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風雲의 翠玉城
남쪽으로는 광활한 사천성(四川省)의 분지를 드넓게 포함한 곳. 남북(南北)으로 이백 리, 동서(東西)로 사백 리의 넓은 대지 위에 일흔 두 개의 현(縣)과 세 개의 성(城)을 포함하고 있는 곳이 있다. 이 넓은 땅 위에 사는 인구는 무려 육십만을 헤아리고, 군사만도 팔만(八萬)에 이르는 곳. 이 사천성에서 가장 신비한 성역으로 알려진 곳. 그곳의 중심부에는 인구 십만이 사는 거대한 고성(古城)이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솟아 있었다. 취옥성(翠玉城)!바로 취옥성이다. 고성의 성벽 전체를 푸른 벽돌로 쌓아올렸고, 벽돌벽에는 이끼가 끼어 있어 더욱 더 신비하고 고풍스러운 멋을 풍기는 고성 취옥성. 홍무제 당시 그의 한 팔이었던 천하의 명장 천위대장군 냉염이 은퇴하여 왕위를 하사받고 이곳을 통치한 지 백 이십여 년 이래에 취옥성은 고고하게 중원에서 가장 신비스러운 곳으로 꼽혀왔다. 위치가 북경에서 먼 까닭도 있지만 홍치제가 왕위를 하사하고 영지를 부여했기에 취옥성은 중원에서도 대명제국의 통치를 받지 않는 유일한 곳이었다. 취옥성주는 이 땅 위에서는 황제와 다름없는 지대한 권위를 지니고 있다. 취옥성의 통치를 받는 백성들은 평안했고, 함포고복(含哺鼓腹)이라, 언제나 부른 배를 두드리며 태평가가 끊일 날이 없었다. 그러나 이렇듯신비하고 성역화된 취옥성에 암운(暗雲)이 깔리기 시작한 것은 바로 십 이 년 전이었다. 취옥성주인 서평왕의 대부인이 의문의 사망을 한 이후 기다렸다는 듯이 서평왕의 적자인 두 아들이 의문의 실종을 당하고... 그때부터 취옥성의 공기는 심상치 않게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던 것이 근래에 들어 서평왕이 지병으로 세상을 뜬 후 취옥성은 더 이상 평안하고 신비한 곳이 아니었다. 풍운이 밀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항상 웃음꽃이피어나고 어디서나 평화스럽던 성내의 분위기는 살벌하게 변했고, 그 무서운 풍운은 취옥성의 영지 곳곳으로 파급되어 나갔다. 이유는 한 가지였다. 서평왕의 서출인 아들이 암암리에 성주의 자리를 놓고 대암투를 벌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과거의 평화는잊혀진 지 오래된 이야기고, 이로 인해 문(文)을 사랑했던 취옥성은 어느 샌가 무(武)를 숭상하는 살얼음판으로 변해 버렸다. 서평왕의 서출세 아들은 취옥성 내에 독자적인 영지를 암암리에 확보한 채 서로를 견제했다. 취옥성의 젊은이들은 모두 붓을 꺾고 병기를 든 채 무공연마에 몰두했다. 약육강식의 풍조가 자연스럽게 전염병처럼 번져가고.. 취옥성은 마치도화선에 불이 붙은 거대한 폭약(爆藥)과 같이 변해 있었다. 그러나 취옥성의 고고한 모습은 가을 하늘처럼 오늘도 우뚝 선 채 푸른 모습을 고고하게 보이고 있을 뿐이었다. 가을도 깊어 유난히 찬 바람이 몰아치던 날, 냉검상은 어린나이로 쫓겨나야 했던 취옥성으로 냉곡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입성했다. 그것은 취옥성에 또 다른 풍운을 예고하는 것이었으니.. * * * 사람의 발은 언제나 땅을 밟고 있다. 그것은 별로 신기할 것이 없는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때로는 땅을 밟고 있다는 사실이 더없이 가슴을 벅차오르게 만드는 법도 있는 것이다. 냉검상이 그랬다. 십 이 년 전의 죽음에서 도피하기 위해 취옥성의 영지에서 발을 떼어 놓은 냉검상의 마음은 벅차오르는 감동과 함께 착잡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다시는 중원에발을 들여놓지 않겠다고 맹세했던 것이 바로 이곳 때문이었다. 그 어린시절 작은 가슴에 온갖 한(恨)과 피맺힌 복수심을 심어 주었던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그러나 그는 돌아온 것이었다. 물론 자신의 신분을 떳떳하게 밝히고 온 것은 아니었지만 그 감정은 실로 감회가 서리고 감동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고고하게 우뚝서 있는 취옥성의 모습을 자신의 눈으로 보았을 때 냉검상은 의문의 죽음을 당한 모친의 생각이 떠올라 가슴이 답답하고 무거웠다. 또한 취옥성으로 들어와 취옥성의 백성들을 보며 그들 사이에 풍기는 살벌한 분위기를 보고는 이제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슬픈 감정까지 맛보았다. 그리고.. 취옥성의 푸른빛 성문 안으로 들어서면서 냉검상은 죽음의 앙금처럼 가라앉아 있는 살의(殺意)를 강렬하게 느꼈다. (죽는 그 순간까지 다시는 밟지 않으려던 이곳.. 하나 숙명처럼 나는 돌아왔다.) 그렇다. 냉검상이 돌아온 것은 숙명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일단 들어온 이상 그냥 가지는 않는다. 무엇인가는 남기고 간다. 최소한 세 개의 목만이라도...) 문득 올려본 가을하늘은 시린 빛을 냉검상의 눈으로 창처럼 찔러왔다. 대연회를 열었다. 화려하고 환상적인 대연회는 무려 보름 간이나 계속되었다. 대연회의 목적은 바로 냉검상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냉검상은 대연회가 꼭 자신만을 위한 것은 아님을 눈치챌 수 있었다. 냉곡의 거처인 이곳 선유원의 내원(內院)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머무르고 있었다. 그들 중에 취옥성의 백성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대다수가 무림의 인물들이었다. 개중에는 서장(西藏), 금천(金川), 천축(天竺)이나 멀리 섬나라의 왜족이라 불리는 동영의 고수들도 상당수가 끼어 있었다. 