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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역사 스크랩 4. 조선의 불교(무학, 서산, 사명대사, 초의, 경허스님)
보운(dsw) 추천 0 조회 39 07.12.05 14:1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4. 조선의 불교


가. 불교정책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서기 1392년 고려의 마지막 임금인 제34대 공양왕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서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하였으나 도읍은 개성에 그대로 두고 전반적인 사회체제 역시 그대로인 역성혁명(易姓革命)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조선 개국에 앞장섰던 지배세력이 대두함에 따라서 새로운 지도이념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이른바 태조 이성계의 삼대정책이 그것이다.


삼대정책이란 대외적으로는 명(明) 나라에 대한 사대(事大)와 일본과 여진족에 대한 교린(交隣)으로 주변국가와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사대교린(事大交隣)의 정책을 시행하면서 대내적으로는 고려 말에 단행하였던 과전법(科田法)과 토지를 개간하여 농토를 확장하는 농본주의(農本主義) 정책과 함께 유학을 장려하면서 불교를 억압하는 숭유억불(崇儒抑佛)의 정책 등 세 가지의 중요 정책을 말한다.


그리고 이들 삼대정책 중에서 가장 강력하게 추진한 정책은 '숭유억불의 정책'으로서 조선 건국 초까지 11개이던 불교종파를 제3대 태종 때는 7개 종파로 통합하고 다시 제4대 세종 때에는 선(禪), 교(敎) 양종으로 통합하였으나 왕과 왕실 내부에서는 여전히 불교를 신앙하였으며, 제9대 성종 때까지는 과거시험에서 승과(僧科)도 그대로 유지시켜서 국가가 공인한 종교로서의 존재는 인정하였다.


그러나 제10대 연산군과 제11대 중종 대를 거치면서 과거시험에서 승과(僧科)를 완전히 폐지하여 승려로서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등용의 길을 막아 버리고 양종의 종단마저 없애버렸으며, 심지어 사찰을 폐쇄하면서 그 사찰이 가지고 있던 토지를 비롯한 모든 재산을 몰수하고 승려들을 강제로 환속시켜 관노(官奴)와 궁방비(宮房婢)로 삼는 등 불교탄압을 위한 패륜적인 행위가 극에 달하였다.


그러던 중 제12대 인종이 즉위 1년 만에 서거하고 뒤를 이어 제13대 명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서기 1545년)하자 모후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는데, 실권을 잡은 왕후는 경기도 광주 '봉은사(奉恩寺)를 선종의 본사로 하여 주지에 보우(普雨)'를 임명하고 양주 '봉선사(奉先寺)를 교종의 본사로 하여 주지에 수진(守眞)'을 임명하여 양종을 다시 일으키고 승과제도와 도첩제도 부활시켰다.


그러나 명종 21년(서기 1565) 문정왕후가 돌아가자 유학자들은 왕후로부터 신임을 받던 보우를 즉시 주살하라는 상소를 올렸고 명종은 모후(母后)의 신임을 생각해서 제주도로 귀양 보냈으나 결국 보우는 제주목사에 의해서 사살되었고 이듬해에는 양종을 폐쇄하고 승과와 도첩제(度牒制)를 폐지함으로서 승려의 지위는 완전히 땅에 떨어지고 불교는 또다시 산중으로 숨어들게 되었다.


명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제14대 선조(서기 1567~1608년)는 퇴계 이황(李滉)과 율곡 이이(李珥)와 같은 인재를 중용하면서 유학을 장려하였으나 불교를 심하게 탄압하지는 않았는데, 왕 26년(서기 1592)에 왜군이 침략하여 서울을 향해 북진을 계속하자 왕은 부득이 의주로 피신하면서 묘향산 보현사에 머물러 있던 서산대사(西山大師)에게 국난을 타개하여 줄 것을 간곡하게 부탁하였다.


서산대사는 당시 73세의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전국사찰에 격문을 발송하여 침략자를 타도하기 위해서 분연히 일어날 것을 호소하였으며, 전국 각지에서 의승군(義僧軍)이 일어나서 왜군들과 싸워 공을 세웠는데, 이때 의승군을 통솔하는 승려에게는 도총섭이나 부총섭의 지위를 주었고 후방에서 승려들을 소집하여 훈련을 시키다가 동원령이 내리면 병력을 수송하는 승려들에게는 총섭의 칭호를 주었다.


전쟁이 끝난 뒤 선조는 도총섭으로 크게 공을 세운 사명대사에게 환속하여 재상의 자리를 맡아 줄 것을 간곡하게 당부하였으나 사명은 정중히 사양하고 왜란 후에 강화사절로 일본에 가서 우리 동포들을 송환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의 불교정책은 평소에는 승려의 도성출입을 금지시키거나 통제하면서 탄압을 하다가도 외군이 침입하여 군사적 동원이 필요할 때는 강제로 동원하였다.


