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결국 일이 여기까지 이르게 되는 것인가.
단 한번의 학교의 공금 따위를 사사롭게
사용해 보지 않았던 관식이었다. 그럴 만한
위치에 있지도 않았고, 그럴 일도 없었다.
그런데 일이 이 지경에까지 오다니....
물론 그 돈은 집문서를 가지고 나와 빚을
내서 갚을 참이었다. 우선 세희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 아니 그녀를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꺼내기 위해 며칠만 사용하기로
마음 먹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미 그녀에게
들어간 돈의 총계는 3천만원을 육박하고
있었다. 그 돈을 관식이의 퇴직금액 전부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최선생이 교무실 문을 나서면서 말했다.
관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차들이 시동을
걸고 있었다. 여학생들의 깨금같은 밝은
웃음들이 가을 오후의 비어가는 교정에
유리구슬처럼 굴러다니고 있었다.
정규수업이 끝나고 보충수업이 시작되는
저녁 시간이었다. 아이들은 도시락을 먹을
것이고, 학교 근처의 떡볶이집이며
떡라면집이며 튀김집들에서는 아귀아귀
음식들을 먹어치우는 여학생들의 입술들이
번들거릴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교문을 빠져나오자 차들이
엉금엉금 기었다.
"늦으면 안되지 않습니까?"
"나오면서 출발한다고 했으니까.... 그리고
서울 시내의 길 사정이라는 것이 별수 없지
"미인이겠죠?"
미인이겠죠? 하고 묻는 최선생의 말에
관식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직 총각이지 최선생?"
"다 아시면서...."
"한때는 그랬지...."
"지금은 아닌가요?"
그 말에 관식은 얼른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지금 윤세희 그녀는 나에게 있어서
무엇인가. 정(情)인가 아니면 환멸인가,
그도 아니면 더러운 사랑인가, 그도
아니면.... 그래 업(業), 운명과도 같은 것.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이 최선생에게 다
설명할 수가 있단 말인가.
"토굴 속이 춥지 않을까? 침대두 있구
그래야 할텐데...."
전기도 좀 끌어야 할 것이구.... 하지만 이건
부끄러운 얘긴데요.... 저두 명창 흉내를
내볼려구 토굴 속에서 며칠간
살아봤는데요.... 여름에는 시원하구
겨울에는 따뜻하구 그래요.... 자연 냉난방이
되니까요."
"고마워...."
관식은 다시 한번 최선생에게 말했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그의 얼굴이 한번 환하게
웃었다.
약속한 다방에 중년 사내와 험상궂은 젊은
청년들이 먼저 나와 있었다.
"윤세희는요?"
"방에 있어요.... 그보다 먼저...."
관식은 돈을 건네 주었다. 중년 사내가
현금은 젊은 청년들에게 넘겨 주고 수표를
"뒤에다가 이서를 좀 해주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아줌마 데리고 나와...."
중년 사내가 관식이가 수표 뒤에다가
주소와 성명, 그리고 전화번호를 쓰는 사이에
말했다. 젊은 청년들 둘이 '내실'이라고
씌어진 문에서 윤세희를 데리고 나왔다.
그녀는 젊은 청년들의 팔에 이끌려서 의자에
앉았다.
관식은 그녀를 쳐다보았다. 먼저 그녀의
눈을.
"나야... 몸은 괜찮아?"
관식이 그렇게 말했으나 그녀는 그냥 입을
오물거리기만 했다.
"걱정할 거 없어.... 이제 나하구 같이
가면 돼...."
표정으로 주위의 사내들을 둘러보았다.
"자, 우린 이제 볼일 끝났으니
가겠수다.... 선생두 패가망신 안할려면
알아서 허슈.... 이 여자 이미 갈 데까지 다
간 여자유.... 그럼...."
그들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디 다친 데는 없어?"
그녀가 고개를 가로저어 보였다.
"이제 아무 걱정 안해도 돼.... 내가 다
준비해 놨으니까."
그 말에 그녀가 관식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면서 그녀는 부르르 몸을
떨면서 진저리를 쳤다. 그러더니 아주 오래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몸을 잘게 떨기
시작했다.
