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교 5일장
전남 보성군 벌교는 교통 요지다. 2번·15번·27번 국도와 경전선 철로가 모두 벌교를 통과한다. 밀물 때 벌교철교 아래 포구에서 배를 타면 일대 섬과 갯마을로 쉽게 갈 수 있다. 보성과 순천을 연결할 뿐 아니라, 고흥반도 사람들이 바깥으로 나가려면 반드시 벌교를 거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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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남 벌교시장 안 고흥상회에서 내놓은 참꼬막. 뻘(개흙)이 덕지덕지 묻어 있다.‘ 머드팩’을 하는 것만 같다. / 조선영상미디어 유창우 기자 canyou@chosun.com
이런 지리적 혜택 덕분에 벌교는 일제시대부터 상업이 번창했다. 그때부터 벌교5일장은 전남 동부에서 첫손 꼽힐 정도로 규모가 큰 5일장이었다. 이제는 쇠락한 대부분의 5일장과 달리, 지금도 활기가 넘친다. 장날이면 꼭두새벽부터 기차와 버스를 타고 온 장꾼들이 기차역과 버스터미널에 쏟아진다. 벌교장은 4와 9가 들어가는 날짜에 열린다. 벌교는 물론이고 순천 고흥 승주 낙안 화순 보성에서 몰려든 촌로(村老)들이 직접 들에서 농사짓거나 갯벌에서 채취한 농수산물이 넘쳐난다.
벌교역 삼거리에서 부용교까지 도로, 그리고 농협까지 거리에 장꾼들이 보따리를 풀어놓고 손님을 기다린다. 다른 지역 5일장처럼 평소 비었다가 장날만 서는 게 아니라, 매일장이 들어서는 농협하나로마트 옆 상설시장인 벌교시장이 확대 팽창하는 형국이다.
해산물과 농산물이 풍성하다. 농산물 중에선 참다래와 고구마가 요새 많이 나온다. 노량진수산시장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해산물이 다양하다. 꼬막은 물론이고 낙지, 짱뚱어, 주꾸미, 새조개, 키조개, 모시조개, 굴, 서대 따위가 물이 좋다.
출출해졌다면 상설시장 끝까지 걸어 들어간다. 시장이 끄트머리에 국밥집 두세 곳이 있다. 얼큰하고 시원한 국밥이 4000원밖에 하지 않는다. 근처에 팥칼국수집도 있다. "설탕을 팍팍 쳐야 맛있다"면서 칼국수를 잔뜩 넣은 팥죽을 냉면 사발 한가득 담아준다. 겨우 2000원이다. 아주 구수하다.
주인 할머니가 "얼마 전 새로 개통한 인천대교를 다녀왔는데 어찌나 크고 멋있는지 놀랐다"는 둥, 온갖 이야기를 손님들과 주고받는다. 맛이나 좀 보라면서 손님으로 온 할머니가 들고 온 단감을 깎아서 손님과 주인에게 나눠준다. 주인과 손님이 따로 없는 풍경이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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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꼬막 삶기. / 조선영상미디어 유창우 기자
그 밖에 볼거리_ 벌교와 꼬막이 널리 알려진 건 소설 '태백산맥'의 공이 크다. 벌교는 그래서 태백산맥에 등장하는 장소를 둘러보기 위해 찾는 여행객이 많다. 홍교 즉 무지개다리는 조선 영조 때까지 뗏목다리가 있던 곳. 벌교(筏橋)란 지명이 이 뗏목다리에서 유래했다. 영조 당시 송광사 승려가 뗏목다리 대신 세운 돌다리가 홍교다. 현존하는 홍교 중 가장 크다. 태백산맥에서 염상진 등이 굶주리는 주민들에게 나눠주려고 유지들의 창고를 털어 곡식을 모아두던 곳이다. 부용교는 흔히 '소화다리'라 불린다. 홍교 아래 포구 쪽에 있다. '태백산맥'에서 좌우익이 여기서 사형을 집행한다. 김범우의 집은 소설에는 존경 받는 대지주 김사용의 집으로 묘사됐다. 사랑채, 겹안채, 창고자리, 돌담, 장독대가 여전히 당당하다. 경전선 철교에서는 염상구가 벌교 '주먹'들을 제압하려고 담력시합을 벌였던 곳. 일본식 건물 남도여관은 임만수와 대원들이 숙소로 사용하는 것으로 나온다.
