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 우주론은 그리이스인들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들은 약 1500~2000년 전부터 우주를 관측하기 시작하였다. 당시의 우주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하늘의 모형은 구형이고 그 중심에 공모양의 지구가 고정되어 있다고 하였다. 지구를 하루에 한바퀴씩 회전하는 천구의의 존재를 생각하였고 태양과 별들은 이 천구의 속에 박혀 있어서 천구의와 함께 움직인 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에는 예외가 있었다. 가끔씩 경로를 바꾸는 것처럼 보이는 행성들이 관측이 되었다. 프톨레마이우스는 이 예외적인 현상의 설명을 위해 천구의를 추가하게 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을 수정하였다. 그 후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은 기독교신학에 수용되어 조화를 이루며 르네상스시대까지 대표적인 우주관으로 군림하게 된다.
16세기에 접어들어 코페르니쿠스는 태양과 행성들의 복잡하고 불규칙한 운동을 보고 천체의 운동에 대하여 연구를 시작하였다. 그 결과 그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며 지구와 행성들이 태양 주위를 돈다고 확신하게 되고 [천구의 회전에 대하여]라는 저서를 발간하였다. 이후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은 종말을 맞기 시작했다.
실험과 관찰을 통하여 자연의 법칙을 탐구하던 갈릴레이는 망원경을 만들어 금성의 상을 관찰하고 목성 주위를 도는 위성을 발견하여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을 뒷받침하였으며 은하수가 셀 수 없이 많은 항성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발견하여 우주가 당시 생각보다 훨씬 더 넓다는 증거를 얻는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티코브라헤의 관측과 케플러의 이론적 작업을 통해 더욱더 확고히 뒷받침을 받게 되었다. 케플러는 태양 주위를 도는 행성들의 규칙성을 정리하여 케플러의 법칙을 만들었는데 후에 뉴턴의 운동법칙과 만유인력법칙에 의해 훌륭하게 설명이 되었다.
17세기에 뉴턴은 하늘의 붙박이별들이 떨어지지 않는 것에 대해 의문을 품고 우주의 크기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그 이전까지 우주의 크기에 대해서는 지구 또는 태양을 중심으로 유한하다고 하는 생각이 일반적이었다. 당대는 물론 일반상대론이 나오기 전까지 는 공간의 유한성을 생각하기란 불가능하였으므로 여기서 우주의 크기란 무한한 공간에 별들이 분포하는 영역의 크기를 말하는 것이다. 뉴턴은 자신의 중력 이론을 우주에 적용시키면 우주에 있는 모든 별들은 중력에 이끌려 결국 하나의 큰 덩어리를 이룰 것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그러나 별 들이 무한한 공간에 균일하게 분포한다면 중력은 대칭적으로 상쇄될 수가 있고 따라서 우주의 붕괴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뉴턴은 무 한한 크기의 우주를 선호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것도 불안정함을 알아차렸다. 미약한 중력섭동만으로도 전 우주가 하나 또는 많은 숫자의 덩 어리가 될 수 있음을 알고 신의 힘을 빌어 항성들이 아무런 움직임을 하지 않을 때 그 체계가 가능함을 인정한다. 이후 유한한 우주의 개념은 폐기 되고 정적이고 무한한 우주의 개념이 20세기 초까지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하게 된다.
어두운 밤하늘에 대해서 의문을 품었던 케플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만약 항성의 숫자가 무한하고 균일하게 분포되어 있다면 항성들은 모든 우주에 고루 퍼져 있고 항성간의 간격은 일정하게 된다. 그 결과 하늘은 불덩이처럼 빛나게 되고 뜨거운 열로 지구를 불태울 것이다. 따라서 우주는 유한한 것이다. 이것은 무한히 크고 영원히 존재하는 유클리드공간에 물질이 고루 퍼져있는 우주모형의 타 당성을 배제한 것이었다.
