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땅 위에서 영영 사라져도
울음이나 절규는커녕 슬픔조차 없는 동물들
없어져 아주 조용해진 그들의 소리가 몸 속에서 들린다
──김기택, 「계절 관측 동물」부분
1990년대 이후 우리시는 식물성을 중요한 화두로 삼아왔다. 1980년대의 격렬함에 대한 반작용, 고요하고 애상적인 대상에서 솟아나는 서정성, 뿌리를 그리워하는 마음, 썩어가는 문명의 대안으로 떠오른 생태주의 등은 식물을 우리시의 중심에 세우는 동인이 되었다. 시인들은 땅에 뿌리박고 있는 것들을 따라 낮은 곳으로 내려와 "땅바닥에 대고 시를"(최문자, 「땅에다 쓴 시」) 쓰며, 풀꽃의 이름과 곤충과 물고기를 불러모은다. 식물성은 홀아비꽃대나 미나리아재비, 칼잎용담과 며느리밑씻개뿐만 아니라 흰뺨검둥오리와 붉은발농게, 버들치와 유리창떠들썩팔랑나비까지 포괄한다. 식물성은 소멸해가는 존재에 관한 연민을 넘어서 생명 있는 것들의 뒤얽힘, 우주공동체의 역동성으로 내포를 확장하였다. 김규린은 아예 시집 제목을 『나는 식물성이다』로 정하고, 식물성의 개념이 수동성/정태성의 골방에서 벗어나 "자유롭게/꽃 한 마리 날아"(김규린, 「나에게로 다가와서」)오르는 능동성/역동성의 마당으로 흘러넘치는 저간의 사정을 다시 확인해주었다.
식물은 동물의 대립 개념이 아니다. 식물/식물성은 문명의 반대쪽에 있다. 동물성은 동물과 전혀 다른 내포를 지닌다. 백합조개나 사파이어녹색부전나비도 동물임에 틀림없지만 그들을 동물성의 범주로 몰아넣을 사람은 없다. 시인이 자주 찾는 동물은 동물성보다 식물성에 더 가까운 존재다. 맹자는 반만년 전 순제(舜帝)가 설(契)을 사도(司徒)로 세운 뜻을 "無敎而近於禽獸"로 풀이하였다. 이때 금수는 개체가 아니라 맹금류와 인간 사이에 누적된 경험의 추상적 속성을 지시한다. 동물성은 이미 부정성의 범주 안에 들어가 있었다. 식물은 인간과 공생관계를 유지하면서 생존해왔지만, 동물은 대개 인간과 경쟁하면서 충돌할 때가 잦았기 때문에 아전인수식 평가가 이루어지기 쉬웠다. 동물은 땅강아지, 긴꼬리제비나비, 댕기물떼새 같은 것이 아니라 호랑이, 늑대, 하이에나, 독사 같은 것들, 소와 돼지, 개나 고양이 같은 것들이다. 동물성의 개념은 생물학의 갈래에 구속받지 않고 비교적 덩치가 큰 맹수나 가축을 중심으로 형성되면서 부정적인 쪽으로 기울었다. 비인간성, 반문명, 난폭함, 이기주의, 욕망, 어둠, 무지, 무질서, 무의식, 피, 공포 등의 의미망이 동물 자체의 특성보다 동물을 인식하는 인간의 가치 기준에 따라 동물성의 내포에 눌어붙었다. 이러한 의미망은 인간의 부자유와 원초적 본능에 관련될 때만 야성의 생명력과 역동성이라는 긍정의 범주로 전이될 뿐이다.
