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를 바르게 읽자 -⑥- 배씨 성과 경주(慶州).
[편집자주]: 신라 6성(姓)의 한 성인 우리 배(裵)씨 성이 근래에 와서, 본관을 ‘경주배가’로 통일해야 한다고, 야단이다. 2천년의 유장한 역사를 가진 성씨(姓氏)이며, 10여 본(本)의 다른 뿌리(根源)와 역사를 갖고 있는 동성이관(同姓異貫)의 종족(宗族)인데, 2천년이 흘러간 시점에서, ‘경주배가’로 통일해야 한다, 고 한다. 도대체 무슨 변고(變故)인가? 관향(貫鄕)은 본관(本貫)의 고향이다. 성산배씨의 관향은 ‘星山’이고, 분성배씨의 관향은 ‘盆城’이며, 흥해배씨의 관향은 ‘興海’이며, 경주배씨의 관향은 ‘慶州’이다. 어떻게, 천 수백 년이나 이어온 전통을, 역사와 사실에 근거가 빈약한, 특정지명(慶州)으로 통합(통일)할 수 있는가? 발상부터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옛부터 근본을 훼손하는 역관(易貫)이나, 개관(改貫)은 종사의 패덕(悖德)으로 규율(規律)하고 있음은 전회에서 전술한바 있다.
- 본관(本貫)의 사전적 정의는, 【본관(本貫)은 성관(姓貫)의 고향이다. 관향(貫鄕)·본적(本籍)·관적(貫籍)·선향(先鄕)·본(本)이라고도 한다. 사람들은 대개 혈연·지연에 매여 살고 있는데, 성이 부계(父系)의 연결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본관(本貫)은 그 조상의 거주지를 나타낸 것이다. 그러므로 성과 본관이 동일해야 같은 혈연(血緣)으로 볼 수 있다】고 백과사전에서 정의하고 있다.
▶ 먼저, ‘경주’라는 지명의 역사(沿革)부터 살펴보자. <경주시 자료 참조>
~ 현재의 지명(地名) ‘경주’(慶州)는,
▪ 기원 전 100년대에는, 고대 사로(斯盧)의 6촌(村)이었고,
▪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출생한 기원 전 69년에도, 역시 사로(斯盧)였다.
▪ 기원 전 57년에는, 박혁거세가 나라를 건국하여, 국호를 서라벌(徐那伐)이라 했다. 그 후,
▪ 서기 32년(유리왕 9)에는, 6촌(村)을 6부(部)로 이름을 바꾸고, 이(李),정(鄭),최(崔),손(孫),배(裵),설(薛)의 6성을 사성(賜姓)하였다.
▪ 서기 65년(탈해왕 9)에는, 국호를 계림(鷄林)으로 고쳤고,
▪ 서기 307년(기림왕 10)에, 국호를 다시 신라(新羅)로 바꾸었다. 그 후,
▪ 서기 935년(경순왕 9)에, 신라가 고려에 항복을 하자, 고려태조 왕건(王建)은, 신라를 “경주”(慶州)로 이름을 바꾸고, 김부(金傅:경순왕)를 ‘경주사심관’(慶州事審官)으로 삼았다.
<이때부터 “경주”(慶州)라는 지명(地名)이 시작 되었다.>
▪ 서기 940년에는, 대도독부로 승격했다가,
▪ 서기 987년에, 동경(東京)으로 바꾸고, 유수(留守)를 두어 영동도(嶺東道)에 속했다.
▪ 서기 1012년에, 경주방어사로 강등되었으며,
▪ 서기 1015년에,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로 개칭했다가,
▪ 서기 1031년에, 동경(東京)으로 환원했다.
<이때 흥해(興海)·수성(壽城)·영주(永州:永川) 등의 속군과 안강(安康)·자인(慈仁)·하양(河陽)·연일(延日)·해안(解顔)·기계(杞溪)·장기(張鬐)등의 속현이 있었다.>
▪ 서기 1202년에, 경주야별초의 반란으로 지경주사(知慶州事)로 강등되었다가,
▪ 서기 1219년에, 동경으로 다시 환원되었다.
▪ 서기 1308년에, 계림부(鷄林府)로 바뀌었다가,
▪ 서기 1413년에, 다시 경주(慶州)로 정해졌다.
▪ 서기 1895년에, 지방관제 개편으로 군(郡)으로 바뀌어 대구부(大邱府)관할이 되었다가,
▪ 서기 1896년에, 경상북도(慶尙北道)에 속했다.
▪ 서기 1955년에, 경주읍과 내동면 전역, 천북면과 내남면 일부가 통합되어 경주시(慶州市)로 승격했으며, 경주군은 월성군으로 개칭되었다.
▪ 서기 1989년에는, 다시 월성군이 경주군으로 개칭되었다.
▪ 서기 1995년에, 지방자치선거를 앞두고 실시된 전국행정구역개편으로 경주군과 통합되어 경주시(慶州市)라는 하나의 도농통합시를 이루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한편, 배(裵)씨 성의 선계(先系) 조상들이 행신하시던 시대는,
▪ 배(裵)씨의 조상(祖上) 지타(祗沱:금산가리촌장)공의 시대인, 기원 전 100년대는 고대 진한 땅의 사로(斯盧)였고,
▪ 배(裵)씨 성을 사성(賜姓)받은 서기 32년에는, 서라벌(徐那伐)이었다.