벌교꼬막
밤새 내린 비로 벌교는 질펀했다. 전남 보성군 벌교 읍내는 온통 흙물이었다. 하지만 장꾼들은 개의치 않았다. 지난 9일은 벌교 5일장이 열리는 날이었다. 4와 9가 들어가는 날짜에 열리는 벌교 5일장은 어물전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해산물이 다양했지만, 최고의 '스타'는 의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거무튀튀한 꼬막이었다. 뻘(개흙)이 잔뜩 묻은 꼬막과 흙물로 흥건한 벌교는 참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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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꼬막이 제철을 맞아 신이 났다. 꼬막은 추운 겨울 가장 맛이 든다. 사진 속 꼬막은 새꼬막이다. 새꼬막은 참꼬막보다 껍데기가 하얗고 골이 얕다. 겉보기엔 새꼬막이 더 곱지만, 맛은 참꼬막을 쳐준다. / 사진ㆍ조선영상미디어 유창우 기자 canyou@chosun.com
꼬막이 이제 막 제철을 맞았다. 조정래씨는 '태백산맥'에서 "간간하고, 졸깃졸깃하고, 알큰하기도 하고, 비릿하기도 한 그 맛"이라고 표현한 그 조개다. 꼬막은 가을이 끝나고 겨울이 시작할 무렵부터 이듬해 봄 알을 품기 전까지 맛이 최대치로 상승한다. 벌교시장 상인들은 "11월부터 3월까지가 꼬막의 계절"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벌교 사람들에게 겨울은 '꼬막의 계절'과 동의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꼬막은 참꼬막과 새꼬막으로 나뉜다. 벌교를 비롯한 전남 사람들은 새꼬막은 꼬막으로 쳐주지 않는다. 새꼬막을 '개꼬막' '똥꼬막'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서울 등 타지 사람들은 참꼬막과 새꼬막을 구분하기도 어렵다고 한다. 그만큼 비슷하게 생겼다. 껍데기가 전체적으로 동그스름하지만, 자세히 보면 약간 각이 진 것이 직사각형 같기도 하다. 껍데기 바깥쪽 전체적으로 부채꼴 모양으로 골이 패 있다. 벌교 사람들은 "골이 몇 개이냐, 그리고 얼마나 깊게 파여 있느냐로 참꼬막과 새꼬막을 쉽게 구분할 수 있다"면서 "참꼬막은 골이 약 20개이고, 새꼬막은 약 30개"라고 했다.(그런데 언제 이걸 다 세지?) 또 새꼬막은 비교적 뽀얗고 깨끗하다. 참꼬막은 거무튀튀한 뻘이 묻어 있고, 뻘을 씻어낸다 하더라도 새꼬막처럼 새하얀 빛을 띠지는 않는다.
참꼬막과 새꼬막은 종자가 다른 것일까, 아니면 자라는 환경에 따라서 맛과 모양이 달라지는 것일까? 벌교시장 상인들도 의견이 갈렸다. 벌교읍 산업수산계 이형철 계장은 "참꼬막과 새꼬막은 종(種)이 다르다"고 했다. "참꼬막은 자연산이고 새꼬막은 양식산으로 아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꼬막 씨(종패)를 갯벌에 뿌리고 자라도록 한다는 점에서는 참꼬막이나 새꼬막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새꼬막은 항상 물이 잠겨 있는, 깊이 3~5m 뻘에서 자랍니다. 참꼬막은 이보다 얕은, 물이 들고나는 지점에서 자랍니다. 새꼬막은 항상 물에 잠겨 있기 때문에 1~2년이면 다 자라서 채취 가능합니다. 참꼬막은 물이 빠질 때도 있기 때문에 성장이 더딥니다. 3~5년은 지나야 채취할 수 있습니다."
참꼬막과 새꼬막을 가르는 건 무엇보다 맛이다. 벌교시장 안 '동막식당' 주인 조덕심(60)씨는 "참꼬막은 낭글낭글하고, 새꼬막은 단단하다"고 했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고 하자, 조씨가 단골 가게에서 참꼬막과 새꼬막을 사다가 삶아줬다. 5000원어치씩 사왔다는데, 냉면 사발 하나씩 수북하게 쌓였다.
참꼬막과 새꼬막을 양쪽에 놓고 비교해보니 차이가 확연하다. 참꼬막 껍데기를 벌리면 봉긋하게 솟은 부분에 자주색에 가까운 빨간색 물이 들어 있다. 꼬막 맛의 핵심이다. 이 부분이 터지지 않게 나머지 부분과 함께 입에 넣는다. 씹으면 피맛 비슷한 찝찔함이 입안 가득 퍼진다. 싱싱하지만 비리지 않은 갯내가 코로 올라온다. 조갯살이 야들야들 부드러우면서 여린 탄력이 있다. 새꼬막은 좋게 말해서 참꼬막보다 훨씬 차지고, 나쁘게 말하면 질기다. 겉보기엔 골이 얕고 깨끗한 새꼬막이 여성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맛은 참꼬막이 훨씬 섬세하고 미묘하다.