그러던 중 조선말 고종 35년(서기 1897년)에는 국호를 대한제국이라 하고 왕을 황제라 하고 연호를 광무(光武)라 하여 이를 내외에 선포하여 독립국가로서의 형식을 갖추고 광무 6년(서기 1902)에 칙령으로 궁내부 사사관리서(寺社管理署)에 사찰에 관한 사무를 맡기고 사찰령을 제정하여 법회와 포교활동을 허용하고 승려들의 지위도 인정하였으나 한일합방으로 모든 것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나. 교단의 위치


조선시대의 불교 교단은 조정의 숭유억불이라는 탄압정책으로 인해서 사찰과 종단이 통폐합되었고 국가가 인재등용을 위해서 실시하는 과거시험에서 승려들의 등용문인 승과도 폐지되었으며, 국사(國師)와 왕사(王師)제도를 없애버리고 능을 관리하던 능사(陵寺) 제도도 금지하고 승려들의 도성출입마저 통제 당하는 등 온갖 수난을 겪으면서 산승불교(山僧佛敎)라는 명예롭지 못한 이름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승려들은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과 같은 외적의 침략을 받아 국가 안위가 위태로울 때는 결연히 일어나서 목숨을 걸고 그들과 싸웠고 남한산성을 축성하거나 경복궁을 지을 때와 같이 국가적인 대규모의 역사(役事)가 있을 때는 강제로 동원되어 노역에 종사하면서 불교 본래의 수행생활은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많은 고승대덕들이 법통을 이어 오늘에 이른 것이다.


1) 무파무종의 수행


고려 말에서 조선 초까지 모두 11개 종파의 종단이던 것이 제3대 태종 때는 7개 종파로 축소되고 제4대 세종 때는 다시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의 양대 종단으로 통합되면서 사찰의 수까지 제한하여 선종 18사(寺)와 교종 18사 등 36개의 사찰로 통폐합되었으며, 연산군 이후에는 양종(兩宗) 마저 없애버림으로서 불교는 종명(宗名)과 종지(宗旨)도 없는 무파무종(無派無宗)의 산승교단(山僧敎團)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렇게 산중으로 쫓겨난 종파와 종단의 구분도 없는 이름뿐인 사찰이지만 간경(看經)과 참선, 염불을 함께 수행할 수 있는 간경방과 참선방, 염불방을 갖추어 놓고 이들 세 가지를 함께 수행하는 이른바 삼문수업(三門修業)이라는 독특한 수행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실질적으로는 조계종과 임제종 계통의 휴정(休靜)과 부휴(浮休)와 같은 대선사의 법손(法孫)이 맥을 잇는 선종(禪宗)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2) 이판승과 사판승


조선시대의 승려들은 국가의 숭유억불이라는 극심한 탄압정책으로 인해서 참기 어려운 천대와 멸시를 받았으며, 수많은 사찰과 암자는 황폐되거나 문을 닫을 위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교학의 연구와 후학의 양성을 위한 가르침과 스스로의 깨달음을 위한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다른 한편으로 사찰의 존립과 유지를 위한 운영에 대해서도 많은 노력을 경주하였다.


이와 같이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불교를 지켜온 승려들 중에서 간경(看經)과 참선, 염불 등의 삼문수업을 통해서 법등(法燈)을 계승하면서 수행생활의 명맥을 유지하여온 승려들을 가리켜 이판승(理判僧) 또는 공부승이라 하고 사원의 업무와 운영에 노력하여 사찰의 황폐를 방지하면서 재산을 안전하게 지켜온 승려들을 가리켜 사판승(事判僧) 또는 사무승(事務僧)이라 한다.


3) 승직과 승계


조선 초기의 승직(僧職)과 승계(僧階)는 고려시대와 같이 국가가 관장하여 국사와 왕사 제도를 두고 있었으나 태종 5년(서기 1405) 국사와 왕사 제도를 폐지하고 도첩제를 엄하게 시행하면서 통합된 7개 종파에 대하여 3년에 1회씩 승과시험을 실시하여 승계를 부여하고 세종 때는 선교 양종에 대하여 3년에 1회씩 승과시험을 실시하여 종파별로 30명씩 선발하여 대선(大選)이라는 승계를 부여하였다.


