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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일러스트레이션의 역사와 그 산실
'한국무지개일러스트회'창립식. 1981년 6월.
'일러스트레이션'이란 무엇인가?
몇십년전 까지만해도 우리에겐 생소한 이름이었다.
그러나 근래에 들어선 웬만한 사람이라면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이름이기도 하다.
국어사전을 펼쳐보았다.
-어떤 의미나 내용을 시각적으로 전달하기 위하여 사용되는 삽화,
사진, 도안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큰 의미에선 일러스트레이션도 미술의 한 쟝르인 것이다.
나는 일러스트레이션을 직업으로하고 있는 소위 일러스트레이터다.
옛날 우리나라 말로하면 '삽화가'이다.
사실은 삽화(揷畵)라는 어휘도 일본에서 얻어 온 이름이다.
삽화의 의미를 또 사전에서 찾아 본다.
-서적·신문·잡지 따위에서, 내용을 보충하거나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넣는 그림.
넓은 뜻으로는 서적이나 잡지의 표지, 컷(cut), 만화, 광고 미술 따위도 포함한다.
그림에 문외한이 보아도 이제는 쉽게 이해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의 일러스트의 시초는 신문이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말하자면 일제하 '조선일보'나 '동아일보' 내지는 '소년'지가 발행되고서 부터
소설이나 동화를 위한 본격적인 '삽화'그림이 있었고
'순수삽화가'가 등단하기 시작했다.
역사로 말하자면 약 80여년이 되는 셈이다.
길지 않지만 그리 짧지도 않다.
현 우리나라에서 현업이나 현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일러스트레이터들은
수백명이 넘는다.
또한 대학에서도 '일러스트레이션', '시각디자인'과가 많이 생겨
해마다 기백명의 일러스트레이터들이 양산되고 있다.
그들은 시대의 변천에 따라 선과 색으로 당 시대를 표현해 왔으며
또한 대중문화의 중심에서 시각적인 메세지 전달의 중추적인 역할을 해오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한국 미술사에 끼친 영향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역사나 연혁이 전해져 내려 온 자료가 거의 없다.
이제라도 누군가가 나서서 체계적으로,
학술적으로 우리의 '일러스트'계를 정확히 정리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필자 나름대로 알고 있는 몇가지 사록을 이 곳에다 기술하려고 한다.
학술적으로 공부하는 후세대에 참고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한국의 일러스트레이터 1세대들 모임인 <무지개 일러스트>회원들이다.
지금은 이미 고인이 되신 분들도 많다.
뒷줄 왼쪽부터 故 이순재, 김훈, 故 김영주, 송훈, 강인춘, 홍성찬, 위승희, 故 이우경,
이성박, 전성보, 김광배. 故 김희준,
앞줄 왼쪽부터 김천정, 故 최충훈, 이규경, 故 윤동원, 하원언, 이우범, 김박, 이한중,
최준식씨이다. 1986년 여의도에서 월간 신동아 잡지의 화보에 나온 사진이다.
1세대 삽화가들의 모임
지금으로부터 27년 전이다.
1981년 6월1일. 종로1가에 있는 고우(高友)회관 3층이었다.
'삽화'라는 소위 쪼가리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이 한 마음으로 모였다.
당시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었던 삽화가들이 모두 참여했다고 말할 수 있다.
원로이신 김영주선생을 비롯하여 이우경, 전성보, 정준용, 홍성찬, 김광배, 박동일,
김박, 이성박, 최충훈, 김희준, 송훈, 강인춘, 이우범, 이한중, 김천정, 김복태,
이규경 이상 18명이었다.
우경희, 김훈 등의 선생들은 외국에 나가 계셨기 떼문에 참여하지는 못했다.
이순재씨는 개인 사정으로 몇년 후 입회하였다.
모임의 명칭은 '한국일러스트회'라고 정했다.
'일러스트'라는 단어대신 대중화된 '삽화'라고 해야하지 않느냐는 의견도 있었지만
앞으로의 비전을 위해 그냥 '일러스트'라고 의견을 모았다.
'일러스트레이션'이란 외래어는 당시 출판 편집자들도 생소한 단어였다.
