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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현광의 비명(碑銘)
허목(許穆)
자 : 덕회(德晦)
호 : 여헌(旅軒)
시호 : 문강(文康)
국조인물고 권8 유학(儒學)
선생의 휘(諱)는 현광(顯光)이고, 자(字)는 덕회(德晦)이며 별호(別號)는 여헌(旅軒)이다. 성(姓)은 장씨(張氏)로 고려 때 상장군(上將軍)을 지낸 장금용(張金用)이 비로소 옥산(玉山)을 관적(貫籍)으로 삼았다. 그로부터 12대를 내려와 부윤(府尹)을 지낸 장안세(張安世)에 이르고, 부윤이 좌윤(左尹)을 지낸 장중양(張仲陽)을 낳았고, 좌윤이 장령(掌令)을 지낸 장수(張脩)를 낳았는데, 장수는 올곧은 도(道)로써 세상에 알려졌고 선생에게 6세조가 된다. 선생의 증조(曾祖)는 좌승지(左承旨)에 추증(追贈)된 장준(張俊)이고, 조고(祖考)는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된 장계증(張繼曾)이며, 선고(先考)는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된 장열(張烈)이다.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된 모친(母親)은 경산 이씨(京山李氏)로 제릉 참봉(齊陵參奉)을 지낸 이팽석(李彭錫)의 딸인데, 황명(皇明, 명나라) 숙황제(肅皇帝, 세종(世宗)을 말함) 가정(嘉靖) 33년(1554년 명종 9년) 정월(正月) 22일(계해)에 선생을 낳았다.
선생은 태어난 지 8년째에 선부군(先府君)이 세상을 떠났고 17, 18세에 학문에 이미 통달하자 경술(經術)을 깊이 연구하여 ≪우주요괄십도(宇宙要括十圖)≫를 지었으며, 23세 때에 재주와 학문으로써 추천을 받았다. 허잠(許潛)공이 외임(外任)으로 나가 성주 목사(星州牧使)가 되었을 때 한강(寒岡, 정구(鄭逑)) 정 선생(鄭先生)을 찾아뵙고서 남쪽 고을에서 학문을 좋아하는 선비가 누구인가를 묻자, 정 선생이 말하기를, “공자(孔子)의 문하에서도 학문을 좋아한 자는 안자(顔子) 한 사람뿐이었으니, 이것을 어찌 쉽게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장현광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배우기를 구하고 도(道)를 목표로 삼고 있으니, 훗날에 우리 스승이 될 사람은 바로 이 사람이다.”고 하였다.
28세 때에 모부인(母夫人)이 세상을 떠났는데, 선생은 거상(居喪)하면서 ≪상제수록(喪制手錄)≫을 지었으며, 유 문충공(柳文忠公, 유성룡(柳成龍)을 말함)이 일찍이 임금에게 선생을 여러 번 천거하였으며, 서로 만나게 되자 아들 유진(柳袗)을 선생에게 보내어 학문을 배우게 하였다.
만력(萬曆) 22년(1594년 선조 27년) 봄에 예빈시 참봉(禮賓寺參奉)에 제수되었고 가을에 또 제릉 참봉(齊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취임(就任)하지 않았으며, 그 이듬해에 특별히 서용(敍用)하여 보은 현감(報恩縣監)에 임명되었는데, 선생의 문인(門人)인 정사진(鄭四震)이 출처(出處)의 의리에 대하여 가르쳐주기를 청하자, 선생이 말하기를, “학문을 배운 것이 넉넉하면 벼슬에 나가고, 예우하는 뜻이 있으면 벼슬에 나가고, 집안이 가난하고 부모가 늙으셨으면 벼슬에 나간다. 벼슬에 나가지 않으면 부끄러운 경우가 두 가지 있는데, 자기의 몸만 깨끗하게 하려고 대륜(大倫)을 어지럽히는 것이 첫 번째 부끄러운 경우이고, 그 명성을 빌리고 그 성가(聲價)를 색구(索求)하는 것이 두 번째 부끄러운 경우이다.”고 하였다.
