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강 삼백리 여강길 1코스(영월루-황포돛대-소무산-흔암리 선사주거지
https://youtu.be/s5c03kYbzmE?si=5w4e39A8EDCoVCu8
남한강 삼백리 여주 여강길.
산들투어 AI여강길 1코스
여주에는 남한강 물길을 끼고 걷는 트레일. ‘여강길’이 있다.
강변의 아름다운 경관과 역사적 스토리까지 두루 끼고 걷는 길이다.
산들투어 여강길 투어단이. 남한강 삼백리 여강길 140km 걸어보기 첫 출발하는 것이다.
지난 2월27일 여강길 사무국에 들러 스탬프북을 수령하고 1코스 출발지 여주역으로 향했다.
여주역에서 출발하여 여주터미널을 지나 시내길은 2km 남짓의 도심으로 이어지다 영월루(迎月樓)로 들어가고 있었다.
영월루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37호)
조선시대 여주 관아의 정문으로 사용하던 것으로 1925년 현재의 위치로 옮기면서 명칭도 기좌제일루(기좌제일루)에서 영월루(영월루)로 변경했다고 한다. 영월루는 달을 맞는 정자라는 뜻으로 남한강과 여주 일대가 한 눈에 조망된다.
마암 (馬巖)
영월루 바로 아래의 절벽 바위를 ‘마암’ 이라고 한다. 여주를 대표하는 관성(貫姓) 중의 하나인 여흥 민씨는 마암 바위의 구멍에서 시조가 탄생했다 하여 이곳을 성지로 여기고 있다. 또 신라 경덕왕 때 마암 바위 아래의 푸른 물결에서 황룡 마와 여룡마(검은 용마)가 출현하여 고을 이름을 황려현(黃驪縣)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마암은 여주를 대표할 만한 유적이다.
영월루에서 남한강 오른편이 걸어야 할 길이다.
영월루를 벗어나면 길은 이내 남한강변으로 이어지고, 그 길은 다름 아닌 자전거길로 이여진다.
부라우나루터
여주시 단현동과 남한강 건너편의 강천면 가야리 지역을 연결하던 나루이다. 나루 주변의 바위들이 붉은 색을 띠어 붉은바우 - 붉바우 - 부라우라는 명칭이 생겼다고 한다. 주로 강천면 주민들이 여주장을 이용하기 위해 나루를 이용했지만 가끔 소금배가 정박하기도 했다. 고갯 마루에는 당시 세도가인 민참판댁 외가가 있었다고 한다. 명성황후 생가가 있는 능현동는 여흥 민씨의 집성촌이었다. 1975년 폐쇄되었지만 풍경이 뛰어나다. 부라우나루 너럭 바위엔 단암(丹巖)이라는 새겨져 있다. 인현황후의 친오빠인 민진원의 호가 단암이다. 부라우 앞에 있는 강을 단강이라고 불렀다.
강 건너의 신륵사가 보이는 나루터에서 관광객을 실어 나르는 일을 하는 돛배를 보이고 있다.
드넓은 고수부지와 공원들, 캠핑장, 등 공원화 되어 있다.
가족단위 캠핑객들을 보며 아유~ 부러워라.
한마디하고 지나친다.
우만리나루터
여주시 우만리나루에서 떠난 배는 남한강 건너편 강천면 가야리에 도착한다. 나루터 입구에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어 현재 주민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
우만리나루터는 땔감을 구하러 강천으로 가는 주민들이 주로 이용했다. 원주에서 온 소장수들이 우만리나루를 경유하여 여주장과 장호원장으로 이동하였다고 한다.
1972년 홍수로 없어지기 전까지 음력 정월 보름 이면 우물 3곳에서 남한강물을 떠다가 지은 밥을 날이 밝기 전에 강으로 흘려보냈다.
용왕신을 배불리 먹여 사고를 막고자 하는 액땜이었다.
그렇게. 걷고. 걸어. 4대강 사업의 16개의 보(洑) 중 하나인 강천보를 지난다.
강천보. 경기도 여주시 단현동과 강천면에 있는 남한강의 보로서 4대강 정비 사업 과정에서 부설되었다.
강천보 주변에는 한강문화관과 전망대가 있었다,
강천보를 지나자 마을이 보인다. 마을 삼거리 담벽에 여강길을 알리는 이정표가 보인다.
아스팔트길을 지나면서 강도 보이고 산길로 이어진다.
낙엽의 더미가 발목이 빠질 정도로 깊다.
봄기운이 완연하게 보이는 강변 주위길을 마냥 더듬으며 걷는다.
얼마 걷지 않아 만난 수백 년의 세월을 살아냈음직한 은행나무 한 그루가 반겨주고 있다.
길은 오래된 나무들 사이로 이어지고 있었다.
역광의 먹빛 아래로 길이 보이고, 오래도록 강을 따라 흐르고 있었을 길은 행인의 발걸음에 기지개를 켜는 듯, 깨어나고 있었다.
영도고속도로 아래 굴다리를 지나 구,도로에서 낭만팀(반종주)과 헤어지고 종주팀은 다시 산길로 접어든다.
