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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十九回 擒傅瑕厲公復國 殺子頹惠王反正
제19회: 부하(傅瑕)를 사로잡아 정여공은 복위하고, 왕자 퇴를 죽여 초혜왕이 왕위에 복귀하다
話說,齊桓公歸國,管仲奏曰:「東遷以來,莫強於鄭。鄭滅東虢而都之,前嵩後河,右洛左濟,虎牢之險,聞於天下,故在昔莊公恃之,以伐宋兼許,抗拒王師。今又與楚為黨。楚,僭國也,地大兵強,吞噬漢陽諸國,與周為敵。君若欲屏王室而霸諸侯,非攘楚不可;欲攘楚,必先得鄭。」桓公曰:「吾知鄭為中國之樞,久欲收之,恨無計耳!」甯戚進曰:「鄭公子突為君二載,祭足逐之而立子忽;高渠彌弒忽而立子亹;我先君殺子亹,祭足又立子儀。祭足以臣逐君,子儀以弟篡兄,犯分逆倫,皆當聲討。今子突在櫟,日謀襲鄭,況祭足已死,鄭國無人。主公命一將往櫟,送突入鄭,則突必懷主公之德,北面而朝齊矣。」
한편, 제환공이 귀국하니, 관중이 아뢰기를, “주나라가 동쪽의 낙읍으로 천도한 이래 정나라보다 강한 나라가 없습니다. 정나라가 동괵(東虢)을 멸하고 그곳을 도읍으로 삼았습니다. 신정성(新鄭城)의 앞에는 숭산(嵩山)이 있고, 뒤에는 황하가 흐릅니다. 오른쪽에는 낙수(洛水)요, 왼쪽에는 제수(濟水)가 있으며, 서북에는 호뢰관(虎牢關)이 있어 그 험함을 의지하여 천하의 형세를 살피고 있습니다. 지난날 정장공은 이것을 믿고 송나라를 치고 허나라를 병탄했을 뿐만 아니라 천자의 군사들에게 대항했습니다. 지금 또 정나라는 초나라와 한 무리가 되었습니다. 초나라는 참람하게 왕호를 칭하는 나라이며, 땅은 넓고 군사는 강해서 한수(漢水) 주변의 나라들을 삼키고, 주나라를 대적하고 있습니다. 주군께서 만약 왕실을 보호하고 제후들에게 패권을 행사하려면, 초나라를 물리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초나라를 물리치려면 반드시 정나라를 먼저 취해야 합니다.” 하니, 제환공이 말하기를, “나도 정나라가 중원의 가장 중요한 나라라는 것을 알고, 오래전부터 취하려고 하였으나 계책이 없어 한탄만 하고 있었습니다.” 했다. 영척이 앞으로 나와 말하기를, “정여공 돌(突)이 군주가 된 지 2년 만에 제족이 쫓아내고 소공 홀(忽)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고거미가 소공을 죽이고 공자 미를 세우자, 우리의 선군이신 제양공께서 공자 미와 고거미를 유인하여 그 죄를 물어 죽이셨습니다. 그러나 제족은 다시 공자 의(公子儀)를 세웠습니다. 제족은 신하로서 군주를 쫓아내고, 공자 의는 동생으로서 형의 자리를 찬탈하였으니, 제족은 분수를 범하고 공자의는 윤리에 어긋난 행위를 했습니다. 모두 마땅히 성토해야 합니다. 지금 여공 돌은 역성(櫟城)에 있어 날마다 정나라를 공격할 궁리를 하고 있습니다. 또한 제족이 이미 죽어서 정나라에는 국정을 맡을 사람이 없습니다. 주공께서 한 명의 장수를 역성으로 보내어 여공이 정나라 군주가 되게 하면, 여공은 반드시 주군께서 베푸신 은덕을 생각하여 북면(北面)하여 제나라를 받들 것입니다.” 했다.
桓公然之。遂命賓須無引兵車二百乘,屯於櫟城二十里之外。賓須無預遣人致齊侯之意。鄭厲公突先聞祭足死信,密差心腹到鄭國打聽消息。忽聞齊侯遣兵送己歸國,心中大喜,出城遠接,大排宴會。二人敘話間,鄭國差人已轉,回說:「祭仲已死,如今叔詹為上大夫。」賓須無曰:「叔詹何人?」鄭伯突曰:「治國之良,非將才也。」差人又稟:「鄭城有一奇事:南門之內,有一蛇長八尺,青頭黃尾;門外又有一蛇,長丈餘,紅頭綠尾;鬥於門闕之中,三日三夜,不分勝負。國人觀者如市,莫敢近之。後十七日,內蛇被外蛇咬死。外蛇竟奔入城,至太廟之中,忽然不見。」
환공은 그렇다고 생각하여, 빈수무에게 전차 2백 대를 이끌고 역성으로 가도록 명령하니, 빈수무가 역성 20리 밖에 주둔하고 사람을 정여공에게 보내어 제환공의 뜻을 전했다. 그때 정여공은 제족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심복을 비밀리에 정나라에 보내어 소식을 탐지하고 있었다. 갑자기 제환공이 군사를 보내 자기를 정나라에 들여보내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기쁜 마음에 성을 나와 멀리서 온 손님을 영접하고 잔치를 크게 열었다.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중에 정나라에 갔던 사람이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제중은 이미 죽고 지금은 숙첨(叔詹)이 상대부가 되었습니다.” 하니, 빈수무가 묻기를, “숙첨은 어떤 사람입니까?” 했다. 정여공 돌이 말하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좋은 신하이지, 장수의 재목은 아닙니다.” 했다. 정탐하고 돌아온 사람이 또 아뢰기를, “정나라 도성에 기이한 일이 있었는데 남문 안에는 길이가 팔 척이 넘고 푸른색 머리에 노란색 꼬리의 뱀이, 문밖에는 길이가 한 길이 넘고, 붉은 머리에 녹색 꼬리의 뱀이 나타나, 문루에서 3일 밤낮을 싸웠는데 승부가 나지 않았습니다. 나라 사람들이 그것을 보려고 시장처럼 모여들어 가까이 갈 수가 없었습니다. 17일이 지나서야 성안의 뱀이 성 밖의 뱀에게 물려서 죽었습니다. 성 밖의 뱀은 마침내 성안으로 들어와서는 태묘 안으로 들어가더니 갑자기 사라져 버렸습니다.” 했다.
