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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오사카의 심벌은 뭐니 뭐니 해도 오사카 성(大阪城)
이번 일본여행의 마무리를 오사카의 상징인 오사카성에서 혼란의 전국시대(戰國時代)를 끝내고 통일시대를 열어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이야기로 하려고 한다.
오사카조(大阪城)로 발음되는 오사카 성을 굳이 대번성(大繁盛)을 뜻하는 「다이한조(大阪城)」라고 발음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로 상업의 도시 오사카의 심벌은 바로 이곳의 웅장하고 화려한 오사카 성이다.
천수각에는 중요 문화재를 포함한 귀중한 역사 자료가 전시되어 있으며, 기계 장치로 작동되는 「가라쿠리 다이코키(大閣記)」와 영상을 구사한 「오사카 나쯔노친도(夏之陣圖) 병풍세계」등 역사를 재미있게 배울 수 있는 박물관이다. 물론 천수각에서 내려다보는 시내 전망도 최고이다. 도쿠가와(德川) 시대의 망루, 축성의 고난들을 말해주는 거대한 바위로 둘러싸인 돌담 등, 역사의 무게를 느끼게 되면 조금은 심각한 기분에 젖을 것이다. 주변은 오사카성 공원으로 조성되어 매화나무 1,250그루와 벚나무 4,500그루의 꽃을 심어 아름답기로 유명하며, 혼마루, 니노마루 일대에는 특별사적으로 에도시대 이후의 오래된 건조물 13채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가까운 근처에는 나니와노미야 궁 유적(難波宮跡)과 오사카박물관이 있다.
오사카(이시야마)혼간지 절의 시대
1496년 정토진종(淨土眞宗)의 렌뇨상인(蓮如上人)은 지금의 오사카성 부근에 방사(坊舍)를 지었다. 그후 오사카(이시야마)혼간지(本願寺)라는 큰 사원이 되어 강대한 세력을 떨쳤다. 그러나 1580년 천하통일을 목표로 하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게 굴복하여 혼간지 절은 주위의 시가지와 함께 불타고 말았다.
도요토미 시대의 오사카성
오다 노부나가 사후 정치의 주도권을 잡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1583년 혼간지 절터에 오사카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천하통일을 이룬 히데요시를 상징하는 커다란 성곽이 완성되었으나 히데요시 사후 정권은 도쿠가와(德川)가문이 잡게 되어 1615년 오사카 여름전투에서 오사카성은 낙성, 도요토미 가문은 멸망하였다.
도쿠가와 막부에 의한 오사카성 재축
오사카성은 2대장군 도쿠가와 히데타다(德川秀忠)의 명령에 의해 1620년부터 약 10년에 걸쳐 전면적으로 재축되었다. 천수각은 1665년에 낙뢰 때문에 소실하고 말았으나 오사카성은 에도시대(江戶時代)를 통해 도쿠가와막부(德川幕府)의 서일본지배 거점으로서의 역할을 계속하였다. 막부가 멸망해서 내전이 시작된 1868년에는 많은 건조물이 소실하였다.
근대의 오사카성 천수각 부흥
근대의 오사카성은 군사시설로소 사용되었다. 1931년 오사카시민들의 기부에 의해 현재의 천수각이 부흥되어 박물관시설로서 오늘날에 이어지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의 폭격 때문에 큰 손해를 입었으나 전후는 사적공원으로서 정비되었다.
쇼군(將軍)들이 정권을 잡기 시작한 것은 헤이안(平安)시대(794~1192)가 끝나고 미나모토노 요리모토(源賴朝)가 가마쿠라 바쿠후(鎌倉幕府)를 열어가기 시작한 후부터다.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을 일반적으로 쇼군(將軍)이라고 한다. 원래는 에미시를 토벌한 총대장에게 주던 직명이었다. 720년 다지히노 아가타모리(多治比懸守)가 처음 정이장군에 임명된 이래, 오토모노 오토마로(大伴弟麻呂),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坂上田村麻呂) 등이 정이대장군에 임명되었다. 정이대장군의 거처를 바쿠후(幕府)라고 불렀다.
