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이 몇만 년, 몇천 년 지나도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다고 하는 것도,
이러한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 실정이기 때문입니다.
이 이유도, 저 세상에서의 훈련,
조화의 마음을 잊고,
자기 보존, 자아 아욕으로 나날을 보내고,
자기의 마음의 마(魔)에 지배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마(魔)란 무엇인가.---
그것은 미혹입니다.
육체가 모든 것이라고 하는 사고방식입니다.
지(知)와 의(意)로 세상사가 대부분 편협되어 있기때문에,
인간은 살아있는 동안이 최고이고,
죽으면 끝이라고 하는 육체 의식이 강하게 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또 병에 걸리면 괴롭다.
죽은 사람과는 대화를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기껏해야 꿈속에서 만나는 것이 고작이다.
그러나 남을 도왔을 때는 확실히 기분이 좋다.
반대의 경우는 기분이 나쁘다.
적당히, 큰 일없이 살아가면
그것으로 좋다고 하는 사람이 대부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러한 것으로부터,
인간은 중요한 마음을 잊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집착,
자기 보존이라고 하는,
신의 자식에 반(反)한 마(魔)의 노예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 그 원인은 번뇌이다.
번뇌는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의
육근이 근원이다.
육근의 조화는
항상 중도를 근본으로 해서
자기의 올바른 마음에 묻는 것이며,
자기자신의 올바른 마음에 묻는 것은 반성으로서,
반성의 마음은
자기자신의 혼이 정화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사람은 갖가지의 생활의 과정에서,
이른바 덧없는 세상의 무정함, 가련함,
슬픔에 직면하고, 일상생활에서 반성을 찾는 기회에,
대개 조우(遭遇)하도록 짜여 있습니다.
친한 사람과의 사별(死別). 사회적 모순, 건강문제,
어떻게도 되지 않는 운명의 장난, 살기 위한 허무한 노력. 등.....
그 인생의 어딘가의 시점에서,
반드시, 한 번이나 두 번. 아니. 몇 번, 수도 없이.
멈추어 서서, 자신을 되돌아보는 기회를 만나는 것입니다.
이때가 말하자면, 전세(前世)에서 배운 것에의 향수인 것입니다.
노스탤지어입니다.
인간은 무엇 때문에 태어나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죽음이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어떤 사람이라도 가슴을 스칩니다.
가슴을 스칠 때,
그 사람이, 만약, 이제까지의 잘못된 삶의 방식에서
정신적인 방향을 찾아내어, 올바르게 살려고 원하면,
그 사람은, 저 세상에서 배운 것의 몇 퍼센트인가를,
현실에 살리는 것이 되지요.
그 반대로, 그것은 그것, 이것은 이것이라고 딱잘라 결론지어,
육체적인 감각만을 다시 쫓아간다면,
그 사람은, 저 세상으로 돌아갔을 때에,
태어날 때의 약속을 파기한 것이니까,
다시 한번, 천년, 이천 년, 저세상에서 수행을 다시 합니다.
그렇게 해서, 이 세상에 태어날 때는,
전세와 똑같은 상황 아래서, 생활을 하고,
그 사람이 약속을 깨닫지 않는 한,
같은 운명을, 2번, 3번이나 반복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전(前)의 세상에서 부자로 태어나,
돈에 고통받지 않는 일생을 보냈으나,
부자이기 때문에 남을 깔보고,
자만심이나, 우아한 생활에 길들어,
곤란한 사람들을 구한 것이 없다고 하면,
부자라는 환경 속에서 자신의 혼을 향상시키는 것이 없었으니까.
다시 한번, 그러한 환경에 자기 자신을 두고, 자신을 직시하게 됩니다.
일견, 이러한 생활은 편해서 좋은 것같이 보이는데,
저 세상으로 돌아가고부터가 큰일입니다.
마음은 교만함으로 거들먹거리고,
그 위에, 우아한 생활에 너무 익숙해졌기 때문에,
우선 교만한 인간이 모인 에고의 세계로 갑니다.
에고의 세계에 마음의 평안은 없습니다.
동류(同類)가 모인 세계이니까,
'내가' '내가'라고 하는 싸움의 와중에 말려들어,
오른쪽을 봐도, 왼쪽을 향해도 적들 뿐.
부자인데도 불구하고 남에게 베푸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돈에 집착하고, 아귀계라고 하는 세계가 전개됩니다.
지상계와 달라서 자기가 말하는 것을 듣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무엇을 하더라도 혼자입니다.
남의 돈을 훔치더라도 자기가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아한 생활로 완력은 약한 몸이기 때문에,
패배의 쓰라림을 오랜 기간, 경험하게 됩니다.
이 지상계는 테스트하는 수행의 장이므로,
부자이든, 가난한 자이든, 그러한 환경 속에서,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움직여, 어떤 행위를 해갈까가 문제이며,
이러한 환경에 지고, 혹은 그것에 휩쓸려 버린 경우는,
그 테스트에 패스하지 못한 것이니까.
다시 한번, 그러한 환경을 선택해서 자신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만큼 본인에게 있어서, 가혹한 운명은 없습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업(業)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트교에서는, 원죄에 해당합니다.
업(業)도 원죄(原罪)도, 인간의 마음속에 사는 마(魔)입니다.
마(魔)의 작용입니다.
그 마(魔)가 인간으로 하여금,
저세상에서 배운 것이랑 목적을 잊어버리게 하고,
오관의 의한 육근에 휘둘리는 원인을 만들고 있습니다.
마(魔)란 자기 본위의 감정입니다. 자아아욕입니다.
예를 들면, '돈은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좋다'
라는 자연스러운 감정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필요 이상으로 선동합니다.
"만약 그대가, 고개 숙여 엎드려 나에게 절을 하면,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화를 그대에게 주리라"
하자 예수는
" 악마여 물러가라..."
하고 일갈합니다.
악마는 예수의 강한 신념에 눌려서 달아납니다.
이 대목은, 성서 속에 쓰여 있습니다.
예수와 같은 신의 사자에게도,
그 마음속에, 악마는 숨어 있던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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