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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리브르빌에서의 음모
1982년 8월 19일, 국가안전부 제4국(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담당)에서 충격적인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무력부, 정확히는 김정일이 자신의 수족으로 부리는 공작팀이 대한민국 대통령을 비롯한 내각 일원들을 암살하려고 한다는 소식이었습니다. 8월 17일 케냐를 시작으로 아프리카 4개국 순방에 나선 전두환 대통령은 22일 가봉에 방문할 예정이며, 북한 공작팀은 그들이 리브르빌 공항에 도착해 귀빈용 대합실에 머무르는 틈을 타 폭탄을 사용할 예정입니다.
첩보를 듣고, 화궈펑 주석은 덩샤오핑, 국가안전부장 뤄칭창, 국방부장 후종밍, 문화부장 류메이란, 그리고 비상대책팀원으로 톰페티, 샤오나이, 위안차이나를 비밀회의실로 호출했습니다. 북한의 돌발행동은 일단 위기이지만, 정보 면에서 우위를 가졌으니 이를 기회로 재창출하는 것도 가능할 것입니다…
비밀회의실에 가장 먼저 달려온 후종밍 장군은 자리에 앉자 마자 "이건 기회입니다"라고 말을 꺼냈습니다. 그의 후견인인 덩샤오핑에과 잠시 눈인사를 한 뒤에, 후종밍은 북한의 테러를 방관한 뒤 남한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고 그 사이 북한을 요리하면 되지 않겠냐는 의견을 제시했죠. 남아공의 포트엘리자베스에서 모처럼의 휴가를 즐기다 급히 호출되어 온 샤오나이는 가뜩이나 짜증났는데 옆에서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하니 심기가 확 뒤틀렸습니다. "전쟁이라도 하자는 겁니까, 후 장군?" 후종밍은 "평화는 왕성한 전투의욕 위에서 달성되는 거요"라면서 응수했죠. 두 사람이 서로의 사고방식을 이해하는 걸 포기할 무렵, 류메이란이 도착했습니다.
"여러분, 정보에 따르면 이 일은 김정일이 단독으로 꾸민 일이며, 심지어 최고지도자인 김일성에게마저 보고가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보고를 들은 화궈펑 주석과 덩샤오핑 총리는 순간 벙쪘다가, 이내 혀를 끌끌 차기 시작했습니다. 어느새 도착해서 착석해 있던 위안차이나 역시 답이 없다는 듯이 한숨을 쉬며, 적당히 가봉 당국과 한국에게 알리면 되지 않겠느냐는 의견을 개진했습니다. 샤오나이 역시 이 제안에 동의했죠. 그러나 류메이란의 생각은 약간 달랐습니다. 그녀는 이 사태가 오히려 기회라는 데 후종밍과 의견을 같이했습니다. 다만, 그 기회의 내용이 조금 달랐을 뿐이죠. 오히려 작전을 '처참한 실패'로 끝나게 해 북한 내의 정치구도에 영향을 미쳐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언제까지 그 망할 인간 뒤치닦거리나 하면서 살 수는 없다"는 말에 방 안의 많은 사람들이 동의했습니다.
국가안전부장 뤄칭창은 현재 콩고와 세네갈 등지에 현장요원이 파견되어 있기는 하나 가봉까지의 이동시간을 고려하면 작전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지나치게 짧다는 사실을 주지하며 난색을 표했지만,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까지 부정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류메이란은 "남한의 야당에게 이 사실을 흘려 정권의 위기를 강화하자"는 제안 역시 덧붙였는데 이에 대해서는 한국의 야당이 반공 우익성향이며 자신들에게 쓰여진 주홍글씨를 벗기 위해 오히려 더욱 노골적으로 반공노선을 견지할 확률이 높다며 완강한 반대의 뜻을 밝혔습니다. 아무튼 작전안은 샤오나이와 위안차이나의 찬성, 그리고 뤄칭창의 암묵적 동의를 받았습니다.
다만 후종밍은 여전히 자신의 의견을 견지했습니다. "남한의 혼란을 부추기고 만약 그들이 북한을 침공한다면 군을 동원해 휴전선 남쪽으로 밀어내자"는 것입니다. 그 경우 남한의 사회적 혼란과 북한 내 지배적 영향력 확보, 3차대전의 우려와 염전도의 영향으로 섣불리 개입할 수 없을 미국의 외교적 패배를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이었죠. 그러나 해당 의견을 두고 곰곰이 생각하던 덩샤오핑이 "미국의 개입 가능성이 단 2%에 불과하다고 해도 그들과 전쟁을 감수할 수는 없다"며 류메이란의 의견을 지지하자, 후종밍 역시 대세를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후종밍은 오히려 자신이 반대한 작전을 책임지고 지휘하는 것이 민주집중제의 본질에 가까운 것이라고 생각했고, 또 그것이 자신의 이미지를 제고시키는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작전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자처했습니다.
세네갈을 떠나 가봉 리브르빌에 도착한 인민해방군 5612부대 현장지휘관 한밍 소좌 외 3인은 폭탄이 설치된 귀빈용 대합실에 잠입해 예정시간인 오후 2시보다 약 3시간 빠른 오전 10시 58분 폭탄을 기폭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가봉 현지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이 사실은 즉시 현지 당국을 통해 한국 측에 전달되었고, 나이지리아 라고스를 출발해 이제 막 기니만 상공을 비행하고 있던 한국의 대통령전세기는 긴급 회항을 결정했습니다. 아프리카 순방이 중도취소되고 다음날인 8월 22일 전세기는 모든 각료원들을 태운 채 나이로비를 경유해 성남시의 서울비행장으로 돌아왔습니다. 가봉 군경당국은 고무보트를 통해 도망치려는 북한 측 공작원들과 교전, 2명을 사살하고 1명을 생포했습니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고무보트에는 연료가 채워져 있지 않았으며 공작원들의 수류탄은 안전핀을 뽑자마자 폭발하도록 조작되어 있었습니다.
진상을 알게 된 가봉 공화국은 즉시 북한 대사관을 추방하고 단교를 통보했습니다. 아프리카 단결기구(OAU) 역시 결의안을 통해 북한과의 단교와 한국과의 수교를 권고했습니다. 앙골라는 여전히 북한과의 관계를 유지했지만 대부분의 국가가 이에 따랐습니다. 모잠비크의 경우 원래 북한과 수교를 유지하려 했지만 중국 대사의 접견을 받은 대통령이 입장을 급선회해 한국을 지지하기 시작했습니다. 북한의 상황 역시 혼란스럽긴 마찬가지였습니다. 김일성, 오진우 등 수뇌부들은 대체 이 대참사를 누가 기획했냐면서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고, 김정일은 도끼만행사건 때처럼 일부 좌경 모험분자의 독단이라고 변명하기에 급급한 실정이었죠.