한가닥으로 뒤로 묶은 그녀의 머리,
희뿌옇게 뜬 것 같은 그녀의 얼굴빛, 이제
그녀의 모습에서 본래대로 남아 있는 것은 그
크고 검은 눈이었다. 그러나 너무 얼굴이
말라서 이제 그녀의 그 시원한 눈은 마치
얼굴에 비해서 눈만 지나치게 큰
안경원숭이처럼 보였다.
"추운가 보구나.... 가자...."
"저...."
그녀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모질게
겁을 먹었던 사람이 갖게 되는 그 두려움이
잔뜩 담긴 표정으로 겨우 입을 열었다.
"말해 봐...."
"병원으로 가는 거 아니죠?"
"아냐.... 세희가 요양을 하고 있을 만한
데를 알아볼 때까지 며칠만 가 있을 곳으로
가는 거야...."
"약.... 감기약?"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관식은
퍼득퍼득 머릿속 생각들을 정리해 보았다.
내가 감기약을 사러 간 사이에 그녀가
움츠리고 있던 용철이 튀어오르듯이 몸을
솟구쳐서 도망쳐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관식으로부터 도망친다는 것이
절벽에서 간신히 매달려 있는 밧줄에서 손을
놓아 버리는 일이라는 것을 그녀는 깨닫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이미 그녀는 내일 혹은
모래라는 가까운 미래에 대해서도 걱정하는
사고의 한 줄을 끊어 버린 여자였다.
"같이 나가... 나가서 곧 감기약을
사줄께."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깜박이를 켠채로 대기하고 있었다.
"어디 약국이 보니는 곳에서 잠깐 섰다가
갑시다. 무슨 감기약이 잘 듣지?"
관식의 물음에 세희가 약 이름을 댔다.
약국 앞에 잠시 차를 세우고 들어가서
관식은 그녀가 말해준 음료수 대신 약을 먹을
드링크를 한병 샀다.
다시 차로 들어와서 드링크 병 뚜껑을
비틀어 딴 다음에 그녀에게 약봉지를
내밀었다.
그러자 그녀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드링크 병을 받아들더니 그것을 마시고 어-
할 사이도 없이 약봉지에 있는 약을 입 안에
털어넣었다.
"그거 하루치 약이야.... 다 먹으면 어떻게
해?"
"알고 있으면서 하루 동안에 먹을 약을
한꺼번에 다 먹어?"
"오라버니 알다시피 저
약물중독이잖아요.... 그래서 약발이 잘
안듣구.... 그래서 그러는 거예요.... 저
담배 한대 주시겠어요?"
"그러지...."
관식은 담배 한 개비를 빼어서 그녀에게
불을 붙여 주었다. 그녀가 깊은 한숨과 함께
담배연기를 토해냈다. 담배개비를 들고 있는
그녀의 손마저 파리하게 보였다.
"어디로 절 데려가는 거죠?"
"병원은 아니라니까...."
"이왕이면 지옥으로 데려다 주세요....
오빠 손으로...."
"무슨 소리야.... 아직 앞날이 창창한
거야.... 치료하면 나을 수 있어."
"그렇지 않아요...."
그녀가 비스듬히 관식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면서 말했다. 관식은 그러는 그녀의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두려움과 피곤함,
그리고 절망 그녀의 손끝에서 타들어가고
있는 담배처럼 이제 그녀의 운명도
사그라들어가고 있는 것일까.
그녀가 눈을 감았다. 관식은 자신의
어깨에 실려오는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받치고 있었다. 차가 신호대기에 걸려서
섰다. 그녀가 움찔했다.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잠이 들었을까?
그녀의 손끝에서 여전히 담배가 타들어가고
있었다. 관식은 오른손을 움직여서 그녀의
"김선생님.... 교문리 다 왔는데요...."
백미러 속에서 최선생의 얼굴이 보였다.
"교문리 빠져나가기 전에 시장에 잠깐
들리자구, 참 거기 전기담요 쓸 수가 있나?"
"해보죠 뭐.... 전기줄하구 콘센트 좀 사면
아마 문제없을 겁니다...."
"화장실은?"
"요강을 사야겠죠.... 간이침대하구 침구두
사야겠구.... 식사는 걱정 마십시오...."
