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 열 사람이 없어서 유황과 불로 멸망당했다는 소돔과 고모라는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성서학자들과 고고학자들의 끊임없는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이 도시들은 고고학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천재지변으로 파괴된 유적이어서 화산폭발로 재속에 파묻힌 지중해의 테라섬이나 이탈리아의 폼페이를 연상시키며 그 위치를 찾기위해 몰두해왔다.하지만 아직 그 누구도 자신있게 소돔과 고모라의 위치를 밝힐 수 없었기에 역사성이 없는 허구적 신화로 일축되기도 한다.한편 비교적 얕은 남쪽 사해가 역사시대이후 생겨났다는 학설에 근거하여 원래 그 곳에 소돔과 고모라가 있었는데 북쪽 사해 물이 넘쳐 흘러 들어와서 완전히 물에 잠겼고 지금도 사해 바닥을 발굴하면 불에 타 멸망했던 옛 도시들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된 적도 있다.19세기 이래로 이스라엘 지역에서 대부분의 성지를 지리적으로 확인하려는 전통에서 사해 서쪽에서 소돔과 고모라를 찾으려는 시도하에 ‘소돔 산’과 ‘롯의 아내의 기둥’ 등이 생겨났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특이한 지형지물에 대한 전설적인 명명에 지나지 않는다.
1만년전 사해변의 고도문명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본격적인 고고학적 탐사는 1920년 프랑스 고고학자들이 사해 북동쪽의 고대 유적지 툴레일랏 엘-가술을 발견하면서 시작됐다.이곳의 최초 주거흔적은 7000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특히 서기전 4300년경부터 이 유적지는 이스라엘의 동석기 시대를 대표하는 ‘가술문명’으로 불릴만큼 지역문명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서기전 4000년경 건설된 신전이 있으며 대형 별이 등장하는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벽화는 이곳서 출토된 유물의 백미로 손꼽힌다.고도로 발달된 가술의 문명전통은 이곳에서 북서쪽으로 15㎞ 떨어진 여리고에서 비롯됐다.고고학적 관점에서 도시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주거지인데 이미 1만년전 여리고는 망대와 성벽을 건설한 도시문명을 이룩했다는 사실이 지난 1950년대 발굴을 통해 밝혀진 것이다.
창세기의 소돔(?): 밥 에-드라
1924년 미국 고고학자들은 사해 동편 리산 반도 지역에서 성벽으로 둘러싸인 한 유적지를 발견했다.비록 일년 중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 광야지역에 자리잡고 있지만 이 도시의 북쪽에는 우기에 물이 넘치는 와디 케락이 사해로 흘러들어가고 있기때문에 우물만 파면 얼마든지 물을 구할 수 있었다.밥 에-드라로 불리는 이 고대도시는 1965년부터 3년간 지속된 발굴을 통해서 서기전 3500년경부터 사람들이 거주했으며,서기전 2700년경에는 수천명이 거주하던 대규모의 도시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만일 아브라함 시대를 중기 청동기 시대인 서기전 2000년 이후로 본다면 소돔과 고모라는 그 이전에 번창했던 초기청동기 시대의 도시여야 함으로 밥 에-드라는 소돔의 강력한 후보지로 떠올랐다.이 도시는 서기전 2200년경 그 명맥이 끊어졌다.아마도 기후변동으로 심한 가뭄과 기근으로 정착민들은 도시를 떠나 계절적으로 이동하는 유목민으로 전환된 것으로 보인다.
5천년전 사해변의 다섯도시
소돔과 고모라는 사해 골짜기에 위치한 다섯 도시 중 대표적인 도시들이었다.이 도시들이 위치한 골짜기는 싯딤 골짜기이며 염해,즉 사해 지역에 자리한 곳이다.창세기 14장에는 메소포타미아의 네 왕이 싯딤 골짜기로 원정 와서 이 지역의 다섯 왕과 전투를 벌이는 장면이 등장한다.소돔과 고모라를 비롯해서 아드마,스보임,소알의 지명이 등장하는데 1973년의 이 지역 탐사를 통해서 서기전 3000년경 설립된 초기 청동기 시대의 다섯 도시들을 발견하게 됐다.이들은 이미 발굴된 밥 에-드라를 비롯해서 누메이라,사피,페이파,카나지르 등이다.
데이르 아인 아바타: ‘성(聖) 롯의 수도원’
창세기의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는 남편을 잃은 롯의 두 딸이 아버지를 통해서 아들을 얻었고 그들이 각각 암몬과 모압 민족의 조상이 된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아이러니컬하게도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20세기의 고고학적인 탐사도 지난 83년에 최초로 발견돼 92년에 발굴을 끝낸 ‘성 롯의 수도원’으로 마무리된다.이미 1884년에 발견된 서기 6세기에 제작된 마다바의 모자이크 지도에서 그 존재가 알려진 바 있는 ‘성 롯의 수도원’은 대영박물관의 주관하에 90년부터 3년에 걸친 발굴을 통해 그 실체를 현장에서 확인하게 됐다.롯이 그 두 딸과 동침했다는 굴을 중심으로 서기 5세기경 바닥이 모자이크로 장식된 기념교회가 건설됐으며 이 수도원은 서기 8세기 이후에 폐허로 변한 것으로 추정된다.롯은 이슬람교의 코란경에는 ‘예언자 룻’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사해변 아랍인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 조상으로 숭배됐다.따라서 아랍어로 사해는 ‘바르 룻’,즉 ‘롯의 바다’로 불리기도 한다.
서기전 1200년경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 민족은 오랜 옛날 사해변에 고도로 발달된 도시문명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전해듣게 된다.하지만 이미 그 도시들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코를 찌르는 유황냄새와 역청,그리고 소금 기둥들과 함께 역사속으로 사라진 것에 의구심을 품게 된다.왕정시대로 들어와서 사해를 사이에 두고 요단 건너편의 암몬,모압과 끊임없이 영토분쟁을 일으켰던 이스라엘과 유다는 어떤 형태로든지 저주받은 사해문명의 신학적 원인을 규명코자 했다.결국 성서의 기록자들은 이 대결을 선택된 아브라함과 저주받은 롯의 이미지로 대비시켰다.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스라엘 민족을 끊임없이 괴롭혔던 모압과 암몬 민족은 다름 아닌 비윤리적인 근친상간으로 이루어진 롯의 후예라는 해설이 자연스럽게 첨가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