1982년 9월 15일, 예정대로 김일성이 중국 방문을 위해 철도로 베이징에 도착하자 일행들은 회심의 일격을 준비했습니다. 이상하게도 북한의 '아바이 수령'이라는 사람은 평소와 달리 비굴할 정도로 싹싹하게 굴었습니다. 당시 접견단에 포함되었던 모 고위관리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는 "마치 이불에 오줌을 싸고 부모에게 감추려는 아이처럼" 행동했다고 합니다. 화궈펑의 지시에 따라 후종밍은 선양군구에 유사시에는 곧바로 압록강을 도하할 수 있게 준비하라는 명령을 내려놓은 상태였습니다. 샤오나이 등의 은근한 추궁에도 모르쇠로 일관하던 김일성을 보던 덩샤오핑은 도저히 못 봐주겠다는 듯 볼멘소리를 내뱉었습니다.
“요즘 아프리카에서 다들 남한과 손잡겠다며 우리한테 처신 잘하라고 훈수를 두는데, 그거 참 불쾌한 일이었습니다, 주석 동지. 가봉 일때문에 우리까지 덤으로 욕먹게 생겼단 말입니다. 그래서, 누가 한 짓인지는 찾아내셨습니까?”
그리고 집중포화가 이어졌습니다. 자기네 공작원이 외국에서 국가원수를 살해하려고 폭탄을 터뜨렸는데 최고영도인이 그걸 모르는 건 무능한 게 아니냐, 모르는 일에 우리가 책임을 어떻게 묻느냐, 등등 가지각색의 모욕적 발언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싹싹하게 굴던 김일성도 그건 참아줄 수 없었는지 역정을 내기 시작했지만, 이미 모든 정보는 중국에서 입수한 뒤였습니다. 류메이란이 뤄칭창 부장에게서 받아 건네준 작전계획서에는 '김정일'이라는 이름이 또렷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녀는 또한 '정보가 자꾸 새는 것은 있는 지 없는 지도 모르는 두더지 때문이 아니라 보안 담당자인 김정일이 무능한 탓'이라며 덧붙였죠. 얼굴이 시뻘개진 김일성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얼빠진 채 가만히 자신을 노려다보는 중국 대표들을 쳐다보고만 있던 김일성에게 인민복 차림의 톰페티 라마가 다가왔습니다. "그 현명했던 촉한의 유비조차 후계자를 잘못 골라 자신의 명예마저 깎아먹고야 말았습니다. 동지께서도 그런 전철을 밟지는 않으시리라 믿습니다." 김일성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돌아가고 얼마 뒤, 김정일이 주폴란드 대사로 유배당하고 김평일이 각종 요직에 임명되었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즉 '붉은 왕국'의 왕자가 폐세자되고 새로운 세자가 책봉된 것입니다.
이후 화궈펑 주석은 아시아 지역의 영향력을 다시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류메이란이 북한에, 위안차이나가 베트남에 가게 되었죠. 먼저 메이란은 김평일을 지원해줄 망명가들을 복귀시켜 그의 친위세력을 붙여준 뒤 그에게 현명한 처신을 권고했습니다. 군 경력을 더 쌓아 정통성 면에서 흠집을 잡히지 말고, 대중들 앞에 자주 나타나 전임 후계자와의 차별성을 보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베트남으로 간 위안차이나는 개혁개방, 일명 '도이머이' 개혁을 지원했습니다. 그의 제안대로 레주언 주석이 고집하던 집단농장정책을 즉시 폐기하고 국영기업 주도 산업개발을 추진한 베트남은 개혁의 효과를 보게 될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포괄적경제협력기구(CEPO) 차원에서 메콩강 치수사업을 포함한 동남아시아 지역의 대대적 개발 프로젝트인 '남방의 빛'을 런칭하면서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14. 아프리카의 체 게바라
서아프리카의 작은 내륙국 ‘오트볼타 공화국’은 하룻밤에도 쿠데타가 두세번씩 벌어지던 아주 구석지고 평화로운 나라였습니다. 본래 프랑스 식민지였던 이곳에는 그럴듯한 농지도 없고 변변한 자원도 없다고 합니다. 이런 나라에 전세계가 집중한 것은 바로 1983년 4월 집권한 ‘토마 이지도르 노엘 상카라’ 대통령 때문입니다.
각종 부족갈등과 인프라부족, 악습과 구습을 타파하고 국가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상카라 대통령은 지주의 토지를 몰수해 소작농들에게 균등하게 분배하고, 국가예산을 효율적으로 아껴 도로와 수도를 정비하고, 없는 살림이지만 경공업 진흥을 위한 정책도 빼놓지 않았죠. 그 뿐일까요? 90%가 넘는 문맹률을 낮추기 위한 기초교육시설 확충, 피임 장려, 병원 설립, 여성할례 금지, 민족간 자주관리체계 수립 등등 그의 손을 타지 않은 정책이 없는 수준입니다.
이런 훌륭한 지도자를 미국이 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냐고요? 그건 그가 사회주의자이기 때문입니다. 주변국에게 빨간 물을 들일까봐 우려된다네요. 아무튼, 오트볼타 공화국의 외교관들이 중국에 찾아왔습니다. 이들은 남아프리카 일대에서 진행된 중국의 개발원조사업을 보고 일말의 희망을 가졌고, 거기다가 미국과 소련 모두와 거리를 두면서도 친하게 지내는 중국의 특수한 위치에도 주목한 모양입니다. 아프리카 전체에 자신들의 개혁을 장려하고 싶어하는 상카라 대통령은 자신들을 계속 방해하는 미국과 오해를 푸는 한편 검은 대륙을 희망의 대륙으로 만들고자 합니다.
중국은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요?
오트볼타 공화국은 아프리카 신생국 중 보기 드물게 "투입한 대로 산출을 뽑아내는" 국가였습니다. 즉 중국이 항상 중시했던 아프리카 방면 외교의 북부 거점(남부는 남아공)이 될 수 있는 곳이었죠. 오트볼타의 사절들은 샤오나이의 얼굴을 보자마자 반갑게 웃으며 대뜸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습니다. 애초에 그들이 중국을 찾아온 이유부터가 남아프리카에서의 원조사업이었던 만큼, 그는 나름의 은인인 셈이었죠. 재정지원을 포함한 여러가지 사항들을 조율한 뒤 열린 만찬에서 오트볼타 대표단은 뭔가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었습니다.
그것은 얼마 전부터 시끄러워진 라이베리아와 시에라리온의 일이었죠. 시에라리온 내전에 개입한 라이베리아의 찰스 테일러 정권은 시에라리온의 다이아몬드 광산 채굴권을 강탈했는데, 그 수익이 어디로 가는 건지 모르겠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라이베리아의 뒤를 봐주는 이들이 미국이라는 점은 삼척동자도 알 만한 사실이고, 미국이 그 다이아몬드 수익을 일부 빼돌리는 것도 부도덕하긴 하지만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리 추적을 하려고 해도 그 수익이 어디로 들어가는 지 전혀 모르겠다는 점이 문제였죠.
