를 세워 고려 마지막 임금으로 추대했다. 그가 바로 공양왕이다. 공양왕은 즉위 후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씨라며 모두 처단했다. 이로써 이성계 일파는 한결같이 주장해오던 신우와 창을 제거하고 명분을 세운 것이다.
세상에 전하기를 왕씨의 혈통은 왼쪽 겨드랑 밑에 금비늘 세 조각이 있다고 했다. 우왕이 강릉에서 망나니들에게 목이 베어질 때였다. 우왕이 모인 군중들을 향해 외쳤다. “우리 왕씨는 본래 용龍의 후손이니라. 왼쪽 겨드랑이 밑에 반드시 세 개의 비늘이 있는데, 그것으로 표적을 삼느니라. 자, 내 왼쪽 겨드랑이 밑을 봐라!” 우왕이 왼쪽 팔을 번쩍 들어 겨드랑이를 보여주었다. 과연 세 조각의 금비늘이 보였다. 크기가 돈짝만했다. “이래도 내가 신돈의 아들이란 말이냐! 성계 일파의 모함이 가소롭구나.”
우왕은 망나니의 칼에 맞아 죽었다. 강화에서 목이 달아난 창왕의 왼쪽 겨드랑이 밑에도 금빛 나는 세 조각의 비늘이 붙어 있었다. 이 사실을 안 백성들이 슬퍼하며 이성계를 원망했다.
나라가 바뀌면 전조의 풋내기들은 수난을 당하게 마련이었다. 여기저기에서 왕씨들의 수난과 살벌한 죽음이 이어졌다. 왕씨들은 개성에서 추방당해 서인이 되어 섬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죽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그러나 여기에는 무서운 음모가 숨어 이었다. 이성계 일파는 후환이 두려워 이들을 제거하려고 했다. 이제 새 나라의 임금이 된 이성계가 그들의 계획을 묵인해준 상태였다.
배 두 척이 강화로 가려고 해안을 떠났다. 그러나 배 밑창에는 큰 구멍이 뚫려 있었다. 잠수부를 시켜 구멍을 냈던 것이다. 배가 해안에서 멀어질수록 배는 물 속으로 서서히 잠겨들었다. 한순간 배가 기우뚱 크게 요동쳤다. 왕씨들은 서로 붙잡고 아우성쳤다. 배는 이미 바다 한가운데로 나와 있었다. 배가 서서히 물에 잠겨들었다. 한 스님이 이 광경을 지켜보다가 왕씨 가운데 아는 얼굴이 있어 손을 흔들었다. 왕씨가 스님을 알아보고 큰 소리로 시를 읊어주었다.
노 젓는 한 소리 바다 밖에
비록 중이 있은들 어이하랴
이 시를 듣고 스님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통곡을 터뜨렸다. 배는 돛대만 조금 보일 뿐 왕씨들의 모습은 가라앉아 보이지 않았다. 벌겋게 물든 황혼이 핏빛처럼 바다에 번졌다. 중의 통곡소리만이 간간이 이어질 뿐이었다. 왕씨를 바다 속에 빠뜨려 죽인 후 이성계의 꿈에 칠장지복七章之服(국왕이 입는 예복으로서, 천자는 구장지복, 제후는 칠장지복임)을 입은 고려 태조가 나타나 화를 내며 소리쳤다. “내가 삼한을 통합하며 이 백성들에게 공이 있거늘, 네가 내 자손을 멸하였으니 곧 오래 가지 않아 보복이 있을 것이니라. 너는 알아두어라!”
이성계가 식은땀을 흘리며 놀라 깨었다. 곧바로 입직 승지를 불렀다. “내가 고려 태조에게 꾸지람을 들었다. 어찌하면 좋은가?” “아무래도 은전은 베풀어야 할 것 같나이다.” “방법을 말하라!” “신의 생각으로는 고려 왕실의 선원璿源(왕실의 世?)의 장부에 적혀 있는 한 부분을 사면하시면 어떠할는지요?” “그 부분의 왕씨들을 살려둔다, 그 말이더냐?” “그러하오이다.” “좋은 생각이다. 시행하도록 하라!”
이 뒤부터 왕씨 사냥의 고삐가 늦추어졌다. 한편, 산속이나 외딴 섬에 숨어든 왕씨들은 신분을 숨기고 성姓을 바꾸었다. 대개 전全씨, 옥玉씨 ,전田씨, 용龍씨 등이 왕씨로 알려져 있다.
두문동 72현
충절을 상징하는 두문동杜門洞은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光德山 서쪽 기슭에 있던 옛 지명이다. 고려가 망하자 조선을 반대했던 고려 유신 신규․신혼․신우․신순․조의생․임선미․이경․맹호성․고천상․서중보․성사재 등 72현이 두문동에 들어가, 끝까지 고려에 충성을 다하고 지조를 지키며 살았다. 새 왕조에 있어서는 두문동이 눈엣가시였다. 아무리 회유책을 쓰고 높은 관직을 준대 해도 전혀 반응이 없었다. 이성계는 생각다 못해 그들에게 문호를 개방하기 위해 과거시험을 치르도록 했다. 새로운 인재를 발굴하려는 뜻도 있었으나, 고려의 충절 높은 유신들을 끌어안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
과거를 치르는 날 이성계는 초조한 마음으로 두문동의 인재들이 나타나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나 이성계의 짝사랑일 뿐이었다. 두문동의 선비는커녕 전국의 뜻 있는 선비들은 과거를 무시해버렸다. 기껏 입신양명에 눈이 어두운 조무래기 선비들이 모여 재주를 뽐냈다. 그런데 더 참담한 것은 국학에 머물러 있던 태학생들이 보따리를 싸짊어지고 국학을 떠나는 것이었다. 과거를 보지 않고 먼저 두문동으로 들어간 선비들을 따라 길을 떠나는 것이었다. 두문동으로 들어간 선비들이 태학생을 비롯하여 72명이나 되었다. 문과시험을 맥없이 치르고 무과시험을 치렀다. 결과는 문과와 다를 바 없었다. 이름난 무관들은 무과시험을 무시하고 보따리를 짊어지고 두문동으로 들어갔다. 이들은 48명이었다. 문인들은 서두문동에 모여 살고, 무인들은 동두문동에 모여 살았다. 이들은 산을 개간하여 씨를 뿌리고 가꾸어 자급자족했다.
