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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만공주는 선덕여왕인데요.. 선덕여왕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입니다.
선덕여왕의 일생.
이름은 덕만이다. 아버지는 진평왕이요 어머니는 마야부인 김씨이다. 성골(聖骨)의 남자가 없었으므로 여왕이 왕위에 올랐다. 왕의 배필은 음 갈문왕(飮葛文王)이다. 인평(仁平) 갑오년에 왕위에 올라 14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 <삼국사기>는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죽어서 국인들이 맏딸을 임금으로 세웠다고 한 반면, <삼국유사>에는 성골의 남자가 없으므로 (성골의) 여자인 덕만공주가 왕위에 올랐다고 한 것이다. 경위야 어쨌든 선덕여왕은 공주 시절부터 총명했기때문에 왕위를 이었다.
선덕여왕이 즉위할 때 나이는 43~ 48세로 추산된다. 결혼적령기가 15~ 16세였던 1500년 전 당시에 여자 나이 쉰이 가까우면 ‘당연히’ 할머니였다. 선덕여왕은 즉위 이후 자신이 신라사상 최초의 여왕이라는 신분적 한계를 더욱 절감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위년 12월에 당에 사신을 보내 즉위 사실을 알리고 조공했으며, 이듬해 7월에도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는 것은 그만큼 당과의 우호적 관계를 강화하고자 노력했다는 반증이다. 이와 같은 외교활동이 고구려와 백제의 지속적인 군사적 압력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도 여자를 우습게 보는 자였다. 그는 신라에 사람이 없어서 여자를 임금으로 내세웠느냐고 노골적으로 깔보았으며, 신라에서 사신이 올 때마다 모욕적인 언사로 무안을 주었다. 그래도 강적 고구려와 상대하기 위해서는 신라를 이용할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마지못해 선덕여왕을 진평왕의 후계자로 인정하는 봉작을 내렸으니 선덕여왕 즉위 3년 만이었다. 선덕여왕은 이처럼 즉위 초부터 대외적으로는 당과의 외교강화를 통해 국가안보를 기하는 한편, 대내적으로는 불법의 힘으로 민심을 통합하여 안정을 기하고자 대대적인 불사를 일으켰다. 그리하여 재위 3년 정월에 분황사의 낙성을 기해 연호를 인평(仁平)으로 고쳤으며, 그 이듬해에는 영묘사의 낙성을 보았다.
또한 재위 4년 3월에는 황룡사에서 백고좌를 열어 ‘인왕경’을 설법토록 하고, 중 100명에게 도첩을 허락했다. 진골 출신 고승인 자장법사(慈藏法師)가 구법을 위해 당나라로 건너간 것도 그해였다. 자장이 귀국한 것은 8년 뒤인 선덕여왕 12년이었다. 자장은 선덕여왕을 뵙고 황룡사 9층탑을 세우도록 청했고, 여왕은 이를 받아들였다. 서라벌 어디에서도 보였다는 이 황룡사탑은 2년 뒤인 선덕여왕 14년 3월에 완공되었다. 분황사는 그 이름이 뜻하는 ‘향기로운 황제의 절’에 걸맞게 신라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대왕의 원찰로 지어진 절이었다. 이는 여왕의 즉위를 불교의 힘을 빌려 정당화시키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나라 밖에서는 북쪽에서 고구려가, 서쪽에서 백제가 쉴새없이 침범하여 하루도 국경이 조용한 날이 없는데 도성에서는 숱한 재물과 인력을 기울여 불법 진흥이라는 명목으로 거창한 토목공사를 계속하니 자연히 불평불만과 반대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자장이라는 걸출한 고승의 설법을 듣고 불법에 빠진 선덕여왕은 자신이 관세음보살의 현신이라고 착각했는지도 모른다.
그 결과 선덕여왕 16년, 재위 마지막 해인 647년 정월에 비담과 염종의 반란이 일어났다. 비담은 그 지난해 11월에 이찬에서 상대등으로 승진한 인물인데, 이들은 “여왕이 정치를 잘못하고,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는 명분을 내걸고 군사를 일으킨 것이었다. 명활산성을 근거지로 하여 일으킨 비담과 염종의 반란은 한때 기세가 높았지만 김알천(金閼川)과 김유신(金庾信) 등의 활약으로 결국 진압되고 말았다. 하지만 즉위 직전에 칠석과 석품의 반란을 겪었던 선덕여왕은 또다시 터진 귀족들의 반란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이미 60고개를 넘긴 노령에 전부터 앓던 지병까지 겹친 여왕은 마침내 더는 견디지 못하고 쓰러져 버렸다. 그리하여 반란이 채 진압되기도 전인 그해 정월 8일 세상을 떠났다. 추산해보건대 선덕여왕이 48세에 즉위했다면 그해에 나이 64세였을 것이다. 이것은 <삼국유사>에만 나오는 이야기인데, 현재 경주시 인왕동의 반월성과 대릉원 사이에 우뚝 서 있으며 불국사·석굴암과 더불어 경주의 상징처럼 되어 있는 국보 31호 첨성대가 바로 선덕여왕 때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첨성대의 용도가 당시의 천문관측대였다는 주장이 그동안 정설처럼 굳어져 왔는데, 최근에는 이 첨성대야 말로 다름아닌 선덕여대왕과 33천 도리천을 이어주는 하늘기둥이요 지상의 통로였다는 새로운 해석이 나와 주목받고 있다는 점도 덧붙여둔다. 선덕여왕은 우리 역사상 여자의 몸으로 왕위에 오른 최초의 여왕이었다. 또한 선덕여왕은 불법 진흥을 통해 서라벌을 불국토로 만들기 위해 애썼으며, 뛰어난 인재들을 발탁하고 양성하여 이른바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기도 했다. 이는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이미 몰락한 진지왕의 자식들과 가야계 신김씨(新金氏) 세력을 포용하여 뒷날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는 주역이 되게 한 사실로 여실히 증명된 바이다.
나라에서 모란을 심자 향기가 없는 것을 선덕여왕의 총명함을 과장해서 나타난 설이거나, 또는 모란을 중국에서 가져 올 때 품종의 이유로 향기가 나지 않았을 겁니다. |
첫댓글 선덕 여왕능은 아직도 남아 있지요...거기가 내친구 동네인데요,,
요새 복원중입디더, 선덕여왕능, 신문왕능 옆에.. 내칭구 복이는 유과할매 동네 살았는데..
마자요..그언냐 동생이 태하선배님 이시고 그동생이 닉 달구지인데 제 동창이어라.ㅋㅋㅋ
그라먼 귀부인도 경주사람? 반가버유~~~~~~
마쟈요, 귀부인님 경주 동방사람.
우와~~ 더 반가버요 울신랑이 구정리,, 동방에도 시이모님이 계셨는데,,지금은 하늘나라 가셨지만요 ~~~`
양재기님 반가워요,시 이모 택고가 머래요, 함 대봐요 그자손 이름을 ...??
잘몰라요 울 신랑한테 물어 봐야해요 울 시엄니 택고는 산호댁이라카던데요,,,이모님은 잘 모리겠네요 ㅎㅎ 내가 이래요~~
귀분,재기 두키 또래끼리 잘 해바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