시장에서 필요한 물건들을 사서 트렁크에
넣고 교문리를 빠져 나왔을 때는 이미 짧은
가을 햇발은 모두 산너머로 숨어 버린
뒤였다. 그러나 경춘가도에 접어들어서 많은
차들이 켜대는 헤드라이트 때문에 길은
어둡지가 않았다.
"아무래두 저녁은 먹구 들어가는 것이
"그러는 게 낫겠네요."
"저 배고파요.... 오라버니...."
"그래, 알았어...."
그동안 화장실에 들어간 세희도 지켜야
했다. 시장에서 물건을 살 때도 최선생과
교대를 해야 했다.
절대로 저 여자 말을 믿으면 안돼....
그녀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그녀를 혼자
놔두어서는 안된다고 관식은 몇 번이나
최선생에게 강조를 했었다.
-겉으로는 멀쩡한 거 같은데요.... 병색이
좀 있어 보이기는 하지만.
-몰라서 그래.... 내가 얘기했잖아....
저번에는 목욕하러 간다고 들어가도니
거짓말로 둘러대고서는 도망을
치더리니까.... 지금두 우리가 한눈만 팔면
마약을 구하기 위해서 도망치려고 할 거야.
경춘가도는 원래부터 풍치가 좋기도
하려니와 서울에서 가까운 곳이라 평소에도
소풍객들이 많은 곳이었다. 게다가
고속화도로를 닦아 놓고, 승용차들이
자전거마냥 흔해지기 시작하자 곳곳에 바람난
남녀들을 유치하기 위한 러브호텔들이
경쟁적으로 들어서 있었고, 횟집이며 장어집
같은 스테미너 식당들이 또한 곳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무얼 먹을까.... 세희, 그동안에 뭐 먹고
싶은 것 없었어?"
"매운탕에다가 소주를 먹고 싶어요."
"그러지 뭐...."
소주 몇 잔이 들어간 그녀의 볼이 비로소
발그스레해졌다. 술기운 때문일까, 그녀의
정상에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오라버니 나 때문에 고생하네요...."
그녀가 수줍은 듯한 모습으로 말했다.
그런 식으로 고마움을 표시할 수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든지 그녀가 제정신이 돌아왔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래.... 지금도 나한테서 도망치고
싶어?"
"그때는 오라버니한테 미안한 생각이
들어서 그랬어요.... 오라버니가 무슨 돈이
있겠어요....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저
혼자 힘으로 버텨 보려고 그랬던 거예요....
여자는 어디 가나 저하나 먹을 것은 지니고
태어난다는 사실을 모르세요?"
"말이나 못하면...."
"저 때문에 이분도 수고하시네요.... 참,
하나도 없어요.... 옷두 이것 뿐이구요...."
"걱정 마... 내가 내일 다
사다줄테니까...."
"그리구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지만 당장
아까 먹었던 감기약이 좀 필요해요."
"알았어.... 그것두 가다가 약국에서
사도록 하지...."
"꼭요.... 잊어버리면 안돼요...."
"걱정하지 말라니까...."
최선생이 알고 있는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완전한 어두움이 그 작은 산마을으러
뒤덮고 있었다. 몇 백 년 묵었다는
은행나무 한 그루가 커다란 독수리처럼
날개를 펼치고 있는 마을 어구를 지나서
개울물 소리가 들리는 곳에까지 차가
들어갔다. 거기서 일단 최선생은 돌아가고
묵기로 했다. 집에다가는 최선생에게 전화
부탁을 하고 말이다.
몇 시쯤 됐을까....
시골의 골목길들을 흔들어 놓는 것 같은
개짖는 소리에 관식은 후딱 잠을 깼다.
그리고 얼른 옆을 더듬어 보았다.
이런....
옆에서 자고 있어야 할 세희 그녀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관식은 다른 생각할 사이도
없이 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뒷간에 희미한 불빛이 보이고 있었다.
그녀가 화장실에 있는가. 그곳은
화장실이라거나 변소라는 말을 쓸 수가
도저히 없는 '잿간'이라는 표현이 맞는
순재래식 화장실이었다.
