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주여 주여 하는 자
성경 : 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우리 안의 ‘거짓 안도감’과 마주하기
오늘도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이 자리에 나온 여러분를 환영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말씀은 사실 목사인 저에게도, 그리고 오랜 시간 신앙생활을 해오신 여러분에게도 참 ‘불편한’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불편함이 우리를 살리는 생명줄이 될 줄 믿습니다.
혹시 여러분, 이런 경험 있으신가요?
홈쇼핑에서 운동기구를 사면서 “이거만 있으면 나도 몸짱이 될 거야!”라고 확신하며 결제 버튼을 누릅니다.
물건이 배송되는 순간까지는 이미 살이 빠진 것 같은 기분이 들죠.
하지만 정작 그 기구는 거실 구석에서 옷걸이가 되어버립니다.
우리는 ‘구매했다’는 사실만으로 ‘운동했다’는 착각에 빠지곤 해요.
우리 신앙도 이와 비슷할 때가 많습니다.
“주여, 주여”라고 부르는 그 고백이, 마치 천국행 티켓을 이미 사용한 것 같은 착각을 줄 때가 있거든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그 안일한 착각의 담장을 무너뜨리십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7:21)
성경은 신앙의 고백이 삶의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는 '종교적 착각'의 위험성을 경고합니다.
1. “주여, 주여” — 뜨거운 고백이 함정이 될 때
본문을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해 “주여 주여(κύριε κύριε, 퀴리에 퀴리에)”라고 부릅니다.
헬라어에서 단어를 두 번 반복하는 것은 아주 강한 강조와 친밀함, 그리고 열정적인 감정 상태를 의미해요.
이들은 그냥 대충 믿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아주 열정적이고, 확신에 차 있으며, 스스로를 ‘신실한 자’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진단은 냉혹합니다.
“그 고백이 너를 구원하는 게 아니다.”
왜 그럴까요? 퀴리에(κύριε), 즉 ‘주님’이라는 말의 본래 뜻은 ‘나의 소유주, 나의 통치자’라는 뜻입니다.
입으로는 “당신은 나의 주인입니다”라고 하는데, 정작 내 삶의 핸들은 여전히 내가 꽉 쥐고 있다면 그 고백은 언어 도단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종교적 언어’에 너무 익숙해져 있습니다.
"은혜받았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뜻입니다".
그런데 이 말들이 내 삶의 욕망을 포장하는 장식품이 될 때가 많아요.
직장 상사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을 "하나님의 공의"로 포장하고, 내 욕심을 "비전"으로 둔갑시키지는 않나요?
어느 유명한 요리사가 TV에서 화려한 레시피를 설명합니다.
사람들은 그 화려한 말솜씨와 지식에 감탄하며 "저분은 정말 최고의 요리사야!"라고 칭송하죠.
그런데 정작 그 요리사의 주방에 가보니 칼 한 번 잡아본 적이 없고, 가스레인지 불도 켤 줄 모른다면 어떨까요?
그가 말하는 레시피는 그저 공허한 메아리일 뿐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 지식과 화려한 기도 문장이 우리를 신자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신앙의 언어들이 내 삶의 순종을 대신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봅시다.
열정적인 종교적 고백이 실제적인 순종을 대체할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2.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 — 방향이 본질입니다
예수님은 대안을 제시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ποιῶν, 포이온)라야 들어가리라.”
여기서 ‘행하는 자’는 헬라어 현재 분사형으로, 어쩌다 한 번 착한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지속적으로 그 방향을 향해 살아가는 사람’을 뜻합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오직 믿음(Sola Fide)’을 강조합니다. 맞습니다.
행위로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종교개혁자 칼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구원하는 것은 믿음뿐이지만, 그 믿음은 결코 홀로 있지 않다.”
참된 믿음은 반드시 순종이라는 ‘열매’를 동반한다는 것이죠.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벽을 요구하시는 ‘심판관’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의 ‘뜻’ 안에 머물 때 가장 행복하다는 것을 아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여기서 ‘아버지의 뜻’이란 무엇일까요?
본문 앞뒤의 산상수훈을 보면 명확합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은밀하게 구제하며, 마음의 탐욕을 버리는 것—즉,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단순히 명령을 수행하는 로봇이 아니라, 그분의 마음을 닮은 자녀로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우리는 자꾸 ‘큰 순종’을 생각합니다.
