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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교실 스크랩 개념-뿌리들(2) 노트
樂而忘憂 추천 0 조회 47 08.08.27 23:3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이정우_<개념-뿌리들2>"에 대한 노트

(1) 소크라테스의 “그대 자신을 알라”의 참된 의미[이정우, 《개념-뿌리들2》, 철학아카데미, 2004, 26쪽]: “그대 자신을 알라” 〓 “그대가 얼마나 대단하고 소중한 존재인가를 알라”

 

(2) 철학사에 대한 깊은 음미의 중요성[이정우, 앞의 책 27쪽]:

 

“여러분들이 철학사를 배울 때는 늘 각 시대로 돌아가 깊이 음미해 보아야 합니다. 모든 감동적인 이야기들이 시간이 흘러가면 상투화되고 기성 사실화되면서 처음에 있었던 감동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저 교과서에서 듣는 이야기가 되어버리죠. 그래서 우리가 건성으로 알고 있는 이야기들을, 자신이 사실상 잘 모르면서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그런 이야기들을 그 역사적 맥략과 철학적 깊이로 들어가 끝없이 다시 음미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죠. ‘日新 日新 又日新’이 중요한 겁니다.”

 

(3) 고대적인 사유의 매력[이정우, 앞의 책 35쪽]:

 

“고대적인 사유의 매력은 오늘날 우리가 따로 분리시켜 사유하는 주제들이 한 덩어리로 얽혀 있다는 점이에요.”

 

→ 사회의 각 영역들이 분화됨과 동시에 그에 맞춰 사유의 영역 역시 분화된다. 처음의 한 덩어리였던 주제들이 세분화됨으로 인해 목소리의 다양성이 증가하고 개성적 사유의 출현이 점차 늘어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만큼 각 영역간의 원활한 의사소통은 점차 어려워진다. 이는 곧 사유의 전문화가 사회적 분열증을 나타내는 징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음미해볼 만하다. 이와 관련하여 (4)항으로 이어진다.

 

(4) 현대 학문의 전문화된 코드로 인한 영역간 의사소통의 난점[이정우, 앞의 책 35쪽]:

 

“현대 학문은 이미 철두철미 분과화되어 있어 학자들은 오로지 자기가 훈련받은 자기 분과의 언어들, 방법들, 분위기, 문제의식, …에만 갇혀서 사유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어느 한 부분이 매우 정교하게 탐구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또한 동시에 자기의 ‘전공’(게다가 이 ‘전공’이라는 것이 항상 학문적인 맥락에서만 구분되는 것은 아니죠. 시대적 분위기, 우연한 사건들, 사람들 사이의 이해관계 등 여러 비학문적인 요소들이 얽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에 갇히게 됩니다. 때문에 종합적이고 균형 잡힌 것이어야 할 사유를 왜곡시키는 측면이 많죠. (…) 고대의 포괄적인 사유를 늘 가까이 하면서 공부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 아인슈타인의 만년의 연구 대상이었던 ‘통일장 이론’이 이와같은 문제 의식으로부터 도출된 시도라고 본다. 물론 어떤 학문에서든지 그 영역의 모든 이치를 하나의 카테고리안에 흡수할 수 있는 이론의 발견이란 매우 어려운 과제이다. 특히 물리학을 포함한 자연과학의 영역보다 형이상학적 차원에서의 철학적 사유의 포괄성은 더욱이 그 난해함이 크며 거의 실현 불가능하다. 헤겔이 모든 사유를 ‘절대이념’으로 포괄하고자 시도했던 것은 일종의 오만이다. 다만 여기서 이정우 선생이 제안하는 ‘포괄적 사유’의 참된 의미는 동일성의 사유가 아니라 차이를 전제로한 일반적 상식을 기본으로 타 학문에 대한 존중과 겸손한 자세를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여기서의 ‘포괄적 사유’는 박학다식(博學多識)이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5) ‘비대칭적’ 술화 구조에 대한 언급[이정우, 앞의 책 89-90쪽]:

 

“논의 구도가 같을 경우 서로 입장이 반대된다 해도 비교가 용이합니다. 그리고 서로 대립함에도 불구하고 같은 인식론적 장(場)안에, 소통의 네트워크 안에 들어 있다고 볼 수 있죠. 하지만 사유의 구도 자체가 다르면 문제가 다릅니다. 이 경우에는 두 구도를 동시에 볼 수 있는 사람만이 두 구도를 넘어 뭔가 의미 있는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대부분의 경우 어느 한 구도를 고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대화가 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질적인 여러 구도―예컨대 현상학과 구조주의, 분석철학과 도가(道家), 유교와 인도 철학―를 동시에 볼 줄 아는 사람은 대단히 뛰어난 지적 안목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어요.”

