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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머리말 Ⅱ. 남한강 중․상류 소금 유통 1. 제염지에서 경강으로 소금의 이동 2. 경강에서 충북 각포구로 소금의 이동 3. 포구 중심의 소금 유통 |
Ⅲ. 금강 유역의 소금 유통 1. 강경-부강 중심의 소금의 유통 2. 둔포 소금의 유통 Ⅳ.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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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머리말
소금은 우리 일상 생활에서 하루도 결할 수 없는 것이다. 해안 지역에 거주할 때는 소금의 섭취가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해안에서 내륙으로 거주지가 옮겨가고, 곡물을 섭취하면서 다량의 소금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따라서 제염지인 해안에서 내륙으로 대량의 소금 이동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충청북도는 한국에서 유일하게 바다와 접하지 않는 道이므로 충북지방에서 생필품인 鹽의 확보는 다른 道보다 더 힘든 일이었다. 소금은 곡물과 함께 무거운 상품이므로 운반하는데 무척 번거로움이 많았다.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못했던 과거에는 등짐이나 소말짐을 이용할 수 밖에 없었는데, 해안에서 소비지까지 수 백리 떨어진 충북지방의 주민에게는 육운을 통한 소금의 운반은 고통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전 세계 다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나라에서도 다른 교통수단에 비하여 운송량이 많고, 비교적 비용이 저렴한 선박이 소금의 운송에 가장 적합한 교통수단이 되어 왔다.
충북지방은 남한의 다른 지방에 비해서 산지가 많고 평야가 적다. 높은 산지는 경북과의 도계를 이루는 소백산맥을 따라 분포한다. 소백산맥은 높고 줄기가 뚜렷한 산맥으로서 금강․남한강 수계와 낙동강 수계를 나누고 있다. 소백산맥은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 험준하기 때문에 소금을 지고, 고개를 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古來로 소금은 수운에 의해 운반되었다. 충청북도는 북동부의 약 절반이 한강유역에, 남동부의 약 절반이 금강유역에 속한다. 남한강은 水源이 길어 충북 단양까지 비록 小船이지만 선박이 소강할 수 있었지만, 금강은 한강에 비해 가항수로가 짧고, 충북지방에는 부강을 제외하고는 배가 닿을 수 있는 곳이 없었다. 따라서 포구가 발달한 남한강 유역에서는 포구에 소금이 이입되어 각 소비지로 이동할 수 있었는 반면, 금강 유역에서는 소강종점인 부강에서 소금이 하역되어 육운으로 각 소비지로 운반되어야 했다.
이 글에서 筆者는 行政區域인 忠淸北道를 크게 自然地域인 南漢江 水系와 錦江 水系를 나눈 다음, 각 지역에서 소비된 소금이 황해안의 어느 지역에서 생산되어 어느 중계 포구를 거쳐 소비지까지 운반되었는가를 고찰하고, 아울러 철도 개설 이전 소금의 유통권을 밝히고자 하였다.
Ⅱ. 남한강 중․상류 소금 유통
1. 제염지에서 경강으로 소금의 이동
충북 북부 지방에서 소비된 소금은 경기도, 황해도, 충청남도 일부 해안을 포함하는 京畿灣 地域에서 생산된 것이었다. 경기만 지역은 해안 경사가 완만하고, 조석간만의 차가 크고 간석지가 넓어 제염지로서 적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소금의 생산력을 좌우하는 토질도 이상적이고, 소금의 생산량과 관계 깊은 강수량도 관서 지방을 제외하고는 전국에서 가장 적은 편이다.
철도 개통 이전의 제염법은 鹹水를 채취하여 다량의 연료를 투입하여 증발시키는 방법이었으므로 연료 확보가 중요하였다. 경기만 연안의 해안지역과 도서에는 제염 연료인 松林이 풍부한 편이었다. 경기도 인천․안산․남양, 충청도 당진․면천 등 제염지 부근에서는 제염에 소비되는 松葉이 적지 않아 주민들이 직업으로서 송림을 길러 송엽을 판매하였다고 하였다. 소금은 중량이므로 거리에 따른 운송비의 증가가 크므로 육운보다 수운에 의해 운반되었다. 경기만에는 한강, 예성강, 임진강 등 대하천이 흘러들어서 소비지인 서울과 한강 유역 및 기타 하천 유역까지 용이하게 소금을 수송할 수 있는 잇점을 가지고 있었다.
천일제염법이 우리 나라에 들어오기 이전 우리 나라에서 행해지던 제염법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뉘어진다. 하나는 염전(鹽田)에서 농후한 바닷물을 채취하는 채함작업(採鹹作業)을 한 후 이것을 전오(煎熬)하여 제염하는 염전식 제염법(鹽田式 製鹽法)이고, 다른 하나는 바닷물을 직접 염부(鹽釜)에 넣어 전오(煎熬)하여 제염을 하는 해수직자식 제염법(海水直煮式 製鹽法)이다. 19世紀末 當時 해수직자식(海水直煮式)은 함경북도 일부 지역에서만 행해지고 기타 지역은 모두 염전법이 행해졌다. 염전법은 堤防의 有無에 따라 유제염전식(有堤鹽田式)과 무제염전식(無堤鹽田式)로 나뉘어지는데, 경기만 지역은 조석간만의 차가 큰 자연조건 때문에 無堤鹽田式이 행해졌다.
경부선 개통 이전 개항기의 소금의 생산지와 소금 생산액을 지역별로 상세하게 파악한 조사자료가 없어서 정확히 알 수 없는데, 뒤 시기인 1907년 度支部 臨時財源調査局에서 전국의 鹽業 狀況을 조사한 것을 참고로 할 수 있다. 물론 이 시기는 외국염이 본격적으로 수입되어 국내의 제염업자가 피해를 입고 도산하는 경우가 많았음으로 1905년 철도 개통 이전 사정을 정확히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韓國鹽業調査報告(1907)와 韓國水産誌(1911) 자료가 경부선 철도 개통 이전의 소금 생산량과 유통 상황을 비교적 잘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충북 북부 한강유역권에 공급된 소금은 경기만 지역에서 생산된 것으로 제염지에서 배로 경강까지 운반되어 양육된 다음, 다시 小船으로 충북 지방 남한강 연안 포구까지 운반되었다. 19세기말 기록에 의하면, 경기도 남양의 각 만입에 20~40개의 鹽場이 존재하였고, 각 포구에서 이송할 제염용 연료 매입액은 남양, 안산, 수원 순으로 많았다고 하였다.1) 또한 19세기말 鹽場의 규모를 간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있다. 제염업자가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에 납부한 鹽稅를 보면 남양(1,175兩), 인천(354兩), 안산(168兩), 부평(134兩), 통진(166兩) 순으로 나타나 있다. 좀 뒤의 자료인 韓國水産誌(1911)에 따르면 남양 674만근, 통진 370만근, 인천 359만근, 안산 336만근, 부평 268만근, 김포 128만근 순으로 제염량이 많았다. 그런데 이 자료에는 수원, 강화, 교동의 소금 생산액이 누락되어 있으므로 경기도 연안의 전체 소금 생산액을 알기 어렵지만, 대체로 경기도 연안 1년 소금 생산량은 약 5,000만근에 달하였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또한 경기도에서는 남양의 소금 생산량이 압도적으로 많았음을 알 수 있다.
