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사무총장을 하면서 보고 배우고 느낀 것이 대한민국 발전에 도움이 된다면 한 몸 불살라서 노력할 용의가 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12월20일(현지 시각) 뉴욕 유엔본부에서 가진 한국 특파원단 기자회견에서 한 말이다. 사실상 대선 출사표다. ‘기름장어’란 별명이 붙은 반 총장이 이날은 ‘기름기’를 뺐다. 직설 화법으로 “물불 가리지 않겠다”고도 했다. 46년 외교관 옷을 벗고 정치인으로 변신한 모습이었다. 국내 정치권은 술렁였다. 반 총장이 신당을 창당할지, 비박계 ‘보수 신당’에 합류할지, 제3지대 세력과 뭉칠지 등 여러 관측이 쏟아졌다. ‘차기 대선 주자 지지율’ 여론조사에서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1~2위를 다투고 있는 반기문 사무총장. ‘유력 대선 주자’ 반기문이 돌아온다. 대선 주자는 혹독한 검증 과정을 거쳐야 하고, 반 총장 역시 예외는 아니다. 2004년 1월 외교통상부 장관 후보자로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받았던 검증은 ‘예선전’에 불과하다.
‘본선’은 지금부터다. 리더십과 정책, 비전뿐 아니라 사생활 문제까지 검증 대상이다. 그런데 반 총장이 2009년 ‘박연차 게이트’ 당사자인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거액을 받았다는 복수(複數)의 증언이 나와 파문이 일 전망이다. 시사저널이 만난 복수의 인사들은 “반기문 총장이 2005년 외교부 장관 시절 20만 달러, 유엔 사무총장에 취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2007년에도 3만 달러 정도를 박연차 회장으로부터 받았다”고 주장했다. 반 총장이 무려 23만 달러(약 2억8000만원)를 수수했다는 것이다. 만약 이 같은 증언이 사실이라면 파문이 클 전망이다. 우선 도덕성과 청렴성을 두루 갖췄다는 반 총장 이미지가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 이는 향후 대선 구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또한 ‘박연차 게이트’ 수사 당시 드러난 박 회장으로부터 금품을 받은 정·관계 인사 가운데 반 총장이 가장 많은 액수를 받은 셈이 된다. 법적인 책임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반 총장은 언제, 왜, 박 회장으로부터 거액을 받았던 것일까. 시계를 2005년으로 되돌려 보자. 2005년 5월2일부터 5일까지 3박4일 일정으로 응우옌 지 니엔(Nguyen Dy Nien) 베트남 외교장관 일행 7명이 방한했다. 2001년부터 해마다 개최해 왔던 한-베 외교장관 회담의 일환이었다. 당시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과 응우옌지 니엔 장관은 2004년 10월 노무현 대통령과 2005년 4월 이해찬 국무총리의 베트남 방문 때 합의된 양국 실질 협력관계 증진방안에 대한 이행 문제 등에 관해 논의했다.
“2005년 한남동 공관서 20만 달러 수수”
방한 이틀째인 5월3일 니엔 장관 일행은 삼성전자 시찰, SK텔레콤 사장 주최 오찬, 한-베 외교장관 회담을 가졌다. 이날 저녁엔 반기문 장관 주최 환영 만찬이 한남동 외교부 장관 공관에서 열렸다. 이날 만찬엔 박연차 회장도 초청받았다. 주한 베트남 명예총영사 자격이었다. 박 회장은 2003년 7월, 3년 임기인 주한 베트남 명예총영사로 재위촉됐다. 박 회장은 1994년 7월 ‘태광비나’라는 베트남 현지법인을 설립한 뒤 1만2000여 명의 현지인을 고용하고 연간 1억 달러 이상 수출실적을 기록하는 등 베트남 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가 명예총영사로 위촉된 이유다.
그런데 이날 만찬 행사가 열리기 직전 박 회장이 반 장관에게 거액을 줬다는 증언들이 나왔다. ‘박 회장과 가까운 지인’은 시사저널과 여러 차례 만나 “박 회장이 나에게 직접 했던 말”이라며 이렇게 전했다. “베트남 외교장관 일행 환영 만찬이 열리기 한 시간 전 쯤 박 회장이 한남동 외교부 장관 공관에 먼저 도착했다. 그리고 반 장관 사무실에서 20만 달러(약 2억4000만원)가 담긴 쇼핑백을 전달했다. 반 장관에게 ‘거마비 등으로 잘 쓰시라’는 말도 했다고 한다.” 이 증언을 한 ‘박 회장과 가까운 지인’은 본지에 자신의 실명을 공개하지 말아줄 것을 요청했다.
이와 유사한 증언은 사정 당국 쪽에서도 나왔다. 2015년 6월 만났던 ‘사정 당국 핵심인사’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대선 주자로 나오면 검증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상당히 험난할 것”이라며 ‘반 총장의 돈 문제’를 거론했다. 이 인사는 “반 총장이 외교부 장관 시절 박연차 회장으로부터 수억원을 받았다”며 “분명한 팩트”라고 강조했다.