보은현에 도임한 뒤에 고을의 부로(父老)들과 약속하여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모여서 부로들로 하여금 각자 주민들의 고충거리와 치정(治政)의 궐실(闕失) 등을 말하게 하여 보익(補益) 규정(糾正)하였는데, 효제(孝悌)를 도탑게 하고 염치(廉恥)를 권면하고 덕행(德行)을 존중하고 패속(敗俗)을 물리친 것은 모두가 풍속을 아름답게 개선시킨 대법(大法)이었다. 2년 만에 벼슬살이가 즐겁지 않아서 그만두고 집에 돌아왔는데, 허락없이 멋대로 관직의 직무를 버려두고 돌아갔다는 이유로 법에 의거하여 의금부에 나아가 심리를 받게 되었으나, 어떤 경연관(經筵官)이 임금에게 아뢰어 석방될 수 있었다.
그해 여름에 영양(永陽)의 입암(立嵒)에 있는 천석(泉石)을 유람하였고, 만력 29년(1601년 선조 34년)에 임금이 경서(經書)를 교정(校正)하라고 명하여 선생이 소명(召命)을 받았는데, 지나는 고을에서 말을 지급하라 명하였고, 또 연이어 임금의 소명을 받았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그해 겨울에 공조 좌랑(工曹佐郞)에 제수되어 ≪주역(周易)≫을 교정하는 일에 참여하였고, 형조 좌랑(刑曹佐郞)에 이배(移拜)되자 벼슬을 사양하고 집에 돌아왔다. 31년(1603년 선조 36년)에 용담 현령(龍潭縣令)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또 의성 현령(義城縣令)에 제수되었는데, 몇 달이 지나 고을에 변고(變故, 문묘(文廟) 대성전(大聖殿)의 위판(位版)을 분실한 일을 말함)가 있게 되자 스스로 자기의 잘못이라고 자핵(自劾)하고서 집에 돌아왔다.
만력 36년(1608년 광해군 즉위년)에 광해(光海)가 새로 임금 자리에 올라 선생을 합천 군수(陜川郡守)에 제수하였고, 38년(1610년 광해군 2년)에는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제수하였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43년(1615년 광해군 7년)에 ≪관의(冠儀)≫를 수정(修訂)하였고, 48년(1620년 광해군 12년)에 정 선생(鄭先生, 정구(鄭逑)를 말함)이 별세하자, 선생은 여러 제자들과 더불어 상례(喪禮)를 강론하였다.
그해 가을에 명(明)나라의 현황제(顯皇帝, 신종(神宗)을 말함)가 붕어(崩御)하자 선생은 마을의 골목에서 곡(哭)하며 말하기를, “우리나라 백성들이 임진년(壬辰年, 1692년 선조 25년)과 계사년(癸巳年)의 왜란(倭亂) 때로부터 아비는 아비의 도리를 지키고 자식은 자식의 도리를 지키며 오늘날에 이를 수 있게 된 것은 모두 이 황제가 도와준 덕분이다.”고 하였다.
천계(天啓) 3년(1623년 인조 원년)에 인조(仁祖)께서 반정(反正)한 후 맨 먼저 초야(草野)에 묻혀있는 인재들을 찾아내게 하였는데, 이때 선생을 사헌부 지평(持平)에 임명하여 불렀으나 선생이 나이가 늙었다는 이유로 사양하자, 특별히 성균관 사업(成均館司業)에 임명하였다. 국조(國朝) 초기에는 이 관직이 없었는데 인조께서 즉위하고서 특별히 징사(徵士, 학덕(學德)이 높으나 벼슬하지 않는 선비)를 위하여 설치한 것이었다. 다시 지평으로 개임(改任)되었다가 중도에 병 때문에 사직하였고, 그 이듬해 봄에 승진하여 장령(掌令)에 임명되었다. 그 당시에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어 임금이 남쪽으로 피난을 갔다가 이괄이 패사(敗死)하게 되자 임금의 거가(車駕)가 서울에 돌아왔는데, 선생은 행재소(行在所)에 가지 못하였고 뒤쫓아 도성에 이르자, 또 벼슬에 제수하는 어명(御命)이 있었다.