 

→ 여기서 ‘사유의 구도 자체’를 ‘술화 구조’로 대치시키면 ‘비대칭적’ 술화 구조와 관련된 담론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두 구도를 동시에 볼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제시하는 ‘매개적’ 역할의 담당자로 대치할 수 있다. 이에 대한 나의 주장은 <비트겐슈타인의 ‘비대칭적’ 언어 게임이론 비판>에서 ‘질문자’와의 대화를 통해 좀더 구체적으로 그 의도가 제시된 바 있다.

 

(6) 메를로-뽕띠의 ‘겹’의 사유―지각에 관한 칸트와의 비교론[이정우, 앞의 책 91-92쪽]:

 

“메를로-뽕띠는 지각에 칸트와는 다른 의미를 부여합니다. 신체가 대상과 접촉해서 가지게 되는 것, 즉 지각을 통해서 가지게 되는 것은 이미 그 안에 의미를 품고 있다고 보는 것이죠. 더 정확히 말해 메를로-뽕띠에서는 신체와 대상이 서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서로 떨어져 있다가 관계를 맺은 것이 아니라는 뜻이죠. 둘은 ‘언제나 이미’ 포개져 있다고 해야 합니다. 낯선 두 존재가 서로 관계 맺는 것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서로 구분되기는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포개져 있는 하나라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포개져 있는 차원에서 이미 의미의 씨앗이 자라고 있는 것이죠. 그 씨앗이 자라나 비로소 명료하고 분명한 인식이 성립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체와 대상이 분리되었다가 관계맺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주름을 이루고 있는 현실을 두 개로 분석하면 대상과 주체가 성립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포개져 있는 차원은 바로 (주체측에서 보면) 신체의 차원이고 (대상측에서 보면) ‘체험되는 세계’입니다. 그런 차원/세계가 의식에 의해 반성되고 추상화되고 개념화되면서 보다 개념적이고 분석적인 생각, 이론적인 인식이 나온다고 보는 겁니다. 칸트와는 상당히 다르죠. 근대적인 인식론은 인간의 의식을 딱 떼어서 그것을 주체인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메를로-뽕띠는 그 전에 이미 신체 자체가 주체로서 활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계와 떨어져서 존재하는 의식이 그것(새계)을 대상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신체는 이미 세계와 더불어 살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그런 삶 속에 이미 의미의 씨앗이 들어 있다고 보는 겁니다. 메를로-뽕띠는 이런 코기토를 ‘전(前)반성적 코기토’라고 부릅니다.

   (…)

   신체는 그저 정신의 명령을 수행하는 껍데기가 아닌 것이죠. 그래서 메롤로-뽕띠는 지각의 차원이라고 해서 아무 의미 없는 인식질료가 형성되어 있는 차원에 불과하다고 보는 생각을 거부합니다. 의식이 구성해야만 인식이 성립한다는 칸트의 사유를 거부하는 것이죠. 지각의 차원에서 이미 의미와 주체성과 가치가 묻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차원이 이후의 모든 이성적 행위들, 즉 고도의 반성, 추상화, 개념화, 이론화 등의 토대라는 것이죠. 이렇게 되면 진리의 근원은 초월적 형상도 아니고 구성하는 주체도 아니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전(前)반성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지각의 차원이 근원이 되는 것이죠. 메를로-뽕띠는 지각의 차원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대표적인 사유입니다.”

 

Ex. “우리가 길을 가다가 무심코 간판을 피할 때가 있죠? 피하려고 마음을 먹은 것이 아니라 몸이 ‘판단’을 해서 간판을 피하고, 그 후에 돌아보고서야 아차 다칠 뻔했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92쪽)


(7) 동일성과 정체성의 차이[이정우, 앞의 책 107쪽]:

 

“동일성은 시간을 거부하는 개념이죠. 때문에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나 정체성은 다릅니다. 정체성은 시간과 더불어 변해가면서도 상실하지 않는 그 무엇이죠. 시간을 껴안지 못할 때 정체성은 동일성으로 화하고 그 동일성에 집착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시간과 차이를 껴안을 수 있는 정체성이 중요한 것이죠.”