바쿠후란 본래 중국에서 장군의 막영(幕營)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것이 일본에서는 무가 정치의 수반인 정이대장군, 즉 쇼군의 거처를 의미하게 되었다. 이러한 바쿠후의 개념은 에도시대 후기에 성립했으며, 쇼군을 수장으로 하는 정권 자체를 바쿠후라고 한다. 정청(政廳)의 소재지 이름을 따서 가마쿠라 바쿠후, 무로마치 바쿠후, 에도 바쿠후라고 부르는 것은 그러한 정권을 의미하는 것이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정권도 무가 정치에 속하지만, 두 사람은 쇼군에 임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정권을 바쿠후라고 하지 않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1536~1598년,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무장이다. 오다 노부나가의 사업을 이어받아서 무력으로 전국을 통일하면서 바쿠한(幕藩)체제의 기초를 만들었다. 히데요시는 오와리(지금의 나고야)에서 농민이자 하급 보병인 아시가루(足輕)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릴 때의 이름은 기노시타 도키치로(木下藤吉郞)였다. 오다 노부나가에 출사하여 전공을 세우고 무장이 된 뒤 이름을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라 했다. 주코쿠 지역의 모리(毛利)씨를 정벌할 때 오다군의 총대장이 되었는데,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가 노부나가를 자살하게 했다는 소식을 들은 뒤 적과 휴전하고 야마자키 전투에서 미쓰히데를 격파했다. 노부나가가 죽은 뒤 주도권을 둘러싸고 시바타 가쓰이에(柴田勝家)와 대립했으나, 1583년 가쓰이에를 격파하고 오사카성을 쌓고 전국 통일의 거점으로 삼아 경기 지역을 장악했다. 1584년 노부나가의 차남 노부카쓰(信勝)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연합군과 고마키 나가쿠테에서 싸웠으나 외교로 이에야스를 복종시키고 노부나가의 후계자 지위를 확립했다. 1585년 시코쿠, 1587년 규슈, 1590년 관동, 동북 지역을 평정해서 전국 통일을 달성했다.
히데요시는 1585년 관백(關白), 1586년 태정대신에 임명되고 천황으로부터 도요토미라는 성을 받았다. 1588년 교토에 건설한 저택 쥬라쿠다이(聚樂第)에 고요제이 천황을 맞이해서 다이묘들에게 충성을 서약하게 했다. 1591년 관백을 양자인 히데쓰구(秀次)에게 물려주고 다이코(太閣)가 되었으며, 1592년부터 임진왜란·정유재란을 일으켜서 1598년 죽을 때까지 싸움을 게속했다. 히데요시는 토지조사를 시행하여 병농분리의 사회 체제를 만들고, 토지의 생산량을 기초로 다이묘의 영지·군역과 농민의 부담을 정했다. 또 전국에 220만 석의 직할 영지를 두었으며, 금·은의 광산을 직영화해서 화폐를 주조했다. 이러한 히데요시의 정책은 에도 시대의 바쿠한(幕藩)체제의 토대를 만들어 주었다.
오사카성(大坂城) : 원래 혼간사(本願寺)의 본거지였던 오사카는 정치 중심지인 교토로 들어가는 육해 교통의 요충지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 곳을 통일 사업의 거점으로 성을 쌓았다. 공사는 히데요시가 여러 다이묘들에게 명하여 1583년부터 시작되었고 인부 3만 명을 동원하여 3년 정도 걸려 완성했다고 한다. 성의 규모는 아즈치성의 두 배나 되었고, 요도 강 강물을 끌어들여 판 해자와, 외관은 5층, 내부는 9층의 천수각으로 이루어진 이 성은 당시 일본 최대 성으로 난공불락이라 일컬어졌다. 아래에서 3층까지는 돌담을 쌓고 내부는 금박으로 장식해서 장엄하고 화려했다. 성하(城下)의 시가도 정비하여 교토·사카이 그 밖의 도시에서 상인들을 옮겨 와 성하 도시를 번영시켰다. 오사카성은 히데요시에 이어 아들 히데요리가 거처하던 성이었는데, 오사카 니쓰노진 때 무너지고 불탔다. 이후 에도 바쿠후가 재건하여 1619년 직할령으로 하고 오사카 죠다이(大坂城代)를 설치했으나 1868년 화재로 대부분 소실하고, 현재의 천수각은 1931년에 재건한 것이다.