샤오나이가 해외 금융기관의 지인 및 자신이 신뢰하는 '금융스파이'들에게 맡겨 알아본 결과, 해당 자금이 CIA의 비밀계좌로 추정되는 한 계좌에 입금된 사실은 발견했습니다. 모두가 골머리를 싸매던 그 때, 보고서를 읽던 위안차이나가 급하게 자신의 집무실로 달려가 데스크탑에 플로피디스크들을 차례차례 끼우며 무엇인가를 미친듯이 살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1시간 뒤, "찾았다!" 하는 소리와 함께 그가 밖으로 나왔습니다. 전말은 이러했습니다. 미국은 예상대로 라이베리아 정권을 충동질하고 무기와 물자를 지원해 시에라리온의 다이아몬드를 강탈해 그 수익 일부를 CIA 비밀계좌로 가져갔습니다. CIA 등 정보기관의 예산 집행은 비공개되지만 DEA 등 ‘법집행기관’의 예산은 공개되었고, DEA(마약단속국)의 자금 흐름을 추적해보았을 때 ‘불필요한’ 유출이 계속되는 점이 발견되었습니다. 특히 “니카라과” 지부의 예산에서 이러한 지점이 지속적으로 발견되는 점 역시 드러났죠. 즉 미국은 해당 자금을 니카라과의 콘트라 반군을 후원하는 데 집행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코카인 판매조차 그 자금으로 위탁해주고 예산에서 빈 공간은 마약단속국의 활동비로 기재하는 행위를 반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미 대선이 다음 해로 예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우선 지도부는 톰페티의 제안을 채택했습니다. 야당인 공화당 유력주자에게 접근해 월리스 정권의 치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주는 대가로 오트볼타를 비롯한 아프리카 지역의 내정에 불간섭하라는 약속을 받아내는 계획이었죠. 그러나 이는 일단 실패로 끝났습니다. 연락을 받은 조지 부시 시니어는 이 제안을 자신의 애국심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이고,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었습니다. 다른 방법이 필요했죠.
그 다른 방법이라는 것은 이후 미국의 월리스 정권이 알아서 제공했습니다. 중국의 문화검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미국을 방문한 류메이란 문화부장에게 항의의 뜻을 전하러 그녀를 백악관에 초청한 것입니다. 소형 녹음장비를 착용하고 오벌 오피스에 도착한 류메이란은 일부러 영어를 못하는 척을 하며 월리스를 도발했습니다. "앨러배마에서 대통령님께서 등교를 금지한 흑인 학생들 역시 자유의 중요성을 깨달았겠지요?" "라이베리아 산 다이아몬드가 유명하다죠?" 이에 월리스는 분통을 터뜨리며 각종 인종차별적 발언들을 쏟아냈습니다. 졸지에 '건방진 치노 년'이 된 메이란은 굴하지 않고 다이아몬드-콘트라 사건의 증거를 가지고 있다며 월리스를 압박하기 시작했고... 월리스는 또 한번의 흑인 비하발언을 녹음테이프에 남기며 장렬하게 침몰했습니다.
이후 미국은 아프리카 제3세계 비동맹노선에 대한 존중과 비간섭을 골자로 하는 선언을 발표했고, 오트볼타에서는 상카라가 정권을 잡는 데 조력을 제공했던 블레즈 콩파오레 사령관이 미국에 포섭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나 전격 체포되었습니다. 약점을 잡힌 데 분노한 월리스 대통령은 윌리엄 웹스터 FBI 국장에게 연락해 국내 방첩(이라지만 사실은 각종 사회단체에 대한 탄압에 가까운 공작) 프로그램인 'COINTELPRO'를 재가동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미국은 월리스라는 자연재해를 만나 서서히 곪아가고 있었습니다.
이후 샤오나이가 오트볼타(이후 부르키나파소)를 방문해 확인한 바에 따르면, 개혁작업은 정말로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아프리카 단결기구를 보다 단합된 '아프리카 연합'으로 재편하는 안을 상정한 상태였고, 이는 샤오나이의 연설을 통해 힘을 받았습니다. "서구 세력의 교묘한 족쇄를 벗어던지고 진정한 자유와 번영을 만끽하라"는 그의 연설은 중국이 아프리카의 반제국주의 운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한다는 이미지를 덧씌웠고, 이는 아프리카 국가들의 스탠스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아프리카 연합의 헌장에 상카라의 노선이 다수 반영되었음은 물론입니다.
중국은 이제 말로만 제3세계의 수장이 아닌, 정말로 제3세력이 되었습니다. 아프리카에서의 강력한 영향력을 바탕으로 미국, 소련과 차별화되는 도덕적 권위를 세울 수 있었고, 중립지역에서 마치 1920년대의 소련을 방불케 하는 이미지를 쌓았습니다. 중국의 주가는 점점 높아져가고 있었습니다.
15. 청제정신오염운동
1983년 10월 15일 개최된 제12차 공산당 2중전회는 리셴넨 기율검사위원장의 한마디로 시작되었습니다. “서구 자본주의의 해로운 물을 경계해야 한다” 천윈 역시 문화계에 만연한 폭력, 음란, 반사회적 묘사를 배격해 건전한 문화를 다시 배양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세우며 리셴넨을 지원사격했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그리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 아니었습니다. 개혁개방과 급진적 문혁 탈피, 마오 격하의 영향으로 중국 내에서는 인민의 정치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민주주의에 대한 동경, 자유로운 인본주의 문화에 대한 호기심 등이 전례없이 강해진 상태이고, 상대적 보수파인 신사회주의파의 입장에서는 이를 억제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죠.
회의 둘째날이 되자 덩샤오핑마저 공세에 가담했습니다. 그는 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가 최근 반국가세력의 보루로 전락할 위기에 놓여있다고 완곡히 언질한 뒤, 이를 후원하는 제방파 거두들(즉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을 비판했습니다. 후야오방 역시 지지 않고 맞섰지만, 여전히 긴장관계는 풀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덩샤오핑은 “극좌 문혁잔당들의 극단적인 사고와 마찬가지로 반국가적 자유주의자들의 ‘서방 경도노선’ 역시 만만찮은 과오”라고 말하며, 연방제와 같이 국가의 근간과 단결을 흔들 모든 시도에 대해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현재 일행 다섯 중에 이와 직접적으로 관련있지 않은 이는 없습니다. 과연 중국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까요..?