 

(8) ‘욕망’ 개념에 대한 들뢰즈+가따리식 이해―욕망의 생산론적 관점[이정우, 앞의 책 121쪽]:

 

“20세기 후반에 활동한 인물들인 들뢰즈와 가따리는 욕망 개념을 다각도로 분석하면서, 욕망 개념의 의미-갈래들 중 하나에 창조적인 약동(躍動)이라는 뉘앙스를 부여합니다. 욕망을 비어있는 무엇, 결여(缺如), 채워야 할 무엇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인 에네르기, 차이를 만들어내는 원동력, 생명의 약동으로 이해해요. 비어 있기 때문에 채워야 할 것이 아니라 이전에 없던 무엇을 만들어내는 것을 욕망이라고 보았습니다. 특히 그런 관점에서 정신분석학의 욕망 개념을 비판하죠.”


(9) 덕(德)에 대한 여담(餘談):

 

-(a) “소크라테스에게 정말 중요했던 것은 개념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변화시키는 것이었습니다.”(이정우, 앞의 책 157쪽)

 

-(b) 본질주의적인 생각의 패턴: “~한 존재는 ~한 본질을 가지고 있기에 꼭 ~해야 한다”(이정우, 앞의 책 159쪽)

 

Ex. ㉮ 너는 여자아이이므로 인형을 가지고 놀아야 한다. ㉯ 왜 그렇게 여자답지 못하냐.

 

(10)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의 ‘덕’의 의미[《니코마코스 윤리학》참조; 이정우, 앞의 책 182쪽]: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덕이란 ‘의지를 통해서 획득되는 경향(hexis)’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정의는 상당히 중요한 정의입니다. 이에 따르면 덕이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노력에 의해 얻는 것이며, 경향이라는 점에서 고정된 무엇이 아니라 변해가는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11) 이정우 선생이 바라보는 노무현대통령에 대한 생각―고정된 구조의 변형 가능성[이정우, 앞의 책 175쪽]:

 

“이번에 비교적 매력이 있는 노무현 씨가 대통령이 됐는데, 그 양반이 한국 정치사에 한 획을 그을지 아니면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가 될지 지켜봐야 하겠습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구조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어떤 구조에 들어가느냐가 그 사람을 결정하죠. 물론 인간이 구조를 변화시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구조의 힘은 참 강하죠. 한 인간은, 대통령이 아니라 설사 그보다 더 강력한 존재라 해도 쉽게 구조를 바꾸지는 못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한국을 바꾸느냐 아니면 한국이라는 이 괴물이 노무현이란 한 인간을 삼켜버리느냐를 5년 동안 지켜봐야죠. 물론 대중들의 지원이 중요합니다. 한 인간이 구조를 바꾸지는 못하지만 단결된 인간들은 구조를 바꿀 수 있습니다. 장기를 둔 적이 있는 분들은 알겠지만, 卒이나 兵은 약한 존재이지만 이들이 일렬로 묶일 때 무서운 힘을 발휘합니다. 바둑돌들의 경우에는 더 그렇고요. 대중들이 노무현 대통령을 채찍질하면서도 애정을 가지고서 도와준다면, 한국 사회도 조금은 바뀌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져봅니다.”

 

(12) ‘다중(多衆)’의 의미[이정우, 앞의 책 178쪽]:

 

-(a) ‘대중’과 ‘다중’의 의미상의 차이: “대중은 비교적 동질적인, 거대한, 익명적인 사람들의 전체라면, 다중은 수많은 집단들로 쪼개진, 나름대로의 ‘코드’를 가진, 일정한 ‘입장’을 가진 그런 사람들의 전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한국의 대중들은 얼큰한 맛을 좋아한다’고 할 때는 ‘대중’이라는 말이 어울리지만, ‘다중들의 다양한 취미와 직업과 계층…’이라고 말할 때는 ‘다중’이라는 개념이 더 어울리는 것이죠. 요컨대 대중은 평균치의 개념이고 다중은 모자이크의 개념입니다.”

 

-(b) “네그리와 하트가 말하는[《제국》] 의미에서의 ‘multitude'의 번역어로서” (a)항의 “다중 개념에 보다 적극적인 의견 개진, 정치적 실천, 꼬뮨적인 동질감이라는 뉘앙스가 깃든 것”으로 보면 될 듯 하다. 좀더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실천적 다중’, ‘의식화된 다중’, ‘비판적 다중’”같은 표현을 쓰면 좋을 듯 하다.