한강 유역에 소금을 공급한 다른 鹽場은 충남과 황해도의 鹽場이었다. 韓國水産誌(1908)에 의하면 충남 태안군의 연 생산액이 300만근, 당진 75만근이었다. 기타 황해도 옹진에서 생산된 소금도 서울로 유입되었다고 하지만 그 양은 극히 적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표 1> 경기만 연안의 제염지와 생산량(1911)
도 별 |
산 지 별 |
염 부 수 |
생산량(근) |
경기도 |
남양 |
429 |
29,885,439(38.0) |
안산 |
68 |
4,536,105(5.8) | |
인천 |
93 |
5,830,410(7.4) | |
통진 |
67 |
3,706,470(4.7) | |
수원 |
21 |
1,030,795(1.3) | |
부평 |
67 |
2,675,490(3.4) | |
김포 |
33 |
1,281,995(1.6) | |
충청남도 |
서산 |
79 |
3,472,326(4.4) |
면천 |
67 |
6,247,500(8.0) | |
태안 |
203 |
12,122,980(15.4) | |
당진 |
41 |
3,645,000(4.7) | |
황해도 |
옹진 |
47 |
4,114,000(5.3) |
합계 |
|
1,215 |
78,548,510(100.0) |
위의 <표 1>에서 1910년대초 경기만 소금 생산액은 약 8,000만근(40萬石)에 달함을 알 수 있고, 남양이 압도적으로 많고, 그 다음은 태안, 면천, 인천 순이었다.
한강유역에는 국내염 뿐만 아니라 청국염이 인천항을 통해 수입되어 유통되었다. 인천항이 개항된 1882년부터 1892년까지 청국염은 거의 수입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경기도 지방에서는 조선인들이 외국염을 배척하였고, 한편으로 경기도의 남양을 비롯한 경기만 염전에서 생산된 염이 충분히 공급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898년 청국염은 31,847擔(1擔은 100斤), 1899년 42,891擔, 1901년 42,891擔, 1903년 204,960擔으로 증가하였고, 1908년과 1909년에 이르러서는 50萬擔에 이르렀다.2) 당시 수입된 청국염 5,000만근은 경기도 전체 염 생산량과 맞먹는 많은 양이었다. 수입된 청국염은 再製鹽하여 철도를 통해 각 역 부근 군에 공급되었다. 그런데 충북지방 각 포구에서 하역된 소금은 마포에서 집산된 조선염이 朝鮮 船商에 의해 운반된 것이었다.
제염지에서 생산된 소금이 누구에 의해서 경강까지 운반되었는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韓國鹽業調査報告(1907)에 따르면 남양과 수원의 경우 제염업을 전업으로 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모두 부업으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남양과 수원의 경우 생산량의 90%는 경성의 마포상인의 손을 거쳐 경성 및 그 부근 각 군에 공급하고 기타 인천 및 군포장에 이출하기도 하고, 각 自郡의 部落 수용에 사용되었다.3) 즉, 마포에 거주하는 買受人이 賃運으로 제염지 포구에서 마포로 운반하였던 것이다.
남양과 수원을 제외한 인천, 부평, 김포, 안산, 통진군의 경우는 약간 달랐다. 오로지 포구에 거주하는 仲買人의 손을 거쳐 각 지방으로 수송하는데, 마포로 수송하는 것이 가장 많고, 기타 황해도가 그 다음이다. 마포로 집중하는 것은 서울시장에서 거의 전량이 소비되었다.4) 남양과 수원의 경우는 마포상인이 풍부한 자본을 바탕으로 제염업에 참여하여 판매권을 독점하는 경우이었고, 기타 제염지의 경우는 제염지 포구의 중매인(객주)이 소금 유통에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경기만 지역에서 마포로의 소금의 운반은 한강유역 및 서해안 지역의 포구를 주 무대로 활약하는 경강선상(京江船商)과 지토선상(地土船商)에 의해 이루어졌다. 京江商人은 용산․마포․서강․두모포․뚝섬 등 京江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는데, 그들은 이미 조선초부터 정부의 세곡운송에 참여하기 시작하였고, 16세기 이후에는 조운계(漕運界)의 경험을 살려 沿岸海路 혹은 內陸水路를 통하여 주 취급품목인 米․鹽의 판매활동도 전개하였다. 이들이 경기도와 충청도 연안의 제염지 부근의 浦口를 드나들면서 소금을 실어 마포까지 운반하였다. 이들 중 일부 상인 및 객주는 소금의 판매를 통하여 부를 축적하는데 그치지 않고, 전술한 바와 같이 제염업에 직접 참여하여 생산과 유통을 장악하기도 하였다.
또 하나의 소금 운반 담당자는 지토선상(地土船商)들이다. 지토선상은 外方浦口를 주된 활동 무대로 삼았고, 대부분 지토선이라는 소형 선박을 가지고 상품유통에 참여하였다.5) 지토선(地土船)은 대부분 배의 규모가 작아 원거리 항해에 부적합하여 주로 지방의 대포구와 소포구 사이의 상품유통을 담당하였는데, 이들의 주 활동 분야는 곡물․어염을 배에 적재하고 운수업에 종사한 것으로 보인다. 지토선의 선박은 200-300석을 실은 것이 많았고, 태안, 안면, 남양, 강화 어촌의 소유로 鹽․魚․米穀 等 그 계절을 따라 각 포구를 왕래하고 각 화물(貨物)을 임운(賃運)하였다. 해안포구에 있는 객주 소유의 배나 지토선이 경강에 들어가면 그 지역 담당의 마포 여각주인에게 거래구문(去來口文)을 주고 소금을 시전상인에게 전매하였다.
<표 2> 朝鮮木船出入統計
面 別 |
繫船場別 |
出入隻數 |
西江面 |
玄石里 |
356 |
新井里 |
16 | |
賀中里 |
32 | |
下水溢里 |
78 | |
소계 |
482 | |
龍山面 |
麻浦 |
1,500 |
桃花洞外契 |
500 | |
兄弟井契 |
1,200 | |
灘項契 |
100 | |
土亭里江邊 |
1,000 | |
소계 |
4,300 | |
漢芝面 |
漢江 |
200 |
西氷庫一二契 |
80 | |
소계 |
280 | |
豆毛面 |
豆毛浦 |
4,000 |
|
총계 |
14,124 |
資料 : 朝鮮總督府, 1913. 京城商工業調査, 150을 필자가 정리
<표 2>를 보면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용산의 마포 1,500척, 兄弟井契 1200척, 토정리가 많은 데, 이들 배들이 경기만 연안에서 용산, 마포 방면으로 염을 이입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두모포, 한강, 서빙고에 적을 둔 배는 주로 한강 중․상류를 왕복하는 배로서 한강 연안의 소금의 유통에 기여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2. 경강에서 충북 각 포구로 소금의 이동
경부선 철도 개통 전 마포 등 京江에 얼마나 많은 양의 소금이 집산되었는가는 기록이 없어서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비교적 철도 개통 이전을 잘 반영한다고 생각되는 자료에 근거를 하면 1908년 경성 염상인(鹽商人)이 마포의 소금객주로부터 구입하는 소금의 수량이 37,500石(1톤 1,680근, 200근을 1석으로 환산함, 768萬 7,500斤)6), 1909년 五江에 集中하는 소금은 연간 25萬石에 달하였다.7) 前者는 마포에서 서울에 이입되는 소금의 집산량이고, 後者는 한강 유역 전체에서 소비되는 소금의 집산량을 추산한 것이므로 後者가 약간 과장은 있어도 당시를 잘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경강의 객주나 여각들도 윗강 여각, 아랫강 여각으로 구분되었고, 윗강 여각은 서빙고, 두모포, 뚝섬에서, 아랫강 여각은 서강, 마포, 용산, 망원, 합정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이와 같이 여각의 활동 근거지가 분리된 이유는 지리적 요인 때문이다. 조수(潮水)가 영향을 미치는 범위는 대개 용산까지이다. 그래서 해안 포구에서 소금을 실은 대형 선박은 용산까지 밖에 소강할 수 없었고, 게다가 선박구조가 수심이 얕은 하천에서 항행하기에 적합하지 못했다. 따라서 일단 소금을 실은 선박은 마포에서 육양되었다가 소선(小船)으로 바꾸어 실려 상류로 소강되었던 것이다. 소금은 마포, 용산, 서강 등 아랫강 여각 상인의 전략 상품이었다. 특히 마포는 소금과 새우젓 교역을 통하여 1910년까지 전국 제일의 하항(河港)으로 번영을 누렸었다.