그리고 제14대 선조 이후에는 이 승계(僧階)제도가 승직(僧職)제도로 변경되었는데, 서산대사 휴정은 임진왜란 때 팔도십육종도총섭에 임명되어 전국 승려들의 통수권을 가진 일이 있으며, 사명대사와 벽암선사도 도총섭이 되었다. 원래 도총섭과 총섭의 직위는 승군과 승병을 통솔하는 승군 대장의 자리였으나 뒤에는 석왕사와 법주사, 유점사, 해인사 등 4대 사찰의 주지도 총섭을 배치하였다.


다. 이름난 스님

 

고려 말에서 조선초기에 이르기까지의 불교는 모두 11개의 종단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각 종단마다 많은 업적을 남긴 고승 대덕들이 배출되었으나 조선중기 이후의 극심한 숭유억불정책과 한일합방 이후의 일제에 의한 역사왜곡과 말살정책 등으로 인해서 고승과 명승들에 관한 전기가 거의 없어졌기 대문에 간접적인 사료(史料)에 의해서 비교적 행적이 뚜렷하게 나타난 분들에 대해서만 알 수 있을 뿐이다.


1) 무학대사 자초


무학대사(無學大師)는 고려 제27대 충숙왕 14년(서기 1327)에 출생하여 조선 제3대 태종 5년(서기 1405)에 입적한 스님으로 속성은 박(朴)씨, 이름은 자초(自超), 법호는 무학(無學), 당호는 계월헌(溪月軒)이다. 경남 합천 출신으로 나이 18세에 출가하여 송광사의 소지선사(小止禪師)를 찾아가서 삭발하고 용문사에서 혜명국사(慧明國師)와 법장국사(法藏國師) 등 고려 말의 덕 높은 스님들로부터 법을 배웠다.


스님이 부도암(浮圖庵)에 있을 때 어느 날 뜻하지 않은 화재로 인하여 암자가 모두 불에 타고 있는데도 스님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참선에만 정진하여 다른 대중들로부터 법을 크게 일으킬 재목이라는 감탄을 받았으며, 묘향산 금강굴에서 능엄경을 공부하던 중에 잠이 들었다가 새벽 범종소리를 듣고 깨달음을 얻은 후에 그것을 증명 받기 위하여 스승을 찾았으나 아무도 그의 깨달음을 증명하여 주지 못했다.


할 수 없이 공민왕 3년(서기 1353) 원 나라로 들어가서 인도 출신 지공(指空)선사를 만나 깨달음을 인정받은 다음 그곳에 먼저 와서 선풍을 떨치던 나옹(懶翁)선사를 찾아가서 가르침을 받고 공민왕 6년(서기 1356)에 먼저 귀국하였는데, 뒤이어 나옹이 귀국하자 천성산 원효암(元曉庵)으로 찾아가서 문안을 올렸더니 나옹은 자기가 가지고 있던 불자(佛子)를 주면서 법을 전수하는 신표로 삼았다.


나옹이 입적하자 무학은 전국의 명산을 두루 찾아다녔는데 고려의 마지막 임금인 제34대 공양왕이 그를 불러 왕사(王師)에 봉하려고 하였으나 극구 사양하였으며, 같은 해 7월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그 해 10월 태조에 의해서 왕사에 봉해졌는데, 대사는 일찍부터 이성계의 조선 건국을 예언하였으며, 태조 3년(서기 1394)에 조선왕조가 한양으로 천도한 것도 무학의 영향력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2) 매월당 설잠


설잠(雪岑, 서기 1435~1493년)의 속명은 김시습(金時習)이고 자는 열경(悅卿), 호는 동봉(東峯), 청한자(淸寒子), 매월당(梅月堂) 등이다. 세조가 단종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자 세상을 등지고 삭발하여 양주 수락사(水落寺)와 경주 용장사(茸長寺) 등에 머물러 있었는데, 높은 학식 때문에 모여드는 사람들은 무척 많았으나 광기 어린 태도와 기이한 행동으로 인해서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모두 떠났다고 한다.


설잠은 성종 13년(서기 1481)에 47세의 나이로 환속해서 안(安)씨 성을 가진 부인을 맞이하였다가 얼마 후 부인이 돌아가자 다시 입산하여 삭발하고 스님이 되어 두타행(頭陀行)을 행하다가 성종 25년 부여 무량사(無量寺)에서 입적하였는데, 그가 입적할 때 화장하지 말라는 유언에 따라서 절 옆에 묻어 두었다가 3년 후에 다시 파보니 과연 안색이 조금도 변하지 않고 살아있을 때와 꼭 같더라고 한다.