최선생이 얘기하던 토굴은 미리 전화를
않아서 여러가지 준비가 필요했고, 또 세희
그녀를 데리고 여관까지 가려면 한참을 차를
타고 나갔다 들어왔다 해야 되기 때문에
토굴을 관리하는 영감네의 건넛방에서 세희를
데리고 자던 참이었다.
토굴 관리인의 집에서 기르던 개들이
왕왕거리자 옆집, 건넛집 개들이 아울러
목청을 높이기 시작해서 순신간에 개짖는
소리들로 동네 안골목이 들썩들썩해지고
있었다.
시골 개들이라는 것이 사람을 물지는
않지만 목청 하나는 큰 법이었다. 소음이
없기 때문에 개짖는 소리들이 더 크게 들리는
건가. 그렇다고 저희집에 들어 있는 손님이
밤에 뒷간엘 갔는데 저렇게 살쾡이 본 듯이
거품을 물고 짖을까?
가마니 하나를 길게 늘어뜨려 놓은 거적문
앞에서 관식은 그렇게 세희를 불러 보았다.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거적을 들추어
보았다. 없었다. 그렇다면.... 이 여자가
또....
그때였다.
"비켜 저리 비켜!"
날카로운 세희의 목소리였다. 관식은
소리나는 곳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아니
이런.... 세희는 잿간의 지붕 위에 올라가
있었다.
"세희.... 왜 그래!"
"살려줘..... 뱀!.... 뱀들이...."
가만.... 불이 어디 있더라.... 관식은
다시 후다닥 방안으로 뛰어들어와 후레쉬를
찾아들었다. 그리고 지붕 위를 비추어
흰 잠옷 차림의 그녀가 시골 뒷간의 지붕
위에 올라가서 손을 휘휘 내젓고 있었다.
머리를 산발한 채로.... 세희야....
윤세희.... 관식이 소리치면서 휘레쉬를
그녀의 얼굴에 비추었다.
그 불빛에 비치는 세희의 눈이 광기를 띄고
있었다. 깊은 밤 한적한 비포장도로를
달리다가 헤드라이트에 놀라서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짐승의 눈에서 나오는 그
푸른빛.
"실성한 여자구먼유...."
집주인이자 토굴 관리를 하는 노인이
말했다.
"정신병자는 아니예요.... 다만...."
관식은 차마 그녀가 마약중독자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난리가 났는데도 영감의 말투는
느려터지기만 했다.
"사다리를 좀 갔다 주세요.... 어서...."
주인 영감이 가지고 온 사다리를 걸쳐놓고
관식은 그 위에 올라갔다.
"가까이 오지 마!"
어둠 속에서 그녀가 소리쳤다. 이웃집의
불들이 하나씩 켜지고 있었고, 마을에 있는
살아 있는 모든 개들이 짖어대고 있었다,.
"나야.... 세희...."
"뱀.... 뱀떼들이...."
"걱정 마, 세희야.... 내가 그 뱀들을 다
쫓아 버렸어.... 자 보라구.... 이제는 한
마리도 없잖아?"
부드러운 목소리로 관식은 그녀를 달랬다.
그녀는 마치 커다란 짐승에게 물려서 이제는
몸을 옹크리고 있듯이 시골 변소의 지붕
끝에서 벌벌 떨고 있었다.
"자 봐.... 오빠가 나쁜 뱀들을 다 쫓아
버렸잖아.... 내 얼굴을 봐...."
"오빠?"
"그래.... 나 김관식이야.... 관식이
오빠...."
어둠 속에서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공포와 절망의 끝에서 그녀가 내미는 차디찬
손. 이제 누가 그녀의 그 아픈 손을 잡아줄
것인가.
"걱정말고 내려가자.... 오빠하구 내려가면
아무 일도 없어.... 뱀들도 내가 다 쫓아
버렸어...."
그녀의 손을 잡고 사다리를 내려오면서
관식은 마치 금이 간 유리 항아리를 가슴에
유리항아리는 여기저기 작은 금이 가서
이제는 힘센 남자가 후, 하고 입김을 불기만
해도 후루루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그런
항아리였다.
그녀는 간신히 방에 들어오자마자 감기약을
찾았고, 관식은 할수 없이 주머니에 감추어
두었던 알약들을 내주었다.
