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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호남정맥 장고목재-가지산-피재-병무산-금장대-용두산-갑낭재(시목치) 2011,11,08.흐린후 비. 산행거리;19.2km(접근거리1.8km 포함) 산행시간;08;07-17;53(9시간46분) 25시간 동안 움직인 하루였다. 0시10분(출발시간)에 시작한 움직임이 다음날 01시(귀가시간)에 끝났으니까... 새벽0시10분쯤에 서울을 출발,가다가 졸기도 하고 휴게소에서 눈도 조금은 붙이면서 07시 조금 넘어 전남 장흥군 장평면 병동리 월곡마을에 도착, 아침을 라면으로 끓여 해결하고 산행 시작. 잔뜩 찌푸린 날씨가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것 같다가도 참아주다 산행 마감 1시간을 남겨 놓고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해가 짧아 오후 5시30분이 지나면서 부터 어두워지기 시작, 오랫만에 비를 맞으며 랜턴불빛에 길을 더듬는 산행을 하기도 하고.. 날머리에 내려서서 장동택시(010-9222-0630 정 회수씨))를 호출했는 데 3-4분 정도만에 차가 도착하여 병동리 월곡마을로 가서 차량회수(택시요금이 16,000원이 더 나왔는 데 15,000원만 달란다). 장고목재에 오르면서 내려다 본 월곡마을의 아침
금강산도 食後景.장고목재를 오른는길에 나무의자가 설치되어 있는곳. 이곳에서 라면을 끓여 아침을 해결하고 커피까지 한잔한 후에~~
장구의 가운데처럼 잘록하게 생겼다고 해서 장고목재란 이름을 얻었다고.
장구;한자로는 장고(杖鼓)라고도 한다. 장고란 이름은 오른손에 채를 들고 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고려시대 송나라로부터 전래되어 당악(唐樂)에 쓰였고, 장구의 크기가 오늘날의 것보다는 작았다. 기록이 남아 있는 옛 문헌으로는 〈악학궤범〉이 있고, 고려가요인 〈한림별곡〉 가사에도 그 이름이 보인다. 북통의 모양이 허리가 잘록하다고 하여 세요고(細腰鼓) 또는 요고(腰鼓)라고도 한다.
장고목재에 있는 이정표,그리고 철탑 아래를 지나 봉우리를 치고 올랐다가 이어서 로프가 있는 자그마한 암봉
가을 나그네/김헌영
가지산 북봉(509.9m)
가지산 북봉 이정목
가지산 삼개봉 정맥길은 좌측으로 이어지고..직진해서 암봉들로 이루어진 가지산 봉우리들을 올랐다가 돌아 오는데 30여분이 걸린다 정상석은 없지만 가지산 정상(삼개봉)이란 팻말이 놓여있다 삼개봉에서 내려다 본 두번째 봉우리
잔뜩 화가 난듯한 날씨에 ..
양쪽으로 갈라친 바위 모양이 서로 등 돌리고 앉아 있는 모습이 꼭 다툼후의 토라진 부부像 같다.
정상석이 있는 가지산.정맥길에서 200여m떨어져 나가 있다
가다 뒤돌아 본 가지산의 봉우리들..세개의 峰이 있다고 삼개봉이라캤나..
가지산 능선 가야할 정맥길...첩첩산중이다. 장평우산갈림길 탐진강과 장흥댐(탐진댐)의 주변으로 이어지는 산하가 시원스레 조망되고 탐진강 길이 56㎞이다. 영암군 금정면 세류리 궁성산(弓城山:484m) 북동쪽 계곡에서 발원해 남동쪽으로 흐르며, 장흥군 유치면 보림사(寶林寺) 앞을 지나면서 물길을 남쪽으로 바꾼다. 유치천(有治川)과 제비내를 합류하고, 장흥읍을 관류해 남서쪽으로 흐르다가 금강(錦江)을 합류한 다음 강진군 강진읍 남쪽에서 남해 도암만으로 흘러든다. 하천명은 탐라(耽羅)의 사자가 신라에 조공할 때 배가 이 강 하구의 구십포(九十浦)에 머물렀다고 해서 탐라국의 탐(耽)자와 강진의 진(津)자를 따서 탐진이라 한 데서 유래되었으며, 예양강(汭陽江) 또는 수녕천(遂寧川)이라고도 불렸다. 강유역에는 용반평야를 비롯해 부산평야·장흥평야·강진평야가 분포하며, 영산강·섬진강과 더불어 전라남도의 3대강으로 손꼽힌다. 탐진강의 하구인 구십포는 수심·수온 등이 장어가 살기에 알맞아 장어의 서식지로 알려져 있다. 은어도 서식하나 하천 오염으로 인해 줄어들고 있다. 유역 내에는 보림사를 비롯한 고성사·금곡사·무위사 등의 사찰과 궁성(弓城)·수인산성(修仁山城)· 수암서원(秀巖書院)·연곡서원(淵谷書院)·사인정(舍人亭).부춘정(富春亭) 등의 유물·유적이 있다. 이 강의 지류인 금강(또는 금강천)의 상류지역은 월출산국립공원에 속한다.