마포 염객주의 경성염전(京城鹽廛)에 대한 거래는 통상 음력(陰曆) 5,10日 양(兩) 파수일(派收日), 도화동 거주 상인에 대한 거래는 익일(翌日), 즉, 6일과 11일에 대금 지불을 받는 것으로 약정함으로써 성립하였다. 원격지 거주 상인에 대한 거래의 경우 현금 거래는 특히 신용이 두터운 경우에 한하고, 반액을 현금불, 다른 반액을 후불하고, 매상 후 현금 혹은 곡물로 지불하였다. 위와 같이 마포의 염객주는 서울뿐만 아니라 한강유역 전체를 상권으로 하였던 것이다.
마포에 이입된 소금의 절반은 경성염전(京城鹽廛)의 손에 의해 경성 주민의 수요에 충당하고, 절반은 마포 부근의 도화동 등에 거주하는 상인, 충북 및 강원도 각지에서 온 상인, 선주(船主) 등의 손에 의해 한강 중․상류로 운반 판매되었다. 봄에 아랫강에서 소금을 올려다 놓으면 수상선(水上船)을 이용하는 상인이 소금을 한강 상류 지역에 올려 콩․팥 기타 잡곡(雜穀)․약재(藥材)․산채(山菜)의 마른 것 등과 교환하였다.
충북지방의 남한강을 소강하여 소금을 운반 판매한 상인은 마포, 구용산, 두모포, 한강리, 뚝섬, 양주 등지에서 거주하는 선상(船商)들이 많았다. 철도개통 이전을 반영한다고 생각되는 韓國忠淸北道一班(1909)에 의하면 1년간 충북지방의 각 포구를 왕래 선박수는 영춘 65척, 단양 71척, 청풍 441척, 충주 250척으로 모두 827척이었다. 郡內 在籍 船舶數는 충주 42척, 청풍 22척이었다. 따라서 남한강을 운행하는 절대 다수의 선박은 경강 연안에 적을 둔 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한강에서 결빙기를 제외하고, 저수시(低水期)에 소강(溯江)할 수 있는 곳은 忠州까지이고, 그 上流는 평수시에 있어서는 흘수가 얕은 배에 한하여 영춘까지 소강하였다. 漢江 河口에서 龍山까지는 200石을 실은 船舶, 용산에서 忠州의 北倉까지는 5,60石을 실은 船舶, 忠州의 北倉에서 永春까지는 2,30石을 실은 船舶이 溯江할 수 있었다. 대체로 청풍 상류는 증수시가 아니면 항행이 곤란하였다. 한강을 운행하는 배 가운데 40石을 실은 것이 가장 많았고, 그 다음이 30석, 50석, 25석 순이었다. 대형선박은 선적량이 많은 장점은 있지만 속도가 느려서 염을 싣고 소강하는 선박은 50석을 전후한 양을 싣는 선박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철도 개통 이전 남한강 수운을 통한 충북 지방에 염을 운반 및 판매 상황에 대해서는 상세한 통계 자료가 없어 단편적으로 남아 있는 자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다음의 글을 통해서 당시 상황을 짐작할 수가 있다.
한강 상류의 연안에서는 아직도 물물교환의 관습이 남아 있다. 自家의 농산물을 사용하여 드물게 石油, 海産物과 교환하는 것이 있어도 食鹽과 교환하는 것이 慣習이다. 例年 해빙기에 이르면 마포, 용산지방의 객주는 배를 고용하여 食鹽을 滿載하고, 상류 주요 船附場(譯者註-浦口)에 이르러 고객을 기다린다. 현지의 농민은 牛馬 또는 擔軍에 의해서 농산물을 가져 와 염과 물물교환을 한다. 배는 종종 한 곳에 오랫동안 체류하는데, 염을 모두 판매하고 돌아 올 때까지 3개월이 소요한다. 그런고로 주행기간에 있어서 불과 3回의 거래를 하는데 불과하다고 한다. 船夫는 교역을 끊내면 농산물을 적재하고 귀환한다. 객주에게 운임 수수료로서 대개 現品을 지불 받는다. 충주 부근에서는 食鹽 10俵에 대하여 2俵 내지 3俵를 받는 것을 慣例로 한다고 한다.8)
윗 글은 1910년대 초의 水運 狀況을 기술한 것이지만 철도 개통 이전에도 상황은 비슷하였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객주(客主)가 선상(船商)을 고용하여 한강 중상류 각 포구에서 주민과 물물교환하는 형태가 주를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5일장이 열리는 정기시장에서 소금이 거래되기도 하였지만, 그 보다는 포구에서 배가 들어 올 때마다 열리는 부정기시장인 ‘갯벌장’에서 거래가 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3. 포구 중심의 소금 유통
충북지방의 남한강 유역 포구에서 철도 개통 전 얼마큼의 소금을 이입하였는가는 기록이 없어서 정확히 할 수 없다. 남한강 유역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는 1910년대 초에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가장 빠른 시기인 것으로 생각되는 자료는 朝鮮彙報(1915) 5월호에 실린 本間孝義의 ‘南漢江踏査’이다. 다음 자료는 1919년에 발간된 治水及水利踏査書이다. 후자의 자료는 조사시기를 알 수 없으나 朝鮮彙報에 실린 자료와 중복되는 것이 많다. 마지막으로 1916년 하천 조사 자료를 발간한 朝鮮河川調査書及附表(1929)이 있는데 가장 내용이 풍부하여 학술적 가치가 높지만, 철도 개통 후 10년 뒤의 조사 자료이기 때문에 철도 개통 전의 상황을 파악하기는 좀 어렵다. 그 후의 이 자료들을 베낀 것에 불과하다. 세 자료를 비교해 보면 한강 수운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韓國忠淸北道철一班은 경부선 철도 개통 이후의 자료이지만, 개통 직후이기 때문에 철도 개통 전을 비교적 잘 반영하고 있다. 이 자료에 근거하면 경부선이 통과하는 황간, 영동, 옥천, 회인과 역에 인접한 보은지방은 철도역에서 소금이 공급된 것으로 나타나고, 진천과 청안은 둔포포구에서 육운으로, 기타 한강 유역은 한강 수운에 의해 소금이 공급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충청북도 이입된 소금은 총 47,599石이었는데, 자료가 없는 문의를 제외한 금강 유역이 29,549石인데 문의 지방을 고려해 넣는다면 약 30,000石일 것이고, 충북의 남한강 유역이 약 17,000石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量의 자료는 정확한 수치가 아니기 때문에 신빙성은 떨어진다. 그러면 철도 개통 이전 충북의 남한강 유역에서의 소금 유통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한다.
