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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나주시 봉황면 와우리(臥牛里)
와우리는 면소재지에서 약 2㎞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봉동마을, 와곡마을, 분동마을, 각동마을 등 4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진 와우리는 본래 남평군 죽곡면의 지역으로 지형이 소가 누워있는 형국이라 하여 누실 또는 와우라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개편에 의해 분동을 병합하여 와우리라 이름하게 되었다. 이중 와우 1구는 와곡(누실)이고, 와우 2구는 봉동, 분동, 각동이 해당된다. 총 117가구에 인구는 약 866명으로 대부분이 농업을 주업으로 하고 있는 극히 평범한 농촌이다.
이들 마을 중 누실은 순흥안씨(順興安氏), 성주이씨(成州李氏)가 주류를 이루며, 봉동은 순흥안씨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분동과 각동마을은 이들 마을에 비해 고른 성씨 분포를 보이고 있다. 이들 마을 가운데 봉동마을은 원래 잿등이라는 지역과 한 마을을 이루고 있었는데 한국전쟁 이후 다른 지역으로부터 흘러 들어온 사람들로 인해 인구분포가 많아지자, 잿등 주민들이 봉동과 분리를 주장함으로써 한 마을이었던 봉동마을과 잿등이 분리되었다.
누실(臥谷) 마을 이 마을은 서기 1300년대말부터 한양조씨(漢陽趙氏)와 청주한씨(淸州韓氏)가 들어와 살고 있었다고 전하며, 1500년대말 임진왜란시 순흥안씨(順興安氏) 안세단(安世湍)이 한양에서 내려와 철야(鐵冶)에 정착한 후, 그의 증손인 안신립이 1600년초에 이 마을로 옮겨와 자손대대로 살게 되었다.
다른 성씨의 입향을 살펴보면 조선조 단종 4년에 성주이씨(星州李氏) 이계분이 장성리에 낙향한 후, 그의 손자인 이사가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또 김해김씨(金海金氏) 김휘탁은 단종 시해사건 당시 단종의 시중공(사부)으로서 사건 발생 후 나주 다시면 시랑골로 낙향하였는데 그의 후손이 약 150년 전에 이 마을로 들어왔다고 한다.
하동정씨(河東鄭氏)는 정인지의 손자 정복유가 만봉으로 낙향한 후, 그의 후손 정제명이 본 마을로 들어왔다.
이 마을의 가장 큰 특색은 소와 관련된 문화이다. 마을의 이름에서 잘 나타나듯이 소가 누워있는 형국이라 하여 와우(臥牛)라고 하였다가 현재는 소가 여물을 먹고 돌아누운 형상이라고 하여 누실로 통용되고 있다.
마을 입구에 무덤이 위치하고, 그 주위엔 소나무가 둘러싸여 있다. 정월 보름 저녁 8시부터 자정까지 제가 행해지며 마을의 안녕과 주민들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며, 삼신 신앙의 형태로 자식의 잉태를 기원하기도 한다.
보름 전날에 제관 및 마을 사람들이 모여 제사상을 차리고, 제를 지낸 후 음주와 가무를 한다. 예전에는 제관을 정해진 방법에 따라 선정했다고 하나 요즘은 마을의 연장자가 돌아가며 한다고 한다.
누실마을에서는 당산제를 천제로 부르는데 당산할머니를 천제할머니라고 한다. 당산나무는 원래 2그루가 있었는데 20년 전에 사라졌다. 무덤의 높이는 39m이고 지름은 140m이다. 제 음식으로는 미역국, 홍어, 과일, 육고기는 올리지 않고 붉은 장닭을 올린다. 제음식을 장만할 때는 값을 깎지 않는다고 한다.
이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로는 ‘장자못'의 전설이 있다.