실로 수백 명에 이르는 인물들이었다. 냉검상은 느낄수 있었다. 냉곡이 그들을 모은 목적은 간단했다. 바로 취옥성의 대권을 차지하기 위한 세력 암투에 이용하려는 것이었다. 보름 간에 걸쳐 화려하게 전개된 대연회는 바로 냉검상을 포함한 그들을 위한 것이었다. 마음의 고통이있는 사람에게는 세월만이 심약(心藥)이라 하지만 , 흐르는 시간은 인간을 기다려 주는 법이 없다. 어느덧 보름 간의 대연회가 끝나고 선유원은 항상 시끌벅적한 분위기에서 조금은 차분하게 변하고 있었다. 선유원. 이곳은 한 마디로 거대한 규모의 장원을 연상시키면 되는 곳이었다. 수만 평의 대지 위에 수십 채에 달하는 전각들이 건립되어 있고, 연무장과 화원, 인공호수까지 있는 독립된 별원이었다. 선유원은 일단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으로 구분되고, 외원에는 취옥성 자체의 무사들과 식솔들이 기거하고 있었다. 그에 반해 더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내원에는 수십 채의 별전이 있었고, 각 별전에는 외부에서 초청되어 온 무림인들이 머물고 있었다. 별전의 규모는 큰 편이어서 수십 개의 방이 딸려 있어 그들이 머물기에 조금도 불편한 점이 없었다. 냉검상은 냉곡의 특별배려로 청운각(淸雲閣)이라는 별전에 혼자 머무르게 되었다. 다섯 명의 미녀 시비가 두 명의 시종까지 딸린, 냉검상이 생각해도 특별대우였다. 이미 가을도 막바지에 달해 창 밖의 풍경은 스산했다. 이미 옷을 벗어 버린 나뭇가지를 흔들며 지나가는 바람도 어쩐지 냉기를 품기 시작한 것 같았다. 조락의 계절 가을은 쓸쓸함을 풍기고 있었다. 냉검상의 뒤에는 그에게 배정된 다섯 명의 앳된 시비들이 정장을 한 채 다소곳이 서 있었다. 맨처음 그녀들은 냉검상의 시비로 배정되면서 바싹 긴장했었다. 소문으로 듣기에 냉검상이 유난히 여자를 밝히는 색광(色狂)이란 것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들은 냉검상에게 오기 전에 서문수에게 불려가 단단히 명령을 받았다. 냉검상이 그 어떤 요구를 하든 들어 주라는 것이었다. 그것이 아무리 심하고 수치스러운 것이라도 거절하거나 실수를 하면 엄벌에 처한다는 것이었다. 그녀들은 취옥성의 영지 내에서는 고르고 고른 미녀들이었고, 한참 꽃다운 나이에 이상과 꿈에 부풀은 여인들이었다. 그러나 취옥성의 삼공자인 냉곡의 명령으로 선유원에 들어온 이상 아무도 명령을 거스릴 수는 없는 것이었다. 억지로 냉검상의 청운각으로 왔지만 그녀들의 마음은 공포와 긴장 뿐이었다. 마치 힘없는 토끼와 사자의 밥이 되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그런데 청운각에서 며칠을 보내도록 냉검상은 그녀들 중의 누구에게도 손을 대지 않았다. 시비들은 몹시 의아했지만 한시라도 긴장을 풀 수는 없었다. 그러나 역시 냉검상은 그녀들에게 손을 대지 않고 며칠을 더 보냈다. 결코 냉검상이 이곳에 들어오면서 군자로 변한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곳은 냉검상의 고향이고, 이곳의 백성들은 자신이 다스릴 뻔한 백성들이었다. 그렇기에 냉검상은 아무리 여자를 좋아해도 욕망이 일지 않았다. 오히려 다섯 명의 시비들을 보면서 측은한 느낌을 갖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는 사이 다섯 시비들은 조금씩 안도감을 찾으면서 제법 명랑하게 냉검상의 시중을 들었다. "......" 한동안 창 밖의 풍경을 바라보던 냉검상은 조용히 내실의 탁자로 와 앉았다. 그러자 다섯 시비들은 갑자기 할 일이 생겼다는 듯이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나는 과일을 깎고, 둘은 냉검상의 뒤에서 어깨를 안마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둘은 냉검상의 또 다른 분부에 대기라도 하는 듯한 자세였다. 냉검상은 상큼하게 신맛이 풍기는 과일 한 조각을 베어물며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삼공자가 합천현(合川縣)으로 갔다고?" 과일을 깎고 있던 홍의소녀가 빠르게 입술을 열었다. "예. 오늘 아침 일찍 떠나셨습니다." "음... 무슨 일로 선유원을 비웠지?" 그러자 왼쪽에서 어깨를 주무르고 있던 청의소녀가 대답했다. "잘은 모르겠지만...귀한 손님을 영접하러 가신다는 것 같았어요." 과일을 깎던 홍의소녀는 자신의 대답을 빼앗겼다는 듯이 잠깐 청의소녀를 흘겨보았다. 청의소녀는 그녀의 표정이 우스운지 킥! 하고 웃었다. 그러나 홍의소녀는 샐쭉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냉검상 앞에 깎은 과일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외원의 무사님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무슨 혁련이라고 하던가 아무튼 복성을 지니신 손님들이라고 합니다." (혁련...?) 흔한 성씨가 아니었다. 냉검상은 잠시 갸웃하다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만해라. 내가 무슨 신경통 환자도 아니고 앉기만 하면 이러니." 청의소녀가 콧등에 주름을 잡으며 말했다. "하지만... 너무 할 일이 없으면 저희들이 문책을 받습니다." 냉검상은 약간차갑게 말했다. "나를 시중드는 것은 나를 편하게 하기 위한 것인데, 내가 편히 있거늘 너희들이 왜 문책을 받느냐?" 냉검상의 기세에 어깨를 주무르던 두 소녀는 일시 긴장한 듯 손을 떼고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그녀들의 모습을 보면서 냉검상은 혀를 찼다. (이거야 원..!) 그때 문 밖에서 굵직한 사내의 음성이 들려왔다. "어르신, 주문하신 물건이 방금 도착했습니다." 