임금이 즉시 선생을 인견(引見)하고 정치에 관하여 물었는데, 선생이 대답하기를, “이것은 전하(殿下)께서 일심(一心)으로 진작(振作)하여 날로 새로워지도록 애쓰시는 데에 달려있습니다.”고 하자, 임금이 좋은 말이라고 칭찬하고 특별히 후하게 물품을 내렸다. 얼마 뒤에 집의(執義)에 제수되자 선생은 상소하여 사직하면서 이어 공순 검소하여 비용을 절약하고 후덕하여 형벌을 줄일 것에 관해 진언(進言)하였다. 궁궐에 나아가서 사은(謝恩)을 하자 임금이 다시 선생을 인견하고 인심(人心)과 세도(世道)는 적합하기가 어렵다고 말하자, 선생이 아뢰기를, “예로부터 변화시킬 수 없는 인심이 없었고, 또한 만회(挽回)할 수 없는 세도도 없었으니, 이것은 성군(聖君)과 현상(賢相)이 서로 더불어 큰일을 해보려고 노력하는 것에 달려있을 따름입니다.”고 하였다. 이에 임금이 말하기를, “중외(中外)의 민심이 다들 원망하고 있는데, 어찌하면 좋겠는가?”라고 하자, 선생이 대답하기를, “온 나라 사람들이 이미 이전의 잔인하고 포학한 정치에 고생하고 시달리어 걱정과 아픔이 아직 가시지 않았는데, 서울에 새로 대란(大亂, 이괄의 반역을 말함)을 겪었으므로 소요(騷擾)가 가라앉지 않아 서로 의심하고 이간질하는 일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임금께서 백성들을 측은히 여기는 하교를 내리시어, 정사에 부지런하고 백성들을 보살핀다는 뜻을 보여주시면 민심이 가라앉을 것입니다.”고 하였다. 시종(侍從) 반열에 있던 자가 반측(反側)하는 자들에 관하여 말을 꺼내자, 선생이 말하기를, “백성들로 하여금 대도(大度) 안에서 눈에 보이지 않게 교화되도록 하면 반측하는 자들이 저절로 안정될 것입니다. 도성(都城)은 사방의 근본이니, 도성에 사는 백성들이 안정되면 사방이 안정될 것입니다.”고 하였다. 이에 임금이 선생의 말을 존중하여 후하게 물품을 내렸으며, 특별히 공조 참의(工曹參議)에 임명하였다. 임금께서 말하기를, “하찮은 관직이라 하여 사양하지 말라. 마땅히 크게 등용하리라.” 하였다.
후일에 특별히 주강(晝講)에 입시(入侍)하라고 명하였는데, 주강을 마친 뒤에 세자(世子)가 선생을 뵙기를 청하면서 빈례(賓禮)로써 예우하였다. 선생은 물러나온 뒤에 상소하여 집에 돌아가겠다고 고(告)하고서 즉시 도성 문을 나왔는데, 임금이 연이어 명을 내리어 선생의 뒤를 따라가라고 하였으나, 선생은 이미 길을 출발하였으므로 경기 감영(監營)에 명하여 선생에게 말을 지급해서 호송(護送)하도록 하였다. 그 뒤로 연이어 이조 참의(吏曹參議),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천계 6년(1626년 인조 4년)에 형조 참판(刑曹參判)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계운궁(啓運宮, 원종비(元宗妃)의 궁호(宮號)임)의 상(喪)이 있었고 마침 임금의 소명(召命)이 있었으므로, 선생은 궁궐에 들어가 은명(恩命)에 숙배(肅拜)한 뒤에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이어 대사헌(大司憲)에 이배(移拜)되자 연이어 상소하여 힘껏 사양하였는데, 세 번이나 상소하여 고하자 임금께서 그때서야 허락하였다. 졸곡(卒哭)을 마친 뒤에 길을 출발하면서 상소하여 건극(建極, 임금이 중정(中正)의 도(道)를 세워서 다스림)의 근본에 대하여 진언(進言)하고 또 말하기를, “지향(志向)이 낮으면 도(道)가 비루(鄙陋)하고 도가 비루하면 사업(事業)도 비루하고, 사업이 비루하면 사람들이 복종하지 않으며, 사람들이 복종하지 않으면 이웃나라가 두려워하지 않으며 천지(天地) 귀신(鬼神)들도 또한 도와주지 않습니다.”고 하였다. 그 이튿날에 임금께서 인견(引見)하자 선생은 또 천덕(天德)과 왕도(王道)에 관한 이야기 수백 마디를 진언(進言)하였고, 사직하고서 나오자 임금이 송별하기를, “세자(世子)를 만나 좋은 말을 가르쳐 주라.”고 하였다. 이에 선생이 세자에게 고하기를, “세자께서 나이가 옛사람이 학문에 뜻을 둔 나이에 이르렀으니, 학문을 배우되 먼저 뜻을 수립하는 것을 우선으로 삼으소서.”라고 하였다.