나니와궁 유적과 오사카 역사박물관
오사카 성의 남쪽, 우에마치 다이치(上町台地) 가운데 마치 가장 높은 곳을 차지한 듯이 나니와궁 유적(難波宮跡)」이 펼쳐져 있다. 전기 나니와궁은 고토쿠(孝德)천황 시대의 나가라토요사키노미야(長柄豊崎宮, 625년 완성)라고 추정되고 있으며,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도읍지의 유적이다. 덴무(天武)천황 시대에 당시의 대장성에서 발화된 불로 소실되어 버린 흔적이 남아 있다. 후기 나니와궁은 나라(奈良)시대의 쇼무(聖武)천황 시절에 재건된 것으로 여겨지며, 이들 모두는 사적 공원으로 정비되고 있는 중이다. 1500년이 넘는 이러한 오사카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체감해 볼 수 있는 곳이 2001년 11월 3일 오픈한 「오사카 역사박물관」이다. 관내에는 고고학 자료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오사카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나니와노미야(難波宮) .. 645년 신라계인 나카토미노 가마타리(中臣鎌足)의 도움으로 백제계인 소가노 이루카(蘇我入鹿)를 궁중에서 죽이고 왕위쟁탈전에서 승리한 고토쿠(孝德)천황은 연호를 다이카(大化)로 바꾸면서 다이카개신(大化改新)이라는 개혁정치를 단행하면서 수도를 이곳 나니와(難波)로 옮기게 된다.
그리고 그 공노로 나카토미노 가마타리(中臣鎌足)는 후지와라(藤原)라는 성을 받고 그 후 오랫동안 후지와라(藤原) 가문은 명문가문으로 성장하게 되는데, 옛날 SBS주말기획 천년지애에서 나오는 가문이 바로 이 후지와라(藤原)가문인 것이다.
신사이바시스즈(新齊橋) 도로는 에도 시대부터 세련된 쇼핑 나들이길
미도스지 도로의 동쪽과 평행하게 나있는 길이 신사이바시스지 도로. 에도 시대부터 이어져온 전통 있는 옛 상점들이 많이 남아 있는 유서 깊은 쇼핑거리이다. 북쪽으로는 직물 도매상들이 모여 있는 「도부이케스지 도로」. 도톰보리가와 강을 가로지르는 「에비스바시 다리」를 건너면 남쪽은 「에비스바시스지 도로」이다. 최근 주목받고 있는 곳이 미도스지 도로와 나가호리도리 도로의 교차점 부근. 세계적 고급 브랜드의 직영점들이 밀집되어, 패션센스를 자랑하고 있다.
문학과 역사의 거리는 마음의 고향
오사카에서도 비교적 높은 지대인 이곳 우에마치 다이치는 오사카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를 지녀 이른바 오사카의 뿌리라고 불려지는 지역. 그 남쪽 현관인 JR저널 덴노지 역. 역 주변의 쇼핑 빌딩에는 젊은이들이 북적댄다. 역 앞의 덴노지 공원에는 연못을 둘러싼 모습이 볼만한 「게이타쿠엔 정원」과 「오사카 시립박물관」, 그리고 「덴노지 동물원」등이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그 옛적, 화려했던 시절의 잔영과 젊은이들의 발랄한 표정이 교차하는 거리가 바로 이곳 덴노지 부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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