냉검상은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들어와." 문이 열리면서냉검상에게 배정된 두 명의 시종이 커다란 상자를 들고 들어왔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냉검상의 앞으로 다가와 상자를 내려놓았다. "열어." 냉검상의 간단한 말이 떨어졌다. 그러자 시종들은 빠르게 손을 놀려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털가죽옷이 가득 들어 있었다. 보름 전에 냉곡이 선물한 털가죽으로 만든 옷이었다. 냉곡은 냉검상이 털옷을 즐겨 입는다는 것을 알고 대파산에서 잡은 최고급 가죽 열 장과, 푸른 색이 은은한 담비 가죽 스무 장, 그리고 불곰의 가죽 한 장을 선물했다. 냉검상은 이 선물에 극히 만족했다. 그는 곧 시종을 불러 취옥성에서 제일 재주가 좋은 재단사를 택해 옷을 만들게 했다. 그 털가죽 옷이 지금 도착한 것이었다. 시종들은 조심스럽게 완성된 털가죽 옷을 꺼냈다. 옷이 세 벌, 조끼와 바람막이 피풍이 각 여섯 벌, 그리고 가죽신이 열 켤레였다. 털옷을 바라보는 냉검상은 지극히 만족한 표정이었다. 냉검상은 시종들에게 말했다. "모두 물러가라." "알겠습니다." 시종들이 물러가자 냉검상은 거울 앞에서 옷을 벗고 털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겉옷은 백호 가죽에 피풍은 불곰의 가죽, 조끼는 푸른 담비가죽으로 차려 입으니 냉검상의 모습은 천애령에서처럼 야성적이고 매력적으로 돋보였다. 더욱이 습관대로 양팔을 끼지 않은 백호 가죽 옷은 재단사가 재주를 발해 가슴털의 무늬로 쌍룡(雙龍)의 모습을 만들어 놓아 더욱 멋들어져 보였다. 담비조끼와 검은 피풍은 더 이상 잘 어울릴 수가 없었다. 더욱이 무릎어림까지 올라오는 털신은 사내다운 매력을 원시적이면서도 강렬하게 풍겨주었고, 머리는 장발로 길게 늘어뜨려 과거 천산에서의 위대한 지배자의 모습이 재현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 거친 털옷과는 천양지차의 고급스러운 가죽옷이었다. 냉검상은 거울 속에 투영된 자신의 모습을 흡족한 표정으로 바라보고는 미인혈을 허리춤에 찔러넣었다. 냉검상이 옷을입는 것을 도와주던 다섯 소녀들은 변해버린 냉검상의 모습에 그만 망연해지고 말았다. 흑의장삼을 입었을 때는 약간 창백하고 문약해 보이기까지 했던 미남자 냉검상이 털옷을 입자 그 기풍이 싹 바뀌어 버린 느낌 때문이었다. 천신(天神)인들 저러할까? 천왕(天王)인들 저렇듯 늠름할까? 마치 거대한 산악처럼 냉검상의 모습이 그녀들의 눈에는 한없이 크게 부각되어 보이는 것이었다. 다섯 시비의 눈은 황홀감에 젖어 한없이 냉검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동안 거울을보던 냉검상은 빙글 몸을 돌렸다. 그리고 다섯 시비를 향해 물었다. "괜찮아 보이느냐?" 과일을 깎아 주었던 홍의소녀가 한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세상에서 나으리보다 멋진 분은 안 계실 것입니다. 취옥성의 수십만 사내 중에서도 나으리에 비견될 남자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냉검상은 지극히 유쾌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난 듯 그는 물었다. "참,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이번에는 어깨를 주물렀던 청의소녀가 재빠르게 대답했다. "무엇인지요?" "취옥성에서 삼공자를 모시고 있는 사람 중에서 회회국(回回國) 출신의 금발미녀가 있다. 아라사란 이름을 지니고 있지. 그녀가 누군 줄 아느냐?" 청의소녀는 약간 표정이 변하면서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그...그 분은.." "말해 봐라." 잠시 머뭇거리던 청의소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내원에서 십년(十年)째 머무르고 계신 회회국의 귀족 에센 대공(大公)님의 쌍동이 따님 중에 한 분이세요." "회회국의 귀족이라?" 냉검상의 두 눈 깊숙한 곳에서는 묘한 빛이 일렁였다. 호기심이었다. 무슨 일로 회회국의 귀족이 십 년째 취옥성에서 머무르고 있단 말인가? * * * 냉검상은 다섯시비 중에 가장 눈이 크고 예쁘장한 소녀 초미(楚眉)의 안내를 받아 선유원의 내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가죽 털옷으로 일신을 감싼 그의 모습은 유독 눈에 돋보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인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냉검상은 천천히 선유원의 내원을 구경해 나갔다. 내원이라 하지만 그 규모가 삼만 평이 넘어 꽤 넓었다. 가산이 두 개 있었고, 제법 거대한 인공호수까지 있었다. 내원의 곳곳에는 많은 인물들이 유유자적하게 흩어져 있었다. 바로 냉곡이 불러들인 무림인들이었다. 몇몇이 어울려담소를 즐기는 자가 있는가 하면 홀로 검을 품고 생각에 잠겨 있는 자, 인공호수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자, 각자의 개성대로 흩어져 있는 모습이었다. 냉검상은 그들을 보다가 문득 냉곡이 한 말을 떠올렸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은 과거 제(濟)의 맹상군이오. 맹상군처럼 천하의 기인이사들을 식객으로 모시고, 그 분들과 고담준론(高談峻論)을 나누며 세상의 이치를 이야기 한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소? 