가지산 남쪽 기슭에 자리 잡은 보림사(寶林寺)는 원표대덕(元表大德)이 당나라와 인도를 두루 순례한 후 신라로 돌아와 경덕왕 18년(759년)에 가지산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고 전합니다. 그로부터 100년쯤 뒤 헌안왕 4년(860년)에 통일신라시대의 구산선문(九山禪門) 가운데 하나인 가지산파(迦智山派)의 3조(祖)인 보조선사(普照禪師) 체징(體澄, 804~880)이 이곳으로 옮겨온 이래 수행자가 구름처럼 모여들어 큰 절이 되었습니다. 선종 사찰 보림사로 바뀐 것입니다. 보림사에는 다음과 같은 창건설화가 전합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큰 못이 있었고, 이곳에 뱀, 이무기, 용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보조선사는 궁리 끝에 도력으로 사람들에게 눈병을 앓게 한 후, 가지산 아래 못에 흙과 숯을 가져다 넣으면 눈병이 나을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흙짐과 숯짐을 진 안질 환자가 줄을 잇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못은 메워졌습니다. 보조선사는 안 가려고 버티는 용을 지팡이로 때려서 내쫓고 절을 지었습니다. 보림사는 중국 남종선의 초조인 육조 혜능이 주석하던 소주 조계산 보림사와 같은 이름입니다. 따라서 인도의 가지산 보림사와 함께 3보림으로 일컬어졌습니다. 이것은 보림사가 우리나라 선종의 본산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落葉이 빨갛게 떨어져있어 산꾼의 걸음을 멈추게하고 길가 버섯재배 농장에는 탐스런 버섯이 달려잇다 피재에있는 동네 피재는 현재 몸살中 보림사 창건설화에 의하면 옛날 보림사 절터에 3마리의 용(백룡,청룡,황룡)이 살았으나, 마지막 남은 백룡이 칼에 눈을 찔려 피를 흘리면서 이 고개를 넘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장흥군 유치면과 장평면을 이어주는 820번 지방도가 지나는 피재는 도로 확장 공사가 한창이였다 피재 들머리 반대편 날머리를 기준으로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곳으로 들머리가 있다
419봉을 넘어서고 한동안 고도를 낮춰가다가 까진재를 지나고 병무산
▲▼ 병무산에서의 조망
하늘기둥님 꾸벅~~ 부산관한임도 오늘 구간은 장흥군에서 등로를 훌륭하게 정비를 해 놓아서 참 편한 길이였다. 단,이정표상의 거리가 제각각으로 표기가 믿을만 하지 못해 아쉽기 짝이 없었다. 오-매 단풍 들것네
오-매 단풍 들것네 용두산이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데 치고 오를일을 생각하니 에구~~ 금장대 용두산 정상 용두산 오늘 지나는 곳에 釜山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 山名도 용두산이라면 부산시에도 용두산이있고..지나온 임도名도 부산관한임도였고.. 물론 이곳의 동네 이름도 부산面이라..ㅋㅋ
▲▼용두산 정상에서의 조망
제암산의 임금바위봉이 뾰죽하게 보이고 상방마을 부근의 벌목지대를 지나 갑낭재까지 정맥길이 이어진다
정맥길은 제암산을 바로 앞에 두고 지루하게 좌측으로 휘감는다
여섯군데로 갈라지는 상방마을고개 부산만년임도
