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여름 들어 가장 무더운 날이다. 더위를 피해 새벽부터 집을 나섰다. 목적지는 춘천, 애니메이션 박물관과 토이 로봇관이다. 박물관 입구 바닥에는 하늘색이 칠해져 있었다. 그 위를 걸어가니 하늘에 오른 듯 붕 뜨는 기분이 들었다.
박물관 정면에는 ‘꿈이 없는 사람은 입장을 할 수 없다’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그렇다면 잠시 꿈을 만들어 볼까, 했는데 박물관은 새 단장을 하느라 문을 열지 않았다. 꿈을 잃어버린 지 오래되었다. 그래서일까 하필이면 문을 열지 않은 날에 새벽부터 찾아 온 것이.
바로 옆에 있는 토이 로봇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귀여운 구름빵 캐릭터가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로봇세상은 어린이 장난감과 로봇을 주제로 한 박물관으로 게임 등 여러 가지 체험을 할 수 있었다. 어린이들이 하는 게임은 구경만 하고 몇 가지 체험을 해 보았다. 로봇에 색칠을 하고 이름을 써서 입력시키면 로봇이 화면에 두둥실 떠다닌다. 나는 이름을 도깨비라고 썼다. 큰 화면 위를 내 로봇이 도깨비, 도깨비, 도깨비, 하면서 떠다녔다. 내 옆에 있던 아이가 재미있다고 깔깔 웃었다. 나는 그 애를 보고 저게 나야, 나 했다.
나의 무의식 속에 잠재해 있던 도깨비가 토이 로봇관에 들어서니 되살아났다. 도깨비는 내 어릴 때 꿈이 엇으며, 친구들과 함께하던 놀이였다. 어릴 때의 장난기가 되살아나 로봇에 내 이름을 도깨비라고 적었던 것이다. 나는 잠시 동안 익살스런 도깨비가 되었다.
박물관을 나와 소나무 그늘아래 긴 나무의자에 벌렁 드러누웠다. 뭔가 재미난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기대하다가 잠이 들어버렸다. 툭, 툭 하는 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뜨니 솔방울 몇 개가 떨어져 있었다. 해가 옮겨가서 그늘은 사라지고 뙤약볕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도깨비가 다녀갔구나, 햇볕이 뜨거울 가봐 솔방울을 떨어뜨려서 내 잠을 깨워 주었구나 하고 엉뚱한 상상을 하니 기분이 좋았다. 나는 어릴 적에 도깨비를 만난 적이 있다.
초등학교에 막 입학해서였다. 우리 집은 학교 근방이었다. 집이 먼 친구들은 10리 거리에 있는 산골마을에 살았다. 친구들은 공부를 마치면 우리 집에서 놀다가 갔다. 나도 토요일이면 산골마을에 놀러가곤 했다. 그곳에는 순애가 앞집에 살고 복수가 둘째 집, 셋째 집에는 우리보다 나이가 서너 살이 많은 순행이가 살았다. 집으로 돌아 올 때는 친구들이 중간쯤까지 바래다주었다. 그날도 정신없이 놀다가 보니 벌써 해가 빠져 집에 돌아가야 하는데, 아무도 바래다 줄 수 없다고 말했다. 아무리 졸라 보아도 소용없었다.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산길을 혼자 벌벌 떨면서 내려왔다. 나는 너무나 무서워서 뛰기 시작했다. 산모퉁이를 돌아서는데 하얀 치마를 입고 긴 머리를 늘어뜨린 귀신이 내 앞에 불쑥 나타났다. 나는 “엄마야 귀신이다”, 하고 소리 지르면서 뒤로 넘어졌다. 이제는 죽었구나 하고 무서움과 긴장감으로 눈을 꼭 감고 있는데, 귀신이 내게 다가오면서 “귀신 아니야, 도깨비야” 했다. 도깨비는 3명이였는데 손에는 방망이를 들고 있었다. 그것은 빨래방망이었다.
나는 너무 놀라서 울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뭔가 이상했다. 내가 나올 때 친구들은 집에 있었는데, 그 애들이 도깨비였나. 그러고 보니 깊은 산골 아이들의 집은 정말 도깨비 집 같았다. 내가 눈물을 닦으면서 여기까지 어떻게 왔느냐 물으니, 집 뒷산으로 올라가서 다시 산 밑으로 살살 가로질러 오면 여기로 올수 있다고 했다. 친구들은 도깨비 놀이를 하려고 도깨비로 분장을 한 것 이었다.
우리는 새카맣게 어두워진 산골길에서 도깨비놀이를 했다. 아이들은 나에게도 도깨비방망이를 주었다. 우린 서로 손을 잡고 빙빙 돌면서 춤을 추었다. 그리고 소원을 이야기하면 서로 도깨비방망이로 소원을 들어 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나중에 우리가 크면 꼭 그 소원이 이루어 질것이라고. 마지막으로 멈추어 서서 불빛 나와라 뚝딱 하자, 순애가 손전등을 비추었다. 나의 어린친구들은 10리길을 걸어 우리 집까지 데려다 주고 돌아갔다.
초등학교졸업하고 한동안 도깨비들을 보지 못했다. 어느 날, 우연히 길에서 순행이를 만났다. 머리는 완전 뽀글이 파마를 하고 입술을 빨갛게 칠한 것이 영락없는 도깨비였다. 그날도 그는 나야 나, 도깨비야, 라고 말했다. 그는 결혼하여 아기까지 업고 있었지만, 행복해 보였으며 초등 때의 장난기가 얼굴에 그대로 살아 있었다.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났다. 어릴 적 도깨비방망이는 그의 소원을 들어 준 것일까. 순행이는 안동장터에서 산골마을에서 키운 야채를 팔고 있었다. 나는 얼른 뛰어가서 빨래방망이를 하나 사주고 왔다. 우리들의 도깨비 방망이를 잊어버리지 말라고 말하면서,
여름날 새벽, 하늘색을 칠한 길은 나에게 판타지 세계를 열어 주었다. 거기에서 잃어버렸던 어릴 적 도깨비를 만났다. 툭, 툭, 솔방울을 떨어트려 건재함을 알려주고 갔다. 도깨비는 살아있었다.
첫댓글 2019 아침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