須無欠身賀鄭伯曰:「君位定矣。」鄭伯突曰:「何以知之?」須無曰:「鄭國外蛇即君也,長丈餘,君居長也。內蛇子儀也,長八尺,弟也。十七日而內蛇被傷,外蛇入城者,君出亡以甲申之夏,今當辛丑之夏,恰十有七年矣。內蛇傷死,此子儀失位之兆;外蛇入於太廟,君主宗祀之徵也。我主方申大義於天下,將納君於正位,蛇鬥適當其時,殆天意乎!」鄭伯突曰:「誠如將軍之言,沒世不敢負德!」賓須無乃與鄭伯定計,夜襲大陵。
빈수무가 몸을 굽혀 정여공에게 경하하여 말하기를, “군주의 자리는 정해졌습니다.” 하니, 정여공 돌이 말하기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했다. 빈수무가 말하기를, “정나라의 성문 밖 뱀은 즉 군주입니다. 길이가 한 길이 넘으니 군주가 형님뻘입니다. 성안의 뱀은 공자 의(儀)입니다. 길이가 팔 척이니 동생입니다. 17일 만에 성안의 뱀이 상처를 입어 죽고 성 밖의 뱀이 성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은 군주께서 갑신(甲申)년 여름에 정나라를 떠났다가 지금 신축(辛丑)년 여름이 되었으니 그 동안이 17년간입니다. 성안의 뱀이 상처를 입고 죽었다는 것은 공자 의가 군주의 자리를 잃게 될 조짐이고, 성 밖의 뱀이 태묘에 들어갔다는 것은 군주께서 종사를 이을 조짐입니다. 우리 제나라의 군주께서 바야흐로 대의를 천하에 펴시고자 장차 군주를 정나라의 군주 자리에 올리려고 하시니, 뱀들이 싸울 때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거의 하늘의 뜻입니다.” 했다. 정여공 돌이 말하기를, “진실로 장군의 말대로만 된다면 대대로 이 은덕을 저버리지 않겠소.” 했다. 빈수무와 정여공이 곧 계책을 정하여 대릉성(大陵城)을 야습했다.
傅瑕率兵出戰,兩下交鋒,不虞賓須無繞出背後,先打破大陵,插了齊國旗號,傅瑕知力不敵,只得下車投降。鄭伯突銜傅瑕十七年相拒之恨,咬牙切齒,叱左右:「斬訖報來!」傅瑕大呼曰:「君不欲入鄭耶?何為殺我?」鄭伯突喚轉問之。傅瑕曰:「君若赦臣一命,臣願梟子儀之首。」鄭伯突曰:「汝有何策,能殺子儀?不過以甘言哄寡人,欲脫身歸鄭耳。」瑕曰:「當今鄭政皆叔詹所掌,臣與叔詹至厚。君能赦我,我潛入鄭國,與詹謀之,子儀之首,必獻於座下。」
부하(傅瑕)가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여 정여공의 군사들과 싸우는 틈을 이용해 빈수무가 후방으로 우회하여 대릉성을 먼저 공격하여 제나라 깃발을 꽂았다. 부하가 힘으로 당하지 못할 것을 알고 어쩔 수 없이 전차에서 내려 항복했다. 정여공은 부하가 17년 동안 자기를 항거해 온 원한을 품고, 이를 갈며 좌우에게 명하기를, “참한 뒤에 보고하라.” 고 했다. 부하가 크게 소리쳐서 말하기를, “군주께서는 정나라로 돌아가고 싶지 않으십니까? 어찌하여 저를 죽이려고 하십니까?” 했다. 정여공 돌이 다시 불러들여 물으니, 부하가 말하기를, “군주께서 만약 신의 목숨을 살려 주신다면 원컨대 신은 공자 의의 머리를 효수하겠습니다.” 했다. 정여공 돌이 말하기를, “너는 무슨 계책이 있기에 능히 공자 의를 죽일 수 있다고 하느냐? 감언으로 나를 속이고 몸을 빼내어 정나라로 돌아가려는 것이 아니냐?” 하니, 부하가 말하기를, “지금 정나라의 정사는 모두 숙첨이 장악하고 있습니다. 신과 숙첨은 아주 가깝게 지내는 사이입니다. 군주께서 만일 저를 용서하여 주시면 제가 정나라에 몰래 들어가서 숙첨과 계책을 궁리하여 공자 의의 머리를 반드시 폐하께 바치겠습니다.” 했다.
鄭伯突大罵:「老賊奸詐,焉敢誑吾?吾今放汝入城,汝將與叔詹起兵拒我矣。」賓須無曰:「瑕之妻孥見在大陵,可囚於櫟城為質。」傅瑕叩頭求哀:「如臣失信,誅臣妻子。」且指天日為誓。鄭伯突乃縱之。傅瑕至鄭,夜見叔詹。詹見瑕,大驚曰:「汝守大陵,何以至此?」瑕曰:「齊侯欲正鄭位,命大將賓須無統領大軍,送公子突歸國。大陵已失,瑕連夜逃命至此。齊兵旦晚當至,事在危急。子能斬儀之首,開城迎之,富貴可保,亦免生靈塗炭。轉禍為福,在此一時。不然,悔無及矣!」
정여공 돌이 크게 꾸짖기를, “늙은 도적이 간사하구나! 어찌 감히 나를 속이려고 하느냐? 내가 지금 너를 놓아주어서 성안으로 들여보낸다면 너는 숙첨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나에게 대항할 것이 아니냐?” 하니, 빈수무가 말하기를, “부하의 처자가 지금 대릉에 있으니 역성으로 잡아가 인질로 삼으십시오.” 했다. 부하가 머리를 조아리며 애걸하기를, “만일 신이 배신한다면 신의 처자를 죽이십시오!” 하고, 또 하늘의 해를 가리키며 맹세했다. 정여공 돌이 곧 그를 풀어 주었다. 부하가 정나라 도성으로 들어가 밤에 숙첨을 만났다. 숙첨이 부하를 보고 크게 놀라 말하기를, “그대는 대릉을 지키고 있어야 하거늘 어찌하여 여기에 왔소?” 했다. 부하가 말하기를, “제환공이 정나라의 군주 자리를 바로 잡고자 대장 빈수무를 명하여 대군을 거느리고 와서 공자 돌을 귀국시키려고 합니다. 대릉성이 이미 함락되어 제가 밤에 도망쳐서 여기에 왔습니다. 제나라 군사들이 조만간 당도할 것이니 일이 매우 위급하게 되었습니다. 대감께서는 공자 의의 머리를 베고 성문을 열어 공자 돌을 맞이하여 부귀를 보전하고 또한 백성을 도탄에서 구하십시오. 재앙을 돌려 복되게 하는 것이 바로 지금인즉 때를 놓치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했다.
詹聞言嘿然,良久曰:「吾向日原主迎立故君之議,為祭仲所阻。今祭仲物故,是天助故君。違天必有咎,但不知計將安出?」瑕曰:「可通信櫟城,令速進兵。子出城,偽為拒敵,子儀必臨城觀戰,吾覷便圖之。子引故君入城,大事定矣。」叔詹從其謀,密使人致書於突。傅瑕然後參見子儀,訴以齊兵助突,大陵失陷之事。子儀大驚曰:「孤當以重賂求救於楚,待楚兵到日,內外夾攻,齊兵可退。」叔詹故緩其事。過二日,尚未發使往,諜報:「櫟軍已至城下。」叔詹曰:「臣當引兵出戰。君同傅瑕登城固守。」子儀信以為然。
숙첨이 부하(傅瑕)의 말을 듣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참 있다가 말하기를, “내가 지난날 옛 주군을 모셔다가 군주로 세우자고 주장했지만, 제족에게 저지를 당했소. 이제 제족이 죽고 없으니 하늘이 옛 주군을 돕고 있다고 할 수 있소. 하늘의 뜻을 어긴다면 반드시 허물이 있을 것이나, 단지 어째야 좋을지 계책이 서지 않소.” 했다. 부하가 말하기를, “역성에 편지를 보내서 빨리 군사를 이끌고 진격하라 전하고 대감은 성 밖에 나가 거짓으로 적을 막는 척 하십시오. 그러면 공자 의가 반드시 성 위에 올라가 싸움하는 것을 볼 것이오. 내가 그때 형편을 보아 그를 죽이겠습니다. 대감이 옛 주군을 영접하여 성안으로 들어오시면 대사는 정해지는 것입니다.” 했다. 숙첨이 그 계책을 따라 몰래 사람을 시켜 편지를 공자 돌에게 보냈다. 부하가 그런 뒤에 공자 의를 뵙고, 제나라 군사들이 공자 돌을 도와 대릉성은 함락되었다고 아뢰었다. 공자 의가 크게 놀라 말하기를, “나는 마땅히 많은 뇌물로 초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고, 초나라 구원병이 당도하기를 기다려서, 안팎에서 협공한다면 제나라 군사들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오.” 했다. 그러나 숙첨은 일부러 일을 늦추며 이틀이 지나도록 사자를 초나라에 보내지 않았다. 첩자가 보고하기를, “역성의 군사들이 이미 성 밑에 이르렀습니다.” 하니, 숙첨이 말하기를, “신이 군사들을 이끌고 출전하겠습니다. 주군께서는 부하와 함께 성에 올라 굳게 지키십시오.” 했다. 공자 의가 믿고 숙첨의 말을 따랐다.