오늘날 맹금류를 일상에서 보는 일은 거의 없게 되었으니, 동물성은 실체는 사라지고 관념의 거죽만 남은 말이 되었다. 동물성뿐 아니라 동물이란 말도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 야생 포유류나 파충류는 대부분 멸종했거나 그 수가 격감하였다. "가슴속에 호랑이 발자국 본을 떠오는 이들이/줄을 잇는다고"(손택수, 「호랑이 발자국」) 하더라도 우리 강산에 호랑이는 다시 돌아오지 못할 터. 지리산에서 반달가슴곰의 생태를 복원하는 작업이 수년째 진행되고 있지만, 호랑이가 없고 여우와 늑대가 없는데 곰만 남아서 무엇하랴. 이런 야생동물뿐 아니라 가축을 보는 일도 드물다. 우리가 소비하는 고기의 양이 엄청 많은데도, 현대사회는 분업과 자본의 효율성을 앞세워 동물을 일상의 배후로 밀어낸다. "옛날 사람들은 돼지를 먹었는데 요즈음 사람들은 돼지고기를 먹는다. 돼지가 죽는 줄 모른다. 돼지 비명 소리, 돼지 멱따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박찬일, 「돼지! 그리고 비디오」) 백석의 「오리 망아지 토끼」에서처럼, "오리치를 놓"고, "행길로 엄지 따라 지나가는 망아지"를 만나고, "맞구멍난 토끼굴을 아배와 내가 막어서"는, 야생이고 축생이고 인간과 동물이 얽혀 살아가는, 그런 삶이 어긋나기 시작한 게 겨우 몇십 년 전 일이다. 이제, 암소 잡은 손 놓으시고 붉은 꽃 꺾어바칠 사람도, 칡범도 청노루도, 목이 길어 슬픈 짐승도, 이 세상에서는 더 이상 만날 수 없다.
이렇게 동물이 일상 경험 바깥에 있으니 시의 제재가 될 확률이 낮을 수밖에 없다. 시에 등장하더라도 특정한 상황이나 속성에 한정되게 마련이다. "참개구리, 무자치, 뻐꾹새, 종달새/우리나라 기상청이 지정한 계절 관측 동물들"(김기택, 「계절 관측 동물」)은 생태시의 멸종 목록으로서만 등장한다. 멸종 위기 동물이 급격히 증가하는 한편에선 등뼈가 휜 물고기, "다리가 여덟 개 달린/망아지"(최승호, 「핵망아지」) 같은 기형이 출현하여 동물의 위상을 문명 비판의 자리에 올려놓기도 한다. 「황조가」의 꾀꼬리와 「구지가」의 거북 이래 우리 시와 설화에 등장한 용맹한 호랑이와 요망한 여우, 충직한 소와 현명한 개, 우화의 주인공 까마귀와 유유자적의 대명사 백구는 이제 그 의미망을 거의 잃어버렸다. 동물성은 동물의 실체가 소멸하면서 그 비중이 점차 줄어들고, 대신 생태시의 제재가 되는 작고 여린 곤충류과 조류, 어류가 급격히 늘어나 낯설고 아리따운 이름을 지닌 '식물성 동물'이 서정의 꽃밭을 수놓고 있다.
2. 토종닭의 운명
민박집 뒤뜰의 토종닭
모조리 백숙으로 고아 먹고
부처님 앞에서 지그시 합장하는
관광호텔 손님들
──김광규, 「토종닭」 부분
그렇다고 동물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물론 아니다. 인간을 풍자하고 문명을 비판하는 데 동물을 가장 많이 활용한 최승호는 「우화」에서 "잔꾀를 덧보태줄 우화가 아니라 큰 지혜를 주는 우화"의 제재가 될 동물들로 "코끼리, 사자, 뱀, 얼룩말, 하마, 독수리, 표범, 하이에나, 도마뱀, 곰, 고래, 수달, 족제비, 개미핥기, 들개, 앵무새, 상어, 코뿔소, 토끼, 까마귀, 신천옹(信天翁), 펭귄, 해마, 고등어, 바다표범, 곰장어, 쥐치, 명태, 오징어, 앵무조개, 폐어, 연어, 악어, 거북, 흑두루미, 게, 멍게, 잉어, 쏘가리, 가물치, 메기, 붕어, 기린, 낙타, 말, 호랑이"와 원숭이 등 47종을 열거하고 있는데, 대부분 시에 등장한 바가 있는 동물들이다. 하이에나나 코뿔소라면 이건청이 떠오르고, 까마귀라면 정양, 수달은 정진규, 오징어 굽는 냄새엔 문인수가 생각난다. 식물에 비해 양이 매우 적지만 그래도 아직 상당수 동물들이 시의 제재가 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 동물들이 시에 등장하는 방식은 예전 같지가 않다. 