그러나 냉검상은 맹상군이 누군지 알 바가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고수들을 끌어모은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방향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좋게 미화해 봐야 그것은 결국 세력 암투를 위한 안배로 밖에는 볼 수 없었다. 냉검상은 많은고수들을 보다가 다시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한데 그때 어디선가 난데없이 고함소리가 터져 나오는 것이었다. 헌원광도(軒轅廣道)! 허파에 바람구멍이 나고 싶어 환장했느냐? 당장 그 어린금마창(魚鱗金魔槍)을 내놓아라!" 마치 수백 개의 범종이 일시에 울리는 듯이 굉량한 음성이었다. 냉검상은 흠칫 걸음을 멈추었다. (대단한 내공이다. 누구인가?) 호기심을 느낀듯 냉검상은 초미에게 물었다. "저 목소리는 누구냐?" 초미는 고개를가로저었다." 이곳에 머무르고 계신 분들은 거의 모르는 분들이예요. 나으리 때문에 저 역시 외성에서 이곳으로 들어온 지 보름밖에는 안됐기 때문에 알 수 없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가보자." 초미는 망설였다. "나으리 웬만하면 그만두세요. 이곳에서는 하루에도 몇 건씩 시시비비가 벌어지고 어떤 경우에는 큰 싸움으로도 번져요. 공연히 참견하시다간 불똥이 튈지도 모르는 일이예요." 냉검상은 차갑게 말했다. "삼공자가 그렇게 시키던가?" 초미는 당황한표정을 지었다. 이내 고개를 떨구면서 얼른 변명조차 하지 못했다. "그, 그것이..." 냉검상은 초미의 순진함에 그만 실소를 머금고 말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어깨를 툭 치면서 앞서 걸었다. "아무 소리 말고 따라오너라." 초미는 어쩔 수 없는 듯 냉검상의 뒤를 따랐다. 소리가 들린 곳은 송림이 제법 울창하게 펼쳐져 있는 한 전각의 뒤켠이었다. 그곳에는 네 명의 인물이 흉흉한 기세로 대치해 있었다. 일 대 삼의 형상이었는데 홀로 세 명과 대치해 있는 인물은 팔 척의 거구에 마치 성성이처럼 생긴 중년인이었다. 얼굴도 성성이를 흡사하게 닮아 있는데, 그 얼굴만 빼놓고 온통 흑갈색 털로 뒤덮여 있었고, 특이하게도 양손이 다른 사람의 두세 배는 족히 될 정도로 컸다. 손등에도 털이 숭숭 속아 있어 왠지 흉측함마저 풍기는 인물이었다. 그는 고리눈을 연방 데굴데굴 굴리면서 전면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전면에 서 있는 세 사람은 모두 쌍창을 십자로 등에 비끄러메고 있었는데 나이가 불과 두세 살의 차이를 보이는 삼십대 후반의 인물들이었다. 한결같이 기우가 헌앙하고 눈빛이 형형한 것으로 보아 출중한 고수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쪽에는 소나무 가지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네 사람을 흥미로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한 명의 소녀가 있었다. 허벅지가 완전히 드러나는 짧은 반바지를 입고, 상의도 배꼽과 양팔이 어깨까지 드러난 대담한 복장이었다. 한 손에는 두 개의 호도알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는데, 연신 호기심 많은 눈이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 까무잡잡한 피부가 조금은 야성적인 느낌마저 주는 소녀였다. 나이는 대략 십 육 세쯤 됐을까? 나이에 비해 제법 풍만하고 유난히 눈빛이 영롱한 소녀였다. 네 사람의 주위에는 그 외에도 몇몇의 구경꾼들이 모여 흥미진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때 세 명의 중년인 중에서 중앙에 위치한 중후한 인상의 인물이 입을 열었다. "헌원형, 우리가 비록 강호상에서 만난 적은 없지만 서로의 명성은 많이 듣고 있었소. 공연한 시비를 만들어 봐야 서로가 손해일 뿐이 아니오?" 성성이 같은 괴인이 픽 웃었다. "공연한 시비라고? 웃겨 주는군. 신평락(愼平落). 아전인수격으로 말하지 말아라. 네 막내 신검위(愼劍衛)와 나는 분명 내기를 했고, 신검위는 어린금마창을, 나는 열화신주(熱火神珠)를 걸었다. 그리고 신검위가 내기에 졌기 때문에 어린금마창은 내가 갖는 것이다." "!" "나 헌원광도는 결코 불공평한 일은 하지 않는다." 성성이 같은 괴인의 이름은 헌원광도였다. 그러자 좌측의 중년인이 대뜸 노갈을 터뜨렸다. "공평하다고? 헌원광도! 내기는 정당해야 하는 법이거늘 네놈은 터무니없는 내기를 걸어 사기친 것이다. 그런 내기라면 세상에 어떤 인물이라도 당하고 말 것이다." 헌원광도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미친 놈, 분명히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느냐? 나보고 내기 종목을 정하라고!" 좌측의 중년인, 즉 신검위는 울화가 치솟아 머리 끝에서 연기가 모락모락날 지경이었다. 신검위는 얼굴이 벌겋게 변한 채 씹어뱉듯이 외쳤다. "이... 원숭이 잡종 같은 놈이 궤변을!"헌원광도의 안면이 실룩거렸다. "원숭이 잡종?" 그의 표정이 울그락불그락해 지며 얼마나 화가 났는지 콧구멍이 벌름거릴 정도였다. 이때 소나무 가지에 앉아 있던 소녀가 허리를 젖히면서 까르르 숨넘어가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 바람에 상의가 들리면서 복숭아를 반 쪽으로 쪼개놓은 것 같은 젖가슴이 살짝 드러났다. 헌원광도는 고개를 돌려 소녀는 보면서 버럭 고함을 질렀다. "이 계집애야! 뭐가 좋다고 웃어, 당장 웃음 그쳐!" 그러나 소녀는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생글생글 웃으면서 말했다. "호호호..저 양반의 말은 틀린 소리가 아니잖아요? 딱 맞는 말이 아니예요? 