조정에서는 이성계의 특사로 여러 사람이 동두문동을 다녀왔다. 대답은 한결같았다. “우리들은 이대로 놓아두시오. 소리 내지 않고 살겠소.” “새로운 나라의 새 조정에 나와 백성과 나라를 위해 일해주시오. 전하께오서 그대들의 출사를 손꼽아 기다리고 계시오.” “누구의 전하가 우릴 기다린단 말이오?” “불경스럽소. 말씀 삼가시오!” “불경이라니, 우리 전하는 이 세상에 없소이다.”
이성계는 특사의 보고를 받고 마지막 경고를 전했다. “만약 나오지 않으면 산에 불을 지르겠다.” “맘대로 하시오. 불을 지르든 산을 무너뜨리든 알 바 아니오.” 두문동 사람들은 결사적이었다.
조정에서 긴급회의가 열렸다. 이성계를 비롯하여 정도전․이방원․남은․조준 등 측근들이 머리를 맞대었다. “저들이 이 조정을 우습게 알고 있으니 어찌하면 좋겠소?” 이성계가 물었다. “전하, 새 조정으로서는 그들에게 할 만큼 했소이다. 더는 두고 볼 수 없사오니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하나이다.” 남은이 말했다. “특단의 조치라면?” “그들을 없애야 나라가 조용해지나이다.” “그들을 죽이라는 말이오?” “그러하옵니다.“ “전하, 예로부터 충의지사는 함부로 다루지 아니했나이다. 죽여서는 아니되옵니다.” 조준이 반대의견을 내놓았다. “언제까지 그들을 봐준다는 말이오? 그들이 있는 한 나라에 온갖 유언비어가 퍼져 백성들을 회유하는 데 짐이 될 뿐이오. 이번에 그들을 이 세상에서 없애버려야 하오.”
이방원이 성을 발끈 냈다. “옳은 말이오. 화근의 뿌리는 일찌감치 캐버리는 것이 상책이오. 전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은 신민 되기를 거부하는 자들이니, 역적이나 다를 바 없소. 역적을 그냥 두는 나라법도 있소이까?” 정도전이 거들었다. “하지만 신중해야 하오. 그들을 죽였다가 아직 추스르지 못한 민심을 크게 잃으면 국가적으로 손실이오.” 조준의 신중론에 이방원은 다시 화를 냈다. “두문동 그자들에게 매달려 언제까지 전전긍긍하겠다는 게요!” “그들은 이미 죽은목숨이나 매한가지요. 그대로 살도록 내버려두는 것도 괜찮지 않겠소?” “그리는 못하오. 그들이 고려의 상징이 되어서는 아니되오.”
이성계는 이들의 다른 의견을 듣고 있다가 정도전에게 물었다. “삼봉(정도전의 호), 그들을 죽여야 할 까닭을 말해보오.” “전하, 그들은 전하에게 반기를 든 역도들이옵니다. 역도들을 살려둔 예가 한번도 없나이다. 그러하옵고 그들을 중심으로 고려 복원 운동이 일어나 백성들이 동요하는 날에는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 막아야 할 사태에 직면하게 되옵니다. 화근의 뿌리를 캐어버리시옵소서.” “송당松堂(조준의 호), 양해하시오. 중론에 따라야겠소.” “전하, 그들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소서.” “마지막 기회라면?” “두문동에 불을 지르겠다고 미리 통보하소서. 그리하여 불길을 피해 살아 나오는 자들을 끌어안으소서.” “좋은 생각이오. 그리하십시다.”
두문동에 불을 놓겠다는 통보가 전해졌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드디어 병사들이 두문동에 나타났다. “너희들의 우거를 불사르겠다. 죽기 싫거든 나오너라!” 서두문동과 동두문동에 병사들이 횃불을 들고 들이닥쳤다. 움막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병사들이 들고 온 기름을 움막에 끼얹었다. 이제 횃불을 붙이면 두문동의 움막들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여버릴 것이었다.
“살고 싶거든 나오너라!” 아무 반응이 없었다. 병사들이 들이닥치기 전 서두문동에서는 충신들이 머리를 맞대었다. 그 속에 훗날 명재상으로 이름을 남긴 황희가 끼어 있었다. 충신들은 황희의 그릇을 알고 있었다. 성균관 학관學館으로 있다가 나라가 바뀐 것이다. “황 학관, 그대는 이곳을 떠나 앞날을 기약하시오.” 조의생이 권했다. “당치 않은 말씀이오. 여러분과 생사를 같이할 따름이오.” “충절은 우리만으로 충분하오. 황 학관은 세상에 나가 백성들의 이웃이 되시오. 망국의 백성들이 의지할 사람이 절실한 때요. 황 학관이 그런 역할을 해주시오.” 성사제가 거들었다. 그러자 여기저기에서 황희더러 망국민의 이웃이 되어 그들의 쓰라린 가슴을 달래주는 사람이 되라고 아우성이었다.