<표 3> 군별 소금의 이입량 및 이입지
군명 |
수입량(石) |
금액(円) |
이입지 |
비고 |
청주 |
4,659 |
27,954 |
부강(30리),조치원(40리) |
철도 및 수운 |
문의 |
- |
- |
- |
|
회인 |
800 |
3,240 |
문의,부강 |
철도 |
옥천 |
5,000 |
21,500 |
인천 |
경부철도 |
영동 |
10,000 |
35,000 |
경성 |
경부철도 |
황간 |
2,000 |
6,000 |
남양군 |
경부철도 |
청산 |
390 |
2,730 |
심천역 |
경부철도 |
보은 |
1,000 |
7,000 |
부강역 |
경부철도 |
진천 |
3,200 |
11,520 |
아산 둔포(90리) |
육운 |
청안 |
2,500 |
12,500 |
아산 둔포(160리) |
육운 |
음성 |
500 |
2,500 |
忠州盤川(金遷) |
한강수운 |
괴산 |
1,450 |
8,700 |
牧渡(30리),盤川(70리) |
한강수운 |
충주 |
3,500 |
14,000 |
京城 |
한강수운 |
연풍 |
1,000 |
5,000 |
忠州金灘 |
한강수운 |
단양 |
- |
- |
- |
곡물수출지는 作間下津柳橋 |
청풍 |
10,000 |
40,000 |
북진,서창 |
한강수운 |
제천 |
- |
- |
- |
곡물수출지는 충주 목계,청풍 북창 |
영춘 |
1,800 |
10,800 |
하리 |
한강 수운 |
資料 : 韓國忠淸北道一班 後篇(1909)에서 筆者가 정리
朝鮮後期 소금의 유통을 엿볼 수 있는 자료 가운데 이중환의 擇里志가 있다. 이중환은 이 책에서 충북의 유명한 포구로서 충주의 금천․목계․가흥, 청풍의 황강을 들었다.
1888년경 충주는 2만여 호에 시가지가 1,000호에 달했으므로 소금 소비량도 많았다. 충주군에 소금을 이입한 포구는 목계(牧溪)9), 북창(北倉), 하담(荷潭), 금천(金遷), 조둔(早遯), 천포(泉浦), 가흥(可興) 등이었다. 이들 포구 가운데 가장 번영한 포구로 목계를 손꼽을
수 있다.
이중환은 擇里志에서 ‘목계는 강을 내려오는 어염선이 정박하여 세를 내는 곳으로 동해의 생선 및 산간의 화물이 대개 이곳에 모여 주민들은 모두 장사를 하여 부자가 된 자가 많다’고 하였다. 이 사실을 근거로 한다면 남한강 상류지역은 동해의 어염의 공급권에 포함되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 후 개항기에도 목계는 번영한 것으로 보인다. 1900년대 초 기록에 의하면10) ‘목계는 충주읍치에서 30리 떨어져 있는 선부장(船附場)(譯者註-浦口)으로서 대소원(大召院) 및 내창(內倉)의 곡물(穀物)이 이곳에서 집산되어 수로로 경성으로 가거나 일부분이 人馬로 강원도에 분배된다’고 하였다. 즉, 충북의 內倉과 제천 방면의 소금은 목계에서 하역되어 등짐과 우말짐으로 운반되었던 것이다. 당시 목계는 홋수 100호이었고, 5일과 10일에 5일장이 섰다. 露日戰爭 직후인 1906년 牧溪에는 客主 15戶가 있어 口錢을 받고 화물을 위탁매매하였다. 목계에서 내린 소금이 괴산까지 공급될 정도로11) 소금 유통범위가 넓었다. 윗 사실을 볼 때 목계의 소금 공급권은 충주의 내창, 괴산군 일부와 제천군 및 강원도 지방으로 광범위하였다. 목계는 일제시대를 지나면서 쇠퇴하기는 하였지만, 중앙선 개통까지 그 기능이 유지되었고, 그 후 팔당댐 건설로 수운기능이 완전히 소멸될 때까지 그 기능이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목계의 현지답사를 통해서도 확인이 되고 있다.
충주읍에서 지리적으로 가까우면서 충주읍에 소금을 공급한 포구는 북창(北倉)이었다. 북창은 충주읍에서 불과 10리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60여 호의 小村에 불과하였다. 韓國土地農産調査報告(1906)에 의하면 충주에서 집산하는 화물은 모두 이 곳을 경유하여 水運으로 콩류, 연초, 신탄 등을 이출하였고, 마찬가지로 魚鹽이 이입되었다고 하였다. 1900년경 일본이 제작한 지형도에서도 충주읍에서 북창으로 통하는 도로는 대로로 표시되어 있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후 충주읍에 소금을 공급한 포구는 달라진 것처럼 보인다. 1916년 조사에 의하면 충주읍을 이출입하는 화물은 北倉을 경유하지 않고, 탄금대를 통해 이루어졌다. 이는 우마차의 통행이 가능한, 탄금대~충주 간을 연결하는 도로가 신설되어 북창까지 화물을 운반하는 것보다 비용이 저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가흥은 忠州에서 30리 떨어진 漕運의 중심지로서 발달한 하항취락이었다. 이중환은 擇里志에서 ‘이 곳에는 漕倉이 있어 嶺南의 7邑과 忠淸道 7邑(충주, 음성, 괴산, 청안, 청주, 진천, 연풍)의 전부(田賦)를 거두고 水運判官으로 하여금 배로써 京師에 이르게 하였고, 주민들은 客主로서 쌀 수납 때 많은 이익을 노려 장사하여 큰 이익을 본다고 하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영저(嶺底) 7읍의 쌀 1석을 죽령과 조령을 넘어 가흥창까지 운반하는데 쌀 2석이나 들 정도로 운반비가 비쌌으므로12) 영조 25년(1749)에 慶尙道 嶺底 7邑의 田稅穀이 作錢되었다. 가흥창에 보관된 세곡은 절반 이하로 감소하였다. 즉, 忠淸道邑誌(영조-헌종 연간)에 따르면 충주․음성․괴산․청안․진천․연풍 등 6邑의 田稅를 北倉에서 傳受받아 站船 10隻으로 서울까지 운반되었다. 철종 원년(1850)에는 연풍을 제외한 나머지 5읍의 전세를 참선(站船) 15척으로 서울까지 운반하였다. 그 후 高宗 19년(1882) 조운이 폐지될 때까지 5읍의 전세가 가흥창에서 수납되어 배로 서울로 운반되었다. 조운 기능의 약화는 가흥의 포구 기능의 약화를 가져 왔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가흥은 금천(金遷)과 목계(牧溪)와 같은 큰 포구가 인접하여 배후지가 좁아 소금의 이입량은 많지 않았다.
괴산과 음성에 소금을 공급한 浦口는 금천(金遷)(충주시 가금면 창동리)이었다. 금천도 가흥창과 마찬가지로 조운의 발진기지로 인해 번영한 포구이었다. 漕倉이 가흥으로 옮겨 가기 전 조선초에는 영남의 田稅를 수납하는 慶原倉이 있었다. 조창을 가흥창으로 옮긴 이유는 금천과 가흥 사이에 막희락탄이라는 큰 여울이 있어서 배가 난파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擇里志에서는 ‘금천은 동남으로는 영남의 화물을 받아 들이고, 서쪽으로는 한양의 어염을 통한다. 마을이 즐비하여 마치 한양의 여러 강촌과 비슷하고, 배의 고물과 뱃머리가 연달아서 큰 도회를 이룬다’고 기록되어 있다. 물론 漕倉이 옮겨간 이후 浦口의 쇠퇴를 상정할 수 있지만, 괴산군의 田稅는 가흥창에서 수납되어 漕運되었으나 여전히 大同木 35同이 금천강두(金遷江頭)에서 선적되어 상납되었다.13) 개항기에도 소량의 곡물의 이출과 어염의 이입이 있었지만 개항 이전보다 쇠퇴하였다고 볼 수 있다. 가흥은 대포구인 목계와, 금천은 탄금대와 인접해 있어 소금 교환 기능을 빼앗겼기 때문에 거래가 활발하지 못하였다.