호호호.." 재미 있다는 듯이 소녀는 연신 웃음을 터뜨렸다. 헌원광도는 이상하게도 소녀에게 더 이상 화를 내지 않았지만 표정만은 무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이때 중앙의 신평락이 다시 입을 열었다. "헌원형, 우리 신가창방(愼家槍幇)의 이름을 봐서라도 이번 일은 서로가 좋게 해결합시다." 헌원광도는 코방귀를 날렸다. "족보를 판다고 내가 꿈쩍이나 할 것 같으냐? 나 헌원광도는 평생을 두고 내기해서 얻은 물건을 그냥 돌려 준 역사가 없다." 신검위가 그만울화를 참을 수 없는지 그대로 몸을 날렸다. "헌원광도! 목을 날려 버리겠다." 대붕(大鵬)처럼 허공으로 떠오른 신검위는 어느 새 쌍창을 뽑아 매섭게 헌원광도를 찔러가고 있었다. 마치 폭풍 같은 기세로 헌원광도를 덮쳐가는 신검위의 창법을 보는 순간 냉검상은 흠칫하고 말았다. (불사창법!) 신검위가 펼친창술이 바로 불사창법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저들은 명부의 창잡이라는 신무해의 자손들이란 말인가?) 그러나 수천 개의 유성(流星)이 일시에 떨어지는 듯 무서운 광망과 함께 허실을 간파할 수 없게 찔러오는 불사창법을 보면서 헌원광도는 콧김을 싱 내뿜을 뿐이었다. "캇! 세상이 신가(愼家)의 창법을 두려워 할지는 몰라도 나 헌원광도는 콧털 하나 움직이지 않는다!" 말보다 빠르게헌원광도는 거대한 손을 주먹으로 쥐고 있었는데 두 주먹이 움직이는 것은 실로 눈뜨고 보고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빨랐고, 주먹이 내뻗어질 때마다 벼락치는 듯한 굉음이 터져나왔다. 꽈꽈꽝!번쩍.. 불사창법이 신묘하고 고명하기는 했지만 헌원광도를 쉽게 제압하지는 못했다. 해서 신검위와 헌원광도는 한데 어우러진 채 보는 사람의 손에 땀이 흐를 정도로 격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신검위는 주로창술을 변화 위주의 초식으로 펼쳤고, 헌원광도는 어찌보면 무식할 정도로 위력만을 앞세운 권격을 펼쳐냈는데, 자세히 살피면 두 사람은 상호간에 한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용호상박지세로 공수를 교환하고 있었다. 냉검상은 잠시두 사람의 싸움을 구경하다간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아직 불사창법의 섬세하고 완벽한 변화를 익히지 못한 신검위가 공력이 우세한 헌원광도에게 시간이 흐를 수록 불리하겠군.) 냉검상의 시선이 간 곳은 바로 나뭇가지 위의 소녀였다. (음...) 냉검상의 여자를 보는 눈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의 예리한 눈은 까무잡잡한 피부에 야성적으로 느껴지는 소녀의 모든 것을 한 순간에 꿰뚫어 보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별다른 특징이 없어 보이는 소녀였다. 그러나 그것은 헝클어진 머리칼과 옷차림 때문이지 자세히 살펴보면 이목구비가 놀라울 만큼 선명하고 제법 탐스러운 육체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한 가지 이상한 것은 그 소녀가 분명 헌원광도와 관계가 있는 것 같은데 별로 걱정하는 기색도 없이 오히려 재미 있는 구경이라는 듯이 생글거리며 두 사람의 싸움을 보고 있는 것이었다. 이때 두 사람의 싸움은 점점 격렬해지고 있었다. "크쿳.. 불사창법이란 것이 이제보니 젓가락질에 불과했구나!" "헌원광도! 입을 찢어놓고 말겠다!" 우웅! 신검위는 쌍창을 머리 위에서 크게 휘두르며 무서운 경풍을 일으키며 그대로 요절이라도 낼 듯이 헌원광도를 향해 쏘아져 가고 있었다. 순간, 신평락이 몸을 날리며 신검위의 앞을 막았다. "물러서라, 세째!" 신검위는 관자놀이를 실룩이며 단호하게 외쳤다." 형님! 말리지 마십시오. 저런 인간은 그냥 둘 수 없습니다!" 신평락은 노기띤 얼굴로 외쳤다. "세째, 입다물고 가만 있어라!" 신평락의 기세에 신검위는 찔금한 듯 그만 쌍창을 거두면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신평락은 헌원광도에게 말했다. "헌원형, 서로가 싸우면 좋은 결과는 없소. 나는 헌원형이 세째와 어떤 내기를 했는지 모르고 있소. 내기가 대체 어떤 것이었소?"헌원광도는 묘한 웃음을 지었다. 신검위는 그 웃음을 보자 생각만 해도 울화가 치미는지 급한 성격을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저 원숭이 사촌 같은 인간이 글쎄 말도 안되는 문제를 낸 것이오, 형님. 자신의 손을 내밀고 자신이 주먹을 쥘 것이냐, 아니면 그대로 있을 것이냐 하는 것이오." 세상에 그런 억지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러나 신평락은 차분하게 헌원광도에게 물었다. "그게 사실이오, 헌원형?" 헌원광도는 콧구멍을 후벼파며 말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신검위 놈이 말은 한 번 정확하게 했군. 하지만 분명히 말하겠는데, 아무 문제나 내도 좋다고 말한 것은 바로 신검위 저놈이다." 신평락은 내심노기가 치솟음을 느꼈다. 헌원광도는 억지로 노기를 참는 그의 표정을 보며 키들거렸다. 신평락은 말했다. "헌원형, 어린금마창은 본가의 기보요. 그런 물건을 엉터리 같은 내기로 빼앗는다는 것은 너무한 것이 아니오?" "열화신주는 그럼 아이들이 갖고 노는 구슬인 줄 아나? 좋아, 좋아.. . 정히 그렇다면 어린금마창을 군소리없이 돌려주겠지만, 만약 맞추지 못한다면.." 순각적으로 헌원광도의 표정이 차갑게 변했다. "어린금마창에 대해서는 더 이상 입도 뻥긋하지 말아야 한다!" 신평락은 잠시생각을 굴렸다. 그리고는 승낙을 했다. "좋소. 그 대신 터무니없는 문제는 용납하지 않겠소. 명확한 해답이 있어야 하오." 헌원광도는 싱긋 웃었다. "물론이지. 