“날더러 변절하란 말이오?” “변절이 아니라 백성들의 이웃이 되어 희로애락을 함께 하라는 말이오.” “그리는 못하오.” “황학관, 누군가 살아남아 우리의 충절을 세상에 알려야 할 게 아니오? 세상으로 나가 우리의 뜻을 밝히시오.” 황희의 기세가 그제야 누그러졌다. 이들의 죽음을 헛되이 흘려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희는 이들의 뜻을 세상에 전하겠다는 각오로 두문동을 빠져나와 멀리 전라도 장수로 몸을 숨겼다.
횃불을 움집에 붙였다. 기름 먹은 움집은 성난 듯 불꽃을 튀겼다. 움집에서 기어 나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모조리 타죽고 말았다. 시체 타는 냄새가 백 리 안에 퍼졌다. 노린내가 진동하여 인근 관가와 백성들이 코싸개를 하고 다녔다. 한 사람도 나오지 않고 고스란히 타 죽었다는 보고를 받고 이성계는 탄식을 터뜨렸다. “그들은 영원히 사는 삶의 기로 행하고, 나는 현실에서 발버둥치는 숭냥이가 되었구나.” 두문동 72현과 48현은 이성계가 만들어놓은 충신이었다. 그리고 두문동은 충절의 땅이 되어 역사 속에서 빛을 내고 잇는 것이었다. 사람이 죽어야 할 때 죽는 것, 그 길은 참다운 삶의 길이 아니던가.
세종시대(1418~1450)
맹사성의 해학과 공당 문답
황희 못지 않게 명재상으로 이름을 떨친 이가 고불 맹사성孟思誠이다. 황희와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같은 재상으로서 맹사성은 황희와 쌍벽을 이루었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럽고 청렴했다. 그가 거처하는 집은 겨우 비바람을 막을 정도였다. 나들이 할 때는 소를 타고 다녀 백성들은 그가 재상인 줄을 몰랐다. 집안 살림에는 초연했고, 음률을 사랑하여 퉁소와 피리를 끼고 살았다. 그는 조정에서 주는 녹미祿米 외에는 먹지 않았다. 한번은 아내가 햅쌀밥을 지어 올렸다.
“어디에서 햅쌀을 구해왔소?” “녹미가 묵어 냄새가 나서 먹을 수 없나이다. 이웃집에서 꾸어 밥을 지었나이다.” “허허, 공연한 짓을 했소이다. 벼슬아치가 녹미를 먹는 것은 당연한 일, 앞으로는 절대 그러지 마시오.” 맹사성은 밥상을 물려 버렸다. 그렇다고 맹사성이 꽁생원은 아니었다. 해학이 넘치는 인간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경자생庚子生이면서 계묘생癸卯生끼리 모인 계에 장난삼아 들어갔다. 소위 갑계, 즉 동갑계에 든 것이다. 자기보다 나이 적은 동갑계에 들어 시치미를 떼었다.
세종이 어느 날 고불에게 나이를 물었다. “경의 나이가 몇이오?” 맹사성은 임금을 속일 수 없었다. “예 전하, 신 경자생이옵나이다.” 이 말을 계모생인 신하가 들었다. 갑계에 금세 소문이 퍼졌다. 즉시 제명되고 한때 웃음거리가 되었다. “고불이 얼마나 젊어지고 싶으면 나이를 네 살이나 속이고 젊은 축에 끼려고 했을까.” 고불은 그 말을 듣고도 오불관언이었다. 오히려 능청을 떨며 받아넘겼다. “어린 사람들이 어른이 놀아주면 고맙다고 할 것이지, 웬 말이 그렇게 많은가?”
고불은 피리를 가지고 다니며 기분이 내키면 꺼내서 한 곡조씩 붙었다. 집에 있을 때는 항상 대문을 걸어잠근 채 손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어쩌다가 공무로 오는 관리는 물리치지 않았다. 관리가 일을 보고 가면 이내 대문이 잠겼다. 관리는 멀리 동구 밖에서 피리 소리를 들으면 고불이 집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여름이면 소나무 그늘에 앉아서, 겨울이면 포단蒲團(부들로 둥글게 틀어만든 방석)에 앉아 피리나 퉁소를 붙었다. 그토록 음률을 즐기고 사랑했던 것이다. 그의 주변에는 피리․퉁소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병조판서가 공무로 고불의 집을 찾았다. 마침 소낙비가 내려 고불의 집이 온통 물벼락을 맞고 있었다. 여기조기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병조판서의 의관이 다 젖었다. 고불은 새는 물방울을 피해 앉으며 군시렁거렸다. “하필 손님이 계실 때 소낙비가 쏟아질 게 뭐람.” 병조판서는 마침 사랑채를 크게 짓고 있었다. 집에 들어온 그는 당장 공사를 중단 시켰다. “정승의 집이 그러한데 내 어찌 바깥 사랑채가 필요하겠는가.”
고불의 고향은 온양이었다. 어버이를 뵈러 한양에서 온양까지 소를 타고 다녔다. 한번은 양성과 진위 두 고을 수령이 고불이 온양에 내려온다는 소문을 듣고, 장호원에서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 이번 기회에 재상의 눈에 들어보려는 수작이었다. 수령들이 있는 앞으로 한 노인이 소를 타고 지나쳤다. 수령이 관졸을 시켜 꾸짖었다. “왠 늙은이냐? 재상 행차를 기다리는데 소를 타고 지나가다니 버릇이 없구나.”