▪ 무열공 배현경(裵玄慶:初名 白玉衫)이 탄생한 서기 874년에는, 신라(新羅)였으며,
▪ 무열공 배현경(裵玄慶)의 연세가 62세가 되는 서기 935년에, 신라가 멸망하였고, 신라는 고려 태조로부터 ‘경주’(慶州)로 명명(命名)되며, 새로운 ‘경주’(慶州)가 탄생하게 된다.
<참고: ‘경주’는 무열공의 졸년(卒年:936)보다는 1년 앞서(935) 생긴 새로운 이름이다. 한편, 배현경은 初名이 白玉衫으로 황해도 태백산록(太白山鹿)에서 서기 874년에 출생하여, 44세가 되는 918년에 고려 태조로부터 ‘경주배씨’로 사성.관 받았다고 ‘배씨종사보감’ 등에 기록되어 있다.>
~ 이상에서 배(裵)성의 선계(先系)는 ‘경주’라는 지명(地名)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다.
- 위에서 살펴본바, 배(裵)성의 사성은 서기 32년이고, ‘경주’라는 지명은 서기 935년에 탄생되어 그 간격이 무려 903년간이다. 903년 전에 사성 받은 배씨 성의 고향이, 903년 후에 생(生)긴 ‘경주’(慶州)다는 논리는 심각한 모순이며, 역사와도 합치하지 않는다. 한편, 배씨의 본관 중에서는, 고려 개국 초에 배현경에게 ‘경주배씨’를 사관(賜貫)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배현경은 2중으로 배씨 성을 사성 받으므로 혈통에 의문이 있으며, 公의 후사 또한 실전되어 역사에 전해지지 못하였고, 경주배씨의 기록도 역사에서 더 이상 전해지지 않는다.
- 한편, 조선 명종조(明宗朝)에 배충과(裵忠果:1474~1553)공이 의술(醫術)에 능하여 빈민을 구제하고 생명을 구한 덕행이 조정에 알려져, 의서습독관(醫書習讀官)에 제수되었으며, 경주처사(慶州處士)로 호(號)가 내려졌고, 1553년(명종 8)에 졸(卒)하여, 묘소가 경주시 충효동 송화산 산 28번지 옥녀봉아래에 있다. 그 자손들이 處士(忠果)공을 시조(始祖)로 하여 본관을 ‘경주’로 정한 “慶州裵氏” 一門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20여 세대(世代)를 계대승손(繼代承孫)하고 있다. 이런 역사 현실을, 1764년의 갑신보(甲申譜)는, 처사(忠果)공의 ‘경주배씨’ 실체(實體)는 도외시(度外視)하고, ‘경주배씨대족보’라 이름한 위보(僞譜)를 만들었고, 역사에도 반(反)하고, 상식에도 반(反)하는 ‘갑신보 경주배씨’가 배씨 성의 정통이라고 현혹(眩惑)하여 왔다.
- 전국의 배씨 후손이시여!! 한번 생각해 봅시다. 천 수 백년의 세월과 함께 누대(累代)에 걸쳐, “성산배씨” “분성배씨” “흥해배씨” 등으로, 종통(宗統)을 잘 지켜온 종문(宗門)들이 역사와 순리를 거역하고, ‘경주배씨’로 역관(易貫)하는 수모를 감내 해야 하는가? 지금까지 지성(至誠)으로 모셔온 선영(先塋)의 금석문(金石文:묘갈 등)을 ‘경주배가’로 바꿔야 하고, ‘경주배가’로 족보도 고치고, ‘경주배가’로 호적도 바꿔라고 자손들에게 거짓교육을 시키란 말인가? 또, 자식들의 혼서(婚書)도 ‘경주배가’로 쓰고, 출생신고도 ‘경주배가’로 해서 돌연변이(突然變異) 후손들을 마구 출현시키란 말 인가?
- 왜! 그래야만 하는가?
- 누구를 위해서 인가?
- 위조족보 갑신보 세력에 들러리를 서자는 것인가? 기가 막힌다.
~ 40만 배(裵)씨 후손들은 왜! 침묵만 하는가? 이것이 배씨 성의 정체성 변고가 아닌가?
~ 지난 수십 년간, 배씨 종사의 중심에서 왜곡된 사관(史觀)으로 혹세무민(惑世巫民)해온, 사이비 세력들은, 양심에서 우러나는 진솔한 설명을 하십시오. 그 토록 ‘경주배씨’로의 통합이 정의(正義)라면, 이제는 공론의 장(場)으로 나오십시오. 그래서 자신들의 지론인 <관향도 통일해야 되는 이유>와, <계통(系統)도 다시 세워야, 배씨의 위상이 제고 된다>는 해괴한 논리의 진정성을 40만 종인 앞에 분명하게 설명하십시오. 그리고 검증 받으십시오.
끝으로, 우리 배(裵)성과 역사와 배경이 같은, 신라 6성의 이(李).정(鄭).최(崔).손(孫).설(薛)씨 등 다섯 성씨는, 갑신보와 같은 위조족보(僞造族譜)를 만든 역사도 없고, 관향을 경주(慶州)로 통일하지도 않았어도, 문벌(門閥)이 크게 성장하였고, 대성(大姓)으로써 긍지를 누리고 있음을, 우리는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 한다. 역사의 진실은, 일부의 못난 후손들이 어떤? 물리력으로 잠시 흔들 수는 있을지라도, 영원히 없앨 수는 없는 불멸의 진리라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⑦편으로 계속. 다음은 배씨 성의 족보(族譜)>
2010. 11. 18. 우강 배재기(星山大譜編輯實務委員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