내가 내는 문제는 정확한 답이 있으니까. 그럼 문제를 내겠다." 약간 긴장한 빛을 보이는 신평락을 보면서 헌원광도는 태연스럽게 입을 열었다. "내 몸에 난 털의 숫자가 모두 몇 개냐?" "!" 순간적으로 신평락의 표정이 멍청해졌다. 어이가 없는 것이었다. 신평락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표정이 그랬다. 도대체 몸에 나 있는 털의 숫자를 어떻게 알아맞춘단 말인가? 신평락은 짙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외쳤다. "헌원형! 지금 장난을 하는 것이오?" "장난을 하다니.. 나는 진지하다, 신평락. 이 문제는 분명히 정확한 답이 있는 것이 아니냐? 내 몸에 난 털이 무한대가 아닌 이상에 해답은 있는 것이다." 성격 급한 신검위가 발로 땅을 찍으면서 노성을 터뜨렸다. "죽일 놈! 그걸 어떻게 맞춘다 말이냐?" "못 맞추면 어린금마창을 포기하는 거다. 이미 약속하지 않았느냐?" 실로 억지이긴한데 억지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신평락은 헌원광도가 이렇게 교묘한 방법을 쓸 줄은 몰랐는지 난감한 표정이었다. 헌원광도는 빙글빙글 여유있게 웃었고, 신검위는 그만 노화가 치밀어 쌍창을 움켜쥐면서 외쳤다. "차라리 네놈의 껍질을 벗겨 버려 화를 풀어야겠다." 신검위가 그대로 뛰어나가려는 순간, 한 마디 차가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 답은 내가 해도 되겠나?" 신검위는 움찔하며 소리가 난 곳을 돌아보았다. 멋들어진 털가죽 옷을 걸친 냉검상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냉검상은 모든 사람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 느긋하게 헌원광도 앞으로 걸어갔다. 그 뒤에는 시비 초미가 왠지 불안한 기색으로 따르고 있었다. 나무 위의 소녀는 냉검상을 보고 이채를 발했고, 헌원광도는 의외란 표정이었다. "네가 맞추겠단 말이냐?"냉검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반말이었다. 헌원광도는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눈을 까뒤집고 봐도 족히 자신보다 몇십 년은 아래인 냉검상이 반말을 하니 귀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헌원광도는 뜨거운 것이 목구멍으로 불쑥 치밀어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억지로 참으면서 아래위로 냉검상을 훑어 보았다. "분명.. 답을 맞춘다고 했느냐?""그렇다." 헌원광도는 음침한 시선으로 냉검상을 쏠 듯이 보았다. "못 맞춘다면?""내 목숨을 걸겠다." 헌원광도의 눈빛이 흔들렸다. "ㅋㅋㅋ...재미있군, 재미있어. 내기라면 밥먹는 것보다 더 좋아하는 나 헌원광도에게 목숨을 걸고 내기에 도전하는 놈이 있을 줄이야..확실히 세상은 오래 살고 봐야 되는 법인가?" 그렇다. 헌원광도는 광적으로 내기를 좋아하는 인물이었다. 무슨 일만 있으면 미친 듯이 내기를 하는, 한 마디로 내기귀신이었다. 냉검상이 목숨을 걸고 내기를 하겠다는 데야 반말한 것쯤은 참아 넘길 수가 있었다. "좋다. 어디 맞춰 봐라." 냉검상은 냉정한 표정으로 말했다. "헌원광도, 대답을 하기 전에 한 가지 밝혀줄 것이 있다. 만약 내가 맞춘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 도대체가 진다고 생각하는 헌원광도가 아니었다. 그런데 무슨 조건인들 마다 하겠는가? 헌원광도는 생각할 것도 없이 대답했다. "네 마음대로 해라!" 한 마디로 무엇이든 들어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냉검상은 기다렸다는 듯이 소나무 가지 위에 앉아 있는 소녀를 가리켰다. "저 소녀는 당신의 누이인가?" "미친 놈! 내 딸보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냉검상은 피식웃었다. (어울리지 않는 딸을 두었군.) 냉검상은 생글거리는 헌원광도의 딸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좋다. 내가 맞춘다면 어린금마창과 저 소녀를 갖겠다." "!" 헌원광도는 멈칫했다. 아무리 내기 귀신이라도 딸을 건다는 것은 얼른 승낙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소녀는 오히려 흥미롭다는 기색이었다. 자신이 내기의 재물로 거론됐는데도 태연했다. 영악한 눈을 굴리며 흥미진진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헌원광도는 한동안 심사숙고하더니 도저히 질 자신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듯 힘있게 대답했다. "좋다. 어디 해답을 말해봐라!" 냉검상은 표정의 변화도 없이 그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 몸에 난 털 숫자는 다른 사람보다 약간 많군. 모두 백 육십 사만 팔천 오백 칠십 삼 개다." 너무도 쉽게 대답이 나왔다. 헌원광도는 일순 어이없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커다란 웃음을 터뜨리며 냉검상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이었다. "크하핫..애송이 무슨 헛소리냐? 너는 틀렸다. 나도 모르는 털의 숫자를 네가 어떻게 맞춘다는 말이냐?" 냉검상은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단 한 개의 오차도 없는 정답을 이야기 했다." 헌원광도는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증거를 대라!" "물론이지. 