 

(13) 도덕(morality)과 윤리(ethics)의 차이―칸트와 스피노자의 차이[이정우, 앞의 책 193쪽]:

 

“도덕이 옳음과 그름의 문제―칸트의 경우―라면 윤리는 좋음과 나쁨의 문제―스피노자의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14) 스피노자적 의미에서의 에티카―생성하는 윤리학의 문제[이정우, 앞의 책 197-200쪽]:

 

“이미 이루어진 윤리=에토스(ethos)는 사람들에게 강제적으로 부과되는 어떤 틀로서 존재하는 것이고, 새롭게 이루어지고 있는 윤리=에토스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통해 생성하는 윤리=에토스죠. 전자의 경우, 긍정적으로는 오랜 세월 동안 실험을 거쳐 사람들의 삶을 붙들어 주는 안정된 행위의 규범을 뜻하지만, 부정적으로는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회로에 따라 살도록 하는 억압적 기제일 수도 있습니다. 전통 사회에서의 윤리=에토스는 이미 이루어진 윤리=에토스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윤리는 오히려 만들어 가고 있는 의미에서의 윤리입니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에티카는 전자의 의미에서의 윤리학이 아니라 후자의 의미에서의 윤리학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스피노자적 의미에서의 에티카, 즉 생성하는 윤리학이죠. (…) 상대적 존재들이 함게 살 수 있는 구체적 방식을 제시하는 것이 오늘날의 윤리학의 핵심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 유종윤 논문 <방임적 상상력을 통해 본 ‘모나드 존재론’>에서부터 꾸준히 견지해온 나의 입장은 스피노자적 의미에서의 에티카, 즉 생성하는 윤리학이다. 이러한 생성의 윤리학은 정주적(定住的) 상상력에서 방임적(放任的) 상상력[혹은 유목적 상상력]으로의 이행에서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윤리학의 경향이다. 여기서의 ‘생성’을 ‘생산’으로 대체한다면 생성의 윤리학, 곧 스피노자적 윤리학은 생산-기계(production-machine)를 통한 ‘무의식’의 카오스적 생성과 소멸의 문제로까지 범주를 확장시킬 수 있다. 정해진 길(road)을 통해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하려고 하는 이데올로기적 개념은 ‘보수’적 경향으로 분리되면서 사회의 변화를 허용하지 않는 침체된 막대기에 불과하다. 이러한 경향이 최근 ‘뉴 라이트’, 즉 ‘신보수주의’ 운동으로 표출되는 바,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대립의 극심한 대립과 혼란(마찰)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회의 기득권 층의 안정적 질서 유지의 한 방편으로서의 운동적 성격이 강하다면, 이에 반해 이러한 사회적 혼란과 대립의 경향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때, 과거의 낡은 유산을 정리하고 사회의 낡은 제도를 정비함으로써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사회 문화적 풍토를 만들고자 하는 의지는 곧 생성의 윤리학과 상통한다고 말할 수 있다. 현 시대를 미래로 도약하는 과도기(이행기)로 규정할 수 있다면 지금의 정치적 혼란과 대립의 양상은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진통을 겪고서야 새로운 생명을 출산하는 산모의 분만 과정이 이에 대한 적절한 비유가 될 수 있다. 다만, 우리가 현 시점에서 경계해야할 사항은, ‘뉴 라이트’ 운동을 통해 이와같은 생성과 소멸의 진통으로 인한 새로운 사회적 도약을 가로막는 세력들의 조직적 연대의 출현이다. 막연히 사회적 규율을 안정된 질서 유지라는 차원에서 잘못된 과거로 돌아가고자 하는 연대의 흐름은 스피노자적 생성의 윤리학이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바, 모든 영역에서의 패러다임의 변화를 적극 수용하면서 발맞춰 나아감으로써 새로운 국가상을 형성하는 데 앞장서 나아가야 하는 시대적 요구를 거부하는 낡은 패러다임의 잔재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시대 역행적 만행을 주시하고 그들의 잘못된 연대적 활동에 적극 대항함으로써 생성의 윤리학이 나아가야할 방향을 모색하는 데 전념해야할 것이다.

