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들레르, 포스트모더니즘의 포문을 열다!
기사승인
2016.04.02 22:26:23
- 『악의 꽃』을 ‘反-코기토’로 읽다
시대 변화에 가장 민감한 그룹은 누구일까? 바로 감성적 촉이 발달한 예술가들이다. 그 다음 그룹은 지성적 감각이 발달한 사상가들이며, 가장 마지막 그룹은 현실 정치가나 활동가, 일반 대중이다. ‘근대에서 탈근대(현대 또는 포스트모더니즘)로의 전환’이라는 거대한 시대 변화도 이에 적용해 볼 수 있다. 보통 현실 역사는 20세기 전반의 양차 대전을 기점으로 근대와 현대가 나누어지고, 지성사적으로는 이보다 앞서 19세기 후반의 니체, 프로이트, 마르크스를 탈근대의 효시로 본다. 그렇다면 예술 분야에서는 언제 처음으로 탈근대적 경향이 나타났을까?
19세기 프랑스에서는 예술 전반에 걸쳐 상징주의 운동이 일어났는데, 특히 시 분야에서 탈근대적 사유를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시인들이 등장했다. 이들 상징주의 시인 중 19세기 중반에 활동한 샤를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가 누구보다 앞서 현대성을 열어 보인 인물로 주목받고 있다.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은 보들레르야말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진정한 선구자라고 평했다. 그런 의미에서 장정아 부산대 교수는 「‘反-코기토’로 읽는 보들레르 : 『악의 꽃』의 ‘악’의 ‘꽃’으로서 자아의 확장 혹은 개화」에서 보들레르의 시 『악의 꽃』을 ‘反-코기토’라는 탈근대적 인식 체계를 통해 조명해 보았다.
1862년의 샤를 보들레르
‘反-코기토’라는 탈근대적
인식 체계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유명한 명제를 제시하며 서양 근대 철학의 포문을 열었다. 그는 자기반성에 의한 사유나 의식의 작용이야말로 가장 명증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사유와 의식의 본질적인 구조를 드러냄으로써 우리의 자아를 해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이를 통해 인간을 세계의 중심인 근대적 주체로 확립시켰다. 이후의 근대 철학자들은 별 의심 없이 근대적 주체를 철학적 사유의 기본 전제로 삼았다.
하지만 19세기 후반부터 이런 코기토적 사유에 반대 입장을 표명하는 사상가들이 등장했다. 니체와 그 뒤를 이은 하이데거는 사유 작용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사유 자체가 불확실하고 기만적일 수 있다는 사유의 ‘가상성(假想性)’을 주장했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제시함으로써 의식과 자아가 주체의 기원이 될 수 없음을 드러냈고, 라캉은 인간이 주체적인 판단을 통해서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가 욕망하는 것을 욕망함으로써 주체의 분열을 경험한다고 보았다. 이처럼 니체와 프로이트 등에서 시작된 ‘反-코기토적 사유’는 데카르트가 주장한 의식의 명석 판명함에 제동을 걸었고 근대적 주체의 견고한 성벽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타자와의 상호성 등에서 정체성을 수립하는 새로운 주체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죽음’의 의미와 ‘악’의
정체
이 논문에서는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에게서 이러한 反-코기토적 사유의 징후를 읽어 내는 작업의 일환으로 보들레르의 시집 『악의 꽃』에 주목한다. 필자는 『악의 꽃』의 마지막 시 「여행」의 말미에서 여행의 목적지인 ‘죽음’의 의미를 알아보는 것으로 시 읽기를 시작한다. (지면의 제약으로 논문에서 인용된 시를 모두 언급할 수 없다는 점을 양해하기 바란다.)
오 「죽음」이며, 늙은 선장이여, 때가 되었다! 닻을 올리자!
우리는 이 고장이 지겹다, 오 「죽음」이여! 떠날 준비를 하자!
하늘과 바다가 비록 먹물처럼 검다 해도,
네가 아는 우리 마음은 빛으로 가득 차 있다!
네 독을 우리에게 쏟아 기운을 북돋워주렴!
이토록 그 불꽃이 우리 머리를 불태우니,
「지옥」이건 「천국」이건 아무려면 어떠랴? 심연 깊숙이
「미지」의 바닥에 잠기리라, 새로운 것을 찾기 위해!