조짐은 이전부터 발견되었습니다. 1982년 가을의 제12차 공산당대회에서 화궈펑 주석은 자신의 임기를 1987년까지로 못박는 한편 후임 지도자의 임기 역시 두 번의 당대회, 즉 10년으로 제한하는 '규범'을 마련했습니다. 이는 서로 다른 파벌을 중재하는 데 지친 화 주석의 일방적 조치였지만, 권력을 스스로 내려놓겠다는 의지는 아무튼 여러 인물들의 찬사를 받았습니다. 문제는 이 당대회가 열리는 대회의장 주변에 인민들이 한가득 모여들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공안의 통제도 소용이 없어 전인대 심계장이 밖에 모인 군중들에게 매 1시간마다 나와 결정사항을 하나하나 읽어주어야 했으며, 화궈펑의 '권력 이양' 선언에 고무된 지식인들은 "이제 새 세상이 왔다"며 아주 자유로운 창작활동을 이어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당대회에서 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의 주석에 오른 백화제방파의 후야오방은 "신중국에는 두 개의 날개(전인대와 정협)이 있는데, 하나는 강철로 만든 듯 튼튼하고 하나는 종이로 대충 덧대 만든 것처럼 엉성하다"는 논평과 함께 정협의 권한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이 일련의 움직임들은 신사회주의파의 좌파들, 즉 덩샤오핑과 천윈 등을 비롯한 인사들에게 대단한 위기감을 심어주었습니다. 즉 상술한 안건이 1983년의 2중전회에서 튀어나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죠. 덩샤오핑이 제방파를 쉼없이 몰아붙이고 있던 와중, 그는 자신이 '챔피언'으로 점찍은 후종밍에게 발언권을 넘겼습니다. 연단에 선 후종밍은 "아름다운 사회주의 문화의 창달"을 외치며 적절한 문화계도(검열)정책의 필요성을 역설했습니다. 덧붙여 공안을 동원해 공직자에 대한 반부패 및 반당사상 수사를 펼쳐야 한다고도 주장했죠. 제방파의 지도자인 후야오방은 망연자실한 채 대회장 한 구석을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제방파에 속하는 다른 중앙위원들이 자신들의 생존권을 위해 중과부적인 싸움에 하나둘씩 달라붙을 무렵, 위안차이나가 차분하고 정제된 말투로 검열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다만 언제까지고 문화의 물결을 막을 수는 없으며 점진적으로 완화하는 방책을 사용해야 한다"는 단서조항을 달았습니다. 쇄신파로 분류되지만 속을 알수 없다는 평가를 받는, 이번에 새로 선출된 정치국원 장쩌민 역시 "검열 자체는 필요하지만 이 일련의 과정이 특정 동지에 대한 찍어내기로 전개되어서는 안된다"는 의견을 밝혔습니다. 이러한 '일시정지' 움직임에 다시 탄력을 받은 제방파의 왕뤄슈이 중앙위원은 "문화 검열은 마오주의의 유산이며, 의견개진의 자유를 보장하며 여러 의견을 조율하는 현 화궈펑 체제에서 중국의 경제와 대외신인도가 그 어느 때와도 비할 수 없이 개선되었다"는 점을 들어 사회파의 공격을 방어하러 나섰죠.
천윈은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했는지, 위안차이나의 의견을 그대로 받아 "단계별 문화계도계획"을 제안했습니다. 이에 따르면 1984년부터 5년을 주기로 검열정책을 점차 완화해 나가며, 3차 계도기간이 종료되는 2000년부터는 미풍양속에 심하게 저촉되는 매체를 제외한 모든 문화창작물의 검열을 최소화하게 되는 것이었죠. 또한 장쩌민은 은근슬쩍 후종밍의 편을 들며 '공직자반부패수사국(반부패국)'을 창설해 공직자들의 비리를 감시하는 한편 광파전시부를 통해 반당사상의 유포 역시 관리감독케 하자는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이는 문화부장 류메이란의 지지를 받았고, 후종밍 역시 장쩌민과 모종의 대화를 나누고 온 다음에는 찬성입장을 보였죠. 톰페티의 경우 재심이 허용되어야 하며 소수자의 보호를 위해 소수민족 옹호위원을 반드시 끼워야 한다는 점을 관철했습니다. 이윽고 제방파 일부를 제외한 모두의 찬성으로 통과된 이 계획은 중국이 어떠한 노선을 견지하는 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교도민주주의'. '관리되는 체제'. 문화대혁명의 광기를 경험한 중국의 한계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누군가는 했더랍니다.
다음으로 제시된 안건은 류메이란과 화궈펑의 대화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군부에 의한 지속적인 압박과 그로 인한 정치불안이 당군체제(당이 군대를 보유하는 체제)에서 나온다고 생각한 류메이란은 휴회 중 화궈펑을 찾아가 인민해방군을 국군으로 개편하는 것에 대해 건의했습니다. 화궈펑 역시 그 필요성에 대해 동감하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소련은 1946년부터 붉은 군대를 소련군으로 개편했거늘, 중국은 억지로 전개한 문화대혁명마저 종결을 선언하고서 왜 군조직을 당 휘하로 남겨두냐는 것이었죠. 현재의 체제 상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과 당 중앙위원회 주석을 겸임하지 않고는 정상적인 국가지도자로서의 활동이 불가했기에, 독선적 통치를 일삼는 자가 지도자에 오른다면 충분히 문제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개편안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우선 인민해방군 총참모부와 당 중앙군사위원회를 해체 후 재편성해 '합동참모위원회'를 창설하고, 제9차 공산당 당시 마오쩌둥이 폐지했던 국가주석직을 부활시켜 군통수권을 보장하는 것이었죠. 국무원의 국방부장은 민간인을 임명해 군정권을 행사하고 합동참모위원회 위원장이 제복군인의 최선임으로 군령권을 행사하는 안이었습니다. 이를 들은 후종밍은 책상을 탕 치며 이의를 제기하려 했지만, 화궈펑이 초대 합참위 위원장으로 후종밍을 추천하자 분위기가 바뀌었습니다. 덩샤오핑 역시 크게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국가주석직은 원래 류샤오치의 직위였는데, 마오쩌둥이 그를 핍박했던 역사를 덩 본인이 비판하며 국가주석직의 부활을 지지한 바가 있었기 때문이죠. 원래 중군위에서 관할하던 인민무장경찰부대(무경)는 국방부 휘하로 재편되어 '국가헌병부대'가 되었고, 그 대상 역시 공안과 구별되어 민경작전에서 배제되었습니다. '주석'이라는 직함은 국가주석 1인 및 양회(전인대와 정협) 주석 각 1인으로 한정되어 당 중앙위 주석은 당 총서기로, 중앙군사위 주석은 군령권만을 행사하는 합동참모위 위원장으로 바뀌었죠. 전반적으로 당-정-군으로 삼원화되어 있던 지도체계를 다시 일원화해 혼잡을 줄이려는 의도가 보였습니다.