卻說鄭伯突引兵先到,叔詹略戰數合,賓須無引齊兵大進,叔詹回車便走。傅瑕從城上大叫曰:「鄭師敗矣!」子儀素無膽勇,便欲下城。瑕從後刺之,子儀死於城上。叔詹叫開城門,鄭伯同賓須無一同入城。傅瑕先往清宮,遇子儀二子,俱殺之。迎突復位。國人素附厲公,歡聲震地。厲公厚賄賓須無,約以冬十月親至齊庭乞盟。須無辭歸。厲公復位數日,人心大定。乃謂傅瑕曰:「汝守大陵,十有七年,力拒寡人,可謂忠於舊君矣。今貪生畏死,復為寡人而弒舊君,汝心不可測也!寡人當為子儀報仇!」喝令力士押出,斬於市曹。其妻孥姑赦弗誅。
한편, 정여공 돌이 군사들을 이끌고 먼저 도착하여 숙첨과 몇 합을 싸웠다. 빈수무가 제나라의 군사를 이끌고 크게 진격하니, 숙첨이 전차를 돌려 달아났다. 부하가 성 위에서 크게 외치기를, “정나라 군사가 패했다!” 하니, 원래 담력과 용기가 없는 자의가 문득 성에서 내려가려고 했다. 부하가 뒤를 따르면서 그를 찌르자 자의는 성 위에서 죽었다. 숙첨이 소리쳐 성문을 열게 하고, 정여공과 빈수무가 함께 성안으로 들어왔다. 부하가 먼저 궁을 깨끗이 하러 가는 중에 공자 의의 두 아들을 만나 그들을 모두 죽였다. 공자 돌을 맞이하여 정나라 군주의 자리에 오르게 하니, 정나라 사람들은 원래 정여공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 환호하는 소리가 땅을 진동시켰다. 정여공이 빈수무에게 후한 예물을 주고, 겨울 10월에 친히 제나라 궁에 가서 동맹을 청하기로 약속했다. 빈수무는 사례하고 제나라로 돌아갔다. 정여공이 복위한 지 며칠 만에 인심은 크게 안정이 되었다. 이에 부하를 불러 말하기를, “너는 대릉을 지킨 지 17년 동안에 전력으로 나를 가로막았으니, 가히 전날의 군주에게는 충신이라 할 만하다. 이번에 너는 살기를 탐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여 다시 과인을 위해 전날의 주군을 시해하였으니, 너의 마음은 가히 예측하지 못하겠다. 과인이 마땅히 공자 의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주어야 하겠다.” 하고, 장사들에게 소리쳐 부하를 묶어 저자에 끌고 나가서 참수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그 처자는 용서하여 죽이지 않았다.
髯翁有詩嘆云:「鄭突奸雄世所無,借人成事又行誅。傅瑕不愛須臾活,贏得忠名萬古呼。」原繁當先贊立子儀,恐其得罪,稱疾告老。厲公使人責之,乃自縊而死。厲公復治逐君之罪,殺公子閼。強鉏避於叔詹之家,叔詹為之求生,乃免死,刖其足。公父定叔出奔衛國。後三年,厲公召而復之,曰:「不可使共叔無後也!」祭足已死勿論。叔詹仍為正卿,堵叔師叔並為大夫,鄭人謂之「三良」。再說齊桓公知鄭伯突已復國,衛曹二國,去冬亦曾請盟,欲大合諸侯,刑牲定約。管仲曰:「君新舉霸事,必以簡便為政。」
염옹이 시를 지어 탄식하기를, “정여공 돌은 세상에 둘도 없는 간웅인데, 남의 힘을 빌려 복위하고 다시 그 사람을 죽였다. 부하가 그처럼 짧은 삶을 탐하지 않았더라면, 충성스러운 이름이 만고에 전해졌을 것을” 했다. 전날에 공자 의를 세우자고 주장했던 원번(原繁)은 죄를 얻을까 두려워하여, 병들고 늙었다고 물러가니, 정여공이 사람을 보내 꾸짖자 원번은 스스로 목을 매달아 죽었다. 정여공은 다시 군주를 쫓아낸 죄를 물어 공자 알을 죽였다. (제족을 도와 옹규를 죽였던) 강서(强鉏)가 숙첨의 집에 피했는데, 숙첨이 정여공에게 강서의 목숨을 살려 달라고 빌었다. 이에 죽음을 면하고 발굼치를 잘랐다. 공보 정숙(公父定叔)은 위나라로 도망쳤다가, 3년이 지나자 정여공이 불러서 다시 벼슬을 주고, 말하기를, “어찌 내가 공숙(共叔)님의 후사를 끊어지게 할 수 있겠는가?” 했다. 제족은 이미 죽어 그 죄를 논하지 않았다. 숙첨은 옛날처럼 정경(正卿)이 되고, 도숙(堵叔)과 사숙(師叔)은 대부가 되었다. 정나라 사람들은 이 세 사람을 삼량(三良)이라 불렀다. 한편, 제환공은 정여공 돌을 정나라의 군주 자리에 올리고, 지난겨울에 또한 회맹에 참석하겠다고 통고해온 위(衛)나라, 조(曹)나라를 포함하여 제후들을 크게 규합하여 희생을 잡아 회맹할 약속을 잡았다. 관중이 말하기를, “주군께서 새로이 패업을 세웠으니, 반드시 그 절차를 간편하게 하십시오.” 했다.