고불이 빙긋 웃고 말했다. “수령들에게 이르게. 온양에 사는 맹고불이라고 말일세.” 관졸이 전하자 두 수령은 기겁을 하여 달아났다. 당장 물고를 낼 것 같아서였다. 어찌나 급히 달아났던지 언덕 밑 깊은 못에 수령의 관인이 떨어진 줄도 몰랐다. 뒤에 그 연못을 인침연印沈淵 이라고 불렀다.
고불이 온양에 들러 어버이를 뵙고 한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도중에 비를 만나 용인의 주막에 들렀다. 행차가 요란스러운 과객이 누상에 앉아 거드름을 피웠다. 고불은 할 수 없이 누상 아래에 앉았다. 거드름을 피우고 있는 자는 영남에서 의정부의 녹사錄事(하급관리) 자리에 응시하러 가는 중이었다. 그 사람이 고불에게 누상으로 올라오라고 했다. 둘은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나누며 장기를 두었다. 둘은 갑자기 친해져 농을 주고받기에 이르렀다. “우리 공․당 놀이 한번 할까요?” 영남 나그네가 말했다. “그것이 무슨 놀이오?” “내가 말끝에 공 하고 물으면 노인께서 당 하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거 재미있겠소. 내가 연장자이니 먼저 묻겠소.” “그러시지요.”
고불이 먼저 물었다.
“무엇하러 서울에 올라가는 공?”
“벼슬을 구하러 올라간 당.”
“무슨 벼슬인 공?”
“녹사 지리란 당.”
고불은 한참 사이를 두었다가 말했다.
“내가 시켜주겠 공.”
“에이, 그러지 못할 거 당.”
“그렇지 않을 공.”
“농담이 지나치 당.”
“알아서 하라 공.”
“그리 할게 당.“
두 사람은 비를 피하며 재미있게 지내고 헤어졌다.
며칠 후 맹사성이 의정부에 앉아 있는데 영남의 그 사내가 들어왔다. 고불은 슬그머니 장난기가 발동하며 사내에게 물었다. “어떠한 공?” 사내가 깜짝 놀라 고불을 쳐다보고 납짝 엎드렸다. 그리고 엉겁결에 말을 받았다. “죽었지 당.” “핫핫핫…되었지 공.” “대감, 소인 죽을죄를 지었나이다.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염려놓으시 공.” 그 자리에 있던 신료들이 괴이쩍게 여겨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고불이 그 까닭을 얘기했다. 그러자 의정부가 웃음바다가 되었다.
고불은 그 사람을 녹사로 삼았다. 그 뒤 그 사람은 고불의 추천을 받아 여러 차례 고을 수령을 지냈다. 참으로 묘한 인연이었다. 고불이 아니면 감히 흉내내지 못할 해학이었다. 뒷날 사람들은 두 사람의 희한한 문답을 ‘공당 문답’이라 칭했다.
세 가지 두려워하지 않는 것
세종의 지극한 굄을 받았으나 벼슬을 탐하지 않고 팔자대로 관동지방을 떠돌며 생을 마친 조수趙須는 서거정․권람․한명회 등 쟁쟁한 권세가를 제자로 둔 유방선과 당대에 쌍벽을 이룬 학자요, 문인이었다. 조수의 자는 형보亨父, 호는 송월당松月堂․만취정晩翠亭이다. 태조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라 사예(성균관 관원)를 지내다가, 가정에 화를 당해 관동지방으로 내려가 30여 년간 학문에 힘썼다. 그는 읽지 않은 책이 없었다. 안평 대군이 그의 학문과 문장을 알아보고 조수를 불렀다.
“내 일찍이 송월당의 문장을 보았소. 가히 일품이었소.” “과찬이십니다. 시골에 묻혀 있는 무지렁이가 알면 무얼 알겠소.” “원 겸손의 말씀을… 내가 정표로 책 한 권을 드리겠소.” “무슨 책이옵니까?” “『이백집李白集』이오.” 그러자 조수가 자기의 배를 툭툭 치며 호기를 부렸다. “대군, 이태백 전집이 이 뱃속에 들어 있소이다.” “허허, 그래요?” “『이백집』은 다른 사람에게 주시구려.” 조수는 끝내 『이백집』을 뿌리치고 받지 않았다.
어느 날 세종은 조수의 재주를 아껴, 내관에게 족자를 보따리에 싸서 보내어 시를 쓰도록 했다. 조수는 붓을 들어 그 족자의 그림에 어울리는 시를 휘갈겨나갔다. 그러면서 말했다. “이 늙은이의 화법이 새끼 가진 범이 할퀴는 발톱과 같구나.” 내관은 무슨 말인지 몰라 조수가 하는 양을 지켜볼 따름이었다. 족자의 시를 본 세종이 찬사를 보냈다. “오오, 그의 성품이 너그럽고 대범하구나. 족자의 시가 과인의 마음에 쏙 드는구나.”
한윤이라는 선비가 조수를 찾아가 당호堂號를 지어달라고 청했다. 조수는 3외三畏라는 편액을 써주었다. 삼외란 『논어』에 나오는 글로 ‘군자가 두려워하는 세 가지가 있으니, 하늘의 명령을 두려워하고, 인품이 훌륭한 사람을 두려워하고, 성인의 말씀을 두려워함’을 뜻하는 말이다. 한윤이 물었다. “선생께서도 역시 세 가지의 두려움이 있나이까?” 조수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세 가지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있다네.” “그것이 무엇이오이까?”