인간과 동물이 만나는 방식이 달라진 때문이다. 동물원에 가지 않고 호랑이를 만날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 여우는 목도리 가게, 악어는 가방백화점에 가야 흔적이나마 찾을 수 있다. 영상 매체만이 그 헛것을 오히려 생생하게 보여준다. "'육식동물의 난센스'를 부르며/야생동물의 삶은/왜 항상 비극적으로 끝나는지에 대해"(문혜진, 「슬픈 동물원」) 고민하는 일은 내셔널 지오그래픽을 보아야 가능하다. "사슴이 사자에게 잡아먹힌 저녁의 정체"는 "TV 모니터"(이면우, 「동물왕국 중독증」)를 거쳐 드러난다. "몇 마리 누우가/저쪽 강둑이 아닌 악어를 향하여 강물에 몸을 잠그는"(복효근, 「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 끔찍한 살육의 현장도 영상을 통해 장엄한 생존의 비밀로 윤색된다. 인간과 동물의 만남에는 알게 모르게 문명이 개입한다. 문명의 매개체를 거치면 개체의 삶은 종의 지식으로 변질된다. 전 세계에 "700여 마리만 남아 있"는 저어새를 위해 서해안 갯벌을 살려야 한다는 사실을 시인은 "저어새가 광고모델"(손택수, 「밥주걱새가 간다」)로 나오는 책표지를 보고서야 인식한다. 모르는 것보다야 나을 때가 많겠지만, 피가 통하지 않는 이런 지식은 자칫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킬 수도 있다.
야생동물은 그나마 동물성을 어느 정도 인정받고 있다. 관련 지식이 늘어나면서 과거의 부정적 인식에서 벗어나 연민의 정을 얻기도 하고, 야성의 본질과 존재의 의미를 드러내는 제재가 되기도 한다. 이에 비해 가축은 그야말로 소돼지 취급을 받고 있다. 노동을 함께 하고 생존의 동반자로 살아가던 때도 있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다. 이제 인간은 동물을 '기르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명령에 따라 계획적으로 '생산한다.' 인간은 "신처럼 가축들의 생명을 다스"(함민복, 「기록, 어설픈 하나님」)린다. 최승호의 「슬픈 돼지」는 그 결과가 어떠한지 잘 보여준다. 생명을 함부로 다룬 대가는 결국 인간에게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 "말 못하는 짐승"의 "고통과 안타까움"을 알지 못하고 돼지 목을 딴 주인은 "거의 미치광이"처럼 광기를 내뿜는다. 이런 경우 시가 보여주는 것은 불쌍한 돼지의 애상이 아니라, '돼지는 돼지답지만, 인간은 인간답지 못하다'는 점이다.
함민복의 「종돈」, 「개 도살장에서」 등과 김기택의 「소」 연작도 냉혹한 자본의 논리와 '짐승 같은' 인간의 잔혹함을 풍자/비판하고 있는데, 이런 경우 동물은 그것이 지닌 생태 특성과 상관없이 인간과 사회의 부당함을 드러내는 도구의 성격을 띠게 된다. 김광규의 「토종닭」도 인간의 식욕과 성욕에서 비롯된 가축의 슬픈 운명과 더불어 인간을 파멸로 몰아갈 우리 시대의 이율배반을 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야생동물이 생존을 위해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데 반해 이들은 단단한 수동성에 길들어 있다. 사슴과 누우, 사자와 악어의 존재 방식은 인간의 통제권 밖에 있다. 그것이 삶이든 죽음이든 상호관계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개, 돼지, 소, 닭은 왜, 언제, 어떻게 태어나서 죽는지 모른다. 수성(獸性)은 이들이 아니라 무자비하게 고깃덩어리를 도살하는 인간에게 있다. 개의 충직과 돼지의 먹성과 장닭의 붉은 벼슬, 암소의 커다란 눈망울은 무협영화에서 힘도 쓰지 못하고 나자빠지는 엑스트라처럼 시체더미로서 시의 한켠을 붉게 물들일 뿐이다.