桓公曰:「簡便如何?」管仲曰:「陳、蔡、邾自北杏之後,事齊不貳。曹伯雖未會,已同伐宋之舉。此四國,不必再煩奔走。惟宋衛未嘗與會,且當一見。俟諸國齊心,方舉盟約可也。」言未畢,忽傳報:「周王再遣單蔑報宋之聘,已至衛國。」管仲曰:「宋可成矣。衛居道路之中,君當親至衛地為會,以親諸侯。」桓公乃約宋、衛、鄭三國,會於鄄地。連單子齊侯,共是五位,不用歃血,揖讓而散。諸侯大悅。齊侯知人心悅從,乃大合宋、魯、陳、衛、鄭、許諸國於幽地,歃血為盟,始定盟主之號。此周釐王三年之冬也。
제환공이 말하기를, “어떻게 간편하게 해야 합니까?” 하니, 관중이 말하기를, “진(陳)나라, 채(蔡)나라, 주(邾)나라는 북행(北杏)의 회합 이후 제나라를 섬기기를 한결같이 해왔습니다. 조(曹)나라 군주도 또한 비록 회맹에 참가하지 않았지만, 이미 송나라를 정벌하는데 함께 했습니다. 이 네 나라를 다시 불러 번거롭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로지 송나라과 위나라만이 아직 회합에 참가하지 않았으므로 마땅히 한번 만나서 여러 나라가 한마음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맹약을 하는 게 좋습니다.” 했다.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보고하기를, “주왕께서 다시 선멸(單蔑)을 보내어 송나라가 왕실에 사신을 보내어 예를 표했다는 사실을 우리 제나라에 알리기 위해 이미 위나라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했다. 관중이 말하기를, “송나라와 동맹이 이루어졌습니다. (單蔑이) 위나라를 지나고 있다고 하니, 주군께서는 마땅히 친히 위나라 땅에 가서 회합하여 제후들과 친해지십시오.” 했다. 제환공은 송나라, 위나라, 정나라 3국에 사자를 보내어 위나라의 견(鄄) 땅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다. 이리하여 선자(單子)와 제환공은 세 나라의 군주들과 회동하여 입술에 피를 바르는 의식을 생략하고 서로 인사만으로 의식을 대신한 후 헤어졌다. 제후들이 크게 기뻐했다. 제환공은 사람들이 마음으로 기쁘게 따르는 것을 알고, 곧 송나라, 노나라, 진(陳)나라, 위(衛)나라, 정나라. 허나라 등의 제후들을 크게 규합하여 유(幽) 땅에 모이게 하고 피를 입술에 바르고 회맹하여, 비로소 맹주의 칭호를 받았다. 이때가 주리왕 3년(기원전 678년) 겨울이었다.
卻說,楚文正熊貲,自得息媯立為夫人,寵幸無比。三年之內,生下二子,長曰熊囏,次曰熊惲。息媯雖在楚宮三載,從不與楚王說話。楚王怪之。一日,問其不言之故。息媯垂淚不答。楚王固請言之,對曰:「吾一婦人而事二夫,縱不能守節而死,又何面目向人言語乎?」言訖淚下不止。胡曾先生有詩云:「息亡身入楚王家,回看春風一面花。感舊不言常掩淚,祇應翻恨有容華。」楚王曰:「此皆蔡獻舞之故,孤當為夫人報此仇也,夫人勿憂。」乃興兵伐蔡,入其郛。蔡侯獻舞肉袒伏罪,盡出其庫藏寶玉以賂楚,楚師方退。
한편, 초문왕 웅자(熊貲)는 스스로 식규(息媯)를 부인으로 삼고 사랑하기를 더없이 하였다. 3년 동안에 아들 둘을 낳아 장남은 웅간(熊囏)라 하고 차남은 웅운(熊惲)이라고 하였다. 식규가 비록 초나라 궁중에 3년을 있었지만, 지금까지 초왕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초왕이 괴이하게 생각하던 중 하루는 식규에게 어찌하여 말을 하지 않는 까닭을 물었다. 식규가 눈물을 흘리면서 대답을 하지 않았다. 초왕이 계속해서 재촉하자 식규가 대답하기를, “저는 여자의 몸으로 두 지아비를 섬겼으니 비록 절개를 위해 죽진 못했을망정 또 무슨 면목으로 사람을 대해서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을 끝내자 눈물을 끝없이 흘렸다. 호증(胡曾)선생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식나라가 망하자 몸은 초나라 왕궁으로 끌려와, 되돌아보니 봄바람에 나부끼는 한 송이 꽃이로다! 옛날 생각에 말없이 항상 눈물을 흘리니, 부귀영화로 가슴속 한을 어찌 풀 수 있겠는가?” 했다. 초문왕이 말하기를, “이것은 모두가 채나라 군주 헌무(獻舞) 때문이오. 내가 부인을 위하여 원수를 갚아 주겠으니 너무 슬퍼하지 마시오.” 했다. 이에 초문왕은 군사를 일으켜 채나라를 쳐서 부(郛) 땅으로 들어갔다. 채나라 군주 헌무가 웃통을 벗고 땅에 엎드려 죄를 청하며 채나라 부고에 있던 보옥들을 초왕에게 바치니, 초나라 군사가 물러갔다.
適鄭伯突遣使告復國於楚。楚王曰:「突復位二年,乃始告孤,慢孤甚矣。」復興兵伐鄭。鄭謝罪請成,楚王許之。周釐王四年,鄭伯突畏楚,不敢朝齊。齊桓公使人讓之。鄭伯使上卿叔詹如齊,謂桓公曰:「敝邑困於楚兵,早夜城守,未獲息肩,是以未修歲事。君若能以威加楚,寡君敢不朝夕立於齊庭乎?」桓公惡其不遜,囚詹於軍府。詹視隙逃回鄭國。自是鄭背齊事楚。不在話下。再說,周釐王在位五年崩。子閬立,是為惠王。惠王之二年,楚文王熊貲淫暴無政,喜於用兵。先年,曾與巴君同伐申國,而驚擾巴師。巴君怒,遂襲那處,克之。
그때 마침 정여공 돌(突)이 사자를 보내어 복위하였음을 초나라에 알려왔다. 초문왕이 말하기를, “돌(突)이 복위한 지 2년인데 이제야 나에게 알리니 나를 업신여기는 것이 심하구나.” 하고, 다시 군사를 일으켜 정나라를 쳤다. 정나라가 사죄하고 화친을 청하니 초문왕이 허락했다. 주리왕 4년(기원전 678년)에 정여공 돌이 초나라를 두려워하여 제나라에 감히 조현(朝見)을 행하지 못했다. 제환공이 사자를 보내 꾸짖자 정여공이 상경 숙첨을 제나라에 사자로 보내어 제환공에게 말하기를, “저희 정나라는 초나라 위세에 짓눌려서 밤낮 성을 지키는 데 여념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저희가 상국에 조현을 들이지 못했습니다. 군주께서 만약 위엄으로서 초나라를 물리쳐 주신다면 저희 군주가 어찌 감히 제나라 조정에 입조하지 않겠습니까?” 했다. 제환공은 그 불손함을 미워하여 숙첨을 군부에 가두었다. 숙첨이 틈을 보아 도망쳐서 정나라로 돌아왔다. 이때부터 정나라는 제나라에 등을 돌리고 초나라를 받들기 시작한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한편, 주리왕은 재위 5년 만에 죽고 그 아들 랑(閬)이 그 뒤를 이었다. 이가 주혜왕(周惠王)이다. 혜왕 2년에 초문왕 웅자(熊貲)가 황음에 빠져 정사를 팽개치고 전쟁만을 좋아했다. 지난해에 파(巴)나라의 군주와 함께 신(申)나라를 쳤는데, 그 원정 도중에 초나라 군사의 잔인함이 파나라의 군사들을 놀라 소란을 피우게 했다. 파(巴)나라 군주가 노하여 나처(那處)를 습격해서 점령했다.