옛날 이 마을에 한 부자가 살고 있었는데, 중이 시주를 올 때마다 공양을 주지 않고 쫓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중은 그 날도 시주를 받지 못하고 돌아가면서 ‘마을에 샘을 파면 더 큰 부자가 될 것이다.'라고 중얼거렸다. 그 소리를 들은 부자는 마을 사람들에게 우리 마을이 부자가 될 수 있다면서 샘을 파게 했다. 그러나 부자 마을이 되기는커녕 점점 더 가난하고 궁핍해져 갔다. 이 장자못 전설에 관해서 마을 어른들은 소의 형상 중 물강뼈를 파 버려서 소가 다리에 힘을 쓰지 못하게 된 탓으로 마을이 가난해졌다고들 한다. 또한 마을에는 소가 많이 죽은 ‘와우터'라는 곳도 있다. 또한 ‘달구지'라고 동네 어른들의 기억속에 남아있는 커다란 구멍이 있는데, 현재는 경지정리로 그 구멍이 메꾸어져 없어졌다. 동네 노인들이 어릴적만 해도 그 구멍은 메꾸려고 하면 할수록 마을에 변고가 생겨 못 메꾸었는데 경지정리로 자연스럽게 메꾸어졌다.
이에 대해 동네 어른들은 소구지는 바로 소가 여물을 먹는 구멍인데, 이곳이 현재는 막혀버린 꼴이니 여물을 먹지 못한 소가 힘이 없어 누실마을의 세력이 약해졌다고 말하고 있다. 마을의 민속으로는 농악놀이와 줄다리기가 있었다. 누실마을에는 농요가 발달되어 있다. 논과 밭을 매면서 부르기고 하고, 또는 쉬는 시간에 부르기도 하였는데, 한사람씩 돌아가면서 부르다가 만일 부르지 못할때는 ‘흙짐이오'하는 소리와 함께 벌로서 흙을 한 짐 등에 지도록 하였다.
마을에 남아있는 민간신앙은 산신불공, 조왕단지가 있다. 산신불공은 아들 낳기를 기원하며, 미륵산의 미륵바위에 가서 비는 것을 말한다.
자생조직으로는 위친계가 있다. 위친계는 1971년 조직되어 현재 참여인원은 25명에 이른다. 마을의 인구는 남자 247명, 여자 243명으로 총 490명이며, 총 면적은 1.19㎢로 전 0.03㎢, 답 0.68㎢, 임야 0.08㎢, 기타 0.10㎢가 해당된다. 총 가구수 91호중 농가는 86호에 해당되며, 비농가는 5호이며, 마을 사람들의 주소득원은 쌀농사이며, 특작물로 수박을 재배하고 있다. 성씨로는 순흥안씨 27호, 성주이씨 19호, 김해김씨 10호가 있다.
분각동(紛角洞) 마을 면소재지에서 서쪽으로 약 2㎞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분각동마을은 행정구역으로는 따로 분리되어 있으나, 이들의 생활풍습이나 민속, 공동체적인 모습들을 보면 한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뒤로는 봉황산이 펼쳐져 있고 마을 앞으로 분동은 가드락산이 버티고 있다.
각동(角洞)마을 청주한씨(淸州韓氏) 효정(孝鼎)은 충청도 아산에서 부친 필양(必讓)을 모시고, 15세에 부인 백씨와 혼인하여 슬하에 3남을 두고 육참봉에 봉직하다가, 1592년 임진왜란에 출전하여 격전 중 이충무공 진영인 남해노량진에서 순직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백씨부인은 세 아들 장남 걸(傑), 차남 속(續),삼남 환을 데리고 이충무공 진영을 찾아가 시신을 수습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남평 죽곡면에 이르자 전시중이라 길이 막혀 갈 수가 없었다.
당시 남평현감 한순(韓楯)의 권유로 부군의 시신을 와우곡(지금의 누실후등, 뒤에 각동후등으로 이장)에 매장한 백씨부인은 부군의 시신이 묻힌 와우곡 근처 각동에 터를 잡고 세 아들과 함께 정착하게 되었고, 여기서 임진왜란의 평정을 보게 되었다.
그러므로 청주한씨가 각동마을에 정착한 지 1592년 임진왜란부터 지금까지 4백년을 이어온 것이다. 한편 김해김씨는 김영록(金永錄)이 이 마을에 들어온 것으로 전해지나 확실한 연대는 추정할 수 없다. 마을의 자생조직으로는 1964년에 친목을 목적으로 조직된 위친계, 1975년 조직된 상부계, 1976년 조직된 부녀회가 있다.