약국에서 이틀치의 약을 샀으나 그녀는 단
두 번에 그걸 모두 먹어버린 것이다.
그때서야 관식은 그녀가 사달라고 하는 그
노란 알약이 마약을 구할 수가 없을 때에
임시 방편으로 먹는 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결국 그녀가 감기에 걸렸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었던 것이다.
불을 켜놓은 채로 관식은 밤새 그녀를
지켰다.
약을 삼키고 나서 30분쯤 됐을까....
그녀가 평온해진 얼굴로 말했다.
"오라버니.... 나.... 죽여 주세요."
7. 이슬과 같이 사라지다
-죽여 주세요.
-오라버니 손에 죽고 싶어요.
그녀는 관식에게 몇 번이나 그런 말을
했다. 그러나 관식은 그녀의 그 말이 그저
그녀의 절망의 표현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게다가 입버릇처럼 조선족들은 주겠다고
하지 않는가. 배고파 죽겠다.... 배불러서
죽겠다.... 슬퍼 죽겠다.... 좋아 죽겠다....
아마도 기뻐서 죽겠다라거나 즐거워서
죽겠다라는 표현을 쓰는 민족은 단군의
자손밖에는 없으리라.
그러나 물론 관식은 세희 그녀가 죽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 그런 식의 말버릇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더욱이 어떤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관식은 때때로 죽여 달라는 그녀의
말을 심각하게 생각한 것은 사실이었다.
아니 그녀가 그런 말을 하기 전에도 이
여자를 죽여 버리고 싶다는 순간적인 충동이
일어났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녀가 슬리퍼를 신은 채로 학교 교문 앞에
나타났을 때, 혹은 시도때도 없이 교무실에
전화를 해서 갖은 핑계를 대면서 돈을
요구했을 때.... 시립병원 철문 안에 갇혀
있는 그녀를 봤을 때 차라리 내 손으로 이
여자의 마지막 남은 목숨을 끝장내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잠옷차림으로 시골 변소간의 지붕
위에 올라가 발작을 하는 그녀를 보고
절망이라는 말만을 되씹고 있을 때 그녀가
막연하게나가 그녀를 죽여 버리고 싶은
살의(殺意)가 자신의 몸에 전율처럼 흐르고
있음을 느꼈다. 토굴의 문은 단단히 손보고,
토굴 속에다가 전기를 가설해서 전기담요와
간이침대와 요강을 갖추어 놓은 다음에
관식은 토굴 관리인인 박노인에게 단단히
일러 놓았다.
"저 여자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믿으면
안됩니다.... 노인장이 보셨다시피 저 여자는
가끔 제정신이 아니니까요.... 그러니까
절대로 제가 얘기할 때까지는 문을 열어 주면
안됩니다.... 노인장도 저 여자 발작하는
것을 보셨죠?"
"알았어유.... 지서에서 알면 뭐라고 할
것인데...."
"여기다가 며칠만 가두어 둘 거예요. 제가
동안까지만요.... 밥이나 삼시 세때 넣어
주시면 돼요...."
"밤마다 동네 시끄러운 일 안 생길까
모르겠네요...."
"괜찮을 겁니다...."
"글쎄요.... 토굴이 동네에서는 좀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서두 별 일이 없어야 할
것인데.... 헌데 무슨 병이래우?"
"그런 병이 있어요.... 좌우지간에 그 여자
무슨 얘기를 하더라도 문 열어주고 혼자
놔두면 큰일이 생겨요.... 아시겠어요?"
"알았습니다."
'정신 교정원'이라는 곳을
찾아내기까지에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다.
천안시내를 빠져나가서 일반국도로 접어드는
평범하게 보이는 2층 건물에 '정신
교정원'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다만 그
2층 건물의 모든 창문들을 완벽하게
블라인드로 가리고 있었다.
구멍가게 두 개를 낼 수 있는 칸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그 한쪽으로 유리문이
가리고 있어서 음침한 느낌이 들었다.
관식은 심호흡을 하고 그 유리문을 밀고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유리문을 밀고 들어서는 관식을 향해서
그런 인사를 한 사람은 사십대의 중년
여자였다. 얼굴이 해맑고 살집이 깨끗했다.
