蘭의 향기 속에서
개암 김동출
올해 1월 초순 어느 아침이었다. 거실에 나가 성모상 옆의 난(蘭) 분을 살펴보다 깜짝 놀라 아내까지 불렀다. 튼튼한 잎새 밑에서 검 자색 꽃대 하나가 난석을 헤치고 보란 듯 수줍게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일 년 넘게 자식처럼 정성 들여 키운 보람이요 환희의 순간이었다. 그날부터 이른 아침부터 거실에 클래식 음악까지 틀어놓고 눈도장을 찍는 관심 가운데 여린 꽃대는 조그만 곁가지 7개를 달고 점점 키를 키우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꼭 보름쯤 되었을까? 한 뼘 넘게 자란 꽃대의 곁가지 끝에 맺은 자색 꽃망울을 터뜨리며 은은한 향기를 품어내자 우리 부부는 날마다 기쁨 속에 아이처럼 설날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이번 설날을 전후하여 아름다운 향기로 우리 가족을 행복하게 만들어 준 난은 재작년 가을에 들여와 우리 부부와 함께 살게 된 반려 식물 ‘대명 보세(난)’이다. 그즈음 화자는 장기입원으로 얻은 섬망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 차츰 정신이 안정되고 기초체력도 좋아지자 소일거리로 다시 반려 식물을 키워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시내 외곽지역에 있는 대형 K 식물원에 가서 관엽식물 2종과 함께 대명보세’를 들여와 여태껏 키워온 보람을 얻게 되었으니 너무 기뻤다.
어릴 때 할아버지 따라 참나무 군락지였던 선산을 오르다 처음으로 춘란을 보게 되었다. 양지바른 낙엽 더미 아래 새파란 식물이 저마다 아름다운 꽃잎을 달고 은은한 향기를 피우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이 귀한 춘란인 줄도 모르고 신기한 마음에 뿌리째 캐와서 깨진 넓은 오지그릇에 심었다. 얼마 후 꽃이 지고 나면 앞마당 감나무 아래에다 아무렇게 옮겨 심어놓고 물을 주었더니 해마다 봄이 되면 꽃을 피웠다. 이일을 계기로 고등학교 3년 동안 나의 취미는 오로지 꽃밭 가꾸기가 되었다. 영산홍, 동백, 목련, 라일락 등 귀한 묘목을 가져다 초등학교 때 교육감 표창 부상으로 받은 호두나무 아래 정성껏 심어가자 몇 년 후 나의 생가는 꽃밭 천지가 되어 봄이면 동네 사람들의 휴식처가 되었다.
1976년 교육대학 졸업 후 생가에 머물면서 발령을 기다렸던 기간에 話者는 소중한 경험을 하였다. 지루했던 그 시절에 꽃집 개업을 준비하는 고등학교 선배 J형에게 신비디움 계통의 동양 난을 공부하면서 지루함을 달랬다. 지금은 씨가 말랐지만, 그 시절만 해도 내 고향 바닷가 외진 곳에는 석란과 풍란 등 야생 난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날씨가 청명한 봄·가을날에 자생란의 군락지인 ‘지심도’ ‘양지암’ ’서이말등대’ ‘해금강’ ‘대금산’ 일대를 자주 답사하였다. 늦가을에는 거제도에만 자생하는 희귀식물을 찾아다니면서 씨받기까지 하였다.