“첫째, 돈이 있어서 술을 마시고 취하여 곧 깊은 잠이 들면 코를 골며 벼락도 두렵지 않네.” “예에?” “왜? 맘에 들지 않는가?” “아닙니다.” “둘째, 겨울에는 솜옷을 입고 여름에는 삼베옷을 입으며, 아침에는 밥, 저녁에는 죽을 먹지. 쌀독에는 남은 쌀이 없고 상자에는 암은 옷이 없어 도둑이 두려울 것이 없네.” “그렇습니다.” “셋째, 10년 동안을 벼슬길에서 놀았으나, 한 치 전진하면 한 지를 물러서게 되어, 부귀는 뜬구름이요 공명은 헌신짝인 듯했으니, 재상을 두려워 할 것이 없네.”
“선생님, 아무나 따를 수 없는 규범이나이다.” “아닐세. 욕심을 자르면 얻을 수 있는 것들일세.” 한윤은 느낀 점이 많았다. 조수는 한윤을 보고 방긋 웃어주었다.
세조시대(1455~1468)
충신의 후손이기에…
정보鄭保는 포은 정몽주의 손자이다. 보는 방랑벽이 있고 활달하여, 어디에든 구애받지 않으려고 했다. 보는 성삼문․박팽년을 좋아했다. 보의 서매庶妹가 한명회의 첩이 되었다. 한명회는 세조의 장자방이라 칭해질 만큼 세조의 최측근으로서 권력이 욱일승천하는 판이었다. 사육신을 잡아들여 국청에서 피비린내를 풍길 때 정보가 한명회를 찾았다.
“매제는 어디 갔는가?” “죄인들을 국문하느라고 대궐에 있습니다.” 서매가 대답했다. “아니, 그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지지고 볶는다든가?” “오라버니, 말씀 삼가세요. 역모를 다루는 사건입니다.” “매제가 만약 그 사람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한다면 만고의 죄인이 될 것일세.” 정보는 손을 휘휘 저으며 한명회의 집을 떠나버렸다.
저녁에 퇴청하여 이 말을 들은 명희는 곧 다시 입궐하여 세조에게 고해바쳤다. “전하, 정보라는 자가 난언亂言을 늘어놓고 다닌다 하옵니다. 그자를 잡아다가 죄를 물으소서.” “잡아들이도록 하시오.” 정보가 세조 앞에 끌려왔다. 세조가 친히 국문했다. “네가 무슨 연유로 성삼문․박팽년을 두둔하는 말을 하고 다니느냐?” “신은 항상 그 두 분을 성인군자로 생각하고 있었나이다.” “뭣이라? 성인군자라?” “그러하옵나이다.” “전하, 이자의 죄상이 이미 드러났사오니 극형에 처하시옵소서. 이자도 역모의 방조자이옵나이다.” 신하들이 입을 모아 충성심을 보였다. 정보는 그들이 하나같이 구더기로 보였다. 가소로운 인간들이었다. 정보는 두려운 기색이 전혀 없었다.
“다시 묻겠다. 두 사람이 정녕 성인군자이더냐?” “그러하옵나이다.” “저자를 수레로 짖어 죽여라!” 세조가 화가 나서 소리쳤다.
정보를 형장으로 끌고 갔다. 그가 국청에서 나간 후에 세조가 물었다. “저자는 어떤 사람인가?” “전하, 정보는 포은 정몽주의 손자이옵니다.” 세조는 생각을 바꾸었다. “충신의 손자를 죽일 수는 없다. 극형을 감하여 연일 땅으로 귀양 보내라!” 정보는 할아버지 덕으로 죽음 직전에 살아났다.
대간이 전라감사 이석형을 국문하라고 청했다. 세조는 허락하지 않았다. 이석형은 세종조에 삼장원三壯元에 올라 한때 명성을 날렸다. 특히 박팽년 ․성삼문 등과 친했다. 세조가 단종에게 선위받을 때, 석형은 어머니 상을 당하여 복중에 있었다. 그는 복을 마치고 전라감사가 되었다. 이 무렵 사육신 등의 옥사가 일어났다. 그는 외적에 있었으므로 단종 복위에 가담하지 않았다. 이석형은 전라도 순행길에 올라 익산에서 사육신이 다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객사 벽에 시를 써서 위로했다.
우나라 때 이녀죽二女竹과
대나라 때 대부송大夫松이로다
비록 그 슬프고 영화로운 것의 차이는 있을망정
같은 절개로 대와 소나무의 연량炎凉이야 있을쏘냐
이녀죽은 열녀의 상징으로, 우순이 남방에 놀러갔다가 죽자 그의 두 왕비가 소상강에서 슬피 울어, 눈물이 대술에 뿌려져 반죽班竹이 되었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대부송은 진시황이 태산에 놀러갔다가 도중에 비를 만나 다섯 소나무 밑에서 비를 피했는데, 그 소나무에 대부라는 벼슬을 주었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대간에서 이석형의 이 시를 걸고 넘어졌다.
‘전라감사 이석형을 잡아올려 죄를 물으소서.’ 상소가 빗발쳤다. 세조는 이석형의 재주를 아끼고, 인재들의 희생을 막기 위해 대간의 빗발치는 상소를 묵살해버렸다. “시인의 뜻을 그대들이 아는가? 그 뜻이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거늘, 역도들에게 마음을 주었다고 속단할 수 없다. 다시는 거론치 말라.” 뜻밖의 예외였다. 정보와 이석형은 죽음 직전에 목숨을 건진 천운이 따른 인물들이었다.