守將閻敖游涌水而遁。楚王殺閻敖。閻氏之族怨王。至是,約巴人伐楚,願為內應。巴兵伐楚,楚王親將迎之,大戰於津。不隄防閻族數百人,假作楚軍,混入陣中,竟來跟尋楚王。楚軍大亂,巴兵乘之,遂大敗楚。楚王面頰中箭而奔。巴君不敢追逐,收兵回國,閻氏之族從之,遂為巴人。楚王回至方城,夜叩城門。鬻拳在門內問曰:「君得勝乎?」楚王曰:「敗矣!」鬻拳曰:「自先王以來,楚兵戰無不勝。巴,小國也,王自將而見敗,寧不為人笑乎?今黃不朝楚,若伐黃而勝,猶可自解。」遂閉門不納。
나처(那處)를 지키던 장수 염오(閻敖)가 수채구멍으로 빠져나와 헤엄을 쳐서 달아났다. 초문왕이 염오를 죽이니, 염씨 종족들이 초문왕을 원망했다. 이에 파나라 사람이 초나라를 치면 염씨 종족들이 내응하기로 약속하였다. 파나라 군사들이 초나라를 치자 초문왕이 친히 그들을 맞이하여 진(津)에서 크게 싸웠다. 그러나 염씨 종족 수백 인이 초군으로 가장하여 진중으로 침입하여 초왕을 찾아다니는 것을 막지 못했다. 초나라 군사가 혼란에 빠지자 파나라 군사들이 그 틈을 이용하여 마침내 초나라를 크게 물리쳤다. 초왕은 얼굴에 화살을 맞고 도망쳤다. 파나라 군주는 감히 추격하지 못하고 군사를 거두어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염씨 종족들도 그들을 따라가서 마침내 파나라 사람이 되었다. 초문왕이 성으로 돌아와 밤에 성문을 두드리니, 육권이 성문 안에서 묻기를, “주군께서는 싸움에서 이기셨습니까?” 하니, 초문왕이 말하기를, “졌소!” 했다. 육권이 말하기를, “선왕 때부터 초나라 군사들은 싸움을 하면 이기지 않을 때가 없었습니다. 파나라는 작은 나라인데, 왕께서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서 졌으니 어찌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지금 황(黃)나라가 우리나라에 조공을 바치지 않으니 만약 황나라를 쳐서 이긴다면 이 비웃음을 면할 수 있습니다.” 하고, 끝내 성문을 닫고 초문왕을 성안으로 들이지 않았다.
楚王憤然謂軍士曰:「此行再不勝,寡人不歸矣!」乃移兵伐黃。王親鼓,士卒死戰,敗黃師於踖陵。是夜,宿於營中,夢息侯怒氣勃勃而前曰:「孤何罪而見殺?又占吾疆土,淫吾妻室,吾已請於上帝矣!」乃以手批楚王之頰。楚王大叫一聲。醒來箭瘡迸裂,血流不止。急傳令回軍,至於湫地,夜半而薨。鬻拳迎喪歸葬。長子熊囏嗣立。鬻拳曰:「吾犯王二次,縱王不加誅,吾敢偷生乎?吾將從王於地下!」乃謂家人曰:「我死,必葬我於絰皇,使子孫知我守門也。」遂自剄而死。熊囏憐之,使其子孫,世為大閽。
초문왕이 분연히 군사들에게 말하기를, “이번에 가서 다시 이기지 못하면 나는 결코 살아 돌아오지 않으리라!” 하고, 즉시 군사를 이끌고 황나라를 쳤다. 왕이 친히 북을 두드리자 군사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 황나라 군사들을 적릉(踖陵)에서 무찔렀다. 그날 밤 초문왕이 군영에서 잠을 자는데 꿈에 식나라 군주가 성을 잔뜩 내어 앞에 와서 말하기를, “내가 무슨 죄가 있다고 죽였느냐? 그리고 내 나라를 빼앗고, 또한 내 처를 범했으니 내가 이미 상제께 청하였다!” 했다. 이에 손바닥으로 초문왕의 얼굴을 때렸다. 초문왕이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꿈에서 깨어났으나 화살에 맞은 상처가 터지면서 흐르는 피가 멈추지 않았다. 초문왕이 급히 명령을 내려 회군하도록 했다. 초문왕은 추(湫) 땅에 이르러 밤중에 죽었다. 육권이 초문왕의 영구를 맞이하여 장례를 치르고 장자 웅간을 초왕에 세웠다. 육권이 말하기를, “나는 왕을 두 번이나 범했다. 왕께서 나를 죽이지 않았다고 해서 어찌 내가 감히 목숨에 연연하여 살아 있을 수 있겠는가? 나는 지하에 계시는 왕을 따르고자 한다.” 하고, 집안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거든 반드시 질황(絰皇)이라는 곳에 장사지내서 자손들이 내가 초나라의 성문을 지켰음을 알게 하라!” 했다. 마침내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초왕 웅간(熊艱)이 그를 가엾게 여겨 자손을 대대로 대혼(大閽 ; 성문지기)으로 삼았다.
先儒左氏稱鬻拳為愛君,史官有詩駁之,曰:「諫主如何敢用兵?閉門不納亦堪驚。若將此事稱忠愛,亂賊紛紛盡借名。」鄭厲公聞楚文王凶信,大喜曰:「吾無憂矣!」叔詹進曰:「臣聞『依人者危,臣人者辱。』今立國於齊楚之間,不辱即危,非長計也。先君桓武及莊,三世為王朝卿士,是以冠冕列國,征服諸侯。今新王嗣統,聞虢晉二國朝王,王為之饗醴命宥,又賜玉五瑴,馬三匹。君不若朝貢於周,若賴王之寵,以修先世卿士之業,雖有大國,不足畏也。」厲公曰:「善。」乃遣大夫師叔如周請朝。師叔回報:「周室大亂。」
옛 선비 좌구명(佐丘明)이 <좌씨춘추(左氏春秋)>에서 육권은 군주를 사랑한 신하라고 칭찬했다. 그러나 후세의 사관이 시를 지어 논박하기를, “임금에게 간하는데 감히 용병을 강요할 수 있었던가? 성문을 닫고 들이지 않으니 또한 놀랄 일이 아닌가? 만약 이런 일이 충성스럽고 군주를 사랑하는 일이라면, 난신적자들은 어지러이 그의 이름을 들먹일 것이다.” 했다. 정여공은 초문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나의 근심거리가 없어졌구나!” 했다. 숙첨(叔詹)이 앞으로 나와 말하기를, “신이 듣기에 ‘남에게 의지하면 위태롭고 남의 신하가 되면 굴욕을 당한다’ 라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 정나라는 제나라와 초나라 사이에 끼어 있기 때문에 욕됨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위태로우니, 이것은 장구한 계책이 아닙니다. 선군인 환공(桓公), 무공(武公), 장공(莊公)은 3대에 걸쳐 주왕실의 경사가 되어 면류관을 쓰고 열국의 제후들을 정벌하셨습니다. 지금 주왕실에는 신왕이 왕통을 계승하였고, 괵(虢)나라와 진(晉)나라가 입조하자 신왕은 그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고 또한 옥 다섯 쌍과 말 세 필을 하사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주군께서도 주나라에 조공을 바쳐 주왕의 총애를 받게 된다면 다시 선군들이 가졌던 경사의 직을 맡을 수 있으니, 비록 대국이 우리나라를 위협해도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정여공이 말하기를, “좋은 생각이오.” 하고, 대부 사숙을 주나라에 보내어 알현하도록 하였다. 사숙이 주나라에서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주나라 왕실에는 큰 난리가 났습니다.” 했다.