설잠은 단종이 폐위된 이후 강개(慷慨)의 생애를 보낸 생육신 중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지은 분이다. 선조(宣祖)는 이율곡을 시켜서 그의 전기를 쓰도록 하였고, 중종은 이조판서에 추증하였으며, 정조는 청간공(淸簡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스님이 남긴 저서는 매월당집과 묘법연화경별찬(妙法蓮華經別讚), 화엄일승법계도주(華嚴一乘法界圖註), 조동오위요해(曹洞五位要解) 등이 있다.


3) 벽송 지엄


지엄(智儼 서기 1464~1534년)의 속성은 송(宋)씨, 호는 야노, 거실은 벽송당(碧松堂)이다. 어려서부터 글 읽고 칼 쓰기를 좋아하고 병서에도 통하여 북방의 여진족과 싸워 무공을 세웠으나 '심지(心地)를 닦지 못하고 싸움터만 쫓아다니는 것은 헛된 이름뿐'이라 탄식하고 계룡산으로 조징대사(祖澄大師)를 찾아가서 삭발하고 수선지계(修禪持戒)에 게으르지 않았으며 연희법사로부터 능엄경을 배웠다.


중종 3년(서기 1508) 금강산 묘길상암(妙吉祥庵)에서 대혜선사(大慧禪師)와 고봉선사(高峯禪師)의 어록을 통해서 선지(禪旨)를 깨닫고 왕 29년(서기 1534) 수국암에서 법화경 방편품을 강의하면서 '제법의 적멸상은 말로는 설 할 수 없다'는 부분을 설하다가 문을 닫고 입적하였는데, 스님의 세수71세, 법랍 44세였으며, 부용영관과 서산대사의 스승으로서 문손이 풍부하여 한국 불교의 많은 분들이 대부분 스님의 법손들이다.


4) 부용 영관


부용영관(芙蓉靈觀, 서기 1485~1571년)의 호(號)는 은암선자(隱庵禪子) 또는 연선도인(蓮船道人)이고 당호는 부용당(芙蓉堂)이다. 경남 삼천포에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나서 13세에 홀로 집을 떠나 덕이산(德異山) 고행선사 밑에서 3년 동안 공부하다가 삭발하고 승려가 된 후에 신총법사(信聰法師)로부터 교학을 배우고 위봉대사(危峰)대사로부터 선(禪)의 도리를 배운 뒤 초암을 짓고 9년 동안 좌선으로 용맹 정진하였다.


스님의 나이 25세 때인 중종 4년(서기 1509)에 용문산으로 들어가서 조우대사(祖愚大師)를 방문하여 참선을 배우고 청평산의 학매선사와 금강산 조운대사에게 법을 배웠으나 역시 만족을 얻지 못하여 미륵봉 내원암(內院庵)에서 다시 9년 동안 묵언좌선(默言坐禪)한 뒤에 지리산에서 벽송지엄(碧松智嚴)을 만나 법(法)을 물어 출가한 이후 20여 년 동안이나 가지고 있던 의문을 풀고 깨달음을 얻었다.


스님은 지엄(智嚴)을 3년 동안 모시다가 스승이 입적하자 스승을 대신하여 대중을 제도하고 이후 40여 년 동안 여러 곳을 두루 다니면서 영남과 호남 일대의 대종사(大宗師)가 되었으며, 선조 4년(서기 1571) 고성 연곡사(燕谷寺)에서 세수 87세 법랍 73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스님은 태고보우(太古普愚)의 법통을 계승하여 청허휴정(淸虛休靜)에게 법(法)을 전함으로서 우리나라 불교의 정통적인 법맥을 이은 분이다.


5) 허응당 보우


보우(普雨, 서기 1515~1565년)스님의 호는 나암(懶庵), 또는 허응(虛應)이며, 종교적 정치적 야심과 역량을 가지고 참선과 경학에도 뛰어났다. 그는 15세에 출가하여 금강산 마하연암(摩訶衍庵)에서 삭발하고 장안사(長安寺)와 표훈사(表訓寺) 등 여러 사암에서 수행하여 법력을 얻고 주역도 공부하였다. 그러나 그의 생애와 행적에 관해서 정확한 기록은 거의 없고 대부분 좋지 못한 행적들만 전해지고 있다.