예종 시대(1468~1469)
죽음을 부른 시 한 수
28세에 역적으로 몰려 목숨을 잃은 남이는 태종의 외손자였다. 용맹이 뛰어나고 포부가 커서 시기가 따랐다. 심지어 남이가 그의 어머니와 정을 통했다는 밀고가 들어와 옥에 갇히기도 했다. 일찍이 그가 남긴 시 한 수는 사나이의 기상을 한껏 뽐낸 것이었으나, 결국 자신을 옭아매는 마수가 되어 죽음으로 몰고갔다.
백두산 돌을 갈아 다 없애고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없어졌다.
사나이 스무 살에 나라를 평정 못한다면
뒷세상에 그 누가 대장부라 이르리오
이 한 수의 시는 후에 남이의 올가미가 되게 된다.
권람이 시집 보낼 딸이 있어 사윗감을 골랐다. 그때 남이의 집에서 청혼이 들어왔다. 권람이 남이의 사주를 보았다. 점쟁이가 불길한 말을 했다. “이 사주는 반드시 젊은 나이에 요절할 것이오.” 이번에는 딸의 사주를 물어보았다. “이 사주도 수명이 매우 짧고 자식이 없으나, 복만 누리고 화는 입지 않을 것이오.” 권람은 남이를 사위로 맞았다. 남이는 17세에 무과에 장원한 후 임금의 극진한 사랑을 받았다. 28세에 병조판서에 올라 주위의 시기와 질투를 샀고, 그 결과 죽음을 재촉하게 되었다.
백성들 사이에 이런 말이 전해졌다. 남이가 소년 시절에 거리에서 놀 때였다. 한 어린 종이 보자기에 작은 상자를 싸가지고 가는 것을 보았다. 보자기 위에 분을 바른 여자 귀신이 앉아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하나도 보지 못했으나 남이 눈에는 귀신이 보였다. 남이는 여자 귀신을 따라갔다. 종은 한 재상의 집으로 들어갔다. 조금 후에 그 집에서 우는 소리가 들렸다. 남이가 그 연유를 물었다.
“주인집 작은 낭자가 금방 죽었소이다.” 하인의 대답이었다. “내가 죽은 낭자를 보면 살릴 수 있다. 주인에게 알려라!” 주인은 처음에는 허락하지 않다가 행여나 하는 심정으로 남이에게 죽은 낭자를 보여주었다. 남이의 눈에 분을 바른 여자 귀신이 낭자의 가슴 위에 앉아 있었다. 귀신이 남이를 보고 달아나 버렸다. 낭자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남이가 낭자의 방을 나왔다. 낭자는 다시 죽어 나자빠졌다. 남이가 방으로 들어가면 낭자는 살아나는 것이었다. 남이가 물었다. “아까 어린 종이 가져온 상자 속에 무엇이 들어 있었소?” “홍시가 들어 있었는데, 아이가 그걸 먹고 숨이 막혀 쓰러졌다오.” 남이는 자기가 본 분을 바른 여자 귀신을 자세히 설명하고 귀신을 다스리는 약으로 치료하여 살아났다. 이 낭자가 뒤에 남이의 아내가 되는 권람의 셋째 딸이었다.
남이가 어느 날 숙직하다가 때마침 하늘에 나타난 혜성을 보고 말했다. “혜성은 곧 묵은 것을 제거하고 새로운 것을 포치布置하는 형상이다.” 이 말을 유자광이 전해들었다. 예종이 즉위한 지 얼마후의 일이었다. 유자광은 예종이 남이를 싫어하고 꺼린다는 것을 알고 거짓을 꾸며 예종에게 고변했다.
“전하, 남이가 자신의 직위를 남용하여 반역을 꾀하고 있나이다.” 예종은 곧 국청을 열어 남이를 역모죄로 다스렀다. 예종이 친국했다. “죄인은 낱낱이 고하라! 공범자가 누구이더냐?” 남이는 때마침 예종을 모시고 있는 영의정 강순이 눈에 띄었다. 강순이 자기를 변명해주지 않는 것이 괘씸했다. 강순은 이시애의 난 때 남이와 함께 출정하여 공을 세우고, 또 야인들의 소굴인 건주위를 칠 때 서정장군이 되어, 부장군 남이와 좌장군 어유소와 더불어 괴수 이만주를 죽이는 등 큰공을 세웠다. 남이가 역모를 꾸밀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강순이었다. 그런데 강순은 아무 말이 없었다.
“강순도 역적 모의에 참여했사옵니다.” 강순은 졸지에 역적 누명을 쓰고 예종 앞에 엎드렸다. “전하, 모함이나이다. 신은 본래 평민으로서 밝으신 성군을 만나 벼슬이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영의정에 이르렀나이다. 신이 무엇이 부족하여 역모에 가담했겠나이까! 굽어 살피시옵ㅅ소서.” “경의 말이 맞다. 과인은 경을 믿노라!” “아니옵니다! 전하는 강순의 노회한 속임수에 넘어가려 하시옵니다. 역모에 가담한 자의 죄를 면해주고서 어디서 다른 죄인을 찾겠나이까.”
남이가 외쳤다. 심약한 예종은 강순을 의심했다. “국문하라!” 남이는 회심의 미소를 띠었다. 강순의 나이 80세였다. 고문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자복하고 말았다. 남이가 국문을 받을 때 사나이의 패기를 읊은 시의 한 구절이 단단한 올가미가 되어 그를 옭아맸다.
