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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한국 현대시인 - ㅊ
천상병
귀천 (歸天) - 천상병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최남선
해(海)에게서 소년(少年)에게 - 최남선 -
Ⅰ
텨……ㄹ썩, 텨……ㄹ썩, 텩, 쏴……아.
따린다, 부슨다, 문허 버린다.
태산 갓흔 놉흔 뫼, 딥태 갓흔 바위ㅅ 돌이나,
요것이 무어야, 요게 무어야.
나의 큰 힘 아나냐, 모르나냐, 호통까디 하면서,
따린다, 부슨다, 문허 버린다.
텨……ㄹ썩, 텨……ㄹ썩, 텩, 튜르릉, 콱.
Ⅱ
텨……ㄹ썩, 텨……ㄹ썩, 텩, 쏴……아.
내게는, 아모것, 두려움 업서,
육상에서 아모런 힘과 권(權)을 부리던 자(者)라도,
나 압헤 와서는 꼼땩 못하고,
아모리 큰 물건도 내게는 행세하디 못하네.
내게는, 내게는, 나의 압헤는.
텨……ㄹ썩, 텨……ㄹ썩, 텩, 튜르릉, 콱.
Ⅲ
텨……ㄹ썩, 텨……ㄹ썩, 텩, 쏴……아.
나에게 뎔하디 아니한 자가
지금까디 잇거던 통긔하고 나서 보아라.
진시황, 나팔륜, 너의들이냐.
누구 누구 누구냐, 너의 역시(亦是) 내게는 굽히도다.
나허구 겨르리 잇건 오나라.
텨……ㄹ썩, 텨……ㄹ썩, 텩, 튜르릉, 콱.
Ⅳ
텨……ㄹ썩, 텨……ㄹ썩, 텩, 쏴……아.
됴고만 산(山)모를 의지하거나,
됴ㅅ쌀 갓흔 뎍은 섬, 손ㅅ벽만한 땅을 가디고,
고 속에 잇서서 영악한 톄를,
부리면서, 나 혼댜 거룩하다 하난 자
이리 둄 오나라, 나를 보아라.
텨……ㄹ썩, 텨……ㄹ썩, 텩, 튜르릉, 콱.
Ⅴ
텨……ㄹ썩, 텨……ㄹ썩, 텩, 쏴……아.
나의 땩될 이는 한아 잇도다.
크고 길고, 널으게 뒤덥흔 바 뎌 푸른 하날.
뎌것은 우리와 틀님이 업서,
뎍은 시비(是非) 뎍은 쌈 온갖 모든 더러운 것 업도다.
됴 따위 세상에 됴 사람텨럼,
텨……ㄹ썩, 텨……ㄹ썩, 텩, 튜르릉, 콱.
Ⅵ
텨……ㄹ썩, 텨……ㄹ썩, 텩, 쏴……아.
뎌 세상 뎌 사람 모다 미우나
그 중에서 똑 한아 사랑하난 일이 잇스니,
담(膽) 크고 순정(純精)한 소년배들이
재롱텨럼 귀엽게 나의 품에 와서 안김이로다.
오나라, 소년배. 입맛텨 듀마.
텨……ㄹ썩, 텨……ㄹ썩, 텩, 튜르릉, 콱.
최두석
귀가 - 최두석 -
시흥 산동네 언덕길을 오르는 아낙의 등 뒤로 땅거미가 내린다. 아낙은 땀 맺힌 이마를 문지르며 길가 토마토나 수박을 올려놓은 리어카들을 슬쩍 둘러본다. 그녀가 청소부로 일하는 여의도 상가에서 보던 것과는 사뭇 때깔이 다르다. 길바닥에서 노는 아이들의 입성은 영판 다른 나라다.
그녀의 핼쑥한 홀쭉이 아들이 귀가하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 올봄 고등학생이 된 아들은 밤 열 시가 넘어야 돌아온다. 그녀는 무조건 늦게까지 붙잡아 놓는 학교가 고맙기만 하다. 학교는 물론 출세를 위한 사다리, 그렇지만 한편 불안해진다. 아득하기만 한 대학, 더구나 학사 건달도 여럿 보았으므로.