그 이듬해에 오랑캐가 우리나라에 침범한 일이 있어서 선생을 영남(嶺南) 지역의 호소사(號召使)로 임명하라는 어명이 있었고, 오랑캐가 물러가자 선생은 상소하여 정치의 폐단에 대하여 진언(進言)하고 이어 사리(私利)와 편사(偏邪)의 경계에 대하여 진언하였다.
8년(1628년 인조 6년)에는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서 상소하기를, “전하(殿下)께서는 나라가 위태로운 때를 잊지 않으시고 나라가 혼란스러운 때를 잊지 않으시고 나라가 망해가던 때를 잊지 않으신 다음에라야 임금으로서의 도리를 다할 수가 있으며, 조정 신하들은 자기 일신(一身)을 잊고 그 집안을 잊고 그 사사로움을 잊은 다음에라야 신하로서의 도리를 다할 수가 있습니다.”고 하였다. 그러자 임금이 이르기를, “경은 덕망이 높고 나이가 많은 분이기 때문에 매양 조정에서 함께 일하고 싶었으나 그렇게 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나의 덕이 모자라고 성의가 박(薄)해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경을 윗사람과 아랫사람들의 긍식(矜式, 모범이나 본보기를 말함)으로 삼아 세자(世子)를 가르치게 하고 싶고, 직사(職事)로써 경에게 책임을 지우고 싶지 않다.”고 하였다.
10년(1630년 인조 8년)에 또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 당시에 이귀(李貴)와 최명길(崔鳴吉) 등이 장묘(章廟, 원종(元宗)을 말함)를 추존(追尊)하자는 논의를 언급하였는데, 선생은 상소하여 추존하는 일은 올바른 예법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손자로써 할아버지를 계승하는 것은 대(代)가 끊기게 된 것을 잇게 하는 상도(常道)입니다.”고 하였다. 12년(1632년 인조 10년)에 또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그해 6월에 인목 대비(仁穆大妃)의 상(喪)이 있었는데, 선생이 상소하기를, “양음(亮陰, 임금이 거상(居喪)하는 것을 말함)하는 동안에 지덕(至德)을 충양(充養)하시고 대본(大本)을 수립하시어, 하늘에게 영원한 국명(國命)을 기망(祈望)하는 근본이 되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그 이듬해 7월에 인정전(仁政殿)에 벼락이 치자 선생은 상진 하진(上震下震) 16괘1)(卦)를 올리어 수성(修省)해야 하는 경계를 진달하였으며, 14년(1634년 인조 12년)에 특별히 자헌 대부(資憲大夫)에 승품(陞品)하여 곧이어 공조 판서(工曹判書)에 임명되었으나 또 병을 이유로 사양하였다. 그 당시에 장묘(章廟)를 부묘(祔廟)하는 예제(禮制)를 이유로 쟁론(爭論)하는 자들은 모두 죄를 얻었는데, 선생이 상소하기를, “전하께서는 낳아주신 분에게 대하여 효성을 바친 것이 이미 지극하였으니, 부묘(祔廟)하게 되면 사람들이 장차 예법에 지나친 것이라고 의심할 것입니다. 하물며 종묘에 부묘하는 것은 예전에도 근거할 만한 예법이 없으니, 이 일은 효도를 하려다가 도리어 효도를 손상하고 인(仁)을 하려다가 도리어 인을 해치는 셈입니다.”고 하였으나, 임금이 선생의 말을 듣지 않았다.
또 그 이듬해에 우참찬(右參贊)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16년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임명하여 소명(召命)이 내렸는데, 대우하는 예의(禮意)가 매우 지극하였으므로 선생은 서울에 올라가는 도중에 상소하여 병이 들었다고 사직하니, 임금께서 약물(藥物)을 하사하였다. 그러자 선생은 또 상소하여 사은(謝恩)하면서 인하여 조정의 신하들이 화합하지 못하는 폐단에 관하여 수백 마디의 이야기를 진언(進言)하였는데, 그 글 중에 이르기를, “우주(宇宙) 사이에는 하나의 도리(道理)가 있을 따름입니다. 선(善)과 악(惡)이 각기 한 부류(部類)이고 사(邪)와 정(正)이 각기 한 부류이고 시(是)와 비(非)가 각기 한 부류입니다. 선과 악, 사와 정, 시와 비가 병립(竝立)하거나 병작(竝作)하거나 병행(竝行)하면서 도(道)와 이치가 어그러지지 않았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세우신 기준이 미진(未盡)하시어 뭇 신하들이 그 기준에 모여들지 못하는 것입니다.”고 한 말이 있었다.