우측의 월출산과 좌측의수인산이 실루엣이 되어 장관이다. 수인산;수인산은 강진군과 장흥군의 경계에 있는 천혜의 요새다. 산과 산 사이의 협곡만 차단하면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다. 이곳은 왜란과 호란시 피난처였고, 의병항쟁과 농학농민군들의 본거지였다. 병영면 한 복판에는 하멜이 7년간 머물렀던 전라병영성의 옛터가 있다. 수많은 외침과 고난 속에서도 꿋꿋하게 그 역사를 지켜본 산이 바로 수인산이다 수인산 병풍바위 전설;옛날 장흥군 용산면 억불산 골짜기에 금술 좋은 젊은 부부가 살고 있었다. 농사를 지으면서 평화롭게 살고 있었으나 남편은 늘 농부로서 만족하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부인과 상의한 끝에 산에 올라가 10년 동안 공부하기로 결정하고 억불산의 서북쪽에 있는 수인산 중턱에 올랐다. 공부에 열중하던 남편은 옥녀봉에서 내려오는 선녀에게 반해버리고 말았다. 남편은 선녀를 꾀여 수리봉 밑에 살림을 차리고 부인 몰래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중 선녀가 임신을 하여 고기가 먹고 싶다고 했다. 남편은 공부를 까맣게 잊은 채 수리봉 아래 마을에 내려가서 닭을 훔쳤다. 닭을 들고 산에 오르던 젊은이는 신의 노여움을 받아 벼락을 맞고 돌이 되어 버렸다. 이 돌은 이후 '부암'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훔쳤던 닭은 '계구암', 젊은 남편과 선녀가 밀월을 즐기기 위해 둘러쳤던 병풍은 '병풍바위'가 되었다고 전한다. 지금도 수인산 중턱에는 부암, 계구암, 병풍바위, 수리봉, 옥녀봉 등의 바위가 10리 안팎에 널려있다. 또 수인사 부근 '홈골'이라 부르는 골짜기 밑에 '쌀남바위'라 부르는 바위가 있다. 바위에는 작은 구멍이 있어 수인사 승려들은 그 쌀이 충분하지는 못할지언정 식생활은 근근히 이어갈 수 있었으므로 오로지 불경연구와 수도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욕심이 많은 중이 더욱 많은 쌀이 탐났던지 쇠꼬챙이로 쌀바위의 쌀이 나오는 구멍을 크게 뚫어 놓았다. 이 일이 있고 난 후 이제까지 꼭 중들이 먹을 만큼의 쌀이 나오던 것이 한 톨도 나오지 않았고 완전히 빨간 피만이 흘러내리게 되었다고 전한다. 그후 쌀바위(영남 알프스에 있는 운문산에도 쌀바위가 있는 데 똑 같은 전설이 있던 데..ㅋㅋ)를 비롯하여 부근의 모든 바위의 돌까지도 빨갛게 물들었으며, 따라서 이 근처는 적벽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적벽의 절경은 타 지역에 그 예를 찾기 어려우며, 수인산에서도 으뜸가는 풍광으로 유명하다. 한편 장흥 억불산에서 남편이 공부를 끝마치고 성공해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부인은 10년의 세월이 흘러도 소식을 알 수 없자 남편을 생각하며, 산위에 올라 수인산을 바라보다가 지쳐 그 자리에 바위가 되었다. 이후 이 바위를 망부암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만년리가 내려다 보이며 중간에 남해고속도로가 곧게 뻗어있고... 좌측 도로 끝자락이 갑낭재인데도 봉우리를 넘고 또 넘고 또 넘어 ..한시간이 걸린다.에고~~지루하다...비는 오고 날은 저물고... 비구름이 몰려오다 결국에는 비가 쏟아져 우중산행을 하게 되고.. 암릉구간을 지나고
정암재.비는 오고..날은 어두워지고..
鑛夫 같네..ㅎㅎ 장동면의 밤풍경 날머리 갑낭재(2차선 국도)를 내려서며.. 다음구간 들머리 이정목 갑낭재 (匣囊峙);보검을 칼집에서 빼는 형국이라 하여 갑낭치라 칭하게 되었다고도 하고 옛날에 감나무가 많아서 감나무재라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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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어찌하여쓰카? 이고생을 같이하고싶지만 정말난 고생은싫어젊어서 너무많이해서
정말 포상휴가 라도 보내줘야겠네...대단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