그는 당시 재상 정만종(鄭萬鐘)과 사귐으로 인해서 문정왕후의 신임을 얻어 백담사에 있을 때인 명종 7년(서기 1551) 판선종사도대선사(判禪宗事都大禪師) 겸 봉은사(奉恩寺) 주지로 임명되어 그 동안 폐지되었던 선교 양종의 부활과 과거시험에서 승과를 부활시킴으로서 불교의 부흥과 승려들의 자질을 향상시키면서 호국정신을 길러 뒷날 휴정(休靜)이나 유정(惟政)과 같은 승장이 나올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능침(陵寢)에 침입하여 난동을 부리면서 물건을 훔쳐간 유생 황언징(黃彦澄)을 문정왕후에게 고하여 처벌받게 하고 봉선사와 봉은사에 방을 부쳐 유생들의 출입을 금지시키자 성균관 유생들이 일제히 반기를 들고일어나서 보우를 처벌하고 황언징을 석방하라는 상소를 올리면서 보우를 배척하려는 분위기가 한창 고조되고 있을 때인 명종 21년(서기 1565) 그를 보살펴 주던 문정왕후가 별세하였다.


기회를 얻은 유생들이 일제히 일어나서 보우를 당장 주살(誅殺)하라고 주장하였으나 명종은 모후가 아끼던 인물이라 망설이고 있을 때 율곡(栗谷)이 제주도로 유배시키라고 하여 그렇게 하였는데, 유생들의 사주를 받은 제주목사 변협(邊協)이 보우를 살해하여 버렸으며, 이듬해에는 양종과 승과도 폐지되어 불교는 또다시 박해를 받고 승려들의 지위도 땅에 떨어지면서 산중으로 깊숙이 들어가 숨어살게 되었다.


6) 서산대사 휴정


휴정(休靜, 서기 1520~1604년)의 호는 청허(晴虛), 속성은 최씨이고 평안남도 안주 출신으로 묘향산에서 오랫동안 살았기 때문에 서산대사라고 부른다. 그는 9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10세에 어머니마저 돌아가시자 그 지방 목사의 도움으로 한성으로 가서 12세에 공부를 시작하여 15세에 진사과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고 다시 지리산으로 들어가서 숭인장로(崇仁長老)를 만나 21세에 삭발하고 스님이 되었다.


그 뒤 부용영관(芙蓉靈觀)을 만나서 법을 얻고 그의 나이 33세가 되던 해에 선과(禪科)에 응시하여 급제한 후 36세에 전법사(傳法師)가 되었고 그 해 여름에 다시 교종판사(敎宗判事)가 되고 가을에는 선종판사(禪宗判事)의 직을 겸하게 되면서 선교 양종을 관장하는 최고의 자리에 올랐으나 2년 뒤에 두 가지 판사직을 모두 물러나서 금강산, 오대산, 묘향산 등의 명산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마음을 닦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선조 22년(서기 1588)에는 그가 지은 시(詩) 한 수 때문에 요승 무업(無業)으로부터 정여립(鄭汝立)의 투옥사건에 관련되었다는 무고를 당해서 제자 사명(四溟)대사와 함께 투옥되었다가 얼마 뒤에 그들의 결백이 드러나자 선조는 왕명으로 두 사람을 석방하면서 오히려 그 시(詩)를 칭찬하고 상(賞)까지 내렸으며, 대사는 감옥에서 풀려 나오자 그 길로 다시 산사(山寺)로 들어가서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서산대사가 지었다는 문제의 시(詩)는 [만국도성여질의(萬國都城如질蟻) 천가호걸등혜계(千家豪傑等醯鷄) 일창명월청허침(一窓明月淸虛枕) 무한송풍운부재(無限松風韻不齋)]로서 우리말로 '만국의 도성은 개미집과 다를 바 없고 고금의 호걸이란 한 마리 바구미 벌레와 같다네, 창 밖에 비치는 밝은 달빛 아래 아무 욕심 없이 누워있으니 끝없이 불어오는 솔바람의 운치가 더 없이 좋구나'로 풀이하고 있다.


선조 26년(서기 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은 의주로 피난하였는데, 왜군들이 북진을 계속하자 다급해진 선조는 묘향산 보현사(普賢寺)에 머물러 있던 서산대사를 의주로 불러 그에게 국난을 타개하여 줄 것을 간곡히 부탁하면서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이라는 직함을 내렸는데, 그 때 서산대사는 세수 73세의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팔도 승려들에게 구국에 앞장서도록 격문을 돌렸다.


대사는 제자 사명(四溟)과 함께 5천 명의 의승군을 데리고 관군과 합세하여 평양과 한성을 회복하는데 큰공을 세었으며, 국왕이 한성으로 환도한 후에는 노병(老病)을 이유로 제자 유정에게 도총섭의 자리를 물려주고 다시 묘향산으로 들어갔다. 선조는 대사에게 국일도대선사선교도총섭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라는 최고의 존칭을 하사(下賜)하여 치하하였다.


