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북에서 니체를 열심히 까는 것을 주업으로 삼는 내공이 있는 이를 보았다. 그러나 나는 대충 보고 덮었다. 내 생각은 한 마디로 “누가 그걸 모르나?’하는 것이었다.
니체가 기독교를 까는 이유는 무슨 악감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은 말에 좋은 시청각 교재가 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만약에 니체가 불교적 환경에 있었다면 아마도 열심히 깠을 것이다.
니체 당시 기독교는 문명 자체였다. 현 문명을 비판하지 않고는 대안을 제시 할 수가 없는 것이다.
19세기까지 이렇게 체계적으로 기독교적 가치에 근거한 서구 문명을 비판한 사람은 니체 뿐이었다. 오직 니체만이 기독교에 대한 의문 부호를 붙이고 이에 답을 달고자 했었다. 니체의 기독교 비판은 기독교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길을 보여 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니체는 안티기독교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니체는 일생을 기독교와 싸우는데 헌신했다. 적이 없으면 군대가 필요 없듯이 기독교가 없으면 니체가 필요 없었다. 니체가 기독교를 공격한 방법은 뿌리부터 뒤흔드는 방법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니체는 기독교가 정신 차리게 하여준, 나에게는 기독교를 다시 찾게 해준 13번 째 사도였다.
나는 니체를 보면서 요한 복음 5장에 예수가 자기를 설명하면서 그 때까지 유대인들이 믿고 있던 세계를 작살을 내던 모습이 떠올랐다. 이처럼 니체는 그 때까지의 완전한 인간의 표상인 기독교적인 인간을 작살을 내고 새로운 인간의 길을 제시했다. 별로 된 것 없지만…많은 가능성을 열어놓기는 했다.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짜라투스트라가 저자 거리에 나와서 사람들을 깨우쳐 놓고 산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마을로 내려오면 그 사이에 대중들이 기독교도로 변해버렸다는 내용이 나온다. 현실은 그런 것이다.
그러나 나는 가끔 교회에 가서 예수가 아닌 니체를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