'삽화'라고 해야 금방 알아들었다.
초대 회징으로는 모임의 선두주자였던 계몽사 미술부장 최충훈씨가 맡았고,
총무에는 소설가 최인호씨와 연재 콤비였던 이우범씨가 맡았다.
원로들은 한발 뒤로 물러났다. '회'의 활력을 위해서였다.
모임은 월 1회로 총무가 일일히 전화로 알려왔다.
장소는 매 회의 때마다 달랐다.
회수가 차츰 겹치니까 장소도 종로에서부터 광화문일대의 음식점은
골고루 다 섭렵하고 다닌 셈이다.
1차에서는 그간의 회원들 동정들을 묻고 출판미술시장의 사정을 서로 교환하면서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었다.
한두시간의 회식이 끝나면 몇몇 주당에 이끌려 모두들 2차. 3차로 이어졌다.
우리의 만남은 우리 스스로가 즐거워했다.
어느 누구 한사람도 빠지지 않고 밤새도록 종로 뒷골목을 누비고 다녔다.
잊을 수 없는 낭만의 추억들이었다.
그로부터 3년 후, 1984년 4월.
'제1회무지개일러스트회'전(展)이 종로구 사간동의 출판회관 전시실에서 열렸다.
후원으로 계몽사, 국민서관, 동화출판공사, 금성출판사, 새벗, 소년, 소년중앙,
아동문학사, 어린이세계, 엄마랑아기랑, 예림당, 어깨동무 등
당시 유명한 어린이 출판사들이 적극적으로 밀어주었다.
한국 최초의 일러스트 축제는 이렇게 이루어졌다.
지금 새삼스레 초대 전시회 팜플렛의 첫장을 열어 본다.
"저희는 처음엔 제각기 흩어진 무지개의 조각들이었습니다.
바람이 불면 이리저리 흩날리는 미약한 존재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저희 나름대로는 출판게에서 미약하나마 공헌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에는
조금도 흩으러짐이 없습니다. (생략) 오늘 그 첫 열매인 전시회를 갖게된 것에
무한한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생략) 어린이의 꿈을 위해서
우리는 존재하고 나아가서는 한국의 아동도서 그림의 전문화를 위해서도
우리는 그 존재가치를 만끽하고 있습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서 한국 일러스트레이션의 발전에 뿌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창립 당시 회원들의 면모를 훑어보는 것도 의의가 있을 것 같다.
김영주(작고)
초등학교 교과서는 물론 신문 연재소설 삽화의 선두주자였다.
소설가 정비석씨와 콤비를 이뤄 그린 '자유부인'은 장안의 화제였다.
선생은 언제 보아도 항상 잔잔한 미소로 사람을 대하고
누구에게나 겸손한 태도로 일관했다.
모임에 나오면 새까만 후배한테까지 가서 일일히 손을 잡아주는
인자함을 보여주곤 했다.
98년, 향년 80세로 타계.
이우경(작고)
오랜 세월동안 경향신문 화백자리에 있다가 '프리'를 선언하고 회사를 나왔다.
그 후 코믹하면서도 간결한 선으로 독자적인 자리를 확보했다.
늘 새로운 창작에 몰두하여 한 때는 도화(陶畵)에,
말년에는 한국일보 연재삽화를 유리위에다 그리기를 시도했다.
성격이 대쪽같아 부당한 원고료에는 직설적으로 시정을 요구해서
편집장들을 곤혹스럽게 하기도 했다.
98년, 향년 77세로 타계.
전성보
그의 손은 항상 따스한 정이 담겨있다.
모든 사물에 대해서 아이들처럼 항상 감탄했고 모든 것에 긍정적이었다.
특히 여류 아동문학가들에게는 로맨티스트, 휴머니스트로 인기가 높았다.
그의 추리소설 일러스트에는날카롭고 박력있는 선과 대담성이 숨겨져 있었다.
국전 서양화부문에 입선과 어린이문화대상 등 여러 수상 경력이 있다.
홍성찬
'이순신'이나 '삼국지'그림의 정통사실화의 독보적인 존재다.