헌원광도 지금부터 내 답이 맞았다는 증거를 댈 테니 옷을 홀랑 벗어라. 나는 당신 몸에 달려 있는 털을 하나씩 뽑아가면서 정확하게 확인을 해주겠다." 헌원광도의 입이 그만 딱 벌어지고 말았다. "내 답이 틀린다면 나는 틀림없이 목숨을 내놓겠다." 억지를 부려 신검위에게 어린금마창을 빼앗을 수 있었던 헌원광도가 다시 억지를 부리다가 교묘하게 덫에 걸린 꼴이었다. 냉검상이 말한 숫자가 진정한 해답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지만, 어떻게 옷을 홀랑 벗고 털을 뽑혀가며 확인하는 수모를 당할 수 있단 말인가? 헌원광도의 안면은 울그락푸르락 마치 썩은 돼지간이라도 씹은 표정으로 변했다. 그러나 억지라면 헌원광도를 따라갈 사람이 중원천하에 없었다. "조, 좋다...내가 들어가서 확인해 보고 오겠다." 냉검상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어? 뽑아서 하나씩 직접 확인해야지." "끄응..." 헌원광도는 다시 말문이 막혔다. (이 새파란 녀석에게 당하다니.) 헌원광도는 얼마나 다급했는지 냉검상의 손을 덥석 잡으면서 말했다. "그럼 나하고 같이 들어가자. 둘이서 헤아려 보면 정확하지 않느냐?" 냉검상은 차분하게 말했다. "안돼지. 만약 우리 둘만 들어가서 헤아리게 된다면 내가 제시한 답이 맞아도 당신이 틀린다고 우기면 그만 아닌가? 여기 사람들도 많아 증인이 되니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헤아리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자, 어서 옷을 벗어라." 잠자코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신가창방의 삼 형제는 한결같이 통쾌하다는 표정이었다. 특히 신검위는 고소해 죽겠다는 듯이 냉검상의 말을 거들기까지 했다. "옳은 말이야, 옳은 말! 저 원숭이 귀신은 사람을 속이는 재주가 비상하고 억지를 잘 써서 털 몇 개쯤은 슬쩍 숨길 수도 있는 일이 아닌가?" 구경꾼들의 킥킥거리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헌원광도의 표정은 불쌍할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신검위는 신이 난 듯 한 마디를 덧붙였다. "저 자의 털은 색깔이 진하고 길어서 뽑기도 쉽고, 헤아리기도 쉬울 거야." (크으...) 이건 발목이 잡혀도 단단히 잡힌 꼴이었다. 도무지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헌원광도는 표정이 일그러지다 못해 허옇게 뜨고 말았다. 냉검상은 그런 그에게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헌원광도, 나는 이 내기에 가장 중요한 생명을 걸었다. 옷을 벗고 확인하는 것은 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빨리 옷을 벗고 확인하자." 미치고 환장하고 팔짝 뛸 일이었다. 헌원광도는 진퇴양난이라 그저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 어쩔 줄을 몰랐다. "헌원광도,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 이곳에는 많은 증인이 있으니 한 사흘만 뽑으면 다 뽑을 수 있을 것이다." (으으..) 헌원광도는 그저 기절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냉검상의 표정을 보니 도대체 양보나 물러날 기색이 눈꼽 반만큼도 없어 보였다. 아니 오히려 지독해 보였다. (이 자식은 내 콧구멍의 털까지 몽땅 뽑아 버릴 놈이다.) 옷을 벗어 딸 앞에서 흉측한 꼴이 되는 것도 상상할 수 없지만, 몸에 털이 싹 뽑히면 그야말로 털빠진 닭이 되는 것이 아닌가? 헌원광도가 택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뿐이었다. (졌다! 완전히 당했다!) 헌원광도는 냉검상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다가 발로 땅을 꽝! 구르면서 신음처럼 외쳤다. "졌다. 네놈이 맞았다." 헌원광도는 손에 들고 있는 어린금마창을 부들부들 떨면서 냉검상에게 넘겨 주었다. 그때 나무 위에 앉아 있던 헌원광도의 딸이 돌연히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사뿐하게 뛰어내리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태연하게 냉검상 앞으로 가면서 헌원광도에게 말했다. "아버지, 그럼 나는 이제부터 이 양반 것이 된 거야?" "끄응.." 헌원광도는 묘한 신음성을 토해낼 뿐이었다. 소녀는 냉큼 냉검상에게 오더니 생글거리며 말했다. "나는 헌원미예요." 냉검상은 약간의아했다. (이 소녀는 생긴 것과 달리 헌원광도처럼 엉뚱한 면이 있구나.) "나 헌원광도가 내기에서 약속을 어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 그러나!" "?" "내 딸까지 빼앗기고 그대로 있을 수는 없으니 내기를 한 가지만 더 하자!" 냉검상은 실소를 머금었다. (후후...지독한 내기귀신이군. 약이 바싹 올라 있어.) 냉검상은 싱긋웃으면서 더 약을 올리려는 듯 헌원미를 끌어당겨 자신의 뒤로 놓으면서 말했다. "좋다. 어서 문제나 내라." 헌원광도는 콧구멍을 연신 벌름거리며 말했다. "나는 언제나 공평하다. 아까 내가 문제를 냈으니 이번에는 네 차례다. 두 번씩이나 연거푸 우선권을 얻고 싶지는 않다." (그래도 한 가지 장점은 있는 인간이군.) 냉검상은 별로내기를 해본 적이 없었다. 조금 전의 상황은 순전히 임기응변이었다. 그러니 특별하게 문제를 낼만한 것도 마땅치가 않았다. 잠시 생각을 하던 냉검상은 이채를 발하면서 입을 열었다. "좋다. 