인사의 경우, 덩샤오핑은 당 총서기 자리에 앉고자 했습니다. 자오쯔양을 총서기직에 추천하자는 안부터 심지어 아직 그 이름이 크게 알려지지 않은 신임 정치국원이자 테크노크라트인 주룽지를 추천하는 안까지 다양한 제안이 나왔으나, 후야오방은 자신이 정계에서 완전히 은퇴하고 정협의 자문 및 견제권한을 늘리는 대가로 덩샤오핑의 총서기 취임을 지지하겠다는 거래를 해왔습니다. 톰페티는 덩샤오핑과 약 30분 간 가벼운 토론을 나눈 뒤 합의에 도달했죠. 정협 주석을 톰페티 자신이 맡는 조건이었습니다.
이후 인사는 순조로웠습니다. 국방부장에는 이전에 외교부장으로 영전했던 보수파 뤄칭창이, 다시 공석이 된 외교부장직에는 부부장을 맡던 우쉐첸이, 덩샤오핑이 당 총서기를 맡으며 역시 공석이 된 국무원 총리직은 자오쯔양이 인수했습니다. 또한 주룽지는 당 중앙사무처 제1서기가 되어 상무위원 7인에 들어가게 되었고, 당 중앙조직국장에는 후치리가 임명되었습니다. 세간의 평은 "균형이 완전히 무너질 뻔한 것을 그나마 조금은 방어해냈다" 정도로, 제방파는 여전히 큰 타격을 면하지 못했습니다. 졸지에 자신의 작품을 다시 검열당하게 된 지식인들은 분개했고, 초대 공직자반부패수사국 국장 장쩌민은 맹렬하게 공직자들의 구린 부분을 물어뜯어 제 나름대로 입지를 쌓아나갔습니다.
중국 역시 새 시대를 향해 조금씩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16. 붉은 제국의 새로운 차르
1984년은 여러모로 바쁜 해였습니다. 1월에는 불가리아 인민공화국이 부채를 모두 대납해준 소련의 구성국으로 들어가 불가리아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이 되었고, 2월에는 소련의 안드로포프 서기장이 사망해 새 지도자를 뽑는 콘클라베가 절찬리에 개최되었고, 샤오나이는 상술했듯 아프리카를 방문해 중국의 입지를 세웠으며, 후종밍은 지도자 후보로서의 지명도를 키우기 위한 여정에 나섰습니다. 우선 화궈펑 주석을 따라 모스크바로 간 류메이란은 크렘린 내에서 '우파' 고르바초프와 '좌파' 로마노프가 차기 지도자 자리를 두고 다투고 있으며 그 대결 양상이 꽤나 살벌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리즈코프를 중도파 후보로 밀려는 시도를 해보긴 했지만, 소련의 내정에 간섭하는 것은 그것대로 큰 문제였기에 이 시도는 1차 투표에서 승자를 못 고르게 하는 선에서 끝나고 말았습니다. 곧 당 중앙위원회의 위원들을 포섭하는 데 성공한 로마노프가 승기를 잡았고, 그는 정식으로 서기장에 지명되었습니다.
곧이어 화궈펑과 정상회담을 가진 로마노프는 중국이 왜 소련과 함께 유라시아 블록을 이끌어나가야 하는지, 미국의 몰락은 (만약 찾아온다면) 어떻게 찾아오게 될 것인지, 지정학이 어째서 중요한 지 등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았습니다. 1시간 30분 가량 이어진 로마노프 서기장의 일장 연설을 들어주다 못한 화궈펑은 "중국에서도 소비에트 연방에 현명한 지도자가 선출되어 참 기쁘다"는 식으로 억지 칭찬을 늘어놓기에 이르렀습니다. 신임 서기장은 동유럽 및 자국의 자유화 운동에 대해서 "풀어주되, 선을 넘어서까지 풀어주지는 않는다"는 독트린을 세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류메이란이 접견 중 툭 던지고 간 '동독 노선'에서도 많은 영감을 받은 듯 했습니다. 모스크바 발 '붉은 먹구름'은 조용히, 그러나 착실하게 냉전에서의 승리를 위해 전진해나가고 있었습니다.
로마노프의 서기장 선출에 호응하기라도 하듯, '차이니즈 로마노프'라는 평가를 받는 후종밍은 전국의 대도시들을 순회하며 반미, 반서방, 대만에 대한 공격적 발언들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는 군 출신의 '스트롱맨'이었기에, 강력한 손아귀 힘을 과시해 국내외의 세력들을 압박하는 것을 선호했습니다. 대만의 장징궈 총통은 격노해 화궈펑 주석에게 강력히 항의했고, 미국의 월리스 대통령과 통화해 즉시 F-15C/D 전투기에 대한 판매허가를 내달라고 발을 동동 굴렀습니다. 소련의 로마노프는 "역시 나의 따바리쉬, 드룩!"이라며 매우 흡족해했다는 풍문이 돌았죠. 아무튼 후종밍은 전세계적으로 논쟁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공화당을 비롯한 미국의 반-월리스 정치세력들은 역시 발을 동동 구르며 "국제정치의 정교함 따위 모르는 멍청한 월리스"를 비판하고 나섰습니다.
한편 정협 주석이 된 톰페티는 어느덧 74세라는 자신의 나이를 자각하고 후계자로 삼을 이를 물색했습니다. 그 중 단연 돋보인 것은 허베이 성의 한 고아원 출신으로 (민족을 이유로) '칭기스 칸'이라는 별명(이자 사실상의 이름)을 받은 채 살아온 한 건장한 청년이었습니다. 공산당 입당원서에 자신의 이름을 '톈무친(天穆钦)'으로 적어넣은 그는 일전에 톰페티의 추천으로 소수민족군관후보자과정을 수료하고 후종밍의 안배로 총참모부의 엘리트 참모 장교로 육성되고 있었습니다. 역시 톰페티의 추천으로 정협 전국위원이 된 그는 한눈에 보기에도 상당히 뛰어난 능력과 명석한 두뇌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톈무친, 혹은 칭기스 칸은 정말 그의 이름대로 전세계에 이름을 떨치는 이가 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두고 보아야 할 일입니다.
1.
- 이름: 류메이란(刘梅兰)
- 플레이어: 렌지파일
- 생년월일: 1942년 3월 16일
- 성별: 여성
- 민족: 혼혈
- 모국어: 중국 보통화
- 사용가능언어: 러시아어, 영어(약간)
- 능력치:
통솔(8)/체력(10)/지능(10)/지혜(10)/매력(17)
- 기술:
지휘(0)/관리(0)/사격(1)/격투(0)/조사(3)/연구(0)/설득(3)/토론(2)/기만(3)/협박(0)/선동(3)/심문(1)/매혹(3)
- 트레잇:
#Fake News / 집단 간 갈등을 증폭시키고 이간시키는 데 +1 모디파이어.
