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성전과 지체 - 얼굴
겔 41:4
겔 41:4 그가 內殿을 尺量하니 長이 二十尺이요 廣이 二十尺이라 그가 내게 이르되 이는 至聖所니라 하고
에스겔 성전에는 사람의 몸에 해당되는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첼라(=갈빗대), 1규빗(중지부터 팔꿈치)에 한 손바닥을 더한 척이라는 단위와 같이 여러 가지 몸과 관련된 표현이 나옵니다.
에스겔 성전의 지성소 至聖所는 가장 거룩한 곳입니다.
‘성’은 거룩한 ‘성(聖)’으로서, 지성소는 ‘지극히 거룩한 곳, 가장 거룩한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본문 겔 41:4을 보면 성전에서는 지성소를 ‘내전(內殿)’이라고 표현합니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전이라는 표현을 자세히 보면 중요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에스겔 성전에는 20척, 20척으로 된 지성소가 있습니다. 성소가 거룩한 곳이면, 지성소는 지극히 거룩한 곳, 가장 거룩한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구약에는 대제사장이 1년에 한 번 7월 10일에 지성소에 들어갑니다. 대제사장은 언젠가는 죽어야 하는 대제사장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원한 대제사장입니다.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이 들어가시는 곳이 지성소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는 장소를 신령한 지성소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겔 41:4에 지성소를 내전으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내전’을 히브리어로는 ‘페네 하 헤칼’ lk;=yh eh ynEP이라고 표현합니다.
‘페네’ ynEP는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내전은 ‘그 성전의 얼굴’이라는 뜻이 됩니다. 이렇게 성경에서 지성소는 내전인데 이것을 곧 하나님의 얼굴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겔 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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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우리는 이러한 표현을 시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시 18:6을 보면 “내가 환난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저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도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 ‘그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라는 문장을 대구법으로 살펴보면, ‘성전’이라는 단어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앞’입니다. ‘앞’은 히브리어로 역시 ‘페네,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바로 성전은 하나님의 얼굴이다, 특별히 지성소는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똑같은 말씀을 겔 42:8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겔 42:8을 보면 제사장들의 방이 50척 길이의 방, 100척 길이의 방이 있습니다. 100척짜리 건물이 성전 쪽으로 향해 있다고 표현되어 있습니다(겔 42:8).
겔 42:8 “바깥뜰로 향한 방의 장이 오십척이며 성전 앞을 향한 방은 일백척이며”
50척 짜리 방은 바깥뜰을 향해 있고, 100척 짜리 방은 성전 앞을 향해 있습니다.
여기서 ‘앞’은 히브리어로 ‘페네 하 헤칼’입니다. ‘그 성전 얼굴을 향한 방’이라는 의미입니다. 지성소는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것을 에스겔 성전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여기에 담긴 하나님의 구속 경륜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예배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드리기 위해 교회에 나옵니다. 교회에 나오는 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찾는 것입니다. ‘코로나 19’때문에, 또는 정부 시책에 의해 당분간 교회에 나오지 못하고 인터넷을 통해 온라인 예배를 드립니다. 지금 여러분이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다할지라도 하나님 얼굴 앞에 서 있다, 하나님의 얼굴을 찾고 구하는 중이라고 생각해야 그 예배가 하나님이 받으시고 기뻐하시는 예배가 됩니다.
시편 27편은 다윗이 대적들에게 쫓기면서 하나님 앞에 예배도 드리지 못하고 광야를 전전하는 가운데 고백한 내용입니다.
시 27:4을 보면 “내가 그 전을 사모하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 27:8에서는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성전에 나와 예배를 드렸는데, 대적에게 쫓겨 광야를 전전하며 예배드리지 못하는 비참한 상황 속에서 내가 평생 하나님 얼굴을 떠나지 않겠다고 고백한 겁니다.
오늘 우리도 비록 온라인 예배를 드릴지라도 평생 하나님 얼굴을 떠나지 않겠다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 얼굴을 찾으면 그분에게는 엄청난 축복이 주어집니다.
#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 자의 축복이 무엇일까요?
1) 하나님께서 고치시는 축복을 주십니다.
대하 7:14을 보면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찌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얼굴을 찾지 않지만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의 얼굴을 찾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찾으면 그 땅을 고친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병들었더라도 하나님의 얼굴을 찾으면 고쳐주시는 겁니다. 그러나 여전히 죄 가운데 살아간다면 하나님의 얼굴을 숨기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숨기시므로 그 분이 잘 될 수 없는 겁니다.
사 64:7을 보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 오니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을 인하여 우리로 소멸되게 하셨 음이니이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얼굴을 돌리시면 그 집안이 소멸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 빛이 비춰지는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에는 하나님의 빛이 있습니다. 그 빛이 비취면 모든 어둠을 몰아내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도 ‘자네 얼굴에서 빛이나’라고 말합니다. 사람의 얼굴에도 빛이 나는데 하나님의 얼굴은 빛 자체입니다. 하나님의 빛이 비칠 때 우리를 우환과 병마에서 건져주십니다.