 

(15)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의 선/행복의 기준[이정우, 앞의 책 217쪽]: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선/행복이란 ‘우리 자신에게서 가장 완전한 부분에 따라 사는 것’이며, 그것은 곧 관조적 이성(epistemonikon)의 신성한 원리입니다. 우리에게 새의 날개, 두더지의 발톱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이성인 것이죠.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자산의 본질인 이성을 최대한으로 발현하면서 사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16) 칸트의 정언명법(定言命法)과 가언명법(假言命法)의 차이[이정우, 앞의 책 248-249쪽]:

 

“칸트에게서 의무는 마땅히 따라야 할 것으로 이해되는데, 그 중에서 ‘정언명법’이 핵심적입니다. 칸트는 이것을 (간단하게 줄여 표현하면) ‘당신 행위의 준칙(準則)이 항상 또한 보편적인 (도덕)법칙이 될 수 있도록 하라’고 정식화했습니다. 정언명법은 가언명법과 반대되죠. ‘…하려면’이라는 단서가 붙은 경우가 가언명법입니다. 예컨대 ‘죽어서 지옥에 가지 않으려면 착하게 살아라’ 같은 명법이 그것이죠.”

 

(17) 플라톤의 역사의 퇴화론[이정우, 앞의 책 286-287쪽]:

 

“순수한 지적 욕망을 가진 인간들의 정치가 최선자 정치, 명예욕을 가진 인간들의 정치가 두 번째 군인정치, 그리고 세 번째 좋은 정치는 부에 대한 욕망을 가진 사람들의 과두정치인 것이죠. 민주주의는 네 번째로 좋은 정치, 사실상 끝에서 두 번째의 정치로 대중에 의한 통치를 뜻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민주정치가 최선의 정치라고 생각하지만, 플라톤에게는 매우 저급한 정치입니다. 왜냐? 이 정치는 대중의 변덕과 저급한 욕망에 의해 지배되는 정치이기 때문입니다. 민주정치는 대중의 일정한 수준을 전제하는 것인데, 저급한 수준의 대중이 정치의 중심이 된다면 그야말로 최악에 가까운 상태가 된다는 생각이죠. 플라톤의 이런 생각은 현대적인 감각에서는 받아들여지기 힘든 생각이지만, 당대의 민주정치의 구체적 양상을 놓고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실 지금도 마찬가지죠. 민주정치는 ‘民’이 이성적이고 선하다는 전제가 있어야 성립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민주정치가 무조건 최선의 정치인지 신중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지막 최악의 정치는 참주정치죠. ‘참주(僭主)’는 ‘tyrannos’의 번역어죠. 참주는 대개 사회가 혼란스럽고 어두울 때 나타나서 권력을 잡는 사람들이에요. 이런 사람들은 처음 권력을 잡았을 적에는 좋은 일을 하는 듯하다가도 나중에는 무섭게 돌변하죠. 우리 식으로 말하면 독재정치입니다. 참주는 독재자가 되어 ‘티라노사우루스’처럼 대중들을 억누릅니다.”

 

(18)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적 견해 차이[이정우, 앞의 책 290-291쪽]:

 

“플라톤 사유의 특징은 우리가 자의적이고 주관적이라고 생각하는 가치들조차도 똑같이 형상철학적 맥락에서 대등하게 다룬다는 사실입니다. 이에 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훨씬 현실적이에요. 자연은 법칙적이고 필연적인 방식으로 다룰 수 있지만 실천적인 문제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인정하는 겁니다.
   (…)
   플라톤은 지도자를 뽑는 과정에 대한 논의에서 지도자의 자격을 갖춘 사람들이라면 재산은 물론이고 처자까지도 공유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야만 사리사욕(私利私慾)을 초월해서 오로지 폴리스만을 생각한다는 것이죠. 이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란 군대나 가족, 나아가 개인처럼 확고하게 단일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국가의 본질은 오히려 매우 이질적인 존재들의 공동체에 있다는 것이죠. 국가가 완벽하게 단일화되면 그것은 곧 국가의 소멸을 뜻한다고 본 것입니다. 오히려 국가 내에 보다 많은 분업이, 보다 많은 이질성이 존재할 때, 그러면서도 그런 이질성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룰 때 그것이 ‘국가’일 수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처자를 공유하고 재산을 공유한다면 모든 것이 익명적인 것이 될 터인데, 그런 익명적 사회에서는 애정도 노력도 감소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나의 것’이라는 소유 의식이 인간을 움직이기 때문이죠. 사람들은 공유(共有)되고 있는 것들에는 애정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플라톤이 다소 극단적으로 보이는 공산주의 사상을 전개한 것은 기본적으로 극소수의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플라톤의 생각을 폴리스 전체에 대한 것으로 해석하고서 비판합니다.”