그녀는 가게에서 콩나물을 한 봉지 사들고 다시 언덕길을 오른다. 오를수록 목이 타고 더욱 불안해진다. 재개발 소문은 돌림병처럼 떠돌고 갑자기 집이 신기루같이 사라져 버리지나 않을까 하고. 그녀는 얼른 방정맞다고 자신을 나무라며 고개를 젓고 또 생각한다. 어릴 적 무심코 가지고 놀았던 항아리 조각과 거기에 늘어붙어 있던 머리카락 몇 올을. 공동묘지를 뭉개고 신축한 시골 국민학교 운동장가에서 …….
성에꽃 - 최두석 -
새벽 시내버스는
차창에 웬 찬란한 치장을 하고 달린다.
엄동 혹한일수록
선연히 피는 성에꽃
어제 이 버스를 탔던
처녀 총각 아이 어른
미용사 외판원 파출부 실업자의
입김과 숨결이
간밤에 은밀히 만나 피워 낸
번뜩이는 기막힌 아름다움
나는 무슨 전람회에 온 듯
자리를 옮겨 다니며 보고
다시 꽃 이파리 하나, 섬세하고도
차가운 아름다움에 취한다.
어느 누구의 막막한 한숨이던가
어떤 더운 가슴이 토해 낸 정열의 숨결이던가
일없이 정성스레 입김으로 손가락으로
성에꽃 한 잎 지우고
이마를 대고 본다.
덜컹거리는 창에 어리는 푸석한 얼굴
오랫동안 함께 길을 걸었으나
지금은 면회마저 금지된 친구여.
철원평야 - 최두석 -
내 마음속에 구름 모이고 흩어지는
철원평야 같은 너른 벌판이 있어
때로 폭우 쏟아져
한탄강 같은 강물이 격류로 아우성치기도 하고
때로 폭설이 내려
지상의 모든 길이 끊기는 눈나라가 되기도 하는데
폭우 속에서도 백로는 알을 품고
폭설 속에서도 두루미는 새끼를 기르나니
나 세상일에 하염없이 슬퍼질 때
부엉이 되어 찾아가 밤새워 우나니.
최승자
즐거운 일기 - 최승자 -
오늘 나는 기쁘다. 어머니는 건강하심이 증명되었고 밀린 번역료를 받았고 낮의 어느 모임에서 수수한 남자를 소개받았으므로.
오늘도 여의도 강변에선 날개들이 풍선 돋친 듯 팔렸고 도곡동 개나리 아파트의 밤하늘에선 달님이 별님들을 둘러앉히고 맥주 한 잔씩 돌리며 봉봉 크랙카를 깨물고 잠든 기린이의 망막에선 노란 튤립 꽃들이 까르르거리고 기린이 엄마의 꿈속에선 포니 자가용이 휘발유도 없이 잘 나가고 피곤한 기린이 아빠의 겨드랑이에선 지금 남몰래 일 센티미터의 날개가 돋고 …….
수영이 삼촌 별아저씨 오늘도 캄사캄사합니다. 아저씨들이 우리 조카들을 많이많이 사랑해 주신 덕분에 오늘도 우리는 코리아의 유구한 푸른 하늘 아래 꿈 잘 꾸고 한판 잘 놀아났습니다.
아싸라비아
도로아미타불
최승호
내 영혼의 북가시나무 - 최승호 -
하늘에서 새 한 마리 깃들지 않는
내 영혼의 북가시나무를
무슨 무슨 주위의 엿장수들이 가위질한 지도
오래 되었다.
이제 내 영혼의 북가시나무엔
가지도 없고 잎도 없다.
있는 것은 흠집투성이 몸통뿐
허공은 나의 나라, 거기서는 더 해 입을 것도 의무도 없으니
죽었다 생각하고 사라진 신목(神木)의 향기 맡으며 밤을 보내고
깨어나면 다시 국도변에 서 있는 내 영혼의 북가시나무
귀 있는 바람은 들었으리라.
원치 않는 깃발과 플래카드들이
내 앙상한 몸통에 매달려 나부끼는 소리,
그 뒤에 내 영혼이 소리 죽여 울고 있는 소리를.
봄기운에
대장간의 낫이 시퍼런 생기를 띠고
톱니들이 갈수록 뾰족하게 빛이 나니
살벌한 몸통으로 서서 반역하는 내 영혼의 북가시나무여
잎사귀 달린 시를, 과일을 나눠 주는 시를
언젠가 나는 쓸 수도 있으리라 초록과 금빛의 향기를 뿌리는 시를.