- 잔여포인트: 3
- 배경:
충칭 태생의 류메이란은 (아마도) 백계 러시아인인 아버지와 (역시 아마도) 치앙족(서하인의 후손)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모든 게 추정인 이유는, 메이란이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군의 공습으로 부모님이 사망하였기 때문이며, 메이란은 충칭에서 암약하던 공산당의 간부인 류한이라는 여성에게 입양되었습니다.
중국의 적화 후 충칭 시장이 된 덩샤오핑과 군부의 실력자 양상쿤과 함께 손을 잡은 류한은 류메이란을 철저한 공산주의자로 키웠습니다. 그러나 마오쩌둥의 노선을 자주 비판하는 등 '이상한 징조'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어머니의 신뢰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메이란은 1962년 중인전쟁에 자원하여 인도군과 맞서 싸우기까지 했습니다. 당시 메이란은 모병포스터의 모델이 될 정도로 유명세를 끌었으며 촉망받는 청년당원이 되었습니다. 공청단의 간부가 되기도 했죠.
그러나 운명의 그 해 1966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되고 양상쿤과 덩샤오핑 모두 위기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그때 메이란의 양모인 류한의 과거도 밝혀졌습니다. 류한은 과거 28인의 볼셰비키를 비롯한 소련 유학파를 지지하던 당간부로써 대장정의 대참사에 책임이 있었고, 그래서 양상쿤과 친분이 있었으며, 그 과거가 30년을 돌아 다시금 닥쳐온 것이었습니다. 혁명의 배신자라 낙인찍힌 류한은 조리돌림을 당한 끝에 음독자살하였습니다. 혁명가의 딸에서 반역자의 딸이 된 메이란은 1년 동안 수감되었고, 그 이후에는 장시성의 석유기계 공장에서 천윈의 밑에서 일하며 친분을 쌓았습니다.
메이란은 마침내 천윈과 덩샤오핑이 1973년 저우언라이에 의해 복권되면서 함께 복권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음독자살할 때 마오 주석도, 덩샤오핑도, 양상쿤도 도와주지 않은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중국이 진정한 마르크스주의만을 추구해야 하며 다른 모든 노선은 수정주의에 불과하다고 믿는 류메이란은 천윈의 충복입니다. 하지만 다른 그 누구도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2.
- 이름: 위안차이나(袁彩䛔)
- 플레이어: dear0904
- 생년월일: 1939년 9월 1일
- 성별: 남성
- 민족: 한족
- 모국어: 중국 보통화
- 사용가능언어: 영어, 노어, 프랑스어(약간)
- 능력치:
통솔(18)/체력(10)/지능(12)/지혜(10)/매력(9)
- 기술:
지휘(0)/관리(3)/사격(0)/격투(0)/조사(0)/연구(4)/설득(2)/토론(2)/기만(0)/협박(0)/선동(0)/심문(0)/매혹(0)
- 트레잇:
#웃는 사자 / 당원 및 동지들에 대한 설득과 매혹에 +1 모디파이어.
- 잔여포인트: 7
- 배경:
위안차이나는 후난성 출신 관리 위안졔치(袁解奇)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전쟁시기의 혼란기중 몇몇 군벌의 눈에 들어 입신양명할 많은 기회가 있었으나,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사양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조금은 후회되었기에, 자식에게는 그러지 말라는 뜻에서 "비단줄을 붙잡으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위안졔치는 아들을 훌륭한 관리로 키워 내었습니다.
칭화대학 농대를 졸업해 허난성에서 대약진운동의 폐해를 수습하는 농경제진흥소조 관료로 일하던 차이나는 1971년 우연한 기회를 잡았습니다. 9.13 사건의 수습과정에서 마침 고향이자 정치적 기반이었던 후난성 지역혁명위원회를 지도하던 화궈펑 정치국위원에게 조언할 기회가 생긴 것입니다. 화궈펑은 그의 답변에 감명을 받아 위안차이나를 정식 공산당원으로 추천했고, 이내 자신의 측근으로 삼았습니다.
이제 '사람좋은 관료' 화궈펑은 국무원 총리가 되었고, 마오 주석의 후계자로 낙점되었습니다. 위안차이나는 '주군'의 말도 안되는 성공에 매우 기뻐했으나, 그 책임감은 어느 때보다 무겁습니다. 그의 이름은 주석과 함께 할 것입니다.
3.
- 이름: 샤오나이(肖奈)
- 플레이어: 카라멜 마끼아또
- 생년월일: 1942년 10월 1일
- 성별: 남성
- 민족: 한족(북방계)
- 모국어: 중국 보통화
- 사용가능언어: 헝가리어, 영어, 독일어, 러시아어
- 능력치:
통솔(12)/체력(10)/지능(12)/지혜(12)/매력(12)
- 기술:
지휘(0)/관리(3)/사격(0)/격투(0)/조사(3)/연구(1)/설득(3)/토론(2)/기만(0)/협박(0)/선동(0)/심문(0)/매혹(0)
- 트레잇:
#데이터 사이언스 / 현 상황의 파악과 조사에 +1 모디파이어.
- 잔여포인트: 5
- 배경:
샤오나이는 중국 공산당 수뇌부인 샤오즈푸의 자식으로 태어나 공산당 수뇌부의 일원으로 자랐습니다. 그의 아버지인 샤오즈푸는 마오쩌둥의 최측근으로 정강산 시절부터 공산당의 자금 수급과 재정 관리를 도맡아 했으며,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에는 재정부 부장과 상무부 부장을 역임했습니다.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데다, 다른 형제들이 하나둘씩 전란에 휩싸여 죽고 그만 유일하게 남은 터라 가족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습니다. 별 탈 없이 초중고를 졸업한 뒤. 대학도 국내에서 다닐까 했으나. 해외에서 더 많은 경험을 쌓아보면 어떻겠냐는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동유럽으로 유학을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가 선택한 유학지는 헝가리였습니다.
부다페스트 칼 마르크스 대학에서의 유학생활은 그에게 색다른 경험이었습니다. 1956년 헝가리 혁명과 소련군의 잔혹한 진압을 대학 친구들에게 듣자, 그가 태어나고 자랐을때 생긴 가치관에 조금씩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1968년 프라하의 봄 무력 진압 이후부터는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믿음마져 무너져내리기 시작했습니다.(비록 내색은 안했지만) 그리고 굴라쉬 사회주의로 만들어진 헝가리의 (다른 공산권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는 그의 가치관을 크게 변화시켰습니다.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석사, 박사 과정을 거친 후 경제학 교수로 취직했습니다. 1966년 약혼녀인 베이웨이웨이(贝微微)와의 결혼을 위해 잠시 귀국한 것을 제외하면 칼 마르크스 대학의 교수로 재직하며 헝가리에서 지내다가. 저우언라이의 부름을 받아 1975년 11월에 중국으로 귀국했습니다.