반 총장이 ‘박연차 돈’을 받은 게 한 번이 아니었다는 증언도 나왔다. 시점도 2007년 1월 유엔 사무총장에 취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고 한다. 앞서 언급한 ‘박회장과 가까운 지인’은 “반 총장은 유엔 사무총장이 된 다음에도 박 회장 돈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 지인이 전한 당시 정황은 이렇다.
“반 총장이 유엔 사무총장으로 취임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2007년 초였을 거다. 뉴욕에 박 회장이 잘 아는 식당 사장이 있다. 박 회장이 그 식당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반 총장이 식사하러 오면 ‘사무총장 취임 축하 선물’로 3만 달러 정도를 주라’고 했다. 실제로 반 총장에게 돈이 전달된 것으로 안다.”
“박연차, 반기문과 사돈 맺고 싶어 했다”
그렇다면 박 회장은 왜 반 총장에게 거액을 줬던 것일까. 여러 포괄적인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 한남동 공관에서 20만 달러를 준 것에 대해 ‘박 회장의 지인’은 “박 회장이 만찬 행사 전에 미리 반 장관에게 돈을 줌으로써 베트남 장관 일행이 만찬장에 왔을 때는 반 장관과 가까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베트남 장관 일행에게 박 회장이 한국에서 상당히 영향력 있는 사업가로 보였을 것이다”고 말했다.
반 총장 직무와도 관련됐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박 회장은 베트남에서도 사업을 하고 있다. 따라서 ‘외교 업무’와 관련해 외교부의 도움이 필요할 수 있다. 이런 차원에서 외교부 수장이었던 반 총장에게 “잘 봐 달라”는 메시지로 금품을 건넸다는 분석이다.
또한 박 회장이 반 총장과 사돈을 맺고자 했다는 주장도 나왔다. 앞서 언급한 ‘사정 당국 핵심인사’는 “박 회장은 당시 반 총장과 사돈을 맺고 싶어 했다”며 “박 회장이 반 총장 집안과 사돈을 맺기 위해 돈을 갖다준 것 같다”고 언급했다. 박 회장은 슬하에 1남3녀, 반 총장은 1남2녀를 두고 있다. 박 회장이 ‘정략결혼’을 염두에 두고 예비 사돈(반 총장)에게 ‘호의’를 베풀었다는 주장이다. 두 집안 사이에 실제 혼담이 오갔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두 집안은 현재 사돈지간이 아니다. ‘사정 당국 핵심인사’는 “박 회장이 반 총장에게 거액을 줬음에도 사돈을 맺지 못해 불만을 갖고 있었다는 얘기도 있다”고 말했다.
박 회장이 반 총장에게 금품을 전달한 의혹은 2009년 ‘박연차 게이트’를 수사했던 대검 중수부에서도 인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당시 중수부가 이 같은 의혹을 덮었다는 것이다. 2009년 3월14일, 대검 중수부는 ‘박연차 정·관계 로비 의혹’에 대한 본격 수사에 들어갔다. 이 사건은 이인규 중수부장을 비롯해 홍만표 대검 수사기획관, 우병우 중앙수사1과장 등이 맡았다. 정·관계 인사들을 줄줄이 소환 조사하고 구속시켰다. 그 과정에서 박 회장이 검찰에서 반 총장에게 돈 준 사실을 실토했다고 한다. 당시 박 회장의 변호인단에 속했던 한 변호사의 증언이다.
“당시 검찰이 경남 김해에 있는 태광실업 본사와 계열사, 박 회장 자택 등을 샅샅이 압수수색했다. 압수수색을 통해 확보한 서류를 토대로 박 회장에게 아주 세세한 것까지 물어보며 조사했다. 그러자 2009년 3월 박 회장은 검찰 조사를 받던 중 반 총장에게 돈 준 사실을 털어놨다. 검찰이 묻기도 전에 박 회장이 먼저 실토한 것이다. 그러자 수사검사 등 수사진은 진행하고 있던 박 회장 신문을 멈추고 조사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몇 시간 후 돌아와 박 회장에게 ‘반 총장이 유엔 사무총장으로 선임된 지 2년밖에 안 됐다. 현직 사무총장인데 이 사실이 알려지면 사무총장 자리에서 물러나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국익(國益) 차원에서 반 총장 금품 제공 사실은 덮어두고 가자’고 했다. 그러면서 박 회장의 신문조서에서도 반 총장 금품 제공 진술은 삭제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12월16일 뉴욕 유엔본부에서 가진 유엔 출입기자단과의 기자회견에서 “한국 국민들이 현재의 위기 극복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포용적 리더십을 간절하게 원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 Xinhua 연합
“검찰, 반기문 금품 수수 의혹 덮었다”
이 변호사의 증언이 사실이라면, 당시 수사 수뇌부였던 이인규·홍만표·우병우뿐 아니라 그 ‘윗선들’도 반 총장의 금품 수수 의혹을 인지했을 가능성이 크다. ‘박연차 게이트’ 수사에 참여했던 전직 검찰 관계자는 ‘박 회장이 당시 반 총장에 대해 진술했느냐’는 물음에 “그런 유사한 내용을 들어봤는데 자세한 내용은 모른다”고만 답했다.
