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한 때 부산 일대에서 여러 개의 외식업소를 운영하였다. ‘깃발 한 번 날리는 집’이 되고 싶다는 소박한 염원 하나로 동래에 있는 점포 외벽에 깃발을 수십 개 꽂았다. 마치 옛 성채를 연상시킬 정도로 깃발을 꽂았더니 정말 유명세를 탔다. 그러나 ‘이게 무슨 빨갱이 집도 아니고…’라는 역풍에 깃발을 뽑아야 했다. 고객을 향해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내걸었으되, 사람들 눈엔 ‘빨갱이 집’으로만 보였던 것이다. 이제 아버지를 대신하여 아들 사공 승열(31)씨가 ‘부산 최고의 싱싱한 물회’ 깃발을 내걸었다. 해프닝의 주인공이었던 깃발은 내렸지만 아버지의 정신과 맛은 그대로 이어가고 있다.
‘미주구리’로 불리는 포항 물가자미 직송 받아 사용
‘깃발집’의 물회는 두 가지다. 물회의 원형에 가까운 일명 포항식 물회와 육수를 부어 만든 일반적인 물회다. 그러나 둘 다 횟감은 ‘미주구리’로 불리는 물가자미 한 가지만 쓴다. 미주구리는 경북 영덕과 포항 일대에서 잡히는 물가자미의 일본식 방언이다. 물가자미는 원래 생선 가운데 가장 하품(下品)이었다고 한다. 몸집도 광어보다 작다. 각종 생선이 풍어를 이룬 시절에는 잡아도 버리거나 먹지 않고 사료로 쓸 정도였다고 한다. 그야말로 쳐다보지도 않던 생선이었다.
하지만 차츰 어획량이 줄어드는데다가 잘 상하지 않는 특성이 있어서 언제부턴가 물가자미가 대접받는 생선으로 신분이 상승되었다. 단백질과 비타민 B1이 풍부하고 열량이 낮아 다이어트 음식으로도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깃발집’은 오래 전부터 포항 죽도시장 경매인에게 경매 받은 물가자미를 바로 직송 받아서 쓰고 있다. 새벽에 포항에서 경매 끝나고 고속버스로 부치면 아침 9시 부산에 도착한다. 그러나 물가자미 수요가 늘고 가격도 올랐다. 날씨가 조금만 나빠 조업에 차질을 빚으면 물가자미 가격이 천정부지로 솟거나 아예 구하지 못하는 날도 더러 있다. 이럴 때면 사공씨도 식당 운영에 애를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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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식 비빔물회와 육수에 말아먹는 물회, 둘 다 물가자미 맛 ‘생생’
포항식 물회(1만원)는 포항이나 영덕의 해안가 물회와 크게 다르지 않다. 물가자미 썬 것에 고추장을 넣고 배와 오이 채 썬 것, 김, 무싹, 잔파를 고명으로 얹었다. 몇 가지 밑반찬과 함께 밥이 나온다. 포항식 물회는 잘 비빈 뒤 우선 상추와 깻잎에 싸서 먹는다. 기호에 따라 고추장과 식초를 첨가해도 좋다. 그러다가 반 정도 먹고 난 뒤 물을 부어 밥을 말아먹는다.
어떤 손님은 처음부터 이 밥을 물회 그릇에 넣어 회덮밥처럼 먹는다. 각자 자기 스타일이나 입맛에 맞게 즐기면 그만이다. 어떻게 먹어도 쫄깃하고 고소한 물가자미의 육질 맛을 느낄 수 있다. 좀 더 회의 양을 많이 먹고 싶다면 특(1만3000원)을 주문한다. 물가자미 회의 양이 보통(1만원)보다 거의 두 배 정도 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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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식 물회와 함께 ‘2번 물회’로 부르는 물회가 있다. 처음부터 시원한 육수를 부어서 내온다. 바로 이 육수가 물가자미 육질 맛을 훌륭하게 받쳐주는 ‘깃발집’ 육회의 개성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양지와 다시마에 약재를 넣고 끓인 물에 배, 감귤, 식초, 마늘, 양파, 영양고춧가루, 물엿, 매실원액 등 다양한 양념이 들어갔다. 육수의 식재료는 모두 순수 국내산으로 직접 담가서 쓴다.
물회에는 밥과 국수, 두 가지 중 선택해 하나와 함께 먹는다. 밥을 말아 먹어도 좋지만 아무래도 여름철엔 국수를 말아야 제격이다. 살얼음이 살짝 뜬 물회 국물에 국수를 말아먹으면 냉면이나 밀면과는 또 다른 시원한 여름 면식을 경험할 수 있다. 시뻘건 국물에 새하얀 국수가락이 섞이는 모습을 보면 어느새 입 안에 군침이 돈다. 살짝 함께 씹히는 물가자미 육질과 국수 면발은 색다른 즐거움을 준다. 이 맛이 좋아 국수 사리를 7개나 재 주문해서 먹은 손님도 있다고 한다. 국수사리는 얼마든지 리필이 가능하다. 몇 년 전부터 중장년층 위주에서 젊은 층 고객 비율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 물회 맛의 매력에 청년들이 점차 호응한다는 반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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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게 된장조림과 가자미 식해도 주목할만한 맛
‘깃발집’의 간판 메뉴는 역시 물회다. 그러나 꽃게 된장조림(2마리, 2만원)도 이 집의 빼놓을 수 없는 메뉴다. 충남 태안 산 꽃게를 집에서 담근 된장에 자박하게 조려낸다. 마치 된장 풀고 끓인 꽃게탕의 국물을 오래 끓여 졸인 것 같은 맛이 난다. 구수한 된장이 스민 짭짤한 게살이 입맛을 깨워놓는다. 먹다 남은 양념에 남은 밥을 비벼서 먹어도 좋다. 이 집 된장조림은 집된장, 맛술, 영양고춧가루의 하모니가 깊은 맛을 내준다. 계절병처럼 여름이면 달아나는 입맛의 소유자에겐 특효약이 될 듯 하다.
물회를 주문하면 다른 반찬과 함께 나오는 가자미 식해 맛도 허투루 지나칠 수 없다. 좁쌀을 넣고 적당하게 삭혔다. 강원도 동해안에서 맛볼 수 있는 식해 맛과 흡사하면서도 식감이 좋다. 씹으면 씹을수록 감칠맛이 난다.
이 집 주인장 사공씨는 부산에서 음식 비평가로도 활약하고 있다. 그런 만큼 누구보다 자신의 음식에 대해 늘 스스로 검증하고 되묻는다. 남의 음식을 평가하기에 앞서 자신의 음식에 떳떳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집 음식에는 모두 주인장이 엄선해낸 국내산 영양고춧가루가 들어간다. 주의해서 보지 않으면 잘 눈에 띄지 않는 사소한 부분일 수 있다. 이런 데서 자신의 음식에 좀 더 엄격해지려는 주인장의 태도가 살짝 엿보인다.
<깃발집> 부산 동래구 온천동 051-554-4012
기고=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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