유하는 경마장의 말을 통해 인간의 욕망을 통쾌하게 야유한다. "경마장 안팎으로 쉬지 않고 질주하는, 똥말 똥시인 똥감독 똥배우 똥교수 똥기자 똥정치……"는 누구나 아는 이 시대의 일상사인데도 모두가 숨기고 있는, 우스꽝스러운 비밀이다.
두두두두두 똥말은 달려간다 천일마화여, 두두두두 마각을 감춘 채 세상의 똥말들은 쉬지 않는다.
나의 왕인 고객이시여, 아직은 칼을 거두소서. 내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답니다.
나는 여전히 후미 탐색 중이니까요. 기다림을 멈추지 마세요. 언젠가는 대박을 안겨드릴 거예요.
그럼요, 멋지게 인생을 역전시켜드리겠어요.
──유하, 「천일馬화 - 변마의 독백」부분
유하의 풍자는 말이라는 종의 특성이 아니라 "똥말/부진마"의 개별성에 의존하고 있다. 김광규나 최승호, 함민복, 김기택 등의 닭, 개, 소, 돼지는 일반명사다. 동물이 일반명사로 시에 등장하는 것은 오래된 전통이다. 그것이 이데올로기를 실어나를 때는 더욱 그렇다.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고 할 때, 까마귀와 백로의 이미지를 한두 개체의 특성에 맞춰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무의미하다. "무장과 무장 사이로/무장해제된 새들이/아아라이 산맥을 타고/월경하고 있다"(조기조, 「새」)처럼, 기러기니 도요새니 하는 따위조차 필요없는 때가 많다. 이 경우는 분단현실을 드러내는 날개 있는 존재면 충분하다. "해골이 되려고 순대와 족발이 되려고"(김기택, 「마장동 도축장에서」) 온몸이 해체된 소가 검정소인지 누렁소인지 알 필요가 무에 있겠는가. 이와는 달리 유하의 말들은 각기 이름을 지니고 있다. 경마꾼은 말이라는 종에 돈을 거는 것이 아니라 마명(馬名)을 지닌 한 마리 말에 환상을 건다. "마권을 사기 위해 개떼처럼 엉켜 있는 이 인간 군상들"은 "황금박스"에, "불모지"에, "파우스트"에, "근대화"에, "'희망'이란 이름의 똥말"에 고배당의 욕망을 배팅한다(「천일馬화」). 동물이 한 개체로 등장하더라도 특정한 조건을 수식으로 붙여 개별성을 표시하는 정도인데, 유하의 말[馬]들은 개별 특성을 지니고 등장함으로써 새로운 말[言]의 주로(走路)를 생각하게끔 하였다. 인간은 각자 이름을 지닌 개인으로 존재하는데, 말은, 고양이는, 지렁이와 가시엉겅퀴는, 왜 이름이 없는가? 왜 이 느티나무도 저 느티나무도 모두 느티나무인가?
3. 몸 안의 짐승, 몸 밖의 동물
늑골에 숨어살던 승냥이
목젖에 붙어 있던 뻐꾸기
뼛속에 구멍을 파던 딱따구리
꾸불꾸불한 내장에 웅크리고 있던 하이에나
어느 날 온몸 구석구석에 살고 있던 짐승들이
일제히 나와서 울부짖을 때가 있다
──권대웅, 「내 몸에 짐승들이」 부분
동물은 시인의 몸 안팎을 드나들면서 독특한 비유와 상징의 빛을 뿜기도 한다. 김형술의 「달이 있는 겨울」은 달을 염소로 치환하고 그 특성을 빌림으로써 신비한 주술성을 형성한다. "소리도 없이 침대를 뜯어먹고/벽에 붙은 서랍들을 씹어먹고/높이 자란 벽/내 몸 속 뒤엉킨 시간을 갉아먹"는 염소는 화자의 마음을 "맑고 차"게 정화해주는 겨울 달빛이다. 주창윤은 "羊들의 푸른 그림자"를 통해 "육체 없는 생이,/영혼 없는 육체의 외피"(「옷걸이에 걸린 羊」)가 얼마나 무거운지 보여주면서, "인간이 아니라/도롱뇽이 파고다 공원 앞을 왔다갔다"(「양서류를 위하여 1」)하는 기이한 장면으로 그 무거움을 깨닫지 못하는 군상의 헛된 욕망을 풍자한다.