문제를 내겠다." 냉검상은 말과함께 허리춤에서 미인혈을 뽑았다. 거북이 등껍질로 싸여 있는 투박한 미인혈을 헌원광도는 대수롭지 않게 바라보았다. "내가 이 칼을 뽑아 딱 일초의 공격을 펼치겠다 . 당신은 몸을 얼마만큼 움직이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순간 헌원광도의 두 눈에 희색이 떠올랐다. 그에게 있어서 냉검상이 낸 문제는 너무도 쉽고 간단했기 때문이었다. (흐흐흐.. 이 자식이 어쩌다 한 번 이겼다고 기고만장했구나. 미쳤지. 이 헌원광도 앞에서 무공을 논하다니..) 헌원광도는 통쾌한 듯 웃었다. "크하하하.. 단 일초 뿐이라면 나는 이 자리에서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겠다. 만약 한 걸음이라도 물러난다면 나는 깨끗이 패배를 인정하겠다." 헌원광도는 자신만만했다. 신평락이 설사 이런 제안을 해도 자신있을 헌원광도였다. 냉검상은 그를 바라보며 싸늘하게 웃었다. "당신은 그 자리에서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데굴데굴 구르게 될 것이다." "!" 헌원광도의 안색이 일그러졌다. 냉검상의 말은 헌원광도의 존재를 싹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구경하는 사람들도 웅성거렸다.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신가창방의 큰형인 신평락도 냉검상의 말이 조금 지나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너무 광오하다. 권왕(拳王) 헌원광도 하면 하늘조차 떨게 한다는 천하제일권(天下第一拳)인 무림의 명숙이거늘..) 한동안 표정을실룩이며 냉검상을 쏘아보던 헌원광도는 오히려 어이가 없는지 푸들푸들 웃으면서 말했다. "좋아, 좋아... 네놈의 말대로만 된다면 나는 네놈을 영원히 주인으로 삼겠다. 그러나, 네놈이 진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냉검상은 차갑게 말했다. "당신 딸을 돌려 주고 십 년 간 당신의 종이 되지." "이놈..대답 하나는 시원스러워서 좋구나. 좋다. 진정 하늘 높은 줄을 모르고 날뛰는구나. 어서 공격을 해 봐라!" 순간 모든 사람들이 긴장된 표정이었다. 내기의 조건이 너무나 커져 있었고, 그들은 헌원광도가 진정으로 분노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후후후..." 냉검상은 나직이 웃으면서 미인혈을 가슴 앞으로 들어올렸다. 냉검상의 두 눈 깊숙한 곳에서는 섬뜩한 광채가 쏘아져 나왔다. 그 눈빛을 보는 순간 헌원광도는 전신의 피가 싸늘하게 식어 버리는 기분이었다. 순간, 투박한 칼집 속에서 느릿하게 칼이 뽑혀지기 시작했다. 헌원광도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상하게도 입술이 바짝 타고 전신이 팽팽하게 긴장됐다. 그러나 그는 애써 자신의 마음을 안정시키려고 했다. (제놈이 아무리 뛰어나도 일초쯤이야... 일초쯤이야.) 긴장된 헌원광도의 시선 속으로 서서히 뽑혀지는 칼면이 드러나면서 요사하리만치 아름다운 미인의 얼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핏물로 그려진 듯 짙붉은 선으로 그려진 미인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헌원광도는 문득 숨이 막히는 살인적인 염기를 느꼈다. 그러나 더욱 더 칼면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알맞게 융기를 이룬 젖가슴이 드러나고... 여인의 살찐 배와 폭포수처럼 흐드러진 머리칼.. 급기야 아무것도 가린 것이 없는 완벽한 여인의 나신이 확대되어 헌원광도의 동공 속으로 꽉 차들어오는 순간,..번쩍! 한 줄기의 극렬한 광채가 형용불가의 속도로 칼에서 쏘아지는 것이었다. 아주 잠깐... 헌원광도는 여인의 불가사의한 미소에 현혹되었다. 그리고 헌원광도의 두 눈은 찢어질 듯 부릅떠지고 있었다. 도저히 피할 방도가 없었다. 무림에 나온 이래 헌원광도가 이처럼 절망적인 상태에 빠진 적은 단연코 한 번도 없었다. 다음 순간 헌원광도의 육신은 본능적으로 땅바닥을 굴렀다. 하나 헌원광도의 장삼은 갈가리 찢겨져 허공으로 날아오르고, 군데군데 핏물까지 배인 참담한 모습의 헌원광도는 극도의 불신과 경악에 찬 표정으로 그만 굳어 버리고 말았다. 아무도 웃지 않았다. 헌원광도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면서 주위 모든 사람들은 격렬한 놀람에 싸여 정적을 지킬 뿐이었다. 신가창방의 삼형제도 이 순간 돌처럼 굳어 있었다. 실룩!..헌원광도의 관자놀이가 움직였다. 돌연 헌원광도는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짐승 같은 괴성을 내지르는 것이었다. "크아아아아--" 헌원광도는 자신의 패배를 부정이라도 하려는 듯이 바위를 향해 벽력신권(霹靂神拳)을 그대로 폭출시켰다. 쿠아아아!꽈꽈꽝! 엄청난 폭음성과 함께 거대한 바위는 그대로 가루가 되어 휘날렸고, 벽력신권이 격중된 자리는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냉검상은 헌원광도를 보며 차갑게 외쳤다. "헌원광도! 이 순간부터 당신은 약속을 지켜야 한다." 이어 냉검상은찬바람이 일 정도로 몸을 돌려 유유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혼백을 잃은 듯이 서 있는 초미만이 불현듯 정신을 차리고는 급급히 냉검상의 뒤를 따라갔다. |
계 속
|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
즐감.
감사합니다.😘
잘봅니다.
감사합니다
감사 드립니다
즐감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