 

(19) 구조주의 사유의 문제점[이정우, 앞의 책 316-317쪽]:

 

“구조주의 사유의 문제점은 사실상 만들어진 것, 즉 권력이 개입해 구성한 것을 마치 자연법칙처럼, 마치 원래 그런 것처럼, 즉 주어진 것으로 착각했다는 점에 있죠.”

 

(20) 반(反)국가철학의 필요성[이정우, 앞의 책 317-318쪽]:

 

“우리의 삶에 주어진 것들, 교육체제, 생활의 코드들, 제도들, 법들, 규범들, 문화적 코드들, … 이 모든 것들을 우리는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비판적 의식이 잠을 깨고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면 사실 우리의 삶이란 누군가가, 그 언제인가, 어떤 권력의 맥락에서 만들어낸 것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이 우리를 억압하고 있다고 판단될 경우 그것들을 고치고 그것들에 저항해야죠. 싸워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기호체제를 만들어내고 관리하고 강제하는 핵심적인 존재는 바로 국가(와 자본주의)입니다. 더 정확히 말해 (…) ‘국가’라는 것을 소유하고 있다시피 한 권력자들이죠. 그래서 우리에게는 맑시즘을 이어서 오늘날의 시대에 걸맞는 반(反)국가철학이 필요한 겁니다.”

 

→ 구조적인 권력체제에서 인간의 해방된 삶을 위해 우리는 ‘비판적’ 의식이 매우 중요함을 새삼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우리의 존재를 억압하고 있는 다양한 코드들에 대한 메타성찰이 절실히 필요하며 그것들이 만약 부정의한 속성을 지닐 때, 성숙한 시민사회의 연대를 통한 개혁과 구조조정을 과감히 시행하는 것이 발전된 민주주의 사회의 민중으로서 우리가 행해야할 권리라고 본다. 특히 대의정치체제를 수용하고 있는 한국의 민중들에게 해방된 삶의 정의는 코드에 들어있는 이데올로기적 성향을 비판적으로 분석하여 그것이 권력자들의 이익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사회정의 실현에 도움을 주는 것인지에 대한 일차적 분석과정을 거친 후, 그에 대한 대항이냐 협조냐를 판단하는 것이 순서이다. 반(反)국가철학을 마치 국가를 붕괴시키려는 의도로 이해해서는 안되며, 스피노자의 생성의 윤리학에 근거한 권력 이데올로기의 정의로운 사회 실현을 위한 사유 체계로서 이해함이 마땅하다. 그것은 곧 인간 해방의 정치적 차원에서의 실천을 위한 사상적 근거가 될 것이다.

 

(21) 들뢰즈+가따리의 탈국가적 사유―유목적 삶에 대한 이해[이정우, 앞의 책 323-324쪽]:

 

“들뢰즈와 가따리는 정주적 삶과 유목적 삶을 대비시킴으로써 탈국가적 사유를 제시합니다. 정주적 삶이란 일정한 기호체제 안에서 (알튀세르의 표현으로 하면) 소주체로 살아가는 것이고, 이 때의 기호체제란 매우 다양한 것들(주민등록번호, 주소, 거리의 배치, 자리-이름들―회사의 사장, 부장, 과장, …, 군대의 대령, 중령, …, 대학의 정교수, 부교수, … ―등 기호들로 구성된 모든 체제들)을 포괄합니다. 그런데 이런 이름들에 ‘합법성’을 부여하고 그것들을 관리하는 것은 국가죠. 그리고 현실적으로는 자본주의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호체제 바깥에서 살아가려는 시도가 유목적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몽골 고원에 가서 유목민이 되자는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는 아닙니다.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코드들,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들(알튀세르), 지식-권력의 그물들(푸꼬), 기호체제들(들뢰즈와 가따리)과 투쟁하면서 그 바깥으로 ‘탈주’해가고, 그렇게 함으로써 기호체제들을 와해시키고 반(反)국가적, 반(反)자본주의적 삶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유목적 삶인 것이죠.”