"코피를 흘리는 코끼리"(김행숙, 「성스러운 피」), "걸어다니는 테이블 위로" 뛰어다니는 왜가리(이수명, 「왜가리는 왜가리 놀이를 한다」), 비포장길 웅덩이에 살고 있는 "푸른 악어들"(문정희, 「악어를 잡으며」), "낡고 지친 구두만 먹는 곰"(성미정, 「구두 먹는 곰」) 등은 각 시인의 독특한 문체 안에서 형성된 동물적 상상력을 흥미롭게 보여준다. 「암탉」(김혜순)에는 암탉이 없고, 「고양이 비디오를 보는 고양이」(이수명)는 고양이가 아니다. "개들의 역사책을 펼치"고 "날리는 개털"(연왕모, 「나는 개처럼 2」)을 읽는 개 아닌 개도 있다. "거미는 세계의 저쪽 편으로 빠져나와/이제, 영영 돼지를 만나지 못한다"(김중, 「겨울비」). 이런 도발적인 상상력은 동물이 지닌 속성에 다가가기도 하고 비켜서기도 하면서 우리시의 이미지를 풍성하게 해준다. 이들이 보여주는 것은 몸 밖에 실재하는 동물이 아니라 몸 안으로 들어온 짐승이다. 시인의 내면을 거치면서 동물의 형상은 심하게 일그러지고 곰삭아 말의 사리로 되돌아나온다. "얼룩사슴 한 마리를 삼"키고 뼈를 다 소화한 뒤에야 "심장을 뚫고 나온" 것이 바로 "한 줄의 검은 詩!"(김혜옥, 「파사」)
물론 모든 상징과 은유의 출발점은 사물 자체다. 명사를 사용한다는 것은 대상의 범주를 나름대로 인식하고 있다는 뜻이다. 대상은 먼저 몸 밖에 있다. 한 대상이 시간의 풍화작용을 거쳐 굳힌 이미지의 끈적끈적한 힘을 단번에 무시할 수는 없다. 그래서 시인은 특정한 국면을 정교하게 묘사함으로써 대상이 지닌 단단한 이미지의 상투성을 뚫는다. 이시영의 「소」는 섬에 방목하여 "야성의 기운"을 되찾은 소를 통해 일상의 의미를 묻는다. 문인수의 「염소」도 섬에 있다. 염소가 섬의 벼랑에서 사는 법은 실존의 방식과 존재의 의미로 확장된다. 박종현의 「개 같은 사랑 컹컹 짖고 싶다」와 윤석산의 「나는 '느으윽대애'란 말을 아주 좋아한다」는 개와 늑대의 속성을 그대로 차용하면서 대상들을 인간의 삶으로 끌어들인다. 김중의 「개」는 몸 안의 개와 몸 밖의 개를 겹침으로써 생명 있는 모든 존재의 고독을 극명하게 환기한다.
개는 묶인 줄만큼 자유롭다. 줄의 길이가 개의 시민권이며 그 끝은 영혼의 낭떠러지.
외로운 개는 친구를 만나면 똥구멍을 벌린다.
고독의
자랑스런 구린내를 맡아보라는 듯이.