케플러와는 반대로 독일의 천문학자 올버스는 우주의 크기가 무한하다고 믿는 사람이었고, 하늘이 어두운 이유는 무한한 우주의 항성간에는 구름이 존재하고 이것이 빛을 가려 밤을 어둡게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우주의 무한한 별빛은 구름을 가열시켜 결국 붉게 타오르게 만들 것이므로 케플러의 생각처럼 무한한 우주는 밤하늘을 밝게 하는 것이 타당하게 되는 것이다. 이후 이 밤하늘의 어두움에 대한 의문은 올버스의 역설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아인슈타인은 1915년에 중력장의 효과를 시공간의 만곡으로 해석한 일반 상대론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1917년에 는 리이만 시공간에 입각한 새로운 우주모형을 제시하였다. 그의 우주모형은 정적이면서 우주공간의 크기는 유한하지만 경계가 없는 모형이었다. 그는 일반 상대론에서 나온 장방정식이 동적인 우주를 나타내므로 자신의 우주모형과 맞지 않아 우주항을 삽입하여 장방정식을 수정하게 된다. 이 후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론과 허블의 발견은 현대 우주론을 이루는 모체가 되지만 허블이 팽창하는 우주를 발견할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3. 허블의 관측
허블은 윌슨산 천문대에서 100인치망원경을 사용하여 안드로메다좌에 있는 큰 나선형 성운에서 세페이드 변광성(Cepheid Variable)을 발견했고 또한 다른 나선형 성운들에서도 발견했다. 그다음에 그는 주기와 광도 사이의 관계를 사용하여 그들의 거리를 알아낼 수가 있었다. 이 방법으로 그는 안드로메다 성운까지의 거리가 80만 광년임을 얻을 수 있었으며 다른 나선형 성운들에 대해서도 비슷한 값을 얻었다. 이제 이들 성운은 우리 외부의 항성계로서 입증이 되었고 천문학자들은 성운이 독립된 은하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허블의 주요 업적 중 하나는 세페이드 변광성을 찾아내기에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은하들까지의 거리를 측정하는 방법을 고안해 낸 것이다. 그는 세페이드 변광성에 의해 거리를 측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몇개의 단계에 걸쳐서 이것을 해냈다. 그 첫번째 단계는 가장 가까운 은하계에 대해서만 적용되는데 이들은 <국부군>이라 불리우며 은하수도 여기에 포함된다.
다음 단계에서 허블은 세페이드보다 본질적으로 더 밝은 초거성들을 이용하였다. 이 별들은 세페이드가 보이지 않는 멀리 떨어진 많은 은하계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허블은 모든 은하계 내의 가장 밝은 초거성들은 거의 같은 절대광도를 가지고 있다고 가정했다. 그러면 그들의 겉보기 광도는 그들의 거리를 나타내줄 것이다. 허블은 세페이드 변광성을 사용하여 그것의 거리를 이미 알고 있는 국부군에 이 방법을 적용하여 이 방법을 검증했다. 그런 후 좀더 먼 은하들에 그것을 적용했다. 이런 방법으로 그는 측정 거리의 범위를 1백만 광년에서 1천만 광년으로 확장시켰다. 이것이 허블이 별을 사용하여 거리를 알아낼 수 있는 한계였다.
그가 마지막 단계로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은하계들 자체로서 그들 모두가 동일한 절대 광도를 가진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이 단계가 합리적이라는 것을 그는 처녀좌의 방향에 있는 큰 은하군을 관측함으로써 입증하였다. 이 은하군에서 은하들의 겉보기 광도에 대한 그의 관측치는 서로서로의 절대광도가 기껏 많아야 10배정도 밖에 차이가 나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모든 은하계가 이 범위의 중간값으로 모두 똑같은 절대 광도를 갖는다고 가정하게 되면 제일 좋지못한 경우라도 거리의 측정에 있어서 세배 정도의 오차가 생길 뿐이다.
이런 방법들을 사용하여 허블은 5억 광년이라는 거대한 거리 즉 1억개의 은하계를 포함하는 영역까지 우주를 탐구했다. 이것은 100인치 망원경이 있기 이전에 알려진 50만개보다 훨씬 큰 수이다.
허블에 따르면 은하들 사이의 평균거리는 약 1백만 광년 정도이다. 또한 그는 우리 은하계의 직경은 10만 광년이며 다른 모든 은하들은 대체로 이것보다 훨씬 더 작다고 결론 지었다. 은하들의 대다수는 직경이 단지 약 만광년밖에 안된다고 생각했으므로 그들은 자신보다 100배나 큰 거리만큼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