금천에서 가까운 하류에 누암(樓岩)이 있다. 누암은 가흥과는 달리 충청도와 慶尙道의 布木들이 모여 水運으로 서울까지 운반한 배의 발진포구이었다. 哲宗 9年(1858) 기록에 따르면 嶺南 山郡 48개의 錢木布가 충주 누암을 경유하여 서울에 상납되었다.14) 이 布木들은 公私船隻에 의해 賃運 上納되었으므로 근처의 상인들이 몰려 들어 번영하였다. 요약하면 조선 후기에는 田稅는 가흥창, 大同稅는 금천, 포목은 누암에서 수납하여 배로 경성까지 운반되어 지역별 포구의 기능 분할이 되어 있었다.
누암에서 하류쪽으로 가면 현재 가금면 탑평리 부근에 盤川(반내)가 있다. 韓國忠淸北道一班(1909)에 의하면 반천에서 소금이 하역되어 음성과 괴산으로 운송되었다. 반천(반내)은 1910년까지는 소금의 이입이 활발하였으나 경부선의 영향이 본격적으로 미치는 시기인 1910년대 초부터는 조치원역에서 음성과 괴산까지 소금이 우마차로 공급됨으로써 반천은 배후지인 음성과 괴산을 상실함으로써 주변 촌락에 소금을 공급하는 포구로 전락하였다. 이들 浦口 외에도 충주의 천포(泉浦), 구두(龜頭), 달천(達川), 조둔(早遯) 等地 같은 소포구에도 소금이 이입되었다.
청풍에 있는 중요한 포구로는 청풍(淸風), 한천(寒泉), 황강(黃江), 서창(西倉) 등이 있었다. 철종 10년(1859) 충청관찰사는 청풍 부근이 수심이 얕아지고 여울이 많아져 종종 배가 전복되는 사고가 잇달아 단양 등 3邑의 예에 따라 순전(純錢)으로 대납할 수 있게 해달라는 장계를 올리기도 하였다.15) 즉, 조선 후기로 갈수록 한강 상류지역의 지형의 변화가 청풍지역의 수운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0년 후 朝鮮國慶尙忠淸江原旅行記事(1888)에는 당시 서창(西倉)과 황강(黃江)의 情況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西倉村은 홋수가 50여호이고 청풍현에서 20리 떨어져 있다. 한강 상류 船舶 回漕의 極端으로서 소위 運轉貨物의 賣捌所이다. 한강에 의해 내려가는 화물도 대개 當所를 경유하는데, 當所의 객주에게 매매를 위촉한다.(중략) 同所에서 수심은 점점 깊어져 京城으로 轉漕해야 할 화물선은 대개 여기서 머무른다. 당시 포구에 鹽船 7隻이 계류 중인데 그 적재량은 평균 25石이다. 황강촌은 홋수가 60여 호이고, 장시가 3,8일 개시되고 있다. 鹽船 4척이 계류하고 있는데 적재량은 25石 內外이고, 그 所産은 한강 하류의 해안에서 제조된 것이고, 그 염은 황강촌 및 단양의 場林村의 개시일에 판매되고, 대신 오곡과 우피 등을 매입하는데 승선인은 3명으로 많지 않다.16)
개시일에 사람이 많이 모이므로 염선(鹽船)이 장날을 맞추어 배를 정박시키고 주민들과 물물교환하였다. 서창은 평수시 가항종점으로서 배후지가 넓고, 포구로서 입지 조건이 양호하여 염의 이입이 많았다. 특히 1893년 서창 상류 항행 개시 이후 서창 포구는 크게 번영하여17) 1일 20隻 내지 30隻이 상류로 소강하였고, 소금의 이입이 수만 섬에 달하고, 충북 단양과 영춘뿐만 아니라 경북 안동, 예천, 풍기 방면의 물자는 모두 서창에서 이출, 이입되었다. 그러나 그 후 낙동강 상류의 배의 운행이 가능해지자 서창은 경상도 북부의 배후지를 상실하여 급격히 쇠퇴하였다.
黃江津(寒泉)은 淸風府의 田稅穀 運出浦口로서 기능하였을 뿐만 아니라 商船도 많이 모여 들어 거래가 활발하였다.18) 황강의 배후지는 黃江場과 그 주변지역이었다. 淸風邑 對岸에 위치한 北津은 제천과 관계가 깊은 포구이다. 제천의 田稅와 大同稅가 충풍의 북진에서 선적되어 운송되었다. 韓國忠淸北道一班(1909)에 따르면 북진과 서창으로 10,000石의 소금이 이입되었다.
1880년대 말 단양지방의 소금의 공급도 漢江 水運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韓國忠淸北道一班(1909)에 따르면 단양의 경우 作間浦, 下津, 柳橋浦 포구를 통해 소금이 이입되었다. 韓國忠淸北道一班(1909)에 따르면 下津浦口를 통해 소금 1,800石이 이입되어 분배되었다. 경부선 철도 개통 이전 작간포는 단양뿐만 아니라 경북 풍기와 순흥까지 소금을 공급하였으나 철도 개통 후에는 김천역에서 소금이 공급되어 작간포는 쇠퇴하였다.
영춘(永春)에는 상류로부터 오사리(五賜里), 용진리(龍津里), 하리(下里)의 포구가 있었으나 배후지의 인구가 적어 이출량이 적었다. 1801년 전세곡(田稅穀)이 작전(作錢)되기 전에는 영춘의 하진에서 세곡이 참선(站船)에 실려 서울까지 운송되었다.19) 주로 소금의 이입과 연초의 잡곡의 이출이 있었다.
개항기 이전 달천(達川)을 따라 소금배가 소강하여 괴산 주변에 공급되었다. 17세기 중엽 金得臣(1604~1684)의 詩 江口商船에는 당시 괴산읍 괴진(槐津) 나루터의 소금 판매 상황을 다음과 같이 실감있게 묘사하고 있다.
吾家江上在(우리집은 강위에 있으니)
下碇平沙月(닷내리는 곳에는 백사장에 달빛이 밝다)
乘風漢水口(바람은 한강 어귀에서 불어 오고)
明日魚鹽販(내일은 생선과 염 파는 날이다)
門外繫商船(문밖에 장사배가 매여 있고)
落帆古峽煙(멈춘 돛대는 산그늘 연기 속에 있다)
扣枻玖臺邊(배가에서 돛대와 배권을 요란스레 두드리니)
村珉集百千(마을 사람들이 백명 천명 모여든다)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인구가 적은 남한강 유역의 대부분의 경우 염선상(鹽船商)과 주민이 직접 물물교환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달천은 평수시 유량이 적어 적재량 15石 내지 30石의 소형선이 소금을 적재하고 소강하여 귀항시(歸航時) 콩, 벼 등을 반출하였고, 고수시(高水時)에 한해 드물게 대형선박이 소강하였고, 기항지는 산수동(山水洞), 이탄(利灘), 목도(牧渡), 오간니(五間里), 달천동(達川洞)이었다. 산수동은 고수시(高水時)의 가항종점이고, 평수시에는 소형선박이 오간리까지 소강하였다. 괴산읍에 소금을 공급한 포구는 목도(牧渡)이었고, 기타 포구는 주변 촌락에 소금을 공급하는데 그쳤다. 현지 주민과 면담 결과 일제시대 중기까지 牧渡에 소금배가 소강하였고, 물이 많을 때는 괴산읍 부근까지 소강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Ⅲ. 금강 유역의 소금 유통
1. 강경-부강 중심의 소금의 유통
철도 개통 이전 화물 운송 수단은 지게와 우마 밖에 없었기 때문에 운임이 高價일 수 밖에 없었고, 극히 고가의 상품이 아니면 모든 화물은 수운에 의해 운반되었다. 더구나 소금은 곡물과 중량이 비슷할 정도로 무거우므로 육운보다는 수운이 훨씬 경제성이 높았다. 선박은 값싼 운임 외에도 적재량에서 장점을 갖고 있었다. 말이나 소는 사람의 2~3배에 해당하는 짐을 나를 수 있는데, 비해 선박은 약 100배의 짐을 운반할 수 있었다.