──김중, 「개」 전문
동물이 도시로 들어오면서 상상력의 폭은 더욱 넓어진다. 최정례는 설화의 호랑이를 실존의 신호등 앞에 세운다(「햇빛 속에 호랑이」). "거미는 스스로 제 목에 줄을 감지 않"지만 인간은 제 목에 밧줄을 건다(박성우, 「거미」). "박제의 가짜 날개를 달고, 이 도시를 몽유도원처럼 거닐었으면"(김신용, 「몽유 속을 걷다」) 상상하기도 하고, "짚이나 솜 혹은 방부제 따위로 가득 채웠을 박제된/후투티"에서 "떨칠 수 없는 매혹감"(고진하, 「껍질만으로 눈부시다, 후투티」)을 느끼는 실존의 아이러니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렇게 동물은 상상력의 영역으로 들어오면서 실재하는 상황과 상관없이 다양한 이미지를 발산한다. 식물이 생태의 특성에서 벗어나 시의 제재가 되기 어려운 데 반해, 동물은 비일상적이고 부조리한 상황을 수반하면서 동물 자체가 지니고 있던 기존의 부정성과 다른 자리에 새로운 동물성을 형성하면서 우리시의 미래를 예비하고 있다.
생태시가 청띠신선나비와 검은댕기두루미를 식물성으로 끌어들이는 동안, 코끼리는 "늙은 나무"와 몸을 합하고 영산홍은 "한국산 호랑이"로 바뀐다. "한 그루 코끼리는 이제/몸을 약간만 움직여도 사방에서/동굴 같은 바람 소리가 들"(김혜옥, 「코끼리나무」)리고, "호랑이는 깊은 산 속에만 있는 게 아니"(김영남, 「영산홍 쓰다듬으며 호랑이를 잡는다」)라 도처에 널려 있다. 인간이 끼어들 수 없는 자리에서 동물과 식물이 몸을 섞고 드나들며 서로를 바꾸기도 한다. 어떤 꽃은 짐승의 "핥는 듯한 눈초리"에 가깝고 어떤 동물은 꽃에 가까워서(송재학, 「어떤 꽃은 차라리 짐승이고 또 어떤 벌레는 차라리 꽃에 가깝다」), 식물성과 동물성이 내통하며 역동적인 상상력의 세계를 열어나간다. "마침내 사자가 솟구쳐 올라/꽃을 활짝 피"(송찬호, 「동백이 활짝,」)운다.
아빠, 동백은 어떻게 생겼어요,
곰 아저씨처럼 무서워요?
"귀여운 토끼 귀, 쫑긋"이 묻는다. 아빠곰이 답한다.
동백은 결코 땅에
항복하지 않는 꽃이란다
거친 땅을 밟고 다니느라
동백의 발바닥은 아주 붉지
그런 부리부리한 동백이
앞발을 번쩍 들고
이만큼 높이에서 피어 있단다
동물원 쇠창살을 찢고
집을 찢고
아버지를 찢고
나뭇가지를 찢고 나와
이렇게
불끈,
──송찬호, 「山經 가는 길」 부분
동물이 시의 제재가 되는 비율은 식물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지만, 동물적 상상력이 발현되는 방식은 상당히 다양한 편이다. 독특한 상징 체계를 이루며 폭넓은 시세계를 형성하는 동물의 종류는 많지 않으나, 물고기 같은 경우는 몇몇 시집에서 전편을 지배하는 제재가 되기도 하였다. 최근 자주 등장하는 개, 고양이, 돼지, 거미 들은 시인들의 몸 안팎을 넘나들면서 벌써 두꺼운 이미지의 지층을 쌓았다. 식물성 이미지의 중력이 비슷비슷한 시를 양산하게 만드는 최근 우리 시단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서 동물 이미지는 앞으로 계속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땅 위에서 영영 사라져 울음이나 절규는커녕 슬픔조차 없는 동물들이라도 시인은 그 들리지 않는 소리, 보이지 않는 눈망울을 가슴에 품을 줄 아는 존재다. 하물며 아직 이 지상에 남은 동물들의 목록을, 늑골에서 목젖에서 뼛속에서 꾸불꾸불한 내장에서 지울 수야 없지 않겠는가. 온몸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온갖 짐승들을 찾을 생각도 않고, 그 많던 동물들은 다 어디로 갔나 한탄하기에는 아직 이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