그의 일러스트 고증은 과히 국보적이었다. 55년 월간잡지 '희망'을 시초로
일러스트를 시작했다.
96년에는 어린이도서상(일러스트부문)을 받았다.
그는 주로 화선지에 담채로 그리는모습은 성실 그자체였다.
영월박물관에서 '1년간 초대'전시회를 갖기도 했다.
정준용(작고)
한국일보 화백으로 있으면서 틈틈이 출판, 잡지에 일러스를 기고 했었다.
순수한 동심의 세계를 그 만의 독특한 강한 톤으로 묵직하게 표현하여 인기를 누렸다.
천성이 강한 자존심으로 똘똘 뭉쳐져 있어 쉽게 동료들과 어우리지를 못했다.
무지개회에서도 중도에 하차하여 말년에는 혼자만의 고독한 길을 자청했다.
김광배
커다란 키, 챙이 긴 운동모자, 까만 선글래스, 체크남방에 편한 바지를 즐겨 입는
'캐쥬얼 멋'은 그의 그림과도 일맥상통한다.
한마디로 깔끔하다.
한 때는 초, 중등학생 교과서를 그의 일러스트로 도배를 한 적이 있어서
농으로 "원고료로 치부했겠다"하면
"거지같은 대한민국 국정교과서 원고료로 치부는 커녕 근근히 먹고살았다"고 한다.
송훈
옛날 같으면 출판사에서 물고기 그림을 청탁하면 100% 정확한 세밀화가 나왔다.
그만큼 낚시에 도가 터 있었다. 한마디로 낚시광이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꺽다란 키, 마른 몸매에 아무데서나 순간적으로 내질르는
손가락과 독설(?)이 그의 매력이다.
최근에는 현암사에서 발행된 '야생화'그리기에 필생의 힘을 다 쏟고 있다.
이성박
그의 '펜터치'로만 그린 삼국지 세권을 보느라면
그 만의 깐깐한 성격이 그대로 표현되어 있다.
A3정도의 크기만한 종이에 '펜터치'로만 실수 없이 여백을 메꾸려면 얼마만한
인내력이 필요할까?
그의 정신과 마음이 항상 곧곧한 것도 이런 연유에서 나오는 것 같다.
그래서 동료들간에도 마음에 없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도 했다.
어깨동무, 엄마랑 아기랑, 소년동아에서 장기간 일러스트를 연재했었다.
김희준(작고)
그의 일러스트는 거의 성화(聖畵)였다.
매년 제출하는 전시 작품을 보면 꼭 '예수'를 그렸다.
독실한 크리스챤이었다. 교회 장로를 하면서 '벧세다'라는 출판사를 운영했다.
그곳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예수' 그림책을 내기도 했다.
중앙일보 등에 연재소설 일러스트도 했었다.
왼손잡이 사실파이다.
98년 지병으로 59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과 하직했다.
최충훈(작고)
주부생활을 거쳐 계몽사 미술부장을 지냈다.
그의 꿈은 예쁘고 조그마한 일러스트 상설화랑을 갖는 것이라고
평소에 여러차례 말했다.
한때는 만화영화의 배경을 그리기도 했다.
무지개회 초대회장을 솔선해서 맡아 일러스트계의 발전을 위해
여러가지로 힘을 썼지만 젊은 나이에 갑자기 쓰러져 안타깝게도
그 많은 꿈을 접어야 했다.
97년, 향년 58세로 타계.
김박
그는 넓직한 자신의 몸매처럼 회원들 한사람 한사람을 넓은 포용력으로
끌어드리는 마력(?)이 있었다.
평생을 스포츠신문에 만평을 그려 오다가 몇년전에 그만 두었다.
민화풍의 토속적인 전래동화 그림을 자주 그렸다.
박동일
당시 샘터사의 '엄마랑 아기랑'의 전속 화백이었다.
출판미술을 하면서도 순수회화를 갈망해 오다 결국엔 프랑스 파리로
그림공부를 위해 일찌감치 떠났다.
한국에선 그만의 독특한 그림체가 있었는데 그것을 과감히 포기하고 간 것은
아쉽지만 몇년마다 한번씩 그동안의 그림을 모아 귀국전을 갖고 있다.