 

(22) 네그리와 하트의 ‘외부적’ 사유 및 ‘제국’ 개념[이정우, 앞의 책 324쪽]:

 

“네그리와 하트는 푸꼬의 계보학과 들뢰즈와 가따리의 노마디즘을 이어 받아 맑시즘의 입장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어나가고 있습니다. 즉 ‘꼬뮤니즘’의 사상을 구성해 가고 있는 것이죠. 이들은 오늘날 자본주의의 바깥은 없다고 말합니다. 전세계가 자본주의로 완벽하게 코드화된 세상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만일 바깥을 찾는다면 그것은 곧 이 안에서 바깥을 찾아야 한다는 겁니다. 즉 공간적 표상에서의 바깥이 아니라 삶, 다른 사상, 감정, 행위로서의 바깥인 것이죠. 네그리와 하트는 우리 시대가 이제 국가라는 장치가 무너지는 시대, 물론 와해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네트워크에 일정한 기능으로서 편입되고 있는 시대라고 말합니다. 민족국가/국민국가의틀이 점점 와해되면서 전세계가 자본주의 체제로 화함으로써 이전의 ‘제국주의’(즉 특정한 국민국가/민족국가가 제국을 추구하는 상황)가 아니라 단 하나의 ‘帝國’의 시대가 왔다는 겁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상과 실천도 과거와는 다른 방향으로 가닥을 잡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23) 진정한 ‘정치철학’의 의미[이정우, 앞의 책 325쪽:(a)항, 326쪽:(b)항]:

 

-(a) “대중을 향해 아래를 쳐다보면서 그들의 의식을 깨우쳐 주고 대화하고 함께 손을 잡고 아래로부터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기 위한 것이 진정한 정치철학인 것입니다.”

 

-(b) “진정한 정치철학은 위정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도래할 민중, 새로운 대지(大地)를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24) 맑스의 교훈[이정우, 앞의 책 380쪽]:

 

“우리가 맑스에게서 받아들여야 할 것은 사회란 애초에 부정의하다는 것, 그 부정의를 떠받치는 근본적 메커니즘은 자본주의라는 것, 그리고 자본주의 체제에서 소외되는 프롤레타리아를 위해 사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5) 플라톤의 우주론(《티마이오스》)[이정우, 앞의 책 393-394쪽]:

 

“플라톤은 우주 자체를 만듦이 결과로 보았습니다. (…) 어떤 존재에 의해 제작되었다고 본 것입니다. (…) 플라톤은 우주 제작을 설명하기 위해 세 가지 근본적인 존재를 말하죠. 하나는 우주를 만든 ‘데미우르고스(Demiourgos)’ 즉 조물주(造物主)입니다. (…) 조물주가 질료를 빚어 이 세계를 만들었다는 생각 (…) 플라톤의 우주발생론이 제작적 세계관의 성격을 띠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 진공을 인정하지 않는 입장이 플라톤의 입장입니다. 그래서 플라톤에게서는 물질과 공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물질-공간만이 있는 것이죠. 물질-공간이기에 자연히 우주는 꽉 차 있게 되죠. 그래서 ‘plenum’이라고 합니다. (…) [어떤 제작을 위해 참조하는] 형상을 플라톤은 ‘paradeigma(파라데이그마)’라고도 하는데 ‘본(本)’이라고 번역할 수 있겠죠. (…) 조물주가 형상의 세계를 본떠 질료를 빚음으로써 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만들었다는 겁니다.”

 

(26) 모방(mimesis=representation)의 세 가지 용법[이정우, 앞의 책 402-403쪽]:

 

-(a) 존재론 또는 미학적 맥락―재현(再現): 이 세계가 이데아의 세계를 재현한 것이라는 생각(플라톤).

 

-(b) 근대 인식론적 맥락―표상(表象): 인식 대상이 인식 주체에게 각인되는 과정.

 

Ex. “내가 저 전등을 인식한다는 것은 뭡니까? 저 전등은 내가 아니잖아요. 나의 바깥에 있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이 인식주체가 저것을 안다는 것은 저 전등의 존재가 내 마음 안에 표상되는 것이죠. (…) 전등의 등가물(等價物)이 내 안에 들어오는 겁니다.”

 

-(c) 근대 정치철학적 맥락―대의(代議): “우리가 선거를 통해 국회의원을 뽑죠. 그러면 그 국회의원들은 민의(民意)를 대신하는 것이죠.”

 

(27) 기예(技藝)의 개념에 대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합의된 관점[이정우, 앞의 책 404-405쪽]:

 

“일반적 지식을 개별적인 경우들에 적용하는 것”(플라톤)〓“보편적인 것을 개별적인 것에 적용하는 것”(아리스토텔레스)

 

(28) 유가․법가․묵가 사상의 비교[이정우, 앞의 책 422쪽]:

 

“유가 사상이 하급 관리들에서 시작해 위로 올라가면서 인문적 세계를 만들려 했던 사상이고, 법가 사상이 통치 계층에서 시작해 아래로 내려가면서 안정된 사회를 구축하려 했던 사상이라면, 묵가 사상은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평등 사회를 꿈꾸었던 사람들의 사상이라 하겠습니다.”