마을의 기본현황은 총인구 108명중 남자 52명, 여자 56명이며, 총면적은 1.33㎢로 전 0.62㎢, 답 0.67㎢, 임야 0.04㎢가 해당된다. 총 가구수는 23호로 모두 농사를 짓고 있다. 마을 사람들의 주요 산업은 쌀농사이며, 특작물로는 무와 수박이 있다. 성씨로는 김해김씨 2호, 청주한씨 6호, 제주양씨 2호. 기타 13호가 있다. 마을의 민속으로는 동정제비와 당산제가 있다.
분동(粉洞)마을 이 마을은 1700년대말 제주양씨(濟州梁氏) 양예영(梁禮永)이 봉황면 욱곡리 반암(般岩)에서 살다가 아버지가 사망한 후, 이 마을로 이주하여 김해김씨의 딸을 맞아들여 정착하였다고 한다. 또 마을 뒷산에는 상당히 오래된 큰 소나무가 있는데 마을 사람들이 말하기를 양예영이 며느리를 맞아들인 후 심었다고 전한다.
마을의 지명유래는 앞서도 말했듯이 ‘와우'라는 명칭 아래 각동은 소의 뿔이라는 뜻으로 뿔각자의 ‘角', 마을동의 ‘洞'을 써서 각동이라하였다.
분동이라는 지명은 마을뒤에 있는 분통산에서 ‘분통'을 따와서 그 후 통을 ‘동'으로 바꾸어 ‘분동'으로 칭하고 있다. 이외 분동마을에는 옥녀봉, 어릿잔등, 떡고개, 베틀자리 등의 지명이 있다. 분·각동을 나누는 경계선의 역할을 하고 있는 마을회관은 1년에 한번씩 음력 2월초 하루날 정기적으로 마을총회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마을회관이 건립되기 전까지는 분?각동이 따로 자기 마을의 사랑방에서 1년에 한번씩 모여 품삯 등 마을일에 관해 토의하였다고 한다. 현재는 분·각동이 함께 마을회관에 모여서 1년간 품삯을 결정하고 이장 이외의 장을 선출하며, 1년간의 마을행사에 대해 계획을 세운다.
마을에는 1964년에 창립된 위친계와 1975년 조직된 상부계, 1976년 부녀친목을 위한 부녀회가 조직되었다. 마을의 총인구는 133명이며, 남자 64명, 여자 69명이며, 총 면적은 0.49㎢로, 전 0.12㎢, 답 0.27㎢, 임야 0.08㎢, 기타 0.02㎢이며, 농가는 21호, 비농가는 2호가 있다. 마을의 주요 산업은 쌀, 콩농사이며, 주소득원은 쌀농사이고, 수박, 무를 특작물로 재배하고 있는 실정이다. 마을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성씨로는, 제주양씨(濟州梁氏)가 8호, 김해김씨(金海金氏) 6호, 청주한씨(淸州韓氏) 4호, 기타 5호가 있다.