강인춘
동아일보 출판국 미술부장직을 맡고 있으면서 틈틈이 잡지, 그림책에
일러스트를 그려왔다.
주로 간결한 선과 밝은 채색으로 동심을 그렸다.
1994년도엔 '한국어린이도서상(일러스트부문)'을 받았다.
한때는 KBS-TV에서 타이틀 미술과 국립극장에서 무대 디자인을 하기도 했다.
현재는 인터넷 신문에 '그림으로읽는 에세이'를 연재하고 있다.
이우범
옛날이나 지금이나 아줌마 같은 머리카락이 그의 '테드마크'처럼 되었다.
성격이 원만하여 그에게는 적이 없다.
서울대 동양화과를 나와 순수회화를 접고 대신 일러스트계에 우뚝 섰다.
소설가 최인호씨와 연재 콤비로 절정기에는 5~6개의 신문에 연재하는 저력을 보였다.
붓으로 처리하는 그의 일러스트는 확실한 기본이 되어있다.
일본에서도 그의 그림 실력은 알아주는 실력파다.
이한중
술 한잔 먹고 나서의 호탕함과 반비례하게 그의 파스텔화는 상당히 동화적이다.
산을 좋아하고 술자리를 즐기는 그는 언젠가는 이렇게 말해서 우리를 웃기게 했다.
"보라우요! 파스텔을 하도 문질러서 내 손구락의 지문이 다 닳아버렸다구요"
그렇다. 그의 그림은 그의 말대로 온통 각종 색깔의 파스텔을 수천번 문질러서
나온 명작들이다.
김천정
한마디로 개성으로 똘똘 뭉쳐있는 작가이다.
그의 그림은 단순하고 명료한 색깔로 그림속에서 문학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주로 밤과 낮을 거꾸러 사는 작가인데 요즘은 모르겠다.
모임에선 말수는 적지만 다혈질의 정의파로 통한다. 절실한 크리스챤이다.
김복태
중앙일보 미술부 출신이다.
지독한 경상도 사투리로 모임을 이끌어가는 정력파. 그리고 활동파.
그림작업도 열심이어서 한 때는 미국의 '오티스 팔슨스 아트'칼리지에서
그림공부를 하기도 했다.
생략이 많은 단순한 선과 면으로 회화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어린이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이규경
대구에서 홀홀단신 서울로 올라와 '여성동아'에 일러스트를 발표함과 동시에
작가생활로 접어 들었다.
원래 그만의 개성있는 그림세계를 갖고 있는 반면 그의 술 실력은 소문이 나 있다.
중도에 모임에서 탈퇴했지만 가끔 회원들을 개인적으로 만나 회포를 풀고 있다.
무지개회는 창립 이후 83년엔 이순재씨, 84년엔 미국에서 활동한 김훈씨,
85년엔 최초로 여성회원인 위승희씨가 입회해서 지금의 '왕언니'가 되었다.
이어서 윤동원, 하원언, 최준식씨, 88년엔 문조현씨 89년엔 강낙규, 권재령,
김민정, 노영현, 박경희, 박미애, 박선주, 손창복, 최영화씨가 입회했고
뒤이어 한병호,김석진, 곽혜신, 최철민, 정현주, 박건하, 윤문영, 전병준,
이영원씨가 2000년에 까지줄서서 입회를 했다.
그러나 그중에서 충격적인 일들은 그렇게 정정하시던 김영주, 이우경선생이
98년 타계했다. 그리고 김희준, 최충훈, 윤동원회원이 일년사이에
다섯명이나 선생의 뒤를 따라 운명을 달리했다.
우리회는 물론 한국 일러스트계로 봐도 많은 아쉬움이 남는 일이다.
지금 우리 일러스트계는 해마다 많은 젊은이들이 배출되고 있다.
특히나 여성들의 진출이 눈에 많이 띤다.
그들의 실력은 참으로 대단하다.
그래서 한국의 일러스트계의 미래는 밝다.
멀지 않아 좋은 그림책을 그리는 세계적인 일러스트레이터도 나오리라는
기대감은 결코 꿈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