그렇게 샤오나이가 해외 생활을 마치고 귀국했을때. 조국의 모습은 매우 처참했습니다.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인해 경제는 파탄 직전이었으며, 반우파 투쟁으로 인한 국내의 대대적인 숙청. 그리고 문화대혁명이라는 실로 경악할만한 사건으로 인해 중국은 그야말로 인외마경이 따로 없었습니다. 귀국 이후 샤오나이는 재정부에 들어갔고, 그의 탁월한 업무능력 덕분에 고속 승진을 하여 재정부 내에서 상당히 높은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그는 "공산당과 함께라면 신중국을 건설할 수 있다"는 말에 의구심을 품습니다. 진정한 신중국의 길을 걷기 위해서는 자신의 지식을 활용해야 할 것입니다...
4.
- 이름: 라싸더챠오(拉萨的橋) (본명:톰페티)
- 플레이어: 하일레 셀라시예
- 생년월일: 1910년 10월 4일
- 성별: 남성
- 민족: 티베트족
- 모국어: 티베트어
- 사용가능언어: 중국 보통화, 영어, 산스크리트어, 힌디어
- 능력치:
통솔(7)/체력(8)/지능(18)/지혜(7)/매력(13)
- 기술:
지휘(0)/관리(1)/사격(0)/격투(0)/조사(0)/연구(0)/설득(5)/토론(5)/기만(0)/협박(0)/선동(0)/심문(0)/매혹(0)
- 트레잇:
#미소짓는 부처 / 성적인 상황을 제외한 모든 상황에서 매혹에 +1 모디파이어.
- 잔여포인트: 10.
- 배경:
포달랍궁에서 전대 달라이 라마의 시중을 들던 톰페티는 영특한 두뇌를 가져 달라이 라마의 총애를 받으며 원하는 학문을 마음껏 공부하며 자랐습니다. 그는 성인이 되어 티베트 불교내에서도 알아주는 뛰어난 라마가 되었으나 1959년 티베트의 대규모 봉기와 중공의 탄압이 벌어지고,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를 떠나며 자신을 따라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고통스러워하는 티베트인들을 불쌍히 여긴 톰페티는 차마 라싸를 떠나지 못했습니다. 달라이 라마를 비롯한 많은 승려들이 인도로 망명을 가거나 투옥되어 죽는 가운데 남아있는 승려들을 규합하여 티베트인들을 안정시키고 공산당과 티베트 독립세력간의 의견차이를 좁히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평화와 공존을 위한 그의 오랜노력 덕에 티베트인들에게 대대적인 지지를 받게 될 무렵 시찰을 나온 저우언라이와 만나게 되었고 긴 설득 끝에 독립운동을 확실히 막기 위해서는 더욱 큰 자치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을 납득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후 저우언라이의 도움과 함께 몇년간 라싸의 시장으로 있으며 티베트를 발전시키고 강경파를 회유하던 톰페티는 공산당 인물들에게 '라싸강경파들과의 대화창구'라는 뜻에서 '라싸더챠오(라싸의 다리)'라는 별명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자치권을 얻기 위해서는 단순히 저우언라이에게 기대며 티베트에 있을 것이 아니라 스스로 권력의 핵심에 들어가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고 저우언라이의 요청에 따라 자신을 따르는 젊은 승려들 몇을 데리고 베이징에 도착했습니다.
5.
- 이름: 후종밍(胡中明)
- 플레이어: 세르게이 비테
- 생년월일: 1930년 8월 8일
- 성별: 남성
- 민족: 한족
- 모국어: 중국 보통화
- 사용가능언어: 러시아어, 진어
- 능력치:
통솔(18)/체력(9)/지능(9)/지혜(11)/매력(10)
- 기술:
지휘(5)/관리(5)/사격(0)/격투(0)/조사(0)/연구(0)/설득(0)/토론(0)/기만(1)/협박(0)/선동(0)/심문(0)/매혹(0)
- 잔여 포인트: 3
- 트레잇:
#물은 답을 알고 있다 / 적에 대한 심문에 +1 모디파이어.
- 배경:
후종밍은 인민해방군의 고위 장교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인 후챠오밍은 국공내전과 조국해방전쟁에서의 공로로 북부전구의 동원국장과 육군 정치위원직 등을 역임하였고, 현재 지난의 북부전구 육군 사령원으로서 북부전구 내에서의 상당한 영향력을 보유하였습니다. 후종밍은 그러한 아버지의 위세를 덕에 청소년 시절부터 저명한 군사 전문가들에게 개인 훈련을 받을 수 있게 되었고, 그 결과로 중국인민해방군군사학원에 1대 입학생으로 입학하여, 수석으로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중국인민해방군군사학원에서 재학하는 동안 북부 전구 지역 출신의 생도들과 파벌을 형성하였고, 수석으로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북부 전구의 장교로 임관하여 고속 승진한 그는 아버지의 입김을 빌려 중국인민해방군군사학원 재학 시절 자신이 형성하였던 북부 전구 출신의 파벌원들을 북부 전구의 주요 요직에 앉히며, 북부 전구에서의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습니다. 문화대혁명의 광기가 대륙 전역을 휩쓰는 과정에서 챠오밍-종밍 부자는 적절한 처신으로 오히려 입지를 더욱 강화할 수 있었고, 그 과정 속에서 대외적으로 중앙정부에게 능력있고 당에 충성하며 비교적 젊고, (마오 주석이 만든 군사학원의 초대 졸업생)장교라는 이미지를 각인시킨 후종밍은 사십 대의 나이로 북부 전구의 부사령원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마오 주석이 사망하고 정국이 혼란스러운 지금, 그는 겉으로는 당에 충성하는 면모를 보이며 최대한 당을 자극하지 않고 있지만, 은밀히 공청단과 접촉하고, 북부 전구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등 면종복배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가 어떤 선택을 할 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그는 상당히 위험한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중국의 상황.
※미국과의 관계: 5(원만함)
※소련과의 관계: 7(친밀함)
※당내 계파의 세력분포:
- 백화제방파(자오쯔양, 17%)
: 이들은 제11차 당대회에서의 과감한 '사고 이행'을 열렬히 환영한 이들로, 1950년대의 쌍백방침의 복구를 지지합니다. 일부 급진파들은 다당제를 비롯한 큰 폭의 민주화 개혁을 주장하지만, 모두가 그에 찬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들은 후야오방이 재건한 공청단 출신의 젊은 당원들을 주축으로 합니다. 주요 멤버는 자오쯔양, 시중쉰, 샤오나이 등이 있습니다. 현재는 12차 2중전회 때의 타격으로 잠시 세력을 잃은 상태입니다.