어느새 ‘남아이십미평국男兒二十未平國’ 이라는 시구가 ‘남아이십미득국男兒二十未得國’으로 둔갑하여 남이는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미평국’이면 나라를 평정한다는 뜻이 되고, ‘미득국’ 이면 나라를 얻는다는 듯이 되니, 그 둘은 하늘과 땅 차이만큼 뜻이 달랐다. 남이는 벌써부터 나라를 얻으려고 준비해왔다고 유자광 등이 예종을 속이고 몰아붙였다. 남이는 구차하게 살고 싶지 않아 스스로 반역자임을 자백했다.
억울하게 걸려든 강순이 남이에게 부르짖었다. “네 이놈 남이야! 네가 나에게 무슨 원한이 있다고 모함을 했느냐?” “원통한 것은 나도 대감 못지않소, 대감이 영의정으로서 나의 원통함을 알고도 구해주지 않으니 나도 어쩔 수 없소.” 강순은 체념하고 말았다. 병조판서 허종을 의심하여 예종이 남이에게 물었다. “허종도 가담했느냐?” “허종은 충신이오. 허종을 높이 쓰고 의심하지 마시오.” 남이는 허종을 다치게 하지 않았다. 남이와 관련된 인물들을 죄다 잡아들여 문초했다.
남이가 도총관이 되자 벼슬아치들은 다투어 명함을 내밀었다. 김맹이란 사람만이 도총부 경력직에 있으면서도 명함을 내밀지 않았다. 남이의 집을 수색했을 때 명함을 쏟아져 나와 그자들이 잡혀가 혼이 났으나 김맹만은 무사했다. 사람이 살면서 시류에 너무 민감해도 화를 면치 못하는 법이다. 심맹처럼 자신을 믿고 세상을 의연하게 흔들림 없이 살아가면 좋으련만, 예나 지금이나 세상은 풍전세류로 하여 혼탁하기 그지없다.
성종 시대(1469~1494)
임금의 자질
예종이 즉위 후 해를 넘겨 세상을 떠나고, 13세의 어린 임금이 보위에 올랐다. 조선 제9대 성종이다. 성종은 학문에 뜻이 많았다. 아침․낮․저녁 세대에 글을 강론하고, 밤에도 옥당에 입직한 신하를 불러 강론을 청했다. 강론을 마치고는 신하와 편복차림으로 마주앉아 술을 내리면서, 고금의 치란治亂과 민간의 편리한 일, 병폐로운 일 등에 대해 물었다. 따라서 전각안에는 늘 촛불이 켜져 있었다. 혹 입직 신하들이 술에 취하면 어전 촛불을 주어 바래다 주라고 내관에게 일렀다.
성종은 해서楷書에 정통하여, 글씨 모양이 사랑스럽고 단아하며 무게가 있었다. 또 묵화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나랏일을 보살피는 여가에 때때로 필묵을 가까이하여 솜씨를 보였다. 성종의 짧은 글씨와 작은 화폭들이 세상에 흩어져, 이것을 얻은 자는 겹겹으로 사서 간직하여 주옥보다 더 귀중하게 여겼다. 이따금 궁인의 상자 속에 들었던 휴지 조각이 발견되기도 했는데, 종이와 필체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 종이 조각에는 단상을 읊은 시가 적혀 있었다.
그윽한 정자는 물을 내려다보고
높은 나무는 잔잔한 물을 굽어본다
준마가 푸른 풀밭에서 우니
봄이 산기슭에 있구나
한적한 봄을 읊은 것 같으나, 고독감이 물씬 배어 있다. 외로움은 이 종이 조각에도 묻어 있다.
깍아세운 듯한 절벽은 천 길이나 섰는데
솔바람은 불어 그치지 않네
남간에 기대어 서 있는 무한한 뜻에
고향의 가을이 어렴풋하네
성종은 형 월산대군에 대한 우애가 남달랐다. 형에 대한 애틋한 정을 읊은 시도 보인다.
묻노니 형은 무슨 일로 세월을 보내는가
상상하건대 거문고와 노래겠지
이러한 종이 조각으로 보아 성종은 낙서를 즐긴 듯하다.
뒤에 영의정을 지낸 성희안이 홍문관 정자(정9품)로 있을 때였다. 그가 부친상을 당하여 복제를 마쳤다. 성종은 말단 벼슬아치인 그를 편전 문 밖에까지 불러 위로했다. 그리고 내관을 불러 성희안에게 매 한 마리를 주면서 일렀다.
“그대는 늙은 어머니가 계시니, 공무의 여가를 틈타 이 매로 사냥하여 맛있는 고기를 드리도록 하라!”
성희안이 숙직을 할 때 성종의 부름을 받아 술을 마시며 세상사를 토론했다. 그는 술에 취해 감자와 귤 여남은 개를 소매 속에 넣었다. 내관이 술 취한 희안을 업고 나가다가 소매 속의 감자와 귤이 떨어져 바닥에 흩어졌다. 이튿날이었다. 성종은 감자柑子(홍귤나무의 열매)와 귤 한 쟁반을 옥당(홍문관)에 하사하면서 일렀다. “어젯밤 희안이 감자와 귤을 소매 속에 넣은 것은 노모를 위한 것이므로 과인이 오늘 그것을 내리노라.” 성희안은 성종의 은혜를 마음속 깊이 새겨 죽음으로 갚으려고 했다. 뒷날 그는 중종반정中宗反正의 핵심 인물이 되어 폭군 연산을 몰아내는 게 목숨을 걸었다. 성종에 대한 은혜 갚음이었다.
한번은 재상 이영은과 이곤 두 사람이 한 기생을 함께 관계하고 서로 빼앗으려고 추태를 부렸다. 간관이 이를 알고 죄를 논하며 파직시키라고 청했으나, 성종은 응하지 않았다. 양사에서 벌떼처럼 일어나 두 사람을 파직시키라고 성종에게 압력을 넣었다.