"내 전 재산을 바쳐야 하나?", "선교사로 떠나야 하나?".
하지만 주님이 원하시는 ‘행함’은 오늘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는 것, 정직하게 세금을 계산하는 것, 나를 힘들게 하는 동료를 위해 잠깐이라도 축복 기도를 하는 작은 움직임에서 시작됩니다.
구원받은 신자의 증거는 완벽한 행위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향한 지속적인 삶의 방향성입니다.
3. 복음의 역설 — 순종할 수 없는 우리를 위한 은혜
설교를 듣다 보면 마음이 무거워지실 겁니다.
“목사님, 저는 오늘도 실패했는데요? 제 삶은 여전히 괴리가 큰데요?”
설교하는 저 자신도 이 말씀 앞에 서면 발가벗겨진 기분입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아버지의 뜻’을 완벽히 행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겐 복음이 필요합니다.
성경 전체의 흐름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은 끊임없이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예수님만이 이 땅에서 완벽하게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신” 분입니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불순종의 죄값을 다 치르셨습니다.
신앙의 본질은 “내가 이만큼 행했으니 합격이겠지?”라고 계산하는 게 아닙니다.
“주님, 저는 행할 능력이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저를 위해 행하신 일을 믿습니다.
이제 주님의 영이 제 안에 오셔서 저를 움직여 주십시오!”라고 항복하는 것입니다.
순종은 내 의지의 산물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에 감격한 자에게 나타나는 거룩한 반응입니다.
어린아이가 아빠를 도와주겠다고 무거운 짐을 같이 듭니다.
사실 아이의 손은 짐에 닿아만 있을 뿐, 모든 무게는 아빠가 다 감당하고 있죠.
하지만 아빠는 아이에게 말합니다.
“우리 아들이 아빠를 도와줘서 짐이 정말 가볍네! 참 잘했다.”
하나님이 보시는 순종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완벽해서가 아니라, 그분의 뜻에 손을 얹고 함께 가려는 그 마음을 귀히 보시는 것입니다.
순종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의 감격적 반응입니다.
나의 실패에 좌절하기보다, 다시금 나를 붙드시는 그리스도의 완벽한 순종을 의지하며 일어납시다.
순종은 내 힘으로 짜내는 고역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에 붙들린 자의 거룩한 습관입니다.
4. 결론: 입술의 고백을 삶의 예배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경고는 우리를 정죄하여 지옥으로 밀어 넣으려는 협박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짜 안도감에 속아 생명의 길을 잃지 않도록 흔들어 깨우시는 사랑의 음성입니다.
신앙의 본질은 ‘일치’입니다.
내가 교회에서 부르는 “주여”라는 고백과, 월요일 아침 직장에서 내뱉는 내 언어가 같아지는 것입니다.
내가 골방에서 흘리는 눈물과, 가정에서 자녀와 배우자를 대하는 내 손길이 같아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 영리하게 신앙생활을 해왔는지 모릅니다.
삶의 변화 없이도 신자인 척할 수 있는 방법들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영적 위선’을 오늘 이 시간 회개합시다.
"주님, 제가 입술로만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제 삶의 영역 중 주님께 내어드리지 못한 그 부분을 오늘 내려놓습니다."
여러분, 이번 한 주간 딱 한 가지만 실천해 봅시다.
내가 입으로 고백한 것 중 가장 지키기 쉬운 것 하나를 행동으로 옮겨보는 겁니다.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했다면, 오늘 가장 감사하기 힘든 사람에게 감사 인사를 전해 보십시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주여, 주여"라고 부르는 단계를 넘어, 하나님 나라의 실재를 경험하는 참된 제자의 길로 들어서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여러분이 진짜 신앙의 기쁨을 누리길 원하십니다.
그 기쁨은 오직 순종의 문을 열고 들어갈 때만 만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하십니다.
신앙은 고백과 삶의 간격을 좁혀가는 여정이며, 그 힘은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로부터 옵니다.
참된 신앙은 입술의 고백이 삶의 현장에서 순종의 사건으로 번역될 때 완성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