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손주 태어나던 날
우리 가족 단톡방에 새로운 동영상이 올라 왔다. 태어난 지 열흘 된 손주의 모습이다. 배냇짓을 하는지 자면서 배시시 웃는가 싶더니 입을 삐쭉거리기도 하고 때론 얼굴이 빨개지도록 하품을 하고 있는 녀석이 내 마음을 온통 사로잡았다. 하루가 다르게 변해 가는 첫 손주의 모습에 푹 빠져 있으니 나도 어쩔 수 없는 손주바보 할미인가 보다.
며늘아기는 출산 예정일이 지나자 슬슬 걱정이 되었는지 함께 걸어 달라고 부탁했다. 걷는 일은 나의 일상이었기에 순산을 위한 수아의 제의가 그저 기특하기만 하였다. 우리는 강원대 교정을 한 바퀴 돌고 다시 공지천 자전거길까지 걸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첫 아이는 예정일보다 늦을 수 있고 나도 큰애를 예정일 열흘 지나서야 출산했다며 느긋하게 기다리자고, 며느리의 마음을 편히 해 주려 애썼다. 하루에 만보씩 나흘을 걸었다. 만삭의 임산부를 데리고 무리한 건 아닌가 싶었지만 순산의 길은 운동뿐이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오늘은 시내 명동쪽으로 가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는데 출근하던 아들이 짧게 문자를 남겼다. 초기진통이 시작된 것 같다며, 그래도 운동을 해야 하니 엄마가 하루 더 걸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아이쿠!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내심 걱정도 되었지만 내가 불안해하면 안 될 것 같아 마음을 다잡았다. 수아는 가끔씩 느껴지는 통증을 참아내며 곧잘 따라 왔다. 내가 친정 엄마였더라도 힘들게 따라서 걸었을까 생각하니, 산만한 배를 내밀고 하염없이 걷고 있는 며느리가 그저 안쓰럽기만 했다. 쉬었다 가기를 여러 번 육림고개를 지나 중앙로에 다다랐다.
입춘이 지난 춘천 명동거리는 따뜻해진 날씨 때문인지 봄마중 나온 인파로 북적거렸다. 나는 배불뚝이 산모가 사람들과 부딪칠까봐 조바심이 났지만 수아는 요리조리 잘도 피해 다녔다. 이왕 나온 김에 해산 후에 입을 부드러운 면티 두어 장 사주고 싶어 의류 매장으로 들어갔다. 가지고 있는 옷들이 니트 종류가 많아 아가 피부에 닿으면 좋지 않을 것 같아 사려고 했었다며 수아도 기꺼이 고마워했다. 며느리 덕분에 내 것도 같은 모양으로 장만하니 행복 두 배였다.
새옷을 산 기쁨도 잠시, 다시 통증이 찾아 왔다. 수아는 양수가 터지지 않았으니 걸을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근처 작은 카페로 들어가 자몽향의 달콤함으로 아픔을 달랬다. 이런 날에는 혼자 있는 것보다 정신을 다른 곳으로 분산 시키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구경거리 많은 명동으로 데려 온 것인데 수아는 내가 시어미라서 좀 그랬을까.
더 이상 걷는 것은 무리일 것 같아 남편에게 연락을 넣었더니 그러잖아도 명동 부근에서 대기하고 있단다. 우리 부부는 첫 손주와 상봉하기 위해 며칠 동안 비상근무 상태였다.
퇴근길 아들은 산부인과에 가게 되면 연락드리겠다며 수아를 데리고 자기집으로 돌아갔다. 애들을 보내고 나니 초저녁인데도 긴장이 풀렸는지 쏟아지는 잠에 정신이 몽롱하였다. 그동안 산모 운동시킨다고 고단했던 모양이다. 두어 시간 달게 자고 나니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자정 무렵 입원했다며 톡이 왔다. 앞으로 일고여덟 시간은 지나야 시작될 것 같으니 미리 와서 고생하지 말고 연락할 때 오라는 아들의 배려에 피식 헛웃음이 났다.
이 밤에 잠들기는 다 틀렸고 곧 할미가 된다는 생각에 기분이 묘했다. 아직은 아닌데... 손주 녀석이 ‘할미’라 부르기 전까지 현실을 부정하고 싶지만 그게 어디 마음먹은 대로 되는 일이던가. 이런저런 생각으로 하얗게 밤을 지새웠다.
아침은 먹는 둥 마는 둥하고 병원으로 가려고 현관을 나서려는데 아들에게서 아기 바구니가 들어갔으니 곧 출산할 거라는 연락이 왔다. 서둘러 달려갔더니 방금, 오전 8시 31분에 건강한 사내아이가 태어났고 산모도 무사하다 했다. 감사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를 주문처럼 외고 있었다.
야간에 진행된 분만이라 무통주사도 촉진제도 없이 찢어지는 고통을 온 몸으로 느껴가며 귀한 생명을 탄생시킨 며늘아기가 대견했다. 그동안 자연분만을 위해 산모 요가에, 짐볼에 걷기까지 꾸준히 해 온 수아를 잘 알고 있기에 내 마음이 벅차고 아렸다. 그 경황에도 남편은 축하 꽃다발을 센스 있게 준비해 놓고 싱글벙글이다. 화사한 꽃처럼 산모가 출산의 아픔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기를 바라는 친정어미의 마음이 되어본다.
신생아실 유리창 너머로 한 사내아이가 힘차게 울고 있다. 아기의 길쭉한 머리 모양새가 이 세상 밖으로 나오는 길이 얼마나 험난했는가를 말해 주는 것 같다. 아빠 엄마를 반반씩 닮은 아이의 울부짖는 작은 몸짓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손주를 만난 지 일분도 채 지나지 않아 간호사가 아기를 안고 황급히 들어가려는 아주 짧은 순간,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손주 녀석에게 첫 인사를 건넸다.
“아가야! 애썼다. 우리 곁으로 와 주어 정말 고맙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