서울에선 꼬막이 그렇게 맛있다고 느낀 적이 없는데, 이곳에선 손끝에 물집이 잡힐 지경인데도 멈출 수가 없었다. 벌교시장 안에서 꼬막과 말린 생선 등 해산물을 파는 '벌교훈정이네' 이영자씨는 "서울은 꼬막을 소금물에 담가둬서 그런 것 같다"고 했다. "소금물하고 바닷물은 달라요. 소금물에 담가놓으면 맛이 빠져버려. 벌교에선 이렇게(그물이나 함지박 따위에) 건져놓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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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벌교5일장 좌판에 나온 꼬막. 위 오른쪽 사진은 벌교시장‘동막식당’조덕심씨 손바닥에 놓인 참꼬막(오른쪽)과 새꼬막이다. 맨손으로 순식간에 꼬막을 따는 조씨의 신묘한 솜씨가 궁금하다면chosun.com에서 동영상을 확인하시라./ 사진ㆍ조선영상미디어 유창우 기자 canyou@chosun.com
조덕심씨가 삶은 꼬막을 두 손만으로 깠다. 까기 힘들어 꼬막 먹기 포기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인데, 조씨는 신기할 정도로 쉽게 껍데기를 벌렸다. "금에다가 손을 대요. 그리고 돌려 까면 되는 거지 뭐. 여기 양반들은 다 이렇게 따." 조씨가 시키는 대로 따라 해봤다. 두 껍데기가 서로 물리는 부분에 양손의 엄지손가락을 대고, 서로 어긋나게 반대 방향으로 힘을 주라고 했다. 그런데 전혀 꼬막이 입을 벌리지 않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꼬막을 따지 못하는 모습을 보던 조덕심씨가 웃으면서 숟가락과 젓가락을 건넨다. "이건 똥구멍을 따야 된다고(벌교 사람들은 꼬막의 양 껍데기가 맞닿아 붙은 부분을 '똥구멍'이라고 불렀다). 참꼬막은 '똥구멍'이 벌어져 있고, 새꼬막은 좁다. 참꼬막은 젓가락을 눕혀서 끼워 넣으니 딱 맞고, 새꼬막은 숟가락을 세워서 끼우니 딱 맞았다. 그 '부위'에 젓가락과 숟가락을 각각 끼워넣은 다음 비틀자 껍데기가 서로 엇갈리면서 벌어졌다. 벌어진 꼬막 껍데기를 양손으로 잡고 벌리니 쉽게 따진다.
옆에서 삶은 꼬막에 막걸리를 마시던 벌교 아낙이 다가왔다. "그게 그렇게 안돼?" 순식간에 꼬막 대여섯 개를 맨손으로 땄다. "우리야 만날 까니까." 꼬막을 한평생 먹어야 가능한 '내공' 같았다.
꼬막 삶기 노하우
아무리 좋은 참꼬막을 구했어도 제대로 삶지 못한다면 말짱 '꽝'이다. 잘 삶은 새꼬막을 먹는 편이 차라리 낫다.
벌교 읍내 여러 '꼬막 고수(高手)'들의 다양한 조언을 종합해보니, 꼬막 삶기의 핵심은 '익히기'가 아니라 '데치기'이다. 뜨거운 기운이 꼬막 전체에 퍼지도록 해 꼬막의 맛 성분을 최대치로 활성화시키되, 익지는 않아야 제맛이 난다는 것. 쇠고기 스테이크로 치면 완전히 딱딱하게 익은 '웰던(well done)'아닌, 겉은 누릇하게 익었지만 속은 붉은 핏기가 남은 '미디엄(medium)' 또는 '미디엄 레어(medium rare)'로 익혀야 하는 것이다.
벌교시장 안 '동막식당' 조덕심씨의 꼬막 삶기 비법은 이렇다. "물을 끓여요. 손을 넣으면 따실 정도로. 꼬막을 깨끗이 씻어서 넣어부러. 저어주고 이대로 놔둬요. 꺼먼 물이 쪼까 생겨요. 꼬막에서 핏물이 나온 거지. 바로 건져부러. 너무 익어버리면 맛이 없어."
벌교시장에서 '꼬막을 가장 잘 안다'고 자타가 인정하는 '벌교훈정이네' 이영자씨의 비법이 조금 더 간단하다. "꼬막이 잠길 정도로만 냄비에 물을 받아. 불에 물을 올려. 이때부터 꼬막을 씻어. 미리 씻지 말아. 물이 끓으려고 할 때 꼬막을 넣어. 꼬막을 한번 저어줘. 냄비 뚜껑을 덮고 불을 꺼버려. 딱 3분 있다 꺼내면 알맞게 삶아져버려."
이영자씨는 "꼬막을 캔 당일보다 그 다음날 삶아 먹어야 덜 짜고 더 맛있다"고 덧붙였다.
가는 길_ 호남고속도로-순천IC-2번 국도-벌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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