厲公問:「亂形如何?」對曰:「昔周莊王嬖妾姚姬,謂之王姚,生子頹,莊王愛之,使大夫蒍國為之師傅。子頹性好牛,嘗養牛數百,親自餵養,飼以五穀,被以文繡,謂之『文獸』。凡有出入,僕從皆乘牛而行,踐踏無忌。又陰結大夫蒍國、邊伯、子禽、祝跪、詹父,往來甚密。釐王之世,未嘗禁止。今新王即位,子頹恃在叔行,驕橫益甚。新王惡之,乃裁抑其黨,奪子禽、祝跪、詹父之田。新王又因築苑囿於宮側,蒍國有圃,邊伯有室,皆近王宮,王俱取之,以廣其囿。又膳夫石速進膳不精,王怒,革其祿,石速亦憾王。
정여공이 묻기를, “무슨 난리가 일어났소?” 하니, 사숙이 대답하기를, “옛날에 주장왕이 도희(姚姬)라는 여자를 총애하였는데 사람들은 그녀를 왕요(王姚)라고 불렀습니다. 왕요는 퇴(頹)라는 아들을 낳아 주장왕이 사랑했습니다. 주장왕은 대부 위국(蔿國)을 퇴의 사부로 삼았는데, 왕자 퇴는 성품이 소를 좋아하여 일찍이 소 수백 마리를 길렀습니다. 친히 오곡을 먹이고 수놓은 비단옷을 입혀 문수(文獸)라고 불렀습니다. 출입할 때는 항상 종자들을 데리고 모두 소를 타고 다니며 전답을 마구 밟았습니다. 또한 대부 위국(蒍國), 변백(辺伯), 자금(子禽), 축궤(祝跪), 첨보(詹父) 등과 왕래를 긴밀히 했습니다. 주리왕의 재위 시에도 이들을 막지 못했습니다. 지금의 신왕이 즉위하자 왕자 퇴는 자기가 신왕의 숙부 항렬임을 믿고 더욱 교만 횡포해졌습니다. 이에 신왕은 그를 미워하여 그의 일당들을 억누르고자 자금, 축궤, 첨보의 전답을 빼앗았습니다. 신왕은 또 왕궁 옆에 새로운 동산을 쌓기 위해서 왕궁 곁에 있던 위국의 밭과 변백의 집을 몰수하고 왕실의 동산을 넓혔습니다. 또한 궁중의 요리사 석속(石速)이란 자의 요리가 맛이 없다고 왕이 화를 내고 그 녹봉을 줄이니, 석속 역시 왕에게 원한을 품게 되었습니다.
故五大夫同石速作亂,奉子頹為君以攻王。賴周公忌父同召伯廖等死力拒敵,眾人不能取勝,乃出奔於蘇。先周武王時,蘇忿生為王司寇有功,謂之蘇公,授以南陽之田為采地。忿生死,其子孫為狄所制,乃叛王而事狄,又不繳還采地於周。桓王八年,乃以蘇子之田,畀我先君莊公,易我近周之田。於是蘇子與周嫌隙益深。衛侯朔惡周之立黔牟,亦有夙怨,蘇子因奉子頹奔衛,同衛侯帥師伐王城。周公忌父戰敗,同召伯廖等奉王出奔於鄢。五大夫等尊子頹為王,人心不服。君若興兵納王,此萬世之功也。」
그래서 다섯 대부와 석속이 난을 일으켜 왕자 퇴를 왕으로 받들고 신왕을 공격했습니다. 주공 기보(忌父)와 소백(召伯) 요(廖)가 죽을힘을 다해 막았기 때문에, 다섯 대부와 석속 무리가 이기지 못하고 소(蘇)로 달아났습니다. 옛날 주나라 무왕 때에 소분생(蘇忿生)이 사구(司寇)의 직을 맡아 공을 세워서 소공(蘇公)이라 불리었고 남양(南陽)에 있던 땅을 채읍으로 받았습니다. 소분생이 죽고 그 자손이 오랑캐에게 견제되어 왕을 배반하고 오랑캐를 섬기면서도 채읍을 주나라에 반환하지 않았습니다. 주환왕 8년에 소(蘇)의 군주는 그 채읍을 우리 정나라 선군이신 정장공에게 주고, 주나라와 가까이 있던 우리 정나라 땅과 교환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에 소의 군주와 주나라 왕실은 미워하는 골이 더욱 깊어졌습니다. 위혜공 삭은 주나라가 부마인 검모(黔牟)를 보내 위나라 군주 자리에 앉혔던 일을 미워하여 역시 묵은 원한을 품고 있었습니다. 소의 군주가 왕자 퇴를 모시고 위나라로 들어가서, 위혜공 삭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주나라 왕성으로 쳐들어갔습니다. 주공 기보가 싸움에 패하여 소백 요(廖) 등과 함께 왕을 모시고 언(鄢) 땅으로 달아났습니다. 다섯 대부 등이 왕자 퇴를 받들어 왕으로 세웠으나, 민심이 따르지 않고 있습니다. 주군께서 만약 군사를 일으켜 주왕을 모셔서 다시 환궁하게 하면, 만세에 빛나는 공을 세우게 될 것입니다.” 했다.
厲公曰:「善。雖然,子頹懦弱,所恃者衛燕之眾耳,五大夫無能為也。寡人再使人以理諭之,若悔禍反正,免動干戈,豈不美哉?」一面使人如鄢迎王,暫幸櫟邑。因厲公向居櫟十七年,宮室齊整故也。一面使人致書於王子頹。書曰: 「突聞以臣犯君,謂之不忠;以弟奸兄,謂之不順。不忠不順,天殃及之!王子誤聽奸臣之計,放逐其君,若能悔禍之延,奉迎天子,束身歸罪,不失富貴。不然,退處一隅,比於藩服,猶可謝天下之口。惟王子速圖之!」子頹得書,猶豫未決。
정여공이 말하기를, “좋소. 비록 그러하나 왕자 퇴는 유약하니 믿는 것은 위나라와 연나라의 군사들 뿐이고 다섯 대부는 무능하오. 과인이 다시 사자를 보내 이치로 타일러서, 만약 뉘우치고 왕을 다시 모셔간다면 군사를 움직일 것이 없으니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소?” 했다. 한편으로 언(鄢) 땅으로 사자를 보내어 왕을 영접하여 역읍에 잠깐 가 있게 하였다. 역읍은 정여공이 지난 17년간 머물던 곳이라 궁실은 비교적 잘 정비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왕자 퇴에게 사자를 보내 편지를 전달하게 하였다. 편지에 이르기를, “이 돌(突)이 듣기에 ‘신하의 신분으로서 임금을 범한 자는 불충이라 하고, 형제로서 그 형을 범한 자는 불순이다’라고 했습니다. 불충불순(不忠不順)한 사람은 하늘에서 재앙을 내립니다. 왕자의 신분으로서 간신의 계책을 듣고 그 군주를 추방하였으니, 만일 후회하고 재앙을 두려워한다면 천자를 모셔가서 몸을 굽혀 사죄하면 부귀를 잃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고 한다면, 어느 변방 구석진 곳에 물러가서 오랑캐의 복식을 입고 살아도 오히려 천하의 사람들로부터 감사하다는 말을 들을 것입니다. 오로지 왕자께서는 빨리 도모하십시오.” 했다. 왕자 퇴가 편지를 받아 읽어보았으나, 망설이고 결정하지 못했다.