대사에게는 따르는 제자들이 천명이 넘었고 사명(四溟)과 같이 세상에 이름을 더 높인 우수한 제자들만 70명이 넘었다. 대사는 선조 38년(서기 1604)에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서 세수 85세, 법랍 65세로 입적하였는데, 방안에는 21일 동안이나 기이한 향기가 가득하였다고 한다. 땅 끝 마을 전라남도 해남 대둔사(大屯寺 또는 大興寺)에는 대사의 유품인 금란가사와 생전에 사용하던 유물들이 전시되어있다.


대사의 불교사상은 법조 벽송지엄(碧松智嚴)과 스승 부용영관(芙蓉靈觀)으로부터 이어받은 선(禪)의 세계를 더욱 넓히고 깊게 하여 산승선가(山僧禪家)를 일으켰는데, 대사는 사교입선(捨敎入禪)을 주장하면서도 때로는 염불을 권하고 주문을 외우면서 예불의식과 교(敎)의 필요성을 가르치는 독특한 가풍을 일으켰다. 남긴 저서로는 선교석(禪敎釋)과 선교결(禪敎訣), 청허당집(淸虛堂集) 4권 2책 등이 있다.


7) 사명대사 유정


사명(四溟)대사 유정(惟政 서기 1544~1610년)의 속성은 풍천 임씨(任氏), 속명은 응규(應奎), 자는 이환(離幻), 호는 송운(松雲) 또는 사명(四溟), 탑호는 종봉(種峯), 시호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이고 경남 밀양사람이다. 그의 어머니가 해산하던 전날 밤 꿈에 황건을 쓴 금인(佛像)이 나타나서 어머니를 데리고 하늘로 올라가서 백발의 신선에게 절을 하고 돌아와서 그를 낳았다고 한다.


유정은 어릴 적에 양친부모를 여의고 조부로부터 유학을 배웠는데, 13세에 밀양 영남루에서 열린 소년 백일장에서 '관추천희'라는 시를 지어 장원이 되었고, 황유촌(黃柳村) 여헌(汝獻)에게 맹자를 배우다가 '속학(俗學)은 천하고 비루하여 시끄러운 세상 인연에 얽매여 있으니 번뇌 없는 학문을 배우는 것만 하겠는가' 라고 하면서 직지사로 신묵대사(信默大師)를 찾아가서 삭발하고 승려가 되었다.


그는 18세가 되던 해인 명종 17년(서기 1561)에 승과에 합격한 다음 직지사 주지를 역임하였으며, 선조 9년(서기 1575)에는 선종의 본사인 봉은사 주지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묘향산으로 들어가서 휴정의 휘하에서 공부하였다. 그 후 금강산, 팔공산, 태백산 등을 두루 다니다가 오대산에 있을 때 정여립 사건에 관련되었다는 모함을 받고 서산대사와 함께 투옥되었다가 무죄로 밝혀져 석방되었다.


유정이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 있을 때인 서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의 근왕문(勤王文)과 서산대사의 격문을 보고 의승군을 조직하여 순안에서 휴정의 의승군과 합세하여 그곳의 의승도대장(儀僧都大將)이 되어 평양성을 탈환하는데 큰공을 세우고 개성과 한성의 왜군을 물리치는데도 크게 역할을 하였으며, 서울 환도 후 영남으로 몰린 왜적들까지 모조리 소탕하여 그 위세가 조야에 떨쳤다.


그리고 정유재란(서기 1597~1598년) 때는 왜장 가또오기요마사(加藤淸正)의 본거지인 울산 서생포를 포위하고 수 차례 적진을 드나들면서 정세를 탐지하여 왜군과의 회담을 통한 화평(和平)을 맺게 하고 왜란이 평정된 후에는 다시 산사로 들어가서 수도생활을 하던 중 스승의 부음을 듣고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으로 가는 도중 선조의 부름을 받고 그 길로 상경하여 일본과 강화를 위한 특사의 임무를 맡게 되었다.