(『악의 꽃』 <죽음> 편 「여행」 마지막 35-36연)
시인은 ‘죽음’을 통해 목적지인 ‘심연’, ‘어둠’, ‘새로운 것’에 도달하고자 한다. 목적지는 아직 도달하지 않은 미지의 심연이고, 이 새로운 것은 ‘두뇌의 꽃’(<죽음> 편 「예술가들의 꽃」 4연)이라 불릴 만한 인간에 내재된 어떤 정신적인 상태이다. 그리고 그 성격은 지옥이건 천국이건 상관없다.
시인이 이르고자 하는 목적지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악의 꽃』의 ‘악’에 주목해야 한다. ‘악’은 인간 내면의 미지에 도달하기 위한 하나의 계기인 ‘죽음’과 관련해 그 면모를 드러낸다. 시인이 정작 죽음을 ‘흉내’만 내고 있을 때, 다시 말해 죽음을 거쳐 자아의 이면인 심연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을 때, 악마의 부하들인 마귀들이 등장해 시인을 질책한다. 이 마귀들은 바로 일상의 한정성 바깥에 어떤 무한을 갈망하는 이들이다. 이들이 거주하는 현실은 ‘지옥’으로 불린다.
보들레르에게 악마는 ‘나’의 한계를 넘어선 나의 또 다른 모습이며, 심연 또한 나에게는 미지인 나 바깥으로 확장한 영역으로서 새로운 영역이고 나의 한계를 벗어난 또 다른 나로서의 무한이다. 따라서 ‘악’은 무한, 심연, 미지를 특징짓는 하나의 요소이다. 『악의 꽃』의 무한은 지상 저 너머의 천상이 아니기 때문에 ‘악’으로 특징지어지고, 악마도 영웅적 외양을 띠고 나타난다. 결국 『악의 꽃』의 ‘악’은 영웅적인 악마에 의해 성취된 새로움, 미지, 심연으로서 일상의 나 바깥, 나의 바깥, 나의 타자, 나의 너로 연결된다.
『악의 꽃』의 ‘악’의 ‘꽃’으로서
자아의 확장
방탕아의 방에 희뿌연 새벽이
마음을 괴롭히는 「이상」과 함께 비쳐들면,
신비한 응징자에 휘둘려
졸던 짐승 속에서 천사가 깨어난다.
다가갈 수 없는 「여러 영혼의 푸른 하늘들」은
아직 꿈속에서 고통받는 기진한 사내 앞에
심연의 매혹으로 열리며 파고든다.
이처럼, 다정한 「여신」이여, 명료하고 순수한 「존재」여,
(『악의 꽃』 <우울과 이상> 편 「영혼의 새벽」 1-2연)
마침내 괴로움 속에서 밤을 새우며 이상을 추구하던 사내(시인)에게 새벽의 빛과 함께 ‘이상’과 ‘천사’가 찾아든다. 영혼의 푸른 하늘 모양으로 나타나는 그 이상은 사내의 내면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자아의 또 다른 면, 즉 자기 속 천사를 일깨우며 하늘만큼이나 깊은 ‘심연’을 자아 속에서 열어 보인다. ‘이상’과 ‘천사’는 사내가 추구한 자아 너머의 무한으로서의 타자, 나의 경계가 사라진 이후의 나 혹은 너, 나와 너의 이원성을 극복한 너 혹은 나이다. 이러한 확장된 자아, 경계를 넘어서고 경계가 해체된 자아는 나의 미지로서의 심연인 ‘악’의 ‘꽃’으로 피어난다.
네 운명처럼 파란 많은
납빛의 기이한 저 하늘로부터
어떤 생각이 네 텅 빈 영혼 속으로 내려오는가?
대답하라, 바람둥이여.
[…]
검은 거대한 네 먹구름은
내 꿈을 실어가는 영구차,
네 희미한 빛은
내 마음이 즐기는 「지옥」의 그림자.
(『악의 꽃』 <우울과 이상> 편 「공감이 가는 공포」 1, 3-4연)
이제 탈자아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바로 내 마음의 또 다른 면, ‘먹구름’이라고 할 만큼 어둡고 그림자라고 할 만큼 불투명한 또 다른 나이다. 즉 나를 넘어선 또 다른 심연인 나 혹은 너는 ‘나’가 아닌 만큼 ‘나라는 생각’이 사라진 영역이다. 이처럼 『악의 꽃』의 ‘악’의 ‘꽃’으로서 자아의 확장 혹은 타아로의 개화는 나의 사유 작용에 의해 증명되는 데카르트 코기토의 ‘나’를 벗어나 反-코기토적 사유를 펼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데카르 코기토에 함축된 사유의 보증인에 의문을 제기하고 근대적 주체에 한계에 도전하는 것이다. 나아가 나와 너가 해체된 새로운 자아는 나와 세계의 이원성까지도 넘어서는 양상을 보인다.