정치권 일각에서도 ‘박연차-반기문의 돈’ 소문이 퍼져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여권의 한 인사는 최근 시사저널과 만나 “내가 만난 몇몇 새누리당 의원에게서 ‘반기문이 박연차 돈을 받았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다들 ‘대선 정국에서 문제가 될 수 있다’고 했다”고 전했다. ‘박연차 돈’이 반 총장에게 실제로 전달됐다면 법적 책임도 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는 정치적 타격과는 별개 문제다.
만약 반 총장이 박 회장으로부터 받은 돈이 대가성 있는 뇌물로 밝혀진다면 사법처리 대상이다.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특가법)상 뇌물죄의 경우 공소시효는 15년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2005년과 2007년 두 차례 금품이 오갔다면 공소시효는 아직 살아 있다. 또한 특가법 제2조 1항에 따르면, 수뢰액이 1억원 이상인 경우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도록 돼 있다. 다만 검찰이 이번에 제기된 ‘반 총장 금품 수수 의혹’에 대해 수사에 나설지는 미지수다.
시사저널은 반 총장의 반론과 해명을 듣기 위해 ‘23만 달러 수수 의혹’ 등에 대한 질의서를 12월21일 반 총장 측에 이메일로 전달했다. 이에 대해 반 총장 측은 12월23일 오전 이메일을 통해 “이러한 주장이 너무나 황당무계하여 일고의 가치도 없다. 평생을 국내외에서 공직자로 생활하면서 도리에 어긋남 없이 올바르게 살아왔다”는 짧은 답변서를 보내왔다.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 측 반론
시사저널은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이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에게 돈을 건넸다는 의혹과 관련해 박 회장 측 입장을 듣기 위해 12월20일 오전 질문지를 이메일로 보냈다. 박 회장 측은 질문지를 보낸 지 3일 만인 12월23일 오전 아래와 같은 답변서를 보내왔다. 태광실업 측은 “박연차 회장은 기업인 중에 유일하게 만기 출소했는데, 사실 여부를 떠나서 이런 내용들이 기사화될 경우 기업 활동 하기가 어려운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태광실업 측은 또 자신들의 입장을 충분히 반영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시사저널은 질문지·답변서 전문을 그대로 공개한다.
2005년 5월 반기문 외교부 장관이 베트남 외교장관 일행 7명을 공관으로 초청했을 당시 함께 참석하신 것으로 확인됐는데, 그때 상황에 대해 기억이 나는가.
베트남 외교관만 초청하는 행사 자리에 간 적은 없다. 내(박연차 회장) 기억으로는 수많은 각국 외교관들이 모이는 만찬에 간 적은 있었다. 각계각층이 모이는 자리의 일원이었다. 그 당시 베트남 명예총영사 자격으로 간 것으로 기억된다.
박 회장께서 이날(2005년 5월) 1시간 정도 앞서 공관에 도착해, 반 장관을 미리 접견했다고 들었다. 그리고 반 총장에게 미화 20만 달러를 주셨다는 내용에 대해서 검찰에 진술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반 총장에게 돈을 줬던 이유는 무엇인가.
돈을 건넨 적이 없다. 수많은 인원이 모이는 이런 만찬석상에 1시간 정도 일찍 갈 수도 없는 것이고 이런 자리에서 그런 현찰을 줬다는 내용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물론 다른 장소에서도 준 적이 없다. 따라서 검찰에 이런 얘기도 한 적이 없다.
위 내용을 2009년 검찰수사 때 먼저 진술했다가 검찰 측에서 ‘국익을 위해서 이 내용은 수사에 포함시키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했던 것으로 안다. 당시 검찰에서 먼저 진술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사실이 아니다. 그러므로 검찰에서 진술한 적이 없다.
2007년 초 반 총장이 유엔 사무총장 취임 후 뉴욕의 박 회장님 단골식당 사장에게 전화해서 반 총장에게 취임 축하 명목으로 3만 달러를 전달하라고 했고, 나중에 반 총장이 이를 찾아갔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이런 사실이 없다. 이상하지 않은가? 어느 누가 그 큰돈을 전달할 때 단골식당이라고 그곳을 통해서 주겠는가. 이치에 맞지 않는 허구다. 어떤 경우에도 결코 돈을 건넨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