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장收藏 ㅡ 박정경
사랑은 가장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문장이었으나 이별은 높은 산맥을 넘는 고독한 어순(語順)이다.
가방엔 낡은 시집 한 권과 차마 다 태우지 못한 너의 온기만 넣었다. 길은 발밑에서 비로소 갈래를 치고 나는 이제 너의 풍경에서 나의 배경으로 걸어 들어간다.
역마다 내려 이름 모를 꽃들의 안부를 묻고 창에 비친 내 얼굴에서 희미해진 너의 눈동자를 지우는 일.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정갈한 장례이자 여행이다.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이 길의 끝은 너를 잊는 것이 아니라 너를 내 안의 고요한 침묵 속에 깊이 수장(收藏)하는 일일 테니까.
바람이 불면 나는 다시 빈 종이 위에 나만의 이름 석 자를 꾹꾹 눌러 쓴다. 비로소 온전한 1인칭의 여행이 시작되고 있다.
첫댓글 收藏 : 거두어서 깊이 간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