 

 

개념-뿌리들

개념-뿌리들 / 이정우

원인에 대한 여러 가지 이론이 있지만, 후대에 큰 영향을 끼친 가장 기본적인 원인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원인설입니다. 오늘날에도 새겨들을 만한 이론이므로 한번 살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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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이란 우선 한 사물을 구성하고 있는 내재적 질료이다. 청동은 [청동]조각상의 원인이고, 은은 [은]쟁반의 원인이다. 그리고 청동과 은을 포함하는 유(類) 역시 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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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료인은 "그것은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라고 물을 때 그 대답으로서 제시되는 설명 원리죠.

두번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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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의미에 있어서의 원인은 형상과 범형, 즉 본질의 정의[형상인]이다. 예컨대 옥타브에 대해서는 '2:1'이라는 관계, 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수(數)이다. 원인은 또한 정의의 부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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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로 논의되고 있는 원인은 형상인입니다. 형상인은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으로서 제시되는 원인입니다.

이제 질료와 형상 외에 세 번째의 원인이 요청되는데, 그것은 바로 '운동인'이죠. 이 말은 때로는 '작용인'이라고 번역되기도 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능동인'으로도 번역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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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원인은 변화/정지의 제일 원리이다. 한 결정의 주인공은 그 행위의 원인이고, 아버지는 아이들의 원인이며, 일반적으로 행위자는 행해지는 것의 원인이고, 변화시키는 존재는 변화를 겪는 존재의 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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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 운동인은 "무엇이 저것을 저렇게 만들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네번째 경우를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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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은 또한 목적이다. 즉 목적인이다. 예컨대 건강은 산책의 원인이다. 결국 왜 산책을 하는가? 대답은 건강하기 위해서이며, 그렇게 말함으로써 우리는 원인을 설명했다고 생각한다. 자신과 다른 것[자신이 아닌 것]에 의해 움직여짐으로써 [자신을] 움직이게 한 존재와 [최종적인] 목적 사이에 존재하게 되는 모든 것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섭생, 정화, 치료, 기구들은 건강의 원인들이다. 이 모든 수단들이 하나의 목적을 위해 사용되고 있기 대문이다. 이 원인들 사이에서의 차이란 어떤 것들은 기구들인데 비해 다른 것들은 행위들이라는 점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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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인은 어떤 물음에 대한 답일까요? "왜?"라는 물음에 대한 답입니다. 즉 '무엇을 위해서'입니다. 운동인은 그것의 결과에 시간적으로 앞서지만 목적인은 시간적으로 뒤에 오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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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철학자인 앙투안느 쿠르노는 결정론과 우연을 함께 생각했다. 쿠르노는 세계가 단 하나의 인과 게열로 이어져 있는 것은 아니며(즉 세계에는 불연속이 존재하며), 다라서 수많은 인과 계열들=갈래들이 형성된다고 본다. 그 갈래 하나 하나는 모두 결정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결정론적 세게에서도 우연이 성립한다. 번개가 친 것은 기상학적 법칙에 따른 결정론적인 것이다. 또 철수가 그 날 그 장소에 간 것도 여러 심리적-사회적 상황들의 결정성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두 인과 계열이 하필이면 그 때 그곳에서 교차한 것은 우연이다. 즉 두 인과 계열은 모두 결정되어 있지만, 두 계열의 교차까지 결정되어 있던 것은 아닌 것이다. 쿠르노는 이렇게 결정론의 테두리 내에서 우연을 사유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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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등질적이지 않다. 별다른 사건이 없는 느슨한 시간이 있는가 하면, 숨막히도록 바쁘게 돌아가는 시간이 있다. 더 심층적으로는 각각의 시간은 잠재적 사건들을 함축한다. 공 하나로 승부가 갈리는 야구 경기에서 투수가 공을 던지기 위해 자세를 잡는 시간에는 A 팀이 이겼을 때 전개될 사건들(그 사건들로 이루어지는 '세계')과 B 팀이 이겼을 때 전개될 사건들(의 세계)이 잠재적으로 접혀 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을 때 잠재적 복수성 - 여러 가능세계들 - 에서 어느 한 갈래가 현실화된다. 시간의 그런 농축된 부분, 매듭을 '시간의 지도리'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시간의 지도리들을 열면서 인생을 살아 간다.

출:http://blog.naver.com/sds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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