하늘에서 새 한 마리 깃들어
지저귀지 않아도.
대설주의보 - 최승호 -
해일처럼 굽이치던 백색의 산들,
제설차 한 대 올 리 없는
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
굵은 눈발은 휘몰아치고,
쪼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
길 잃은 등산객들 있을 듯
외딴 두메마을 길 끊어 놓을 듯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듯 덤벼드는 눈,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쪼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온다 꺼칠한 굴뚝새가
서둘러 뒷간에 몸을 감춘다.
그 어디에 부리부리한 솔개라도 도사리고 있다는 것일까.
길 잃고 굶주리는 산짐승들 있을 듯
눈더미의 무게로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질 듯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때죽나무와 때 끓이는 외딴 집 굴뚝에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과 골짜기에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때밀이 수건 - 최승호 -
살이 얼마나 질긴지
때밀이수건에 먼저 구멍이 났다.
무명(無明)은 또 얼마나 질긴지
돌비누 같은 경(經)으로 문질러도
무명(無明)에 거품 일지 않는다.
주일(主日)이면
꿍쳐 둔 속옷 같은 죄들을 안고
멋진 옷차림으로 간편한 세탁기 같은 교회에
속죄하러 몰려가는 양(羊)들.
세탁비를 받으라, 성직자여
때 밀어 달라고 밀려드는 게으른 양(羊)떼에게
말하라, 너희 때를 이젠 너희가 씻고
속옷도 좀 손수 빨아 입으라고.
제 몸 씻을 새 없는 성자(聖者)들이 불쌍하다.
그들이 때 묻은 성의(聖衣)는 누가 빠는지.
죽음이 우리들 때를 밀러 온다.
발 빠지는 진흙 수렁 늪에서
해 저무는 줄 모르고 진탕 놀다온 탕아를
씻어 주는 밤의 어머니,
죽음이 눈썹 없이, 아무 말 없이
우리들 알몸을 기다리신다.
때 한 점 없을 때까지
몸이 뭉그러져도 말끔하게 때를 문지르고 또 문지르는 죽음,
죽음은 때를 미워해
청정한 중의 해골도 씻고 또 씻고
샅샅이 씻어 몸을 깨끗이 없애 버린다.
그렇다면 죽음의 눈엔 온몸이 다 때란 말인가?
발효 - 최승호 -
부패해 가는 마음 안의 거대한 저수지를
나는 발효시키려 한다.
나는 충분히 썩으면서 살아 왔다.
묵은 관료들은 숙변을 내게 들이부었고
나는 낮은 자로서
치욕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였다.이 땅에서 냄새나지 않는 자가 누구인가
수렁 바닥에서 멍든 얼굴이 썩고 있을 때나
흐린 물 위로 떠오를 때에도
나는 침묵했고
그 슬픔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였다.
나는 한때 이미 죽었거나
독약 먹이는 세월에 쓸개가 병든 자로서
울부짖음 대신 쓴 거품을 내뿜었을 뿐이다.
문제는 스스로 마음에 뚜껑을 덮고 오물을 거부할수록
오물들이 더 불어났다는 사실이다.
뒤늦게 나는 그 뚜껑이 성긴 그물이었음을 깨닫는다.
물왕저수지라는 팻말이 내 마음의 한 변두리에 꽂혀 있다.
나는 그 저수지를 가 본 적이 없다.
물왕저수지로 가는 길가의 팻말을 얼핏 보았을 뿐이다.
그 저수지에
물의 법이 물왕의 도가
아직도 순환하고 있기를바란다.
그 저수지에 왕골을 헤치며 다니는 물뱀들이
춤처럼 살아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물과 진흙의 거대한 반죽에서 흰 갈대꽃이 피고
잉어들은 쩝쩝거리고 물오리떼는 날아올라
발효하는 숨결이 힘차게 움직이고 있음을
내 마음에도 전해 주기 바란다.
부르도자 부르조아 - 최승호 -
반이 깎여 나간 산의 반쪽엔
키 작은 나무들만 남아 있었다.
부르도자가 남은 산의 반쪽을 뭉개려고
무쇠 턱을 들고 다가가고
돌과 흙더미를 옮기는 인부들도 보였다.