충북 중부와 남부 지역에 이입된 소금은 충청도와 전라도 해안지역에서 제조된 소금이었다. 철도 개통 이전 제염지에서 소비지까지 소금이 어떻게 운반되었는 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한강 유역과 마찬가지로 금강 유역도 감조하천(感潮河川)이라는 특성 때문에 중계 포구가 발달하게 된다. 소금의 유통에서 한강의 마포와 비슷한 기능을 한 포구가 강경이었다.
개항기 강경에 출입하는 출입하는 선박은 1만 척에 달하였고, 50석~300석 이하의 韓船(蓬船)이 약 50척, 50석 이하 부선(艀舟)가 약 150척이 있었는데, 강경에서 부강까지 화물 운반에는 50석 이하의 3,000척의 봉선(蓬船)이 사용되었다.20) 한선(韓船)과 부선(艀船)이 제염지에서 강경과 논산까지 소금을 운반하는 역할을 하였고, 강경에서 부강까지 소금의 운반은 50석 이하의 봉선(蓬船)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1890년대에는 100石이하의 선박은 부강까지 소강할 수 있었다는 기록21)이 있다. 금강 유역에서 소금의 집산지로는 강경과 논산이 1위로 1년 4,5萬石에 달하여 은진, 노성, 고산, 여산, 진산, 금산, 무주, 옥천 등지에 공급되었다.22) 작은 포구들은 鹽客主와 米穀客主가 분화가 되지 않은 반면에 강경은 큰 포구로서 소금을 취급하는 소금객주와 곡물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미곡객주가 분화되어 있었다. 1902년경 강경은 730戶, 인구 4,000의 큰 도회지로서 객주가 36戶가 있었고, 제주와 나주목 산하의 군현들의 해안 등지의 어염선이 많이 들어 왔다.23) 특히 나주목 관하의 해안 등지에서 오는 선박은 어염의 판매를 위하여 들어 온 것이다.
그 후 韓國農産調査報告(1906)에 의하면 객주는 논산 및 강경에 각각 7戶가 존재하였다. 韓國水産誌(1911)에 의하면 논산에 집산되는 소금은 2만석을 상회하는데, 이 소금은 논산천을 이용하여 직접 小舟로 이입하거나 강경상인의 손을 거쳐 이입하기도 하였다. 또한 당시 강경에는 소금객주가 30호에 달하고, 창고업에 입고와 출고되는 소금이 2만석에 달하였다. 논산과 강경에 집산되는 소금은 수운 또는 육운으로 은진, 용안, 임천, 정산, 부여, 석성, 대전, 공주 충북 등 동북지방에 판매되었는데, 그 가운데 태안소금이 7/10이고, 나머지는 나주와 기타 충청도와 전라도 해안지역에서 생산된 소금이었다. 그러나 태안소금이 주를 이루었던 것은 1910년경이고, 그 전에는 나주 소금24)이 대부분을 점하였다.25) 즉,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기 전 강경과 부강에 집산된 소금의 대부분을 나주소금이 차지하였던 것이다. 이 이유는 나주~강경의 운임이나 태안~강경의 운임에서는 큰 차이가 없을 것이지만, 태안소금보다는 나주소금의 생산량이 워낙 많으므로 가격에서 경쟁력이 있었지만, 태안소금이 품질에서 나주소금보다 우수하기 때문에 점점 더 태안소금을 선호하였기 때문이다.
1900년 이전에는 부강이 금강의 가항종점이 아니라 그 상류까지 배가 운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미호천 유역의 곡류, 두류, 엽연초 등 농산물과 하류부의 수산물이 서로 교역된 바 있으나, 미호천의 오근장의 경우 계절적 유수량의 감소와 유로의 토사 퇴적으로 인하여 1900년대 초기에 이미 수운이 마비 상태에 놓여 있었다.26) 강경에서 小舟는 늘 회인(懷仁)까지 소강한 바 있고,27) 1880년대 이전에는 물이 많을 경우 옥천과 영동까지 50석을 적재한 배가 소강할 수 있고, 당시 겨울이라 10石 이상을 탑재한 배도 소강하기 어렵다는 기록이 있다.28) 앞의 자료로 보아 개항 이전에는 부강 상류까지 배가 소강하였음을 알 수 있고, 그 이후 토사의 퇴적으로 부강이 가항종점이 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 시기는 1900년 초일 것으로 보인다.
부강은 금강 상류에 위치하여 충청남북도 양도로 통하는 길목에 해당하여 금강을 이용하여 충청도 곡물을 강경 방면으로 반출함과 동시에 강경에서 오는 소금을 부근 각지는 물론 금강 상류지방에 공급하였다.29) 금강의 가항종점인 부강은 강경에서 약 450리 떨어져 있는데, 청주 부근의 미곡, 보은․청산․회인 부근의 콩류 및 연초 등이 이출되었고, 魚鹽이 이입되었고, 공주 간 4,50石積의 韓船이 운행되었다.30) 강경에서 부강까지 소금을 운반할 때는 강경에서 공주까지 70, 80석을 싣는 선박으로 운반하고, 다시 소선으로 移積하여 부강까지 소강하였다.
충북 남부에 소금을 배급한 금강 수운의 종착점인 부강에서 철도 개통 직후 소금의 집산 상황은 다음과 같다.
지난 날은 每市에 來泊하는 鹽船이 십여 隻, 된장, 간장 및 김장의 구입철에는 每市에 25-6척의 入船이 있었다. 염의 판매고는 每市에 평균 2,500-600俵(小俵 8斗, 大俵 12-3斗)를 내려가지 않았지만, 철도 개통 후는 크게 그 영향을 입고 지금은 거의 반액으로 감소했다고 한다. 염은 완전히 한국인의 거래에 속하고, 일본인 또는 중국인 등이 아직 손을 대지 않았다. 객주는 2호가 있다. 하나는 청주객주라 하고, 다른 하나는 강경객주라 한다.31)
철도 개통 이전의 부강의 소금시장으로서 위치를 짐작케 한다. 두 명의 객주가 부강시장의 소금 유통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1910년 부강역 소금 도착량은 1,106俵(79톤,1톤은 7石으로 환산)에 불과하였고, 염 30,000俵(1石은 2俵로 계산)가 전라도 해안에서 강경을 경유 수운으로 부강에 이입되었는데, 이는 조치원역 도착 식염 16,135俵의 거의 두 배에 달했다. 소등 또는 담군(擔軍)에 의해서 청주, 문의, 회인, 보은에 공급되었다.32) 1904년 경부선 철도가 개통이 되었지만 1910년까지는 소금 거래에 큰 타격을 주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철도 개통 전까지 부강의 소금 유통권은 청주, 문의, 회인, 보은, 청산을 연결한 범위이었다.
1895년경까지 보은 지방은 금강 수운에 의해 소금이 공급되기도 하였지만 낙동강 수운으로 상주 낙동진에 하역된 다음, 소금장수들에 의해 보은 일부 지방에 소금이 공급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보은은 금강 소금유통권과 낙동강 소금유통권의 경계이었다.