성종이 말했다. “예로부터 사대부들이 아내와 첩을 서로 빼앗는 것은 쇠망해가려는 징조다. 나는 지금 이 나라가 쇠망해가는 세상으로 볼 수 없으므로 대간의 파직하라는 청에 따를 수 없다.” 그리고 이영은과 이곤에게 영을 내렸다. “그대들은 벼슬을 내놓고 물러가 깊이 반성하라!” 성종은 두 정승을 파직시키지 않고 사직서를 쓰게 만든 것이다. 현명한 판결이었다.
성종은 경연 강론이 끝나면 곡 편전에 나왔다. 6개 부처 승지가 각기 소속 관청의 일을 가지고 해당 관원들과 함께 임금을 뵈었다. 임금은 승지와 관원들과 더불어 나랏일을 의논하고, 옳지 않은 일을 상부하면 물리친 후 다시 의논해오라고 영을 내렸다. 그리고 의견을 꼼꼼히 따져 물었다.
“이것이 정녕 당상관의 의사인가, 해당 관원의 생각인가?” 그리고 의견을 낸 관원의 이름을 기록해놓았다가 반드시 승진에 반영시켰다. 또한 성종은 수령과 변방의 장수들이 그만두거나 부임할 때 한 사람씩 불러, 그 사람의 출신내력과 친족․교우 관계를 물었다. 그리고 군졸을 다스리고 백성을 어루만지고 외적을 방어하는 방법을 물어, 잘하고 있다고 보면 칭찬해주고, 때로는 승진시켜 사기를 북돋워주었다. 또 잘못한다고 판단되면 내쫓고, 그 수령과 변방 장수를 추천한 사람에게 책임을 물었다. 그러므로 지방관으로 발령받는 관리가 임무를 감당하기 어렵다 싶으면 병을 핑계삼아 부임하지 않는 예가 종종 있었다.
한번은 성종이 한 수령이 지방을 잘 다스린다는 말을 들었다. 성종은 그 수령을 크게 쓸 수 있는지 알아본 후에, 조정으로 불러 사헌부 소속의 집의(종3품)로 명했다. 3사三司(사헌부․사간원․홍문관)에서 상소를 번갈아 올려 그 집의의 임명을 거두어들이라고 아우성이었다. 성종은 오히려 그 사람을 이조참의로 한 품계 더 승진시켰다. 3사에서는 또 극력 반대하여 들고일어났으나, 며칠만에 성종은 또 사람을 품계 올려 이조참판(차관급)으로 임명했다. 그제야 3사에서 상소를 중지했다.
“만약 이에 그치지 않는다면 반드시 정승까지 이르게 될 것이니, 그만 중지하는 것만 못하다.” 그 사람은 후에 정승이 되었고 재능이 출중하여 나라에 큰 도움을 주었다. 성종의 사람 보는 눈에 신하들은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성종이 후원에서 산보를 즐겼다. 그때 까치가 종이 한 장을 물고 가다가 성종 앞에 떨어뜨렸다. 성종이 그 종이를 무심코 보았다. 해변 고을 수령이 좌승지에게 뇌물을 준 물목 단자單子였다. 성종은 그 종이를 소매 속에 넣고 경연에 나가, 여섯 승지를 불러 조용히 말했다. “그대들에게 묻겠노라. 만약 지방의 수령들이 음식물을 그대들에게 선물한다면 예의를 무시하고 받겠는가?” 여러 승지들이 입을 모았다. “전하, 어찌 감히 덥석 받겠나이까?”
그러나 좌승지만은 대답을 못하고 머리를 조아렸다. “신은 덥석 받았나이다. 신은 90세가 되는 노모가 계시온데, 평소에 교분이 두터운 한 수령이 어제 해산물을 신에게 선물하여 그것을 받았나이다. 신에게 죄를 주시옵소서.” 성종은 환하게 웃으며 소매 속에서 그 물목 단지를 꺼냈다. “그대는 옛날 정직한 사람의 유풍을 지녔다고 이를 만하다. 노모를 지극 정성으로 모시도록 하라!” 성종은 뇌물과 성의의 선물을 구별하여 신하들을 단속했다.
성종은 큰 술잔에 술 마시기를 좋아하는 묘한 버릇이 있었다. 맑기가 물 같은 옥 술잔이 하나 있었다. 성종은 술이 취하면 신하에게 그 술잔으로 술을 마시게 했다. 어느 날 종친부의 한 종실이 술을 마신 뒤에 그 옥 술잔을 소매 속에 살짝 넣고 일어나 춤을 추다가, 거짓으로 넘어져 술잔이 와장창 깨어져버렸다. 성종의 과한 음주를 간접적으로 깨닫게 한 처사였다. 성종은 종실의 뜻을 알고 죄를 묻지 않았다.
성종은 말년에 왕자 역(후에 중종)을 유별나게 사랑했다. 사헌부에서 이일을 문제삼았다. 지나친 편애로 교육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다. 성종은 사헌부에서 올리는 상소를 읽고 난 후, 사헌부의 장령을 불러 아무 말 없이 한 수의 시를 보여주었다.
세상 사람들이 늦가을 국화를 사랑하나니
이 꽃이 핀 뒤에는 다시 다른 꽃이 없기 때문이다.
장령이 시를 읽고 눈물을 닦았다. 임금의 심약함이 죽음을 끌어들이고 있어서였다. 얼마 후 성종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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