"저 원장님 계신가요?"
'정신 교정원'이니까 '원장'이라고 그곳
책임자를 부를 것이라는 생각에서 그렇게
"잠시 나가셨는데요. 어디서 오셨지요?"
"예.... 저 환자 문제로 서울에서 전화를
한 사람입니다만...."
"그러세요? 좀 앉아서 기다리십시오...."
조그만 사무실이었다. 벽 쪽으로 책장이
놓여져 있었고, 그 책장 앞에 큰 책상이
있었다. 물론 근사한 회전의자가 있었고,
책상 위에 원장 이 아무개라는 명패와
전화기, 그리고 그 책상 앞에 호사스럽게
생긴 응접세트가 놓여져 있었다.
관식은 거기 앉아서 응접실 의자의 왼쪽,
그러니까 거기 찾아온 손님의 눈에 가장 잘
띄는 곳에 붙어 있는 것들을 하나씩 살펴
나갔다.
'최면술사 자격증' 본적, 생년월일.... 위
사람에게 최면술사의 자격을 수여함....
선거관리위원으로 위촉합니다.... 00당 당수
아무개.... 그 바로 옆에는 태권도 공인
5단을 인정함.... 귀하를 00 경찰서 청소년
선도위원으로 위촉함.... 그리고 각종
표창장들이 붙어 있었다.
결국 그 벽에 붙어 있는 위촉장과 감사장과
표창장들이 그곳 원장의 이력을 한눈에
말해주고 있었고, 그가 보통 사람이 감히
어떻게 해볼 수 없는 화려한 지방유지라는
것을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유리문이 열리고 들어선 중년 사내....
눈이 부리부리하고 완강한 턱을 가진 사진
속의 사내, 큰 키의 딱 벌어진 어깨르러 가진
그 사내가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들어섰다.
"서울서 전화하고 온 손님이신데요...."
"아, 그래요.... 이거 기다리게 해서
"서울 근교에 있습니다."
"그럼, 내일이라도 데려올 수가 있겠지요?"
"물론입니다만.... 치료는 어떤 식으로
하는 건가요?"
"전화로 대충 말씀은 드렸습니다만, 솔직히
말해서 치료보다는 수용이라는 편이
낫겠지요. 보호자로부터 숙식비 정도 받고 또
이곳 유지들과 기관의 협조를 얻어서 사회나
가정에 그냥 놔두면 여러가지로 곤란한
사람들을 보호하고 있는 정도입니다....
그래도 여기는 양호한 편이에요..... 산속에
있는 무연고자 요양소 같은 곳에서는 한
방에다가 환자를 수십명씩 넣어 놓고, 경우에
따라서는 쇠사슬로 묶어 놓기도
하니까요...."
관식은 그 정신 교정원의 원장으로부터
정신 이상자, 간질환자, 노이로제 환자,
약물중독자를 속성 치료합니다. 약도,
전화번호....
그런 광고는 그야말로 하나의 선전에
불과했다.
정신 교정원의 원장과 그런 얘기를 하는
사이에 철문이 열렸고 사람이 하나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관식은 힐끔 그쪽을
쳐다보았다.
철문 안쪽에 있는 침침한 방들 앞에 나와
앉아 있는 환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잠깐
살펴보아도 정신이 나간 사람들의 넋빠진
모습들이 보였다.
"잠깐 살펴볼 수 있을까요?"
"환자르러 데려 오세요...."
천천히 그러나 완강한 말투로 그가 말했다.
하겠습니다, 하고 관식은 일어섰다.
직접 살펴보니까 전화번호부나 혹은 신문
그도 아니면 전신주에 붙어 있는 그런
광고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또한 따지고 보면 싸구려 하숙집의
한달 하숙비보다 못한 금액의 요양비를
가지고 근사한 전문병원이니 개인병원을
기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차피 그 정신 교정원의 원장 말마따나
가정이니 사회에 그냥 놔두면 곤란한
사람들을 수용하는 정도가 아니겠는가.
말이 근사해서 수용이지 그것은 가두어
둔다는 얘기였다. 그렇다고 한다면 천마산의
토굴보다 나을 것이 뭐가 있다는
얘기인가....
|
첫댓글 잘봅니다..~~
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