그 후 결혼하고 고향을 떠나와 교직 생활하면서 동양란을 접하게 되었다. 봄이면 종종 값비싼 동양란을 팔러 오는 보따리 난 장수가 있었다. 그때 난을 좋아하는 선배님 따라 난을 사서 베란다에다 분을 만들어놓고 퇴근 후에는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며 휴식하였다. 그러나 좁은 베란다에서 생육 조건이 까다로운 난을 키우기란 물리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직사광선을 피하려고 대나무 발로 햇볕과 습도를 조절하려고 애썼으나 비싸게 사들인 난들은 기대와 달리 시들시들하다 말라 죽어 나갔다. 그런데도 나의 애란愛蘭 극성은 멈출 수가 없었다. 뒤늦게 승진하면서 선물 받은 난을 교직원들에게 분양하고 남은 몇 분을 집으로 가져와 키워보기로 하였다. 분무기와 영양제와 소독제도 구입하고 분갈이를 위한 도구도 새로 장만하기도 하였으나 그 꿈은 몇 년을 넘기지 못했다. 보듬어 키워야 할 화자가 2019년 정년퇴직한 그해 여름에 심장이식 대기 환자가 되어 장기간 서울 A 종합병원에 입원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바람에 관리에 애로를 느낀 아들이 지인들에게 모두 분양해 버렸다. 퇴원하여 귀가해 보니 ‘못난 소나무 고향 선산 지킨다’라는 말처럼 나의 무관심에 밀려 구석 차지였던 목마른 관음죽만 텅 빈 거실에 홀로 앉아 주인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즈음 마침 나의 퇴원 소식을 들은 친구가 거금을 들여 다육식물 10여 종을 택배로 보내주어 정성을 쏟아가며 키워보았지만, 입양한 지 6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모두 녹아들고 말았다. 참담한 실패였다. 애초부터 베란다가 없는 우리 집에서 다육식물은 키우기는 무리수였다. 재작년 가을쯤 환자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 차츰 심신이 안정되자 반려 식물을 키워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단골 화원에 가서 아내가 좋아하는 관엽식물 2종과 ‘대명보세’ 한 분도 들여와 자식 돌보듯 키웠다.
話者가 별스럽게 난을 좋아하는 이유는 어릴 적 춘란을 키우며 받은 영감과 함께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아름다운 난을 감상할 때 얻게 되는 정신적 정화와 안정감과 편안함’ 때문이다. 안중근 의사는 그의 자서전에서 「대개 천지간 만물 가운데서 혼魂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생장하는 초목의 생혼生魂이요, 둘째는 지각할 수 있는 금수의 각혼覺魂이고 셋째는 사람의 영혼이 있다.」 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식물애호가들의 마음을 헤아려 볼 수 있다. 그들은 특정한 식물을 아기 돌보듯 정성 들여 키우는 은연중에 인간과 다를 바 없이 성장하며 꽃을 피우고 열매나 뿌리로 대를 이어가려는 식물의 생혼을 느끼면서 생명의 소중함을 깨달았을 것이다. 요즈음 화자는 날마다 난 향기 속에서 행복하다. 1년 동안 자식같이 키워온 일명 금화산金華山으로 부르는‘ 대명보세’ 란이 자색의 은은한 향기를 피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날부터 밝히기 곤란한 근심 걱정이 하나둘 사라져 버렸다. 난의 꽃이 피기 시작할 무렵 봄방학으로 내려온 동업자 똑순이 여식의 도움으로 진행한 주택연금 신청 결과가 10여 일 뒤 난 꽃이 절정에 있을 때 확정 통보를 받았으니, 이것 또한 난의 향기가 가져다준 행운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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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년 동안 반려 식물 키우기가 인기 있는 추세다. 특히 은퇴한 노인 세대에게 치유와 요양, 집중력 향상에 도움에 되기에 반려 식물 키우기를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싶다. 식물을 가꾸는 활동은 정신 건강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우울증, 불안, 치매 등의 증상을 가진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노인이나 젊은이들 모두 이러한 이유로 반려 식물을 키우는 것을 즐기는 생활 방식이 자리 잡고 있다. 반려 식물도 사람들에게 반려동물과 마찬가지로 정서적 안정과 삶의 질을 향상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래전 초임지에서 만난 동료 교사 L 선생님 모습이 떠오른다. 예술을 지극히 사랑한 그분은 정서가 남달랐다. 대학에 출강하며 작곡을 가르쳤던 그 남자 선생님은 담임한 어린이들에게 「꽃처럼 살자」라고 가르치며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였다. 2024년 올 한해는 세상 모든 사람이 꽃처럼 환하게 웃으며 웃음꽃 피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 2024-0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