그해 12월에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의 변고가 있게 되자 선생은 행조(行朝, 임금이 피난지에 임시로 설치한 조정)가 가로막히어 명령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주군(州郡)에 통문(通文)을 돌리어 깨우치니, 고을의 부로(父老)들이 각자 군대를 모집하여 근왕(勤王)하였고, 또 재력(財力)을 출연(出捐)하여 군향(軍餉)에 보태주었다. 17년(1637년 인조 15년) 2월에 남한산성의 포위가 풀렸다는 소식을 듣고서, 선생은 선인(先人)의 묘소에 하직 인사를 올린 뒤에 입암산(立嵒山)에 들어가 살았다.
입암산은 동해(東海) 가에 있었는데 입암이라는 이름을 고쳐 입탁암(立卓嵒)이라고 개명(改名)하였으니, 대체로 선생이 자신의 속뜻을 붙인 것이었다. 그해 7월에 문인(門人)에게 심의(深衣)를 만들라고 명하였고, 9월 7일(임신)에 만욱재(晩勗齋)에서 별세하였으니, 향년은 84세였다.
선생이 별세하기 전날 저녁에 크게 우레가 치고 비가 퍼부어 산이 무너지고 냇물이 넘쳤다. 부음(訃音)이 알려지자 임금이 선생을 위하여 이틀동안 조회(朝會)를 중지하고 시장(市場)을 열지 않았으며 본도(本道)로 하여금 상사(喪事)를 거들어 도와주게 하였다. (10월) 1일(을미)에 발인(發靷)하여 고향의 선산에 돌아왔는데, 영구(靈柩) 뒤를 따라오는 선비들이 5백여 명이나 되었으며, 임금께서도 특별히 사제(賜祭)하였다. 이어 12월 15일(계유)에 금오산(金烏山) 아래에 있는 오산동(吳山洞) 동향(東向)의 자리에 장사지냈다.
선생의 전부인(前夫人) 정씨(鄭氏)는 참찬(參贊)에 추증된 정괄(鄭适)의 딸로서 일찍 죽었고 딸 하나를 두었는데, 사위는 참봉(參奉) 박진경(朴晉慶)이다. 후부인(後夫人) 송씨(宋氏)는 충순위(忠順衛) 송정(宋淨)의 딸로서 선생보다 8년 먼저 별세하였고 아들이 없어서 종제(從弟) 장현도(張顯道)의 아들인 장응일(張應一)을 데려다가 후사(後嗣)로 삼았는데, 장응일은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선생의 사위 박진경은 5남 3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박기(朴愭)ㆍ박황(朴愰)ㆍ박협(朴悏)ㆍ박증(朴憕)ㆍ박서(朴)이며, 박황은 현감(縣監)이다. 사위는 임경윤(任景尹)ㆍ이현(李垷)ㆍ조하영(曺夏英)이고, 이현은 교관(敎官)이다. 선생의 양자인 장응일은 3남을 낳았으니, 장영(張)ㆍ장건(張鍵)ㆍ장옥(張鈺)인데, 장영은 별좌(別坐)이고 장건은 지평(持平)이다.
선생이 별세하자 임고 서원(臨皐書院)ㆍ천곡 서원(川谷書院)ㆍ금오 서원(金烏書院)에서 모두 선생을 추사(推祀)하였고, 부지암(不知嵒)ㆍ입암(立嵒)ㆍ원당(元堂)에 모두 사당(祠堂)이 있다. 효종(孝宗) 6년(1655년)에 경연관(經筵官) 오준(吳竣)이 임금에게 아뢰어 좌찬성(左贊成)에 추작(追爵)하였고 그로부터 3년 뒤에 경연관 오정위(吳挺緯)가 또 임금에게 아뢰어 영의정(領議政)에 가증(加贈)하였으며, 태상시(太常寺)에 명하여 선생에게 ‘문강(文康)’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리게 하였는데, 시법(諡法)에 도덕(道德)이 있고 견문(見聞)이 넓은 것을 ‘문(文)’이라 하고 연원(淵源)이 막힘없이 통달한 것을 ‘강(康)’이라고 한다.
