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 6일 월요일 -1차광주폴리 11개소를 돌아보다
(1)
‘광주폴리(Gwangju Folly)’는 제4회 광주디자인비엔날레의 일환으로 기획된 도시공공시설물의 디자인으로, 2011년 광주시내에 처음 등장하였다. 2013년에 2차광주폴리 8개가 증가하게 된다. 그런데 1차광주폴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광주의 옛모습을 돌아보아야 한다. 성벽 터로 추정되는 길, 즉 광주읍성 터를 중심으로 10개 폴리의 여정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1890년대말까지 당시 광주 시가지는 읍성(邑城)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2007년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조성공사를 위해 그 남쪽 성벽 일대를 고고학 발굴조사를 한 결과, 고려 말엽에 돌을 쌓아 축조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후 조선 중기까지 몇 차례의 증개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성벽의 길이는 약2km, 높이는 3m 정도로 추정된다. 1879년판 『광주읍지』 ‘성지(城池)’조에는 “읍성(邑城)은 석축(石築)으로 둘레가 8,253척(尺)이고 높이가 9척(尺)인데 성 안에 1백 개의 우물과 여첩(女堞, 성 위의 얇은 담, 지금은 없어졌다)과 4개의 성문(城門, 東은 瑞元, 西는 光利, 南은 鎭南, 北은 拱北)과 못(池, 지금은 없어졌다)이 있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오늘의 탐험은 ‘5·18시계탑’ 앞에서 출발한다. 장동로터리쪽으로 가지 않고 먼저 옛전남도청 뒷길, 그러니까 문화전당 옆으로 첫 걸음을 떼기로 한다. 각각의 작품을 알리는 데 그치지 않고 동선과 동선 사이 광주의 속살을 들여다보는 데 소요되는 시간도 파악해 볼 참이다. 오전에 내리던 비가 멎어 다행이다.
광주폴리는 아니지만, 시계탑은 1971년 청년회의소 전국회원대회 광주 개최 기념으로 광주청년회의소와 자매결연을 한 일본청년회의소가 선물한 시계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옛 전남도청 앞 광장에 있었다. 1980년대 중반 신군부의 강제 이전 지시에 따라 농성광장으로 옮겨졌는데 올해 제자리를 찾아 복원하였다. 이 시계탑에서는 매일 오후 5시 18분에 1980년 5월 대한민국 민주화를 위해 희생한 이들을 추모하며 ‘님을 위한 행진곡’이 울린다고 한다. 이 시계탑은 회화나무와 함께 이곳에 오는 이들이 당시 상황을 되새기게 해주는 실마리가 될 것이다.
오후 2시 10분에 시계탑을 출발한다. 필요에 의해 폴리마다 번호를 매기려고 한다.
1번 ‘광주사랑방’은 동구 광산동 38-2번지, 문화전당 옆구리에 바짝 붙어 있다. ‘마한지 · 민속촌’ 식당 건너편이다. 시내버스 정류장과 연결되다시피 길다랗게 설치되었는데 계단 구조이다. 음향과 조명시설이 준비된다면 청소년들의 이벤트 장소로 쓰일 만하다. 와이파이 시설 표시가 되어 있지만 정작 와이파이는 터지지 않는다.
2번 ‘열린 공간’은 동구 광산동 89-2번지 ‘구 시청 사거리’에 있다. 몇 줄 진노랑색 동그라미가 울타리처럼 그려져 있고 자동차들은 그 선 바깥으로 돌아서 진행한다. 작가는 포장마차의 구조를 활용하였다는데 어릴 적 과수원에서 본 원두막처럼 보인다. 그곳에서 방향을 잡아 내려가도 되지만 우리는 광주우체국 앞을 통과하기 위하여 길을 되짚어 나온다. 길 건너의 ‘광주사랑방’을 다시 한번 바라보고 충장로1가 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그런데 1997년에 ‘개국100주년기념비’를 세워놓은 광주우체국의 ‘우다방’이 심상찮다. 사람도 만나고 자판기커피도 뽑아먹던 장소가 공사중이다. 들어가서 물어보니 이번 주 금요일 커피숍이 개업한다고 한다. 이제 ‘우다방’이라는 이름도 추억의 불티로 날리게 되는가보다.
황금동 사거리쪽으로 몸을 돌려 걷는데 옛날 학생회관 옆구리쪽에서 2차광주폴리 작품 중 하나인 ‘투표’가 부른다.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예 · 중립 · 아니오”를 선택하며 왔다가갔다가 서너 번을 한다. 지나갈 때마다 계속 숫자가 집계되고 있다.
3번 ‘기억의 현재화’는 동구 황금동 125번지에 있는데 모르고 지나치기 쉽겠다. 사람들이 밟고 다니는 도로의 가운데 약간 도도록한 부분이다. 이곳은 황금로 사거리인데 황금로는 도시 성벽 흔적을 따라 옛 서문까지 이어지는 도로다. ‘황금당’ ‘빛고을신협’ ‘베스킨라빈스’ ‘세계과자’ 등 상점들이 포진해 있는 사거리 바닥에 있다. 광주읍성 지형도가 동그라미 안에 그려져 있고 광주읍성 4개의 문이 표시되어 있다. 폴리 안내문은 보이지 않는다. 무심코 지나가다가 기억의 언덕에 불편을 느껴 발아래를 살펴보는 이가 있을 것도 같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탐험을 계속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작은 우산 두 개로 서로 머리만 가린 채 광주세무서 쪽으로 내려간다.
4번 ‘열린 장벽’은 동구 호남동 27-1번지에 있다. 광주세무서 앞이다. 머리 위에 네모난 스피커 같은 게 달려 있는데 광주읍성의 돌을 형상화한 거라고 한다. 읍성이 내부와 외부를 단호하게 구분한 닫힌 장벽이었다면 이제는 현재라는 시공간이 존재하는 “열린 장벽을 제안한다.” 빗방울이 점점 더 굵어진다. 우산을 쓰고 사진을 찍기도 어렵고 우산을 버리자니 전화기가 다 젖는다. 그래도 ‘충파’ 앞으로 걸어간다.
5번 ‘99칸’은 거대하고 복잡한 구조물이다. 동구 충장로 3가 31-11번지 충장치안센터 옆에 있다. 한옥의 칸 수가 지니는 사회위계질서를 건축 요소로 활용한 이 작품은 좀 멀리에서 보아야 하는데 비가 오니까 코앞에서 겨우 살핀다. 이곳이 ‘공북문 터’였음을 알리는 돌비가 비에 젖고 있다. “광주읍성은 1908년부터 헐리기 시작하였는데 이 무렵 성문도 같이 철거된 것으로 추정된다”는 말을 온몸으로 전하면서……. ‘금남로공원’쪽으로 걸어가는데 비는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유동성 조절’을 살피기 어렵겠다. 공원 옆의 ‘카페파니니’로 들어간다. 차를 다 마시고서도 비가 오면 해산하기로 하고 느긋하게 티타임을 가진다. 운좋게도 비가 그치기 시작한다. 금남로공원을 여유 있게 살핀다. ‘4·19혁명의 진원지’임을 알리는 돌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