흔암리 나루터
여주시 점동면 흔암리와 건너편 강천면 굴암리를 연결하던 나루이다. 마을에 위치한 바위가 희기 때문에 흔바위라고 하며 나루터명도 마을명칭에서 유래되었다.
흔암리와 굴암리 주민 들은 대규모로 땅콩 농사를 지었으며 남한강 중앙에 위치한 하중도 경작을 위한 농선으로도 이용되었다.
1972년 홍수로 인해 마을이 500미터 이상 떨어진 곳으로 이주하면서 흔암 나루도 기능을 상실하였다.
나룻배가 없어지기 전까지 여름철이면 흔암나루에서 원주에 있는 개치나루까지 나룻배를 끌고 가서 배를 타고 내려오는 뱃놀이를 하였다고 전해진다.
흔암리 선사주거지
흔암리 선사주거지는 청동기시대의 유적 이다. 이 시대는 석기시대와는 다르게 농경이 시작되었다.
따라서 낮은 구릉 지대를 중심으로 밭농사가 이루어져 사냥 이나 채집에 의해 식량을 의존하지 않고 경작과 불을 이용한 방식이 도입되어 농업 시대를 열게 된다.
흔암리 유적지는 화덕 자리와 토기 안에 탄화된 쌀을 비롯하여 조, 수수,보리, 콩 등이 출토되었는데 여러 잡곡이 재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강길 1코스(옛나루터길)의 백미인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에서 과거시험을 보기위해 넘었다던 ‘아홉사리 과거길’로 접어든다.
아홉사리과거길
흔암리와 도리를 연결하는 오솔길로 좁고 험해 아홉 구비를 돌아간다고 해서 아홉사리이다.
경상도 충청도에서 과거(科擧)를 보러 서울로 올라가는 길이었지만 사용하지 않아 자연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
현재 39종의 식물의 서식이 확인되었다. 경상도 지역의 과객들이 문경( 聞慶)을 거쳐 서울로 갔는데 이유는 ‘좋은 소식을 듣는다.’는 뜻 때문이었다.
죽령은 ‘죽죽 미끄러지고’, 추풍령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는 이유로 선비들은 문경을 선호했다고 한다.
아홉사리 고개에는 매년 9월 9일 아홉 번째 고개에 피는 구절초를 꺾어 달여 먹으면 모든 병이 낫는다는 이야기가 서려있다.
아홉사리 고개를 넘다 넘어지면 아홉 번을 굴러야만 살아서 넘을 수 있다는 우스개 소리도 전한다. 과객들도 사라지고 주막도 없어진지 오래지만, 배 삯을 아끼려는 사람들이 걸어서 한양으로 오가던 길, 한도 많고 사연도 많은 이 길을 400여년전에 걸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실록에 남아있다.
소무산
산 허리 부분으로 이어진 3㎞ 정도 오솔길을 걷다 보면 빽빽이 들어선 나무들 사이로 여강이 나타났다 사라지곤 한다. 중간에 자그마한 계곡 서너 개를 만났다.
이 고개를 넘으면 여강변에 자리한 도리마을이 나온다. 마을로 통하는 길이 하나뿐이라 들어온 길로 돌아나가야 한다고 해서 도리마을이다. 농로(農路)를 따라 걸으니 야트막한 산기슭 계단식 논에 벼이삭이 새싹이 돋았다 겨율이 되어 문닫은 현상을 보며 약동하는 봄의 정기와 생명이 담겨 있는 듯했다.
도리마을
점동면 장안리 마을 서편에는 도호동(桃湖洞)이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수운이 발달하면서 강변쪽이 생활이 편리하고 토양이 비옥하므로 도호동 사람들이 이동하여 큰마을을 이루게 되었다고 해서 도래(桃來)가 되고 되래로 발음하였으며 도리라는 행정지명으로 굳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도리 늘향골 마을은 녹색농촌체험마을로 감자캐기, 고구마캐기, 두부만들기 등의 농촌체험을 즐길 수 있는 마을이다. 새말과 사장골 부락이 있다.
산들투어 여강길 투어단이 여강길 1코스 19km를 종주한것이다. 낭만팀은 10km정도 트레킹을 들기고 봄향기 체험을 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여주쌀밥집에 들러 늦은 점심을 먹고 돌아왔다
첫댓글 여강길 1코스 (옛나루터길) 영월루 황포돛대 소무산 240227
https://cafe.daum.net/9595kimmini0A0/MZFV/1760
한가롭고 정겨운 시골풍경이 정겨웠습니다
수고들 하셨습니다
어우 대장님 수고하셨습니다
여강길의 시작을 축하 드립니다
반종주 낭만팀 챙기랴 몇 안되는 종주팀에까지 함께 걸으며 여강길 아름다운 페이지 만들었습니다 마을과 산길을 오가기도 하고 역사를 간직한 채 유유히 흐르는 강줄기를 따라 걷기도 하며 신선한 여주의 공기를 호흡해 봤네요
생각보다 길었던 종주길에 살짝 힘듬도 있었지만 호젓한 산길에 폭신하게 밟히는 낙엽길의 묘미를 느낄 수 있어 좋았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해늘님 힘껏 봄기운 맞고 오셨어요
명산팀으로 훨훨 날으실겁니다 ㅎ
여강길 풍경 집에서 편히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2코스에 오세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