봉동(鳳洞) 마을 면소재지에서 북서쪽으로 약 2㎞지점에 위치한 봉동마을은 순흥안씨(順興安氏)가 주를 이루며 사는 대표적인 동족마을이다. 봉황산 밑에 2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봉동마을은 마을에 들어서면 꼭 한 집안 같은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마을의 형성은 순흥안씨(順興安氏) 안달득(安達得)이 누실에서 1810년경에 이 마을에 이주하여 정착함으로써 이루어졌는데 그가 무슨 연유로 누실에서 이곳 봉동으로 이거하였는지는 모르나 생활력이 무척 강하고 생각이 깊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언젠가 그의 어머니가 사망하자 명당자리를 한군데 봐두고는 묘를 3일이 멀다고 여기저기로 옮겨다녔다. 이를 지켜본 사람들은 그를 미쳤다고 손가락질하였다. 그리고 그가 최종적으로 맨 처음 봐 둔 명당자리로 어머니의 시신을 옮겼는데 땅주인도 그를 미친 사람 취급하여 왔던 터라 땅을 떼어줘서 그는 자기 어머니를 명당자리로 모셨다고 하니 이로 미루어 보아도 그는 생각이 남달리 깊은 사람임을 짐작할 수 있겠고, 풍수 지리에도 밝지 않았나 싶다. 그 후 안달득의 두 아들에게서 태어난 자식이 번창하여 지금은 순흥안씨가 주를 이루며 살고있다. 터를 잡을 당시에는 마을 입구에 묘가 있었는데 그 묘의 형국이 갈마음수라 하여 갈마리라 부르다가 입향조인 순흥안씨 안달득이 이주하여 정착하면서 봉황산 밑에 위치하고 있다 하여 봉동 또는 봉황동이라 바꾸어 불렀는데 그 이름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 주민들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자생조직으로는 1956년 조직된 상부계와 1830년에 창립된 돈제공파계와 1976년 조직된 부녀회가 운영되고 있다. 마을의 인구는 남자 58명, 여자 67명으로 총 125명에 이르며, 23가구 모두 농사를 짓고 있다.
한편 마을의 총 면적은 0.38㎢로, 전 0.11㎢, 답 0.18㎢, 임야 0.07㎢, 기타 0.02㎢가 해당된다. 마을 사람들의 주요산업은 쌀농사이고, 수박과 고추를 특작물로 재배하고 있다. 성씨로는 순흥안씨(順興安氏) 21호, 밀양박씨(密陽朴氏) 1호, 전주이씨(全州李氏) 1호가 거주하고 있다.
봉동마을 605번지에서는 50여년 전에 돌확과 옛날 솥이 나왔다. 그 솥을 보면 한자어의 ‘솥정(鼎)' 모양으로 발이 있는 것이어서 옛날의 제의기구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바로 봉동마을이 옛날 신앙적인 관행장소였을 가능성을 짐작케 해주고 있다. 이 유물은 아쉽게도 누군가의 손에 의해 팔려져 남아 있지 않다.
돈제공파계에서는 입향조(入鄕組)인 안달득을 위해 1930년에 서락당을 창건하였는데 옛날에 귀한 손님이 오면 서락당으로 모셔서 대접을 하였고, 학생들에게 한학을 가르치는 서당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또 섣달 그믐날이면 마을사람들이 서락당에 모여 웃어른께 세배를 드리고 정성껏 만든 음식을 서로 나눠 먹으며 운을 내서 글을 짓기도 하였던 곳이다.
현재 서락당의 관리는 돈제공파계에서 맡고 있으며, 이 유적과 관련하여 서락당지 (書樂堂誌)(1978)라는 책이 발간되기도 하였다.
잿등 와우리 총설에서 언급했듯이 잿등이 봉동마을에서 분리되어 따로 독립한 것은 최근의 일이어서 아직도 생활면에서 봉동과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봉동과 결부시켜 잿등을 살펴본다. 잿등이 형성된 것은 한국전쟁 이후의 일이었고 그 전에는 주막만 한 채 있어서 영산포장으로 시장을 내왕하는 사람들이 쉬어 가던 곳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여러 성씨가 들어와서 한곳에 모여 사는 것이 아니라 띄엄띄엄 독립해서 살기 시작하더니 그 호수가 늘어나자 스스로 봉동마을에서 분리해 나갔다. 잿등은 ‘비석거리'라고도 하는데 왜정시대부터 많은 비석이 길 양쪽에 세워져 있어 비석거리라고 불리웠으나 지금은 그 많은 비석이 면사무소와 남평향교로 옮겨지고 일제때 지주를 위해 소작인들이 세운 前主事 허공영규(許公永奎) 시혜불망비(施惠不忘碑) 와 금융조합 이사를 지낸 이사정공창연기념비(理事鄭公昌連紀念碑)만 남아 있다. 마을의 자랑거리는 나주의 명물인 나주배가 많이 생산되고 있다.
http://hwangto.invil.org/n_village/info/status/contents.jsp?con_no=1141682&page_no=1&sub_no=0
순흥안씨(順興安氏) 1파 참판공파24世
안달득(安達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