대사가 임금의 특명을 받고 서울을 떠난 것은 선조 38년(서기 1604) 7월이었으나 대마도에서 3개월을 보내고 일본 경도(京都)에 도착한 것은 그 해 12월 말이었다. 대사가 도착하기 전 왜장 도쿠가와이에야스는 경도까지 마중을 나와 기다리고 있다가 대사를 후시미성에 있는 본법사(本法寺)로 영접하고 회담을 열었는데, 대사의 인격과 위엄에 감복하여 머리를 숙이고 부처님과 같이 존경하였다고 한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대사가 선조 임금의 특명을 받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왜장 도쿠가와이에야스를 처음 만났을 때 그들이 대사의 신통력을 알아보기 위해서 시험을 할 때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불가사의한 신통력을 보여줌으로서 왜장을 비롯해서 그 주변사람들을 모두 깜짝 놀라게 하여 회담을 유리하게 진행시켰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들은 먼저 대사의 기억력을 알아보기 위해서 왜장을 만나러 가는 30리(里)나 되는 도로 양편에 깨알같은 글을 새긴 병풍을 세워놓고 길바닥에 비단을 깔아놓은 후에 그 길로 대사를 인도한 다음 왜장 도쿠가와이에야스가 나타나서 '대사께서는 생불(生佛)이라고 하는데, 병풍에 적혀 있던 그 글들을 모두 외울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대사가 병풍에 적힌 글을 3일 밤낮을 계속해서 한 글자도 빠짐없이 외우고 나서 '병풍 맨 끝 부분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외울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궁금하게 생각한 왜장이 신하를 시켜서 그 원인을 확인하여 보았더니 마침 대사가 그곳을 지나는 순간 바람이 세게 불어서 병풍의 끝 부분이 접혀 있었다는 것이다. 깜짝 놀란 왜장은 과연 생불이니 어떻게 해서라도 죽여야겠다고 생각하고 더 큰 흉계를 꾸민다.


대사가 온갖 도술과 호풍환우도 마음대로 한다는 말을 들은 왜장은 철화방(鐵火房)을 만들어 그 안에 대사를 가두어 놓고 사흘 밤낮을 불을 지피면서 대사를 죽이려고 하였는데, 이런 흉계를 미리 예상하고 있던 대사는 영사를 갈아서 '눈 설(雪)'자와 '서리 상(霜)'자를 써서 네 벽에 붙이고 '포척자(抱擲子) 열매 세 개'를 꺼내어 한 개는 자리 밑에 깔고 두 개는 양손에 쥐고 좌선하면서 진언을 외웠다.

 


이렇게 사흘이 지난 후 아무리 생불이고 도술이 능하더라도 지금까지 살아남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쇠문을 여니 대사는 수염에 고드름이 주렁주렁 맺힌 체 방 한 가운데 조용히 앉아서 '일본은 따뜻하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손님대접을 이렇게 할 수 있는가.' 하고 꾸짖었다고 하는데, 방이 추우면 '사명당의 사초방 같다'는 말은 여기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그 후 대사는 일왕(日王)과 회담 할 때 임진, 정유의 양대 전쟁으로 입은 피해 보상을 위해서 본래 우리 땅이었던 대마도를 반환하고 매년 3천명의 병력을 파견하여 북방경비의 일부를 분담할 것이며, 전쟁 때 죽은 백성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서 해마다 '구멍 없는 사람가죽 300장씩'을 보낼 것을 요구하여 일왕 도쿠가와이에야스로부터 정중한 사죄와 함께 많은 보상을 받아 왔다고 한다.


대사는 일본에 있는 동안 전쟁 중에 잡혀간 우리 동포들을 찾아 위로하고 일왕과 담판한 결과 전쟁 중에 통도사에서 훔쳐갔던 부처님의 사리(舍利)와 잡혀갔던 우리 동포 남녀 3천 5백여 명을 데리고 선조 39년(서기 1605) 3월에 귀국하여 임금에게 복명(復命)하였는데, 선조 임금은 사명대사에게 재상의 작위를 내리고 곁에 머물러 있기를 권하였다. 그러나 사명은 3일만에 이를 사양하고 다시 묘향산으로 들어갔다.


묘향산으로 들어간 대사는 돌아 가신지 1년이 지난 스승의 부도탑에 제문을 올리고 예배를 드렸으며, 광해군 2년(서기 1610) 병이 나서 해인사 홍제암으로 옮겨서 치료하였으나 세수 67세로 그 해 8월에 입적하였는데, 왕은 대사에게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라는 약호를 내리고 비를 세웠는데, 비문의 글씨는 홍길동의 저자 허균이 썼다고 하며, 그 후 암자 이름도 스님의 약호를 따서 홍제암(弘濟庵)이라 하였다.


그 후 제19대 숙종 41년(서기 1715)에 대사의 공적을 추모하기 위해서 고향인 밀양 표충사(表忠寺)에 사당을 지어 위패를 모시고 유물을 전시하고 있으며, 영조 14년(서기 1738)에는 대사의 5대 법손 남붕(南鵬)이 사명당표충비(四溟堂表忠碑)를 세웠는데, 갑오동란과 한일합방, 6. 25동란과 5. 16혁명이 일어났을 때는 물론 지금도 국가적 중대사가 있을 때는 땀을 흘리는 신비한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대사가 돌아 가신지 이미 수 백년이 지났으나 대사의 출생지에는 지금까지 불가사의한 일이 계속되고 있는데, 밀양시 무안면 고라리(槐津里) 생가집터에 여러 차례 집을 지으려고 하였으나 계속 넘어지는 바람에 그곳 교육청에서 사명대사출생지유허비(四溟大師出生地遺墟碑)를 세워서 그 땅을 보존하고 있으며, 인근 다른 마을에는 아무리 우박이 내려도 고라리에는 아직까지 한 번도 우박이 내린 일이 없다고 한다.