通商彙纂 等 開港期 資料에는 강경과 부강의 소금 유통 범위권에 永同이 빠져 있다. 영동과 황간 지역은 지형상 옥천지방과의 교통보다 경상도 김천과의 교통이 편하였다. 추풍령은 고개 높이가 불과 200m로 소백산맥에 위치한 고개 가운데 가장 낮은 고개이다. 왜관에서 양육된 소금이 육운으로 김천장으로 운반되어 판매된 후 일부는 영동 상인에게 전매되어 영동지방의 주민에게 판매되었다.33) 그리고 일부이기는 하지만 경상도 남해안 지역에서 제조된 소금이 멀리 영동지방까지 운반되기도 하였다.34) 영동은 금강 수운을 통해 서해산 소금과 낙동강 수운을 통해 운반된 명지도산 소금 및 남해안에서 제조된 소금이 공급되는 지역으로 소금 판매 경쟁이 치열한 곳이었다.
경부선 철도 개통 이전 금강 수운을 통한 소금 공급권은 강경에서 육로로 직접 공급된 옥천, 강경에서 소선으로 이적(移積)되어 부강에서 하역된 다음, 鹽商과 주민에게 인도되어 공급된 청주, 문의, 회인, 보은을 포함하는 지역이라고 볼 수 있다.
2. 둔포 소금의 유통
진천(鎭川)과 청안(淸安)은 아산만 둔포를 경유하여 소금이 이입되었다. 擇里志에 ‘진천은 서북으로 대문령을 넘으면 안성․직산 땅이 되는데 바다에서 겨우 100리쯤 떨어져 있기 때문에 어염의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진천은 초기부터 아산만에서 소금이 들어 온 것으로 보인다. 둔포는 조운이 편리하여 만조 때는 150석에서 200석을 실을 수 있는 선박이 정박할 수 있었다.35) 둔포는 미곡의 적출지와 어염의 이입지로서 유명한데, 원래는 객주가 없었는데, 개항 후 더욱 발달하여 미곡 객주가 12,3호, 소금객주가 10여 호에 달할 정도로 상업이 성하였다. 둔포에서 집산된 소금은 2,3만석에 달하고 안성을 경유 각 부근 각읍에 분배하였다. 둔포에서 집산된 소금은 南陽産이 가장 많았고, 그 외에 당진, 면천, 서산염이 들어 와 가까이는 아산, 평택, 안성에서 멀리 직산, 천안, 죽산, 목천, 진천, 청주까지 공급되었다.36) 청주는 육운으로 부강에 곡물을 운출하고, 어염을 이입하기도 하였지만, 또한 둔포를 통해 곡물을 이출하고, 귀로에 어염을 이입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둔포에서 청주까지 거리는 약 120里인데 병천․진천을 경유하여 곡물의 이출과 어염의 이입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둔포에서 진천까지 소금의 이입경로는 다음 세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둔포와 진천 사이 거리의 중간이 되는 시장에서 거래하는 방법이다. 즉, 둔포의 상인이 소금을 수송해 와서 입장(笠場)에서 진천에서 오는 쌀과 교환한다37)고 한 예가 그 것이다. 둘째는 소금의 수요 계절만 열리는 소금 전문시장을 통해 거래하는 방법이다. 그 예로 진천군(鎭川郡)의 석현장(石峴場)은 염점(鹽店)으로서 다만 봄(정월부터 3월까지)과 가을(7월부터 9월까지)에 개시한다38)고 하였다. 셋째, 안성의 경우처럼 소비자가 소금의 수요가 많은 계절인 봄과 가을에 둔포에 가서 다량의 소금을 구입해 오는 경우이다. 김장과 장을 담는 계절에는 소금을 시장에서 구입하지 않고, 둔포에 이르러 직접 사오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39) 당시는 우마차가 없어 등짐이나 우말짐에 의존하였으므로 시장에서는 소금값이 고가일 수밖에 없고, 게다가 소매이기 때문에 고가이다. 그러므로 소비자가 직접 곡물을 지게에 실고, 포구에서 다량으로 소금을 구입하면 주민에게 유리하다.
韓國忠淸北道一班(1909)에 의하면 청안(淸安)도 160리 떨어진 아산 둔포에서 소금 2,500石을 진천을 경유하여 들어 왔다. 1908년이므로 철도 개통 직후이지만 그 이전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지금까지 논의한 철도 개통 이전 1900년경 충청북도의 鹽道를 지도화하면 <그림 1>과 같다.
<그림 1> 慶釜線 開通 以前의 鹽道(1900년경)
Ⅳ. 맺음말
경부선 철도 개통 이전 충북 북부지방의 소금유통은 전적으로 수운에 의존하였다. 남양, 인천, 수원, 부평, 통진, 당진, 태안, 안산 등지에서 생산된 소금은 지토선상 또는 경강선상에 의해 마포까지 운반되어 마포에 거주하는 객주에게 인도되었다. 마포의 객주에게 인도된 소금의 일부는 서울 염전(鹽廛)에게 판매되어 경성과 그 부근 촌락에 판매되었고, 일부는 한강진, 두모포, 뚝섬 등 경강선상이나 강원도와 충북에서 온 선상에게 판매되어 수운으로 충북 남한강 연안 각지에 판매되었다. 선박은 한강 연안 거주 상인의 소유수보다 경강상인의 선박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충북의 목계․북창․금천․누암․반천․하담․조둔․천포, 청풍의 한천․황강․북진․서창, 단양의 작간포․유교포, 영춘의 하진․용진 등 포구에서 하역된 소금은 현지 상인 및 주민의 곡물과 물물교환되었다. 철도 개통 전 남한강 소금 유통 범위는 음성, 충주, 괴산, 연풍, 제천, 청풍, 단양, 영춘 등을 포함하였다.
반면에 충북의 중부와 남동부는 금강 수운에 의해 강경 또는 강경을 경유 부강에서 소금이 분배되었다. 강경에서 집산된 소금은 철도 개통 전에는 나주소금이 가장 많았고, 그 다음이 태안 소금이고, 기타 충청도 해안과 전라도 해안에서 생산된 소금은 소량이었다. 강경에서 집산된 소금은 2만석이 넘었고, 강경객주가 소금 판매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충북 남부인 옥천 지방은 강경에서 직접 육로로 소금이 공급되었다. 금강 연안의 선박에 의해 강경에서 부강으로 운반된 소금은 부강객주의 중개를 거쳐 鹽商들에 의해 청주, 회인, 문의, 보은, 청산 등지에 판매되었다. 철도 개통 이전 소금의 운반 수단은 등짐과 우말짐이었는데, 등짐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보은과 영동 지방은 금강 수운을 통해서 소금이 공급되었을 뿐만 아니라 낙동강 수운을 통해서도 이루어졌다. 보은 지방은 낙동강 수운을 통해 상주 낙동진에 운반된 다음, 다시 육운으로 김해 명지도산 소금이 공급되었다. 또한 김해 명지도산 소금이 낙동강 수운을 통해 왜관에 양육된 다음, 80리 떨어진 김천장으로 옮겨지고, 이 소금이 충청도 상인에게 전매되어 영동지방에 공급되었다. 소량이지만 남해안 소금이 육운으로 영동지방에 공급되기도 하였다.
한강 수운과 금강 수운지점에서 멀리 떨어진 진천과 청안은 아산 둔포의 소금이 육운으로 공급되었다.