선생은 내면(內面)을 혼후(渾厚)하게 쌓는 일에 침잠(沈潛)하여 학식과 덕망이 숭심(崇深)하고 박대(博大)하였으며, 재능과 인품을 안으로 감추어 드러내지 않고 스스로 숨기는 것을 귀하게 여기었다. 이미 학문이 넓어지고 덕망이 갖추어지자, 가깝게는 심술(心術)이 인륜(人倫)의 본보기가 되었고, 멀게는 모든 하는 일이 만물(萬物)의 법칙이 되었으며, 이를 미루어 나가서 하늘의 덕(德)처럼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냄새도 없는 극도의 경지2)에 이르기까지 궁구(窮究)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 온화함으로써 덕(德)을 성취하고 인애(仁愛)로써 남들을 이롭게 해주었는데, 남을 이롭게 해주는 일은 외롭게 혼자 사는 사람들을 가장 우선으로 여기었다.
그러므로 선생이 말하기를, “홀아비나 과부를 불쌍히 여기고 고아와 독신(獨身)인 자를 보살펴주는 일이 천지(天地)의 대덕(大德)이고 내 마음의 전체(全體)이다.”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천지 사이의 일은 인사(人事)로서 마땅히 해야 되는 일이 아닌 것이 없다.”고 하였으며, 그 계(戒)에 이르기를, “허(虛)는 온갖 실상(實相)의 창고(倉庫)인 셈이고, 정(靜)은 온갖 변화(變化)의 근기(根基)인 셈이고, 정(貞)은 온갖 사위(事爲)의 근간(根幹)인 셈이고, 겸(謙)은 온갖 이익(利益)의 근본인 셈이고, 검(儉)은 온갖 복록(福祿)의 터전인 셈이다.”고 하였다.
인조(仁祖) 때에 선생이 소명(召命)을 받아 서울에 오자, 상국(相國) 이 문충공(李文忠公, 이정귀(李廷龜)를 말함)이 선생을 보고 시정(時政)의 선무(先務)에 대하여 물었는데, 선생은 다른 대답이 없이 다만 “한마디로 말할 것이 있는데, 오늘날 나라의 큰 걱정이 남을 의심하는 데 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상국이 물러 나와 사람들에게 얘기하기를, “어진 사람이다. 그야말로 시대(時代)를 제대로 잘 살피는 사람이라고 하겠다.”고 하였다. 당시에 공신(功臣)들이 갑자기 대권(大權)을 획득하여 마음 속으로 자기들을 미워하는 자가 있을까 두렵게 여기고서는 평소에 시기(猜忌)한 자들을 모두 살해(殺害)하였다. 그러므로 사대부(士大夫)들이 몹시 몸을 사리고 그들을 곁눈질로 흘겨보았으며 인심(人心)이 크게 무너졌는데, 선생이 임금을 인대(引對)하여 진언(進言)할 때에도 이러한 뜻이 많았다.
선생은 저술(著述)한 것이 매우 많아서 비록 집안사람이나 자제(子弟)이더라도 또한 그것을 알지 못하였는데, ≪역학도설(易學圖說)≫ㆍ≪도서발휘(圖書發輝)≫ㆍ≪역괘총설(易卦摠說)≫ㆍ≪경위설(經緯說)≫ㆍ≪만학요회(晩學要會)≫ㆍ≪우주설(宇宙說)≫ 등의 저서는 선생이 별세한 뒤에서야 세상에 나왔고, 또 ≪우주요괄(宇宙要括)≫ㆍ≪녹의사질(錄疑俟質)≫ㆍ≪모계(耄戒)≫ㆍ≪문집(文集)≫ 등의 여러 저서가 있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학문은 박식하고 통달하였고, 인애(仁愛)로써 남들을 이롭게 해주었으며, 덕(德)은 심원하고 중후(重厚)하였네. 깊으면서도 두루 통하였고 온화하면서도 도타웠으며 위엄이 있으면서도 공손하였네. 아! 권도(權道)가 될 수 있고 행동으로 실천하였고 남들을 본받아 따르게 할 수 있도다.
[네이버 지식백과] 장현광 [張顯光] (국역 국조인물고, 1999.12.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