시 80:19을 보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 빛을 비취소서 우 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 67:1에서는 하나님의 얼굴빛을 비춰주시고 우리에게 복을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3) 신비한 능력을 주십니다.
신비한 능력의 축복입니다.
시 105:4, 대상 16:11을 보면 “여호와와 그 능력을 구할찌어다 그 얼굴을 항상 구할찌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 105:4 여호와와 그 能力을 求할지어다 그 얼굴을 恒常 求할지어다
대상 16:11 여호와와 그 能力을 求할지어다 그 얼굴을 恒常 求할지어다
하나님의 얼굴은 신비한 능력입니다.
오늘 우리가 어떤 어려움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여러분이 어떤 장소에서 예배드린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간절히 구하고 찾으면 그 사람에게 신비한 능력이 임합니다.
우리가 어떤 장소에 있든지 하나님의 얼굴을 찾으면 신비한 능력을 보내주십니다.
오늘도 우리가 어떤 장소에 있든지 간에 하나님의 얼굴을 간절히 구하므로 복을 받고 하나님의 빛을 비춰주시고 하나님의 신비한 능력이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예수님의 오심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1) 초림(初臨)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초림을 통해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은 다른 말로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된 겁니다. 요 1:14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성육신(Incarnation, 인카 네이션) 사건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반절에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얼굴 속에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있기 때문입니다.
고후 4:6에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33년을 이 땅에 사실 때 타락한 인간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보게 된겁니다. 놀라운 축복을 본겁니다.
2) 재림(再臨)
재림은 하나님의 얼굴을 잠시 보는 게 아니라 영원히 보는 것입니다.
우리도 보고 싶은 얼굴이 있습니다. 삶이 고달프고 힘들 때마다 우리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환하게 웃으시고 어떤 때는 벼락같은 뇌성으로 책망하셨던 원로 목사님의 얼굴을 보고 싶습니다.
우리가 보고 싶은 사람의 얼굴을 영원히 보게 된다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이제 천국 가면 보고 싶은 얼굴들을 영원히 다 만나고 보게 됩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의 얼굴을 세세 무궁토록 보게 됩니다.
계 22:3에 하나님과 그 어린양의 보좌가 나옵니다. 그리고
계 22:4에서 “그의 얼굴을 볼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새 예루살렘 성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영원히 보게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과 어린양은 문자적으로 볼 때는 둘입니다. 그런데 ‘그의 얼굴을 볼 것이요’에서 단수(單數)를 사용했습니다. 보좌라는 단어도 단수(單手)입니다.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들이라는 복수가 아니라, 헬라어 원문은 모두 단수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어린양이 그 본체는 하나라는 겁니다. 우리는 성자 하나님, 성부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한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그 삼위일체 하나님을 세세무궁토록 영원히 보게 되는 겁니다. 얼마나 감격스럽습니까?
계 22:3-4을 보면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4 그의 얼굴을 볼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에스겔 성전에서 지성소를 하나님의 얼굴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제 우리가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영원히 보여준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지금은 희미하게 볼 수밖에 없지만 그 나라가면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선명하게 보게 됩니다. 고전 13:12에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이제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는 주님 재림의 날이 도래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전 13:12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稀微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對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部分的으로 아나 그 때에는 主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穩全히 알리라
오늘도 이 날을 소망하며 그날을 사모하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결론적으로,
누가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가?
1) 정직한 자
정직한 자는 하나님의 얼굴을 봅니다.
시 11:7을 보면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 얼굴을 뵈오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정직한 자는 하나님의 얼굴을 뵙게 됩니다.
여기서 ‘정직하다’는 것은 히브리어로 ‘야사르’ rv;y: 입니다. 그 뜻은 ‘곧은, 똑바른’입니다.
우리가 줄을 그을 때도 자를 가지고 그으면 똑바로 그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반듯한 자가 있으면 그 자를 의지해서 그을 때 반듯해집니다.
우리에게 반듯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시 33:4에 “하나님의 말씀은 정직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호 14:9에는 “하나님의 도는 정직하는 의인이라야 그 도에 행하리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정직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정직한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따라 살 때 그 분의 삶이 정직해집니다.
오늘도 정직한 자에게는 하나님의 얼굴을 비춰주십니다.
오늘도 말씀을 붙들고 정직한 길을 걸어갈 때 하나님의 환한 빛을 비춰주시는 역사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2)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
창 32:30을 보면 야곱이 얍복강에서 씨름을 하다가 하나님의 얼굴을 뵈었습니다. 그 장소의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불렀습니다. 히브리어로는 ‘페누엘’ laeWnP]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하나님의 얼굴을 보여주셨습니까? 야곱의 환도뼈가 위골된 다음에 하나님의 얼굴을 보여준 겁니다. 환도뼈는 우리 몸을 의지하고 있는 뼈입니다. 그런데 환도뼈가 부러졌다는 것은 지금까지 자기를 의지한 삶이 깨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창 32:30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 과 對面하여 보았으나 내 生命이 保全되었다' 함이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