- 쇄신파(화궈펑, 40%)
: 화궈펑은 당정쇄신론을 내세우며 마오 주석의 과감한 격하를 이루었지만, 많은 대중들이 바라는 대로 민주화의 수호신이 되고 싶어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중국의 체제를 과감하게 개혁해야 한다는 점은 동의하며, 개인차는 있지만 자본주의의 방식을 일부 도입해야 한다는 의견도 많습니다. 주요 멤버로는 화궈펑 주석 본인, 톰페티, 주룽지, 위안차이나 등이 있습니다. 류메이란의 경우 쇄신파와 신사회주의파의 중간에 위치한다고 평가받습니다.
- 신 사회주의파(덩샤오핑, 34%)
: 이들은 대부분 원래 개혁파 내지 중도파를 이루던 '왕년의 반 마오주의자'이자 '문혁의 피해자' 그룹입니다. 11차 당대회 이후 당의 분위기가 180도 전환되고 '민주의 벽' 사건이 발생하자, 이들은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이들은 아무리 개혁개방을 하더라도 사회주의의 기본 틀은 지켜내야 한다는 입장이며, 특히 대외정책 면에서 소련과의 긴밀한 관계를 추구합니다. 주요 멤버로는 덩샤오핑, 천윈, 후종밍 등이 있습니다.
- 단합단결파(뤄칭창, 6%)
: 원래 보수파의 이름으로 불렸던 단합단결파는 원래 화궈펑 주석을 지지하던 이들이었고, 그것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개혁개방의 성과가 뚜렷이 보이자 이들은 개혁에 대한 반대를 단념했고, 대신 당의 굳건한 단합을 유일한 당론으로 삼기로 했습니다. 이들은 당 또는 국가체제의 급진적인 변화에 아주 신중한 입장을 보이며, 체제의 안정을 위해 세력 간 균형을 중시합니다.
- 무당파(3%)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상무회 현황(1984년 5월)
1. 화궈펑(쇄신파)
-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주석
- 중국 공산당 명예주석
2. 덩샤오핑(신사회주의파)
- 중화인민공화국 전국인민대표자회의 상무회 주석
- 중국 공산당 총서기
3. 자오쯔양(제방파)
-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총리
- 중국 공산당 국무원 당조서기
4. 톰페티 라마(쇄신파)
- 중화인민공화국 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
- 중국 공산당 정협 당조서기
5. 후종밍(신사회주의파)
- 중화인민공화국 합동참모위원회 위원장
- 중국 공산당 합참 당조서기
6. 천윈(신사회주의파)
-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수석부총리
- 중국 공산당 부총서기
7. 주룽지(쇄신파)
- 중국 공산당 중앙서기처 제1서기
※포괄적 경제협력기구(CEPO) 가맹국:
중화인민공화국,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 라오 인민민주주의공화국, 캄푸치아 인민공화국, 타이 입헌왕국, 파키스탄 공화국, 남아프리카 민주공화국, 이집트 이슬람공화국.
1. 파란색 계열(명도순)
- 미국
- NATO 회원국
- 미국의 기타 동맹국
- 친미 또는 자본주의 중립국
2. 빨간색 계열(명도순)
- 소련
- 바르샤바조약기구 회원국
- 소련의 기타 동맹국
- 친소 또는 사회주의 중립국
3. 노란색 계열(명도순)
- 중국
- 친중노선을 견지하는 국가
- 중국의 입장을 지지하는 제3세계운동 회원국
디스토피아 엔딩이 유력하긴 하죠. 그래서 더 기대되는.. ㅋㅋㅋㅋ
+ 플레이어 분들이 굿엔딩을 별로 안좋아하시ㄴ.. 읍읍
저같은 경우엔 하도 극단적인 충돌로 미친 상황이 나서 폭파까지 이어진게 한두번이 아니라서 그런지 좀 거시기한.
뭐 이건 개인 성향차니까.
ㅋㅋㅋㅋㅋㅋ 사실 머릿속엔, 1987 쿠데타 방어 엔딩- 1997or2007 1차 미래- 2021년 2차 미래 (미국 코로나 사태?)- 2050년 3차 미래. 해서 디스토피아도 약간 그림이 있긴 합니다. 부담 스러워서 그렇지?
+ 저는 굿 엔딩 선호긴 한데, 해온거에 대한건 수용하는 스타일이니까요 ㅋㅋㅋ... 만일 쿠데타 못 막으면, 둘중 하나 (반군에게 협조 하진 않겠다! 하고 숙청 or 반군에게 돌격하고 사망) 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죠. 3안이라면... 어딘가로의 망명인데, 한다면... 음...
전 굿엔딩을 원했는데 다른 분들이 자꾸 베드엔딩으로 만들려고 하시니 원...
전 쿠데타를 못 막으면 당장 헝가리 대사관으로 달려가 망명 신청을... 가족들은 미리 보내놀거니 나만 멀쩡히 가면 되니까요.
제 경우는 프랑스... 프랑스어 (약간) 이 계기가 될지도?
+ 근데, 제가 제일 문제지 (진압의 최 전선에 설 예정...) 다른 4분은 그리 걱정 안해도 되지 않나요? 류메이란경이 두번째로 걱정이고... (샤오나이는 경제 관료라 숙청이 힘들다. 위에도 설명 되어 있듯이... 톰페티는 후계자에게 안배 했을 정도로 인계가 완전함. 후종밍은 실패하면 소련으로 가면 된다. 류메이란과 위안차이나가 입지와 지분상...)
+ ㅋㅋㅋ... 방금 쓰면서 안건데. 마지막화가 되어서야, 5인 전원의 이름을 외웠군요. 방금 저거 안 찾아보고 자연스럽게...
쿠데타가 성공하더라도 반대파니 숙청당할까봐 그러죠. 특히 저는 정치, 경제적 자유화를 지지하는데...(서구 수준은 아니고 뜨노 슈페어 파시즘 루트 정도?)
뭐... 그건 그렇죠. 근데 샤오나이는 숙청해도 한번쯤은 말린다고 하긴 했는데...
+ 일단 격문이랑 보낼거 두개는 살짝만 준비 해두긴 했습니다.
한번쯤은 말린다는 말은 두번째에 숙청하겠다고 할땐 말리지 않는다는 거잖아요?
뭐 그건 그렇죠. 거기에 성향차 감안하면...
+ 물론 죽이진 않고 하방시키거나, 좌천시킬 가능성이 높지만...
저도 그래서 최선이 미소냉전 구도를 유지해서 균형 상태를 만들고 힘을 키워 이후 패권에 도전할지 아님 3강체제를 유지할지를 결정하는것이었는데.
일관되게 서방 진영 죽이기를 시전하며 공격적으로만 나온 덕분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처음에 시작할 때는 오히려 플레이어들이 친미노선을 너무 심하게 타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ㅋㅋ
예상치 못한 전개에 예상치 못한 결말이죠 ㅋㅋ
정리하다 보니 이번화 사건들의 순서가 약간 바뀌게 되네요. ㅋㅋㅋ
뭐 그래도 나머지 전개에 영향은 없을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