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문학 산책/靑石 전성훈
비 개인 다음날은 하늘이 맑고 깨끗하기 마련인데 오늘은 그렇지 않다. 봄은 무르익어 가는데 날씨는 아직도 쌀쌀하고 미세먼지로 하늘은 뿌옇다. 그렇다고 야외 활동을 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길거리에 나선 젊은 여성이 노란색 반팔에 검정 짧은 치마를 입고 하이힐을 신고서 가느다란 몸매를 자랑하면서 날렵하게 걷는다. 잃어버린 지난날의 모습을 다시 일깨워주니 젊음이 좋기는 정말 좋다. 어제 비가 내린 탓에 화려하게 꽃피던 봄꽃들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가련하고 처량한 몰골을 하고 있다. 그토록 매혹적이고 아름다웠던 봄꽃도 끝물인가 보다. 땅에 떨어지는 꽃잎은 마음을 아프게 하지만, 연분홍색 물감을 흠뻑 뒤집어쓰고 말없이 눈길을 사로잡는 화사한 복사꽃의 모습은 더없이 요염하고 예쁘기 그지없다.
도봉문인협회 봄날 문학 산책의 날, 윤동주 문학관과 수성동계곡 일대를 둘러보는 일정이다. 경복궁역 부근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자하문 입구에서 내리면 길 건너에 윤동주 문학관이 보인다. 한양도성 성곽을 몇 번이나 걸으며 자하문으로 내려왔어도 윤동주 문학관에 들렀던 기억이 없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의 한 분인 윤동주 선생, 일제 치하에서 살았던 수많은 문인과 예술인 중에서 이토록 사랑받는 분이 또 있을까 싶다. 문학관으로 들어서니 선생의 시 몇 편이 쓰여있는 벽면이 보인다. 안경을 쓴 내게는 글씨가 작게 보여서 읽기가 불편하다. 윤동주 시인하면 생각나는 게 있다. 고등학교 시절 국어 시간에 선생의 시를 암송했던 수업이 떠오른다. 아마도 [서시, 별 헤는 밤] 등을 외워 낭송하는 수업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세월이 많이 흐르고 나 자신 늙은이가 되어 젊은 시인의 삶의 자세와 시에 대한 열정을 생각해 보니 도저히 흉내조차 낼 엄두가 나지 않는다. 해설사분의 설명이 귀가 어두운 내게는 잘 들리지 않는다. 그래도 마음으로 느끼는 감정이 메마르지 않아서 다행이다. 시대와 환경이 변하면 사람 사는 모습도 생각도 달라진다. 선각자의 모습을 되돌아보는 방문객의 발걸음 발걸음마다 힘들고 고단했을 윤동주 시인의 삶의 흔적이 진하게 묻어 있는 듯하다. 일제 치하에서 겨레를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 끝에 일본 유학을 결심한 시인, 유학의 조건으로 ‘창씨개명’을 하지 않을 수 없이 참담한 현실에서 수없는 갈등과 번민으로 고민하다가 지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참회록'이 가슴을 깊게 후빈다. “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윤동주 문학관을 벗어나 근처 쉼터에서 시낭송회를 갖는다. 다섯 분이 윤동주 시인의 주옥같은 시를 낭송한다. 그리고 오늘의 하이라이트, 도봉문인협회 감사이신 박정근 선생님의 특별무대가 펼쳐진다. 오랜만에 갖는 바리톤 리사이틀이다. 부르신 곡은 윤동주 시인의 서시, 그리고 산하, 가고파, 명태이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무슨 노래인가 하고 살짝 귀를 쫑긋하며 지나간다. 마침, 그 순간 바람에 휘날리는 벚꽃이 꽃비를 쏟아낸다. 모여 있던 문우들이 소리치며 환호한다. 먹기 좋게 썬 오이, 사탕, 과자와 맛있는 떡까지 이런저런 간식거리를 가져온 분들이 귀도 즐겁고 입도 즐거워야 한다면서 주전부리를 돌린다.
시 낭송과 가곡 열창이 성황리에 끝나고 말로만 들었던 수성동계곡으로 향한다. 수성동계곡은 인왕산 자락 종로구 옥인동과 누상동의 경계에 놓인 계곡이다. 조선시대에 계곡의 물소리가 맑아서 수성水聲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 옛날 겸재 정선 선생이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로 그렸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의 현장을 찾는다. 인왕제색도는 한여름 소나기가 지나간 뒤의 비에 젖은 인왕산 바위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국보인 진품 인왕제색도는 故 이건희 삼성 회장 유가족이 국가에 헌납하여 많은 사람이 보며 즐기고 있다. 귀중한 작품을 감상하도록 기회를 주신 유가족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겸재 선생 그림에 나오는 돌다리는 3백 년 세월을 견딘 채 그 모습 그대로 그 자리에 있다. 그림 속 모습을 그대로 현재의 수성동계곡을 재현해 놓았다고 안내문이 알려준다. 그림 속의 돌다리를 건너 걸어가는 갓 쓴 선비와 하인의 모습을 보는 순간, 예나 지금이나 신분의 차이에 따라 서로 다르게 사는 사람의 모양이 어른거린다. 인왕산 하면 떠오르는 한 맺힌 여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부부의 인연을 맺어 왕가의 일원으로 알콩달콩 살다가 세상이 바뀌어 어느 날 갑자기 왕비가 된 여인. 비정한 권력 싸움의 등쌀에 7일 만에 궁궐에서 쫓겨난 여인의 한 많은 인생. 지아비(중종)가 자신을 잊지 말라고 인왕산 너럭바위에 치마를 걸어놓았다는 애달픈 이야기. 몇백 년 후에 왕후(단경왕후 신씨)로 복권되었지만, 여인의 피 맺힌 슬픔과 원한을 어떻게 풀어줄 수 있을까.
옥인동과 누상동 골목길을 누비며 젊은이들이 찾는 거리를 구경하고 많이 걸어 피곤한 다리도 달랠 겸 저녁을 먹으려고 유명한 곰탕 전문집을 찾아간다. 소주와 맥주 그리고 막걸리를 주문하고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느냐고 모두가 정신이 없다. 뜻깊은 봄날의 문학 산책이 문우들 가슴마다 아름다운 좋은 글귀를 심어주었으면 좋겠다. (2026년 4월)
복사꽃이 필 때면/石泉 전성훈
계절이 봄바람으로 바뀌자
봄꽃이 하나둘 피기 시작해
자연의 이치와 순리를 쫓아서
일찍 피기도 늦게 피기도 하네
연분홍 치마를 곱게 차려입고
연지곤지 바르고 부끄러운 듯이
발그스름하게 피어오르는
어린 소녀 얼굴 같은 꽃망울을
터뜨리는 복사꽃이 필 때면
아련히 떠오르는 그 사람
사라져 버린 무수한 나날의
조각들이 꽃잎이 되어
바람 속으로 흩날리는
그날의 애잔함처럼
억겁의 세월 속에서도
잊을 수 없는 애증의 그림자
연분홍 복사꽃이 필 때면
더없이 생각나는 그리움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