그때 푸른 잔디 아름다운 숲 속에선
평화롭게 골프 치는 사람들
그들은 골프공을 움직이는 힘으로도
거뜬하게 산을 옮기고
해안선을 움직여 지도를 바꿔 놓는다.
산골짜기 마을을 한꺼번에 인공 호수로 덮어 버리는
그들을 뭐라고 불러야 좋을까
누군가의 작은 실수로
엄청난 초능력을 얻게 된 그들을.
북어 - 최승호 -
밤의 식료품 가게
케케묵은 먼지 속에
죽어서 하루 더 손때 묻고
터무니 없이 하루 더 기다리는
북어들,
북어들의 일 개 분대가
나란히 꼬챙이에 꿰어져 있었다
나는 죽음이 꿰뚫은 대가리를 말한 셈이다.
한 쾌의 혀가
자갈처럼 죄다 딱딱했다.
나는 말의 변비증을 앓는 사람들과
무덤 속의 벙어리를 말한 셈이다.
말라붙고 짜부라진 눈,
북어들의 빳빳한 지느러미.
막대기 같은 생각
빛나지 않는 막대기 같은 사람들이
가슴에 싱싱한 지느러미를 달고
헤엄쳐 갈 데 없는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느닷없이
북어들이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거봐,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귀가 먹먹하도록 부르짖고 있었다.
아마존 수족관 - 최승호 -
아마존 수족관 열대어들이
유리벽에 끼어 헤엄치는 여름밤
세검정 길,
장어구이집 창문에서 연기가 나고
아스팔트에서 고무 탄내가 난다.
열난 기계들이 길을 끓이면서
질주하는 여름밤
상품들은 덩굴져 자라나며 색새이 종이꽃을 피우고 있고
철근은 밀림, 간판은 열대지만
아마존 강은 여기서 아득히 멀어
열대어들은 수족관 속에서 목마르다.
변기같은 귓바퀴에 소음 부엉거리는
여름밤
열대어들에게 시를 선물하니
노란 달이 아마존 강물 속에 향기롭게 출렁이고
아마존 강변에 후리지아 꽃들이 만발했다.
최영미
선운사에서 - 최영미 -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 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최영준
한여름 밤의 실루엣 - 최영준 -
열대야 밤이면 선풍기 바람에서 살 냄새가 난다 체온의 열기가 목까지 차오르고 알몸뚱이를 핥는 바람의 혀끝이 귀를 간질인다.
어둠속에서도 관성처럼 방향과 속도를 잃지 않고 궤도운동을 반복한다.
뜨거워진 심장에서 절정에 이른 열기를 내뿜자 밤하늘 하트성운이 붉게 타오른다.
주변의 놀란 별들은 눈망울만 깜박거리고 수줍은 별들은 꼬리를 감추지 못한 채 멀리 달아난다.
은하수의 꼭지점, 변광성이 보내오는 보랏빛 혹은 물빛 모르스 신호, 잠이 없는 별나라 여자와 나누는 대화,
열대야 밤이면 별이 된 내 몸에서도 누군가에게 보내는 뜨거운 전파가 쏟아져 나온다.
최호일
음부꽃 - 최호일 -
장다리꽃 밭에는 장다리꽃의 오후가 가득하다
장다리꽃 옆에서 서성이고 있는 허공에는 나비가 가득하다
키가 큰 장다리꽃을 일부러 바라보는 사람은 없지만
키가 큰 장다리꽃 사이에 들어가 있는 사람은 있을 것이다
열두 살 먹은 계집애가 장다리꽃 노란 쇠문을 열고 들어가
하나 둘 바람을 세며 오줌을 눌 때도 있는 것이다
하나에서 열을 셀 때 보이는 꽃
바람 열 장이 들추어내고 있다.