五大夫曰:「騎虎者勢不能復下。豈有尊居萬乘,而復退居臣位者?此鄭伯欺人之語,不可聽之。」頹遂逐出鄭使。鄭厲公乃朝王於櫟,遂奉王襲入成周,取傳國寶器,復還櫟城。時惠王三年也。是冬,鄭厲公遣人約會西虢公,同起義兵納王。虢公許之。惠王四年之春,鄭虢二君,會兵於弭。夏四月,同伐王城。鄭厲公親率兵攻南門,虢公率兵攻北門。蒍國忙叩宮門,來見子頹。子頹因飼牛未畢,不即相見。蒍國曰:「事急矣!」乃假傳子頹之命,使邊伯、子禽、祝跪、詹父登陴守禦。
다섯 대부가 말하기를, “호랑이 등에 탄 사람은 다시 내려올 수 없습니다. 어찌 만승의 존귀한 신분으로 있다가 다시 물러나서 신하의 자리에 설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정여공이 사람을 속이려고 하는 말이니 듣지 마십시오.” 했다. 왕자 퇴가 마침내 정나라 사자를 쫓아냈다. 정여공이 역성에 있는 왕을 찾아뵙고 즉시 왕명을 받들어 성주(왕성)을 기습하여 주왕실에 전해 내려오는 보물들을 탈취하여 다시 역성으로 돌아왔다. 그때가 혜왕 3년(기원전 674년)이었다. 그해 겨울 정여공이 사자를 서괵공(西虢公)에게 보내 회합을 약속하고, 함께 군사를 일으켜 주왕을 복위시키자고 하니, 괵공이 허락했다. 혜왕 4년 봄에 정여공과 괵공이 군사를 이끌고 미(弭) 땅에서 만나서, 그해 여름 4월에 함께 왕성을 공격했다. 정려공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왕성의 남문을 공격하자 괵공은 군사를 거느리고 북문을 공격했다. 위국이 당황하여 궁문을 두드려 왕자 퇴를 만나려고 했으나, 왕자 퇴는 그때 마침 소에게 먹이를 주는 일이 끝나지 않아서 곧바로 만날 수가 없었다. 위국이 말하기를, “일이 매우 급하다!” 하고, 왕자 퇴의 명령이라고 속여 변백, 자금, 축궤, 첨보로 하여금 성루에 올라가서 쳐들어오는 군사들을 막게 하였다.
周人不順子頹,聞王至,歡聲如雷,爭開城門迎接。蒍國方草國書,謀遣人往衛求救。書未寫就,聞鐘鼓之聲,人報「舊王已入城坐朝矣!」蒍國自刎而死。祝跪子禽死於亂軍之中。邊伯詹父被周人綁縛獻功。子頹出奔西門,使石速押文牛為前隊,牛體肥行遲,悉為追兵所獲,與邊伯詹父一同斬首。髯翁有詩嘆子頹之愚云:「挾寵橫行意未休,私交乘舋起奸謀。一年南面成何事?只合關門去飼牛。」又一詩說齊桓公既稱盟主,合倡義納王,不應讓之鄭虢也。詩云:「天子蒙塵九廟羞,紛紛鄭虢效忠謀。如何仲父無遺策,卻讓當時第一籌?」
주나라 백성들이 왕자 퇴에게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혜왕이 돌아왔다는 소리를 듣고 모두 천둥소리같이 환호성을 지르며 다투어 성문을 열고 맞이하였다. 위국이 국서를 써서 위나라에 보내 구원병을 요청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국서를 다 쓰기도 전에 종소리와 북소리가 밖에서 나더니 사람이 보고하기를, “전왕이 이미 성안으로 들어와 조당의 왕좌에 앉았습니다.” 했다. 위국이 스스로 목을 찔러서 죽었다. 축궤와 자금은 난군 중에서 죽고, 변백과 첨보는 주나라 백성들에게 사로잡혀 묶여서 주왕 앞에 바쳐졌다. 그러나 왕자 퇴는 석속을 시켜 비단옷을 입힌 소를 앞세우고 서문을 통해 달아났으나, 소가 살이 쪄서 잘 걷지 못해서 추격하는 군사들에게 사로잡혀와 변백과 첨부와 함께 참수되었다. 염옹이 시를 지어 왕자 퇴의 어리석음을 말하기를, “총애를 믿고 맘대로 굴기를 그치지 않았고, 사사로운 도당을 결성하여 간사한 꾀를 냈도다! 일 년 남짓 왕 노릇에 무슨 일을 했던고? 단지 관문 밖에서 소나 기르는 것이 마땅했겠지.” 했다. 또 하나의 시는 제환공이 이미 맹주가 되었으니 의병을 일으켜 천자를 복위시켜야 했음에도, 정여공과 괵공에게 공을 양보한 것을 비난하여 이르기를, “천자가 몽진하게 된 것은 왕실의 크나큰 수치인데, 정과 괵이 분주히 충성스러운 계책을 세웠다. 어찌하여 관중은 계책도 세우지 않고, 당시의 제일가는 공을 남에게 양보하였는가?” 했다.
惠王復位,賞鄭虎牢以東之地,及后之鞶鑒。賞西虢公以酒泉之邑,及酒爵數器。二君謝恩而歸。鄭厲公於路得疾,歸國而薨。群臣奉世子捷即位,是為文公。周惠王五年,陳宣公疑公子禦寇謀叛,殺之。公子完,字敬仲,乃厲公之子,與禦寇相善,懼誅奔齊,齊桓公拜為工正。一日,桓公就敬仲家飲酒甚樂。天色已晚,索燭盡歡。敬仲辭曰:「臣止卜晝,未卜夜,不敢繼以燭也。」桓公曰:「敬仲有禮哉!」贊嘆而去。桓公以敬仲為賢,使食於田,是為田氏之祖。是年魯莊公為圖婚之事,會齊大夫高傒於防地。
주혜왕이 복위하여 정여공에게 호뢰(虎牢) 동쪽 땅을 상으로 주고, 이어 반감(鞶鑒 ; 혁대에 거울을 장식한 것)을 하사했다. 서괵공에게는 주천(酒泉) 고을을 상으로 내리고 술잔 몇 개를 하사했다. 두 나라의 군주가 감사의 말을 올리고 자기 나라에 돌아갔다. 정려공은 돌아오던 길에 병이 들어 정나라에 도착하여 죽었다. 정나라 신하들이 세자 첩(捷)을 받들어 그 뒤를 잇게 하였다. 이가 정문공(鄭文公)이다. 주혜왕 5년(기원전 672년)에 진선공(陳宣公) 저구(杵臼)는 공자 어구(御寇)가 모반했다고 의심하여 죽였다. 공자 완(公子完)은 자가 경중(敬仲)으로 진여공의 아들인데 어구와 친했으므로 목숨에 위협을 느껴 제나라로 도망쳤다. 제환공이 그를 공정(工正 ; 공조정랑)에 임명했다. 하루는 제환공이 진완(陳完)의 집에서 술을 마시며 매우 즐거워하다가 날이 저물자 촛불을 밝히고 즐거움을 다하려고 하였다. 경중(진완)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신은 다만 낮 동안만 주공을 모실 수 있을 뿐이지 밤 동안은 모실 수 없습니다. 감히 촛불을 켜고 계속 마실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제환공이 말하기를, “경중은 과연 예의가 있구나!” 하고, 감탄하며 돌아갔다. 환공은 경중이 어질다고 생각하여 식읍으로 전(田) 땅을 주었다. 그래서 전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해에 노장공은 혼사를 위해 제나라 대부 고혜(高傒)와 방(防)땅에서 만났다.