8) 초의 선사


초의(草衣 서기 1786~1866년)선사는 조선 후기의 대선사(大禪師)로서 자는 중부(中孚), 호는 초의(草衣)이고 당호는 일지암(一枝庵)이다. 강변에서 놀다가 탁류에 휩쓸려 죽을 고비에 이르렀을 때 부근에 있던 어떤 스님이 구해주면서 출가할 것을 권유하여 16세에 출가 남평 운흥사(雲興寺)에서 민성(敏聖)을 은사로 득도하였고 해남 대둔사(大屯寺, 또는 大興寺)에서 완호선사(玩虎禪師)로부터 구족계를 받았다.


스님의 나이 24세(서기 1809) 때 스승 완호선사와 가깝게 지내던 다산(茶山) 선생의 문하로 들어가서 다산초당(茶山草堂)에서 3년 여 동안을 수학하면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선생과 인연을 맺고 만년에는 대둔사 동쪽 계곡에 일지암(一枝庵)을 짓고 40여 년 동안 홀로 지관수행으로 다선삼매(茶禪三昧)에 들면서 차나무의 생태와 종류 및 차 달이는 법 등을 서른 한 수의 시로 읊은 동다송(東茶頌)을 지었다.


9) 경허 선사


경허(鏡虛, 서기 1849~1912년)선사의 법호는 경허(鏡虛)이고 법명은 성우(惺牛)이다. 구한말 암울한 시대 분위기 속에서 근대선(近代禪)을 중흥시킨 분으로 태어나던 해에 아버지를 여의고 9세 때 어머니와 함께 관악산 청계사(淸溪寺)를 찾아갔다가 그곳에서 계허(桂虛)스님을 은사로 삭발하고 스님이 되었고 타고난 영민(英敏)함으로 인해서 23세 때 벌써 동학사(東鶴寺) 강원의 강사로서 명성을 드날린 분이다.


스님의 나이 31세 때인 서기 1879년 여름 옛 스승을 찾아서 한양으로 가던 도중 심한 폭풍우를 만나 인가에서 비를 피하려고 하였으나 온 마을이 돌림병으로 문을 굳게 닫고 있어 부득이 마을 앞 큰 나무 밑에서 밤새도록 죽음이라는 위협에 시달리면서 문자 속에서만 알고 있었던 생사불이(生死不二)의 이치를 직접 체험하고 동학사로 되돌아가서 학인들을 모두 돌려보내고 선방으로 들어가서 용맹정진에 들어갔다.


창문 밑으로는 주먹밥이 들어올 만큼의 구멍만 뚫어 놓고 한 손에는 칼을 쥐고 목 밑에는 송곳을 받쳐놓아 졸음이 오면 몸이 다치도록 하여 잠을 자지 않고 정진하였는데, 석 달째 되던 날 아침 제자로부터 '소가 되더라도 고삐 뚫을 콧구멍이 없는 소가 되라'는 말의 뜻이 무엇이냐는 물음을 듣는 순간에 모든 의심이 풀리면서 크게 깨달음을 얻은 후에 천장암(天藏庵)으로 자리를 옮겨 오후(悟後)의 수행을 계속하였다.


스님은 7년 동안의 오후수행(悟後修行)을 끝낸 뒤에 옷과 탈바가지, 주장자 등을 모두 불에 태워버리고 무애행(無碍行)에 나섰는데, 문둥병에 걸린 여자와 수개월 동안이나 동침을 하고 지나가는 여인을 희롱하다가 몰매를 맞기도 하고 술에 취해서 법당에 오르기도 하는 등 일상적인 안목에서 보면 영락없는 파계승이요 일반적인 윤리의 틀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괴이한 행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스님은 생애를 통하여 선(禪)의 생활화와 일상화를 모색하고 대중 속에서 선(禪)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서 법상(法床)에서의 설법은 물론 대화와 문답을 통해서도 선을 선양하였는데, 그의 기이한 행동도 선의 수행을 위한 방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스님은 만년에 사찰을 떠나 갑산(甲山)과 강계(江界) 등지에서 머리를 기르고 유관을 쓴 모습으로 서당의 훈장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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