시간을 얇게 저미다가 좀 더 크게 썰린 시간은
어금니로 씹으면 약간 소리가 난다
열두 살에 어떻게 나비가 될 수 있나
나비는 날개가 고장난 것처럼 수십 년을 날아다닌다
보았다 장다리꽃 보았다 나비
네 머리에 바람이 분다고 나는 바람 밖에서 말했다
밤이 오고 달빛 아래라면 몰라도 어느 오후는
도화지에 그려놓고 잡아 다니면 주욱 찢어질 것이다
그 겨울의 氣象圖(기상도) - 최호일 -
신용불량의 날씨만 모닥불을 쬐고 있었다
공터에는 늙은 개가 전단지를 훑어보면서
사건을 파헤치고 있었고
첫눈이 현장을 덮치고 있었다
자주 바람이 불어 시야를 가려서인지
노파의 목도리는 첫눈이 아니라
오래된 가난에 젖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북극에서 무작정 실려온 곰의 행렬이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창문을 열어놓고
눈길을 핑계삼아 어슬렁거리며 지나간다
바람은 확성기를 통해 분양사기단의 비리를
부풀리기도 하고 지우기도 하면서 불고 있고
현수막이 눈송이를 자꾸 털어내면서
저 혼자 검붉은 혈서를 써놓고 있었다
마음의 혈관을 후끈, 면도날이 지나간다
아픔이 선명하게 빠져나간다
이제, 시장 입구에 신문지 같은 하루를 펴놓고
어둠이 저벅저벅 걸어올 때까지
실낱같은 희망을 눈물로 다듬어 파는 일이다
텔레비전에서는 비교적 짧게 노파의 소식이
첫눈 소식에 묻혀 광고 문구처럼 지나갔다
그녀가 화면 위로 뱉어낸 가래침이
밥상 위에 하얗게 튄다
눈 그친 공터에는 개의 발자국이
그 해 겨울, 눈이 내린 기상도를 그려놓고
어디론가 개를 데리고 사라졌다
비빔밥과 분리수거에 관한 질문 - 최호일 -
1.
쓸쓸한 당신은, 배가 고프면 가까운 하늘을 비벼먹으세요.
날마다 처음 보는 세상처럼 외로운 날이면, 머리칼이 가장 푸른 바람을 잠깐 집어넣고,
깔깔 웃는 진달래도 따 넣고 벅벅 비비세요.
이 개성 있는 식당은 요즘 성업 중이라 당신의 개성은 무시해 버려요.
꼬리를 잘라버린 도마뱀의 짧은 인연도 그 상처도 아, 하늘에 올라가면 별이 되지요.
머리를 감싸거나 오랫동안 무릎을 꿇더라도 마지막 질문처럼 허기는 찾아와요.
거울도 깊이 잠드는 밤이면 내 마음을 뚝뚝 팔다리도 뚝, 머리통도 뚝, 한 통 속에 비벼 넣어요.
자폐증의 월요일과 싱싱한 주말도 살짝 하루를 속여 넣어주세요.
압정을 밟은 듯 묵직해서 만져보면 돌아누운 한밤의 앙상한 등줄기.
저런, 저 기사 아저씨는 배고픈지 막말도 잘해. 욕도 싱겁지 않게 섞어서……
상처도 비벼놓으면 아이스크림처럼 달콤해서 하느님도 못 알아볼 거예요.
정말 저 찬란한 아파트 불빛도 뻔한 거짓말이죠.
즐겁게 비벼드릴까요? 자동차와 당신과 즐거운 낭떠러지! 꽃피는 아침에 문득 꽃이 피었군요.
2.
은하수 단지 분리수거 하는 날은 꼭 비만 오는 날.
비 오는 날 웃기는 정치인은 이쪽, 호주머니가 커다란 재벌은 저쪽 마대 자루.
아 참, 시인도 순서대로 분류해서 여기다 넣는 거 맞죠? 빈 깡통은 어디였더라……
국물이 흘러요. 이렇게 낡은 생각도 한번 비에 젖나요. 그런데 갈수록 자루가 모자라네.
최신형 우주인이 쓰다버린 첫사랑과 그곳을 거닐던 오솔길과 새로운 농담은 버릴 데가 없어요.
이 그림은 앤디 워홀 바이러스에 심하게 감염돼 격리해야겠군요.
지식은 갈수록 다리를 절어서 돈을 주고 버려야지.
아주 오래 된 어둠은 밤에 살짝 버리면 감쪽같아.
불륜은 가져오지 마세요. 아파트 주민이 아니잖아요.
저 빗줄기 아저씨, 왜 발등을 자꾸 밟으실까.
개성도 좋지만 그렇게 급하시면, 화장장으로 해서 강물에 공짜로 띄워 드릴까요?
저런, 화단 위에 당신이 당신의 몸을 우산 없이 가끔 버리기도 하는군요.
비가 오는 날은 이쪽, 비가 오고 분리수거 하는 날은 은하수 저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