우리 나라에 철도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이전 해안의 소금과 내륙의 곡물의 교환은 전적으로 수운에 의해 운반되었고, 그것이 수운체계의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 소금은 산지인 해안에서 내륙으로 정례적으로 운반됨으로써 고정적인 鹽道와 流通圈을 형성한다. 수운이 가능한 지역에서는 船商이 물자와 사람을 운반함으로써 지역간 정보의 교류를 시킴으로써 두 지역간의 공통의 문화권을 형성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수운이 없는 경우에는 鹽商이 두 지역간을 왕래하면서 정보의 교환 역할을 담당하였다. 따라서 전근대적인 지역구조는 하천 유역에 의해 구분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철도가 등장하면서 전통적인 지역구조는 큰 변화를 겪는 것은 물론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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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商彙纂(1893~1904)
韓國忠淸北道一班(1909)
【第2主題 討論要旨】
김 일 기(한국교원대학교 지리교육과)
朝鮮時代의 소금 유통에 많은 연구를 해오신 김재완 박사께서 충청북도 지방의 염 유통에 대해 좋은 논문을 발표해 주셔서 평소 조선시대의 소금 생산 과정에 관심이 많았던 본인은 학문적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당시의 구체적인 기록이나 선행 연구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많은 자료를 찾아 당시의 상황을 복원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만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알찬 내용의 논문을 발표해 주신데 대해 토론자로 대단히 고맙게 생각합니다. 논문의 좋은 점은 생략하고 좀 더 보완 해 주셨으면 하는 내용만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는 충북 지방은 내륙에 위치해 있어 조선시대에는 남한강과 금강수계에 의해 물자의 유통이 이루어져 왔습니다. 따라서 남한강, 금강 水系와 수계에 따라 분포하고 있는 당시의 주요 浦口를 지도화 했으면 당시 이 지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던 소금유통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더욱이 충북지방의 염 유통은 김박사가 지적한대로 남한강 수계의 충주, 단양과 금강수계의 부강, 낙동강 수계의 영향을 받은 永同과 아산만 둔포에 영향을 받은 진천 등 크게 4개 권역의 소금 유통권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두 번째는 충북지방은 비교적 좁은 지역이기 때문에 소금 유통권의 경계를 설정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따라서 이 같은 점을 조금이라도 보완하기 위하여 당시의 충북지방의 定期市場網과 연결시켜 지도화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세 번째는 인용된 대부분의 문헌이 1900년대 초기의 문헌입니다. 따라서 당시의 통계숫자가 조선시대보다는 일제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때의 통계임으로 통계 사용에 신중을 기해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예로 1906년 牧溪의 객주가 15戶로 되어 있고 1909년에는 木溪가 다른 지명인지, 같은 지명을 잘못 쓰신 건지, 같은 지명이면 객주가 이같이 급격히 줄어든 배경은 무엇인지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네 번째는 朝鮮後期에 청나라에서 많은 소금이 수입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금강유역 포구에는 유입가능성이 적지만은 남한강 수계는 유입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에 대한 설명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조선말에는 일본, 청국의 물품들이 상당량 수입됨에 따라 이들 물품들이 포구를 통해 판매되었으며 이 때 浦口를 중심으로 객주활동이 활발하였고 이들을 통해 많은 물품이 거래되었던 것으로 보아 이 때 남한강 유역 포구에는 값싼 청국 소금이 유통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섯 번째는 충북 지방은 다른 도에 비해 비교적 좁은 지역이기 때문에 당시의 소금유통망을 복원할 때에 단지 문헌에만 의존하고 현지 답사를 많이 하지 않은 것은 소금 유통권을 설정하는데 어려움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앞에서도 지적한대로 浦口중심의 정기시장을 답사하여 당시의 정기 시장망을 복원하고 물자의 유통을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 서울대 지리학 박사
1) 通商彙纂 第 20號 「朝鮮國忠淸道地方巡廻復命書」(1894.5.1) 31.
2) 이영학, 1991. 「개항기 제염업에 대한 연구」, 한국문화 12(서울대 한국문화연구소), 560~563.
3) 財務週報 第 3號 附錄 「京畿道水原郡南陽郡一部鹽業調査」(1907.4.8), 15.
4) 朝鮮總督府財政監査廳, 1907. 韓國鹽業調査報告 第1編 京畿道, 248~9.
5) 고동환, 1985. 「18․9세기 외방포구의 상품유통의 발달」, 한국사론 13(서울대인문대학 국사학과), 294.
6) 財務週報 第10號 報告及統計 「京城韓人市場ニ於ケル食鹽集散狀況」(1908), 495.
7) 財務彙報 第10號 報告 「五江常民近況」(1909.3.10), 20.
8) 朝鮮總督府鐵道局, 1912, 朝鮮鐵道沿線市場一班, 460.
9) 牧溪는 문헌에 따라 木溪, 山溪로 표시되어 있지만 모두 같은 지명이다.
10) 通商彙纂 第1號 附錄 「京畿道及忠淸道地方商況幷ニ農況視察報告」(1893.12.20), 36.
11) 日本農商務省, 1906. 韓國農産調査報告(京畿․忠淸․江原道), 674.
12) 備邊司謄錄 第 82冊, 英祖 3年 丁未 9月 21日.
嶺諸邑稅米 例納於忠州可興倉 踰越險嶺之故 一石米上納之際 例爲倍給二石.
13) 輿地圖書 槐山郡 田稅.
14) 備邊司謄錄 第 246冊, 哲宗 9年 戊午 7月 10日.
15) 備邊司謄錄 第 246冊, 哲宗 10年 乙未 2月 1日.
16) 松田行藏, 1888. 朝鮮國慶尙忠淸江原旅行記事, 102~3.
17) 朝鮮總督府, 1919, 河川水利及踏査書, 387.
18) 輿地圖書 淸風府 山川.
黃江津在府治西三十五里自忠州通東峽捷路也 商船多來泊于此.
19) 備邊司謄錄 第159冊, 正祖 2年 戊戌 正月 8日.
20) 通商彙纂 第188號, 「韓國忠淸道錦江兩岸情況」(1900.11.21), 96.
21) 通商彙纂 第20號 雜之部, 「朝鮮國忠淸道地方巡廻復命書」(1894.7.1), 3.
22) 앞의 책, 4 및 11.
23) 通商彙纂 第228號 附錄, 「韓國群山分館管轄內情況」(1902.8.14), 96.
24) 실제로 나주지역에서는 소금이 생산되지 않았고, 나주목의 월경지였던 지금의 신안군에 속하는 섬들에서 생산된 소금을 나주소금이라고 불렀다.
25) 坂田富藏, 1911. 最近江景事情, 110.
26) 小松悅次, 1909. 新撰韓國事情, 252(나도승, 1980. 「금강수운의 변천에 관한 지리학적 연구」, 公州敎大論文集 16輯, 81에서 재인용).
27)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4, 國譯韓國誌, 201.
28) 松田行藏, 1888. 앞의 책, 177.
29) 財務彙報 第13號, 「大田經濟事情」(1909.4.25), 32.
30) 日本農務省, 1906. 앞의 책, 398.
31) 財務彙報 第28號, 「銀行業ラ韓人熟知セシム講話會及地方槪況」, 1534.
32) 朝鮮總督府鐵道局, 1912. 앞의 책, 78.
33) 通商彙纂 第19號 報告, 「朝鮮國慶尙道巡廻報告」(1895.5.15), 20.
34) 通商彙纂 臨時增刊 第231號, 「韓國慶尙南道視察復命書」(1902.4.23), 122.
35) 通商彙纂 第179號 雜, 「韓國京畿忠淸兩道內地情況」, 68~9.
36) 通商彙纂 第1號 雜之部, 「京畿道及忠淸道地方商況幷ニ農況視察報告」, 44.
37) 通商彙纂 附錄 第211號, 「韓國京畿江原及忠淸道農商況視察報告書」(1902.1.14), 128.
38) 日本農商務省, 1906. 앞의 책, 674.
39) 松田行藏, 1888. 앞의 책, 164.
첫댓글 이 자료를 이곳에 올린 것은 저의 고조부님께서 둔포에서 소금을 서셔서 진천에다 파셨다는 형님들의 말씀이 있으셨기에 올렸습니다. 형님들은 아버님께 전해 들으셨겠지요. 아버님은 할아버님께 들으셨을 거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