卻說,魯夫人文姜,自齊襄公變後,日夜哀痛想憶,遂得嗽疾。內侍進莒醫察脈。文姜久曠之後,慾心難制,遂留莒醫飲食,與之私通。後莒醫回國,文姜託言就醫,兩次如莒,館於莒醫之家。莒醫復薦人以自代,文姜老而愈淫,然終以不及襄公為恨。周惠王四年秋七月,文姜病愈劇,遂薨於魯之別寢。臨終謂莊公曰:「齊女今長成十八歲矣。汝當速娶,以正六宮之位。萬勿拘終喪之制,使我九泉之下,懸念不了。」又曰:「齊方圖伯,汝謹事之,勿替世好。」言訖而逝。莊公喪葬如常禮。遵依遺命,其年便欲議婚。
한편, 노환공의 부인 문강은 제양공이 변을 당하여 죽은 후로 매일 밤 애통해하며 생각하다가 해수병에 걸렸다. 내시가 거(莒)나라 출신의 의원을 들여보내 진맥을 보게 했다. 문강이 오랫동안 남자에 굶주린 뒤라 음욕을 참지 못하고 마침내 거나라 의원을 궁에 머물게 하여 식사를 같이하고 그와 정을 통했다. 후에 거나라 의원이 자기 나라에 돌아가자 문강이 병을 치료하러 간다는 핑계를 대고 두 번이나 거나라에 가서 의원의 집에 묵었다. 거나라 의원이 다시 자기를 대신할 사람을 들여보냈다. 문강은 늙을수록 더욱 음탕해졌으나 끝내 양공에 미치지 못함을 한탄하였다. 주혜왕 4년(기원전 673년) 가을 7월에 문강은 해수병의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마침내 노나라 별궁에서 죽었다. 문강이 임종을 앞두고 노장공에게 말하기를, “너와 약혼한 제나라 여자가 지금 장성하여 18세가 되었다. 너는 마땅히 빨리 맞이하여 육궁의 자리를 바르게 하여라. 상이 끝나야 혼인을 할 수 있다는 법도에 얽매이지 말고, 내가 구천에서 근심하지 않게 해라.” 하고 또 말하기를, “제나라는 바야흐로 패업을 도모하고 있으니 너는 삼가 그를 섬기고, 대대로 내려오는 우호에 어긋남이 없게 해라!” 하고 말을 마치자 숨을 거두었다. 노장공은 예법대로 문강을 장사지내고, 유언에 따라 그해에 혼인을 의논하려 했다.
大夫曹劌曰:「大喪在殯,未可驟也。請俟三年喪畢行之。」莊公曰:「吾母命我矣。乘凶則驟,終喪則遲,酌其中可也。」遂以期年之後,與高傒申訂前約,請自如齊,行納幣之禮。齊桓公亦以魯喪未終,請緩其期。直至惠王七年,其議始定,以秋為吉。時莊公在位二十四年,年已三十有七歲矣。意欲取悅齊女,凡事極其奢侈。又念父桓公薨於齊國,今復娶齊女,心終不安,乃重建桓宮,丹其楹,刻其桷,欲以媚亡者之靈。大夫御孫切諫,不聽。是夏,莊公如齊親迎。至秋八月,姜氏至魯,立為夫人,是為哀姜。
대부 조귀(曹劌)가 말하기를, “친모가 돌아가신 대상 중에는 혼인을 치를 수 없습니다. 3년 상을 치른 후에 혼인하셔야 합니다.” 하니, 노장공이 말하기를, “모친께서 나에게 당부하셨는데 상중에 하면 너무 빠르고 상을 끝내고 하면 너무 늦소. 그 중간쯤에 하는 것이 좋지 않겠소?” 하고, 마침내 일 년 후에 제나라 대부 고혜와 만나서 전에 한 약속을 고쳐 친히 제나라에 가서 납폐의 예를 올리기를 청했다. 제환공 역시 노나라의 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하여 그 혼인의 시기를 늦추도록 했다. 그래서 주혜왕 7년에 이르러서야 혼사에 관한 의논이 비로소 정해져서 그해 가을의 길일을 잡아 혼례를 올리게 되었다. 그때 노장공은 군주 자리에 오른 지가 24년 되어, 나이가 이미 37세였다. 제나라 여자를 부인으로 맞이하게 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한 노장공은 혼사의 모든 것을 사치스럽게 하였으나, 그의 부친 노환공이 제나라에서 죽은 것을 생각하고, 오늘 다시 제나라의 여인을 부인으로 맞이하게 된 것을 마음속으로 불안하게 여겼다. 그래서 노환공의 신위를 모신 환궁(桓宮)을 다시 짓고 기둥에 단청을 칠하고 서까래를 조각하여 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로하려고 했다. 대부 어손(御孫)이 불가함을 간하였으나 노장공은 듣지 않았다. 그해 여름 장공이 제나라에 가서 신부를 맞이하여, 8월에 이르러 강씨가 노나라에 도착하여 부인으로 삼았다. 이가 애강(哀姜)이다.
大夫宗婦,行見小君之禮,一概用幣。御孫私嘆曰:「男贄大者玉帛,小者禽鳥,以章物采。女贄不過榛栗棗脩,以告虔也。今男女同贄,是無別也。男女之別,國之大節,而由夫人亂之,其不終乎?」自姜氏歸魯後,齊魯之好愈固矣。齊桓公復同魯莊公合兵伐徐,伐戎,徐戎俱臣服於齊。鄭文公見齊勢愈大,恐其侵伐,遂遺使請盟。
노나라 대부들의 부인이, 애강을 제후의 아내를 뵙는 예절로 뵈었으며 모두 폐백을 올렸다. 어손이 홀로 탄식하기를, “남자는 큰 예물이 옥과 비단이며, 작은 것이 날짐승이고 기물의 문채를 드러냈다. 여자는 예물이 개암, 밤, 대추 및 육포에 지나지 않았고 공경하는 뜻을 표했다. 오늘 남녀가 같이 물품으로 행하는 폐백은 분별이 없는 짓이다. 남녀가 유별함은 나라의 커다란 절조인데 군주의 부인으로 말미암아 법도가 어지럽혀졌으니 그 끝이 좋지 않을 것인가?” 했다. 강씨가 노나라에 시집온 후부터 제나라와 노나라의 우호 관계는 더욱 견고해졌다. 제환공은 다시 노장공과 함께 군사를 합쳐 서(徐)나라와 융(戎)을 정벌하였다. 서나라와 융은 모두 제나라에 신하로 복종하였다. 정문공은 제나라의 세력이 더욱 커지는 것을 보고, 제나라의 침략을 걱정하여 마침내 사자를 보내어 회맹하기를 청했다.
不知後事如何,且看下回分解。
뒷일이 어찌 될지 모르겠구나. 다음 회를 보면 풀릴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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