앞에서 말한 ‘죽음’은 바로 사유 작용에 의해 증명되는 ‘나’의 죽음, 즉 ‘나의 생각’의 죽음인 것이다. 시인이 이러한 죽음을 통해 도달하고자 한 목적지는 다름 아닌 새로운 자아, 너/세계를 향해 열려 있는 나, 너/세계와 혼융된 어떤 자아 혹은 무아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악의 꽃』의 삽화인 카를로스 슈바베의 '죽음'
‘보는 나’에서
‘보여지는 나’로
금빛과 갈색이 섞인 그의 털에서
풍기는 냄새 그토록 달콤해,
어느 날 저녁 한 번, 꼭 한 번
어루만졌는데, 그 냄새 내 몸에 배어들었다.
이거야말로 이곳을 지켜주는 수호신;
제 왕국에 있는 모든 것을
판결하고 다스리고 영감을 준다;
그것은 요정일까, 신神일까?
사랑하는 내 고양이 쪽으로
자석에 끌리듯 끌린 내 눈이,
순순히 내 쪽으로 돌아와,
내 속을 들여다볼 때,
나는 깜짝 놀라서 본다
창백한 눈동자의 빛나는 불,
밝은 신호등, 살아 있는 오팔,
지그시 나를 응시하고 있는 눈을.
(『악의 꽃』 <우울과 이상> 편 「고양이」 7-10연)
여기서 『악의 꽃』의 ‘악’의 ‘꽃’으로서 자아의 개화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자기 앞에 고양이를 바라보고 있는 화자에게 ‘사랑하는 내 고양이 쪽으로 자석에 끌리듯 끌린 내 눈이 순순히 내 쪽으로 돌아와 내 속을 들여다보는’ 놀라운 일이 펼쳐진다. 고양이의 ‘그 냄새 내 몸에 배어들어’ 나와 대상은 이미 자-타의 경계를 넘어섰고, ‘나’를 ‘보는 나’에서 ‘보여지는 나’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이러한 굴절된 시선은 내가 나의 객체가 되었다는 것이고 ‘너’가 나의 눈이고 ‘나’가 너의 눈이 되었다는 것이다. 비로소 『악의 꽃』의 ‘악’의 ‘꽃’으로서 자아의 확장 혹은 개화가 만개한 상황이다. 이제 나와 대상, 나와 세계의 이원론적 분할은 의미가 없고 나에 대한 인식은 대상과 함께 혼융된 상태에서 인식하는 것이며 나의 정체성은 나와 대상의 상호성에 속에서 수립되는 것이다.
논문은 『악의 꽃』에서 시인 자신 곧, 자아가 나와 너/세계의 이원론적 분할을 넘어 대상과의 상호 교호 속에서 정체성을 수립해 가는 모습을 잘 보여 준다. 분명 『악의 꽃』은 데카르트 코기토의 근대적 주체와는 거리가 먼, 탈근대적이고 反-코기토적인 사유의 결과물이며, 보들레르를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적 위치에 올려놓는 데 이론의 여지가 없을 만하다. 이는 필자가 언급했던 동시대의 니체, 프로이트, 맑스 등과도 사유의 궤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다. 사상가들은 시대의 흐름과 변화를 읽을 때 앞선 세대의 사유 방식에 반대 입장을 표명하거나 변증법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사유를 펼쳐 나간다. 즉, 데카르트의 코기토적 사유처럼 자신이 극복할 대상이 분명히 주어진다. 하지만 시인의 경우는 어떠한가? 『악의 꽃』은 코기토적 사유를 극복하기 위한 의도성을 담지하고 있는 작품인가, 아니면 한 개인의 ‘자연발생적인’ 예술 세계에 불과한 것인가? 다시 말해, 변화하는 시대 흐름의 산물인가, 아니면 시대와 상관없는 한 예술가의 개인적 일탈인가? 필자는 문학 작품 자체의 해석에만 집중했지만, 리뷰어는 독자로서 反-코기토가 거대한 시대적 변화의 징후인 만큼 문학 작품을 둘러싼 예술가 개인의 생애나 그 개인과 시대의 상호관계가 자못 궁금해졌다. 앞으로 진행될 <프랑스 상징주의, ‘反-코기토’의 태동>이라는 더 큰 프로젝트에서는 작품 외적인 요소까지 광범위한 연구가 이루어져 좀 더 풍성한 결과물이 나오길 기대한다.
박일귀 리뷰어 pik101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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