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여러가지 책들에서 짬뽕으로 인용해 온 문구들과, 그에 덧붙인 내 생각들이지만
이 시기에 읽었던 이런 장르의 책들 중 가장 흥미롭고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역시나 시오노 여사의
책들이니.
(그나저나 어째서 책을 선택하지 않으면 글을 못 쓰는 거야??)
∆민주주의 역사와 혁명에 대한 인용구들
Montesquieu, The Spirit of the Laws, Vol.1.124
“In proportion as the power of the monarch becomes boundless and immense,
his security diminishes.”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중앙에 집중되는 권력을 분산해서 무조건 작게 만드는 것이 능사는 아니란 것 또한
우리는 보아오지 않았는가? 민주주의의 형태를 어떻게 할 것인지,
정말 하나의 정답이란 게 존재할 수 없다면 기본적인 원칙과 가치에 대한 합의는 어떤 식으로
이루어나가야 하는 지 등을 모두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다.
Plato, The Republic, Chapter 24.268
“Is it not a simple fact that in any form of government
Revolution always starts from the outbreak of internal dissension in the ruling class?
The Constitution can not be upset so long as that class is of one mind,
However small it may be.”
씁쓸하지만 더 이상 진실일 수 없는,
플라톤씨가 이 정도로 위트 있으신 줄 진작 몰랐던 게 한스러울 정도.
정치에 있어서 faction,이란 특히 민주주의 정치에 있어서 정당이란
정말로 필요악의 존재인 건지 생각해 보아야 할 듯.
Gaius Pliniua Caecilius Secundus,
“Non times bella nec provocas”
“Imperaturus omnibus eligi debet ex omnibus”
전쟁이건 지도자건 간에 그 원칙에 있어서
순서의 전후가 바뀌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지. 특히 미국에서 말이지-_-
가이우스가 안다면 통탄할 일이지만서도,
Erich Fried,
그것이 진정한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민주주의가,
과연 진정한 민주주의인가 ?
이건 패러독스?
진정한 민주주의라면 자유로운 의사 표현이 전제되어야 하니
당연히 불만 있는 사람들이라면 “진정한 민주주의가 아냐”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할 테지만
그렇게 말하는 순간 그럼 그 민주주의는 진정한 민주주의가 되지 않는 다는 거지.
문제는, 민주주의의 목적이 과연 모든 이의 만족에 있느냐 하는 것과
(전형적인 공리주의 논리로 최대 다수의 행복, 이란 걸 난 얘기하고 싶은 걸까?)
전체가 아닌 일부 의견이 그것을 부정한다고 해서 과연 부정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겠지.
(그러나 다수결로 정답을 정하는 사회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 건데 말이지.)
Bertolt Brecht, 의심을 찬양하며
학대 받고 낙담한 이들이 머리를 치켜들고
지금까지 믿어 의심하지 못했던 압제자들의 힘을 더 이상 믿지 않을 때,
가장 훌륭한 의심이 생겨난다.
하지만 뼛속에서부터 질서와 안정을 추구하는 “보수”주의자인 나는
이 의심을 한다는 것 자체의 훌륭함은 인정하지만
이러한 의심이 항상 결과까지 훌륭할 수는 없다는 점을 기억하라고, 덧붙이고 싶군.
사실상 역사를 기억하고 정치를 이야기하는 우리 모두의 약점은
이러한 의심의 훌륭함을 너무 믿어 의심치 못하는 데 있다고 생각해.
의도가 훌륭하고 결과가 훌륭하다고 해서, 과정 또한 훌륭할 수는 없는 거지.
혁명과 반동은 보는 이의 관점에 따른 것이지, 한 끗 차이라고.
“보통 사람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이 훌륭한 사회 제도의 기본이라고
시오노 나나미 여사도 말했지만-
나는 숭고한 희생이라던가,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표현 등을 혐오해.
개인이 자신과, 자신을 구성하는 그리고 자신이 구성하는 사회를 위해
“용단”을 내리는 거야 개인의 자유니까 뭐라 할 생각이 없지만
최소한 지도자(혹은 그런 영향력을 가진 이)의 입장에서 그딴 말을 한다면
정말 한 대 때려주겠어. 그딴 식으로 희생을 강요할 수 밖에 없으면
하지 않으면 되는 거야. 하지 말라고.
현실이 불합리하고 괴로워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의심하고 그 의심을
행동에 옮기는 건, 그 현실에 괴로운 개인들의 자유의지가 모였을 때만
정당한 것이어야 해. 그렇지 않고 소수의 의심하는 무리들의 선동에 의해,
다수가 희생된다면 그 과정의 고통은 너무 가혹해.
의심 자체는 훌륭할 수 있지만 그 의심의 실행 또한 훌륭하려면
관련된 모두가 의심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해.
Shakespeare, Corionalus, citizen 1
이건 빵에 굶주려서 하는 것이지 피에 굶주려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신은 아실 거야.
하지만 빵이 어떤 크기인지도 중요해졌지......
권위 있는 대식가의 자격으로 말하건대, 인간의 “굶주림”이란 정의하기 나름이지.
인간의 자기 합리화의 대가들이니까.
데이빗 샤피로, 잃어버린 원작을 찾아서 중, 꿈속에서 죠 세라발로가 쓴 노트와 시에서
역사와 행복은 서로 닮았네
그것은 우연히 생겨나는 것
또는 우연히 마주치는 것
또는 터질 듯 갑자기 일어나는 것
아니,
역사와 행복은 일어난 적이 없어
Oh History, Oh Happiness
너무 어려워서, 제대로 이해했는지 확신할 수 없어 노 코멘트.
1968년, “혁명”이 진행 중이던 당시 파리의 벽에서,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불가능을 요구하자.
이 보도블록 밑엔 바다가 있다.
그들의 악몽은 곧 우리의 꿈이다.
상상력에게 권력을!
사뭇 감동적이기까지한 68의 구호들은 그러나, 해석하기 나름인 거겠지.
리얼리스트가 되는데 불가능을 요구하면 그건 네오콘......;
장폴 사르트르, 프란츠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 서문에서,
“외세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식민지인들이 휘두르는 폭력은 정당하다.”
그럴 듯 하긴 하지만 폭력이 정당하다는 표현에서부터 마음이 배배꼬이는 걸.
팔레스타인 무장조직 알-아크사 순교여단이 인터뷰 중에서
(p.86 나는 평화를 기원하지 않는다)
“누가 누구를 테러리스트라 부르는가? 국제법상 불법적인 전쟁범죄를 저지르는 이스라엘과
피억압자인 팔레스타인, 둘 가운데 누가 테러리스트인가?
우리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가난하게 사는 데는 익숙해 있다.
문제는 억압으로부터의 해방과 자유이다.
우리는 견딜 수 없는 분노를 느껴왔다.
그 분노를 밑거름으로 하여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해 싸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은 불쌍해, 이스라엘은 나빠. 라고 말하는 근거가
그 GDP랑 국방비라면 다시 생각해보자고.
이스라엘 정부가 쪼개져있는 팔레스타인 “정부”들에 비해 우위에 있고
분명 이스라엘의 무력과 재력이 팔레스타인을 억압하는 측면이 강하지만,
길을 가다가 폭탄에 맞아 숨지는 이스라엘의 시민들에게는
하마스가 억압자일 수 있는 거지.
억압-피억압의 관계는 이제 더이상 국가 대 국가의 논리로만 전환되는 게 아닌 듯.
-그에 대한 독재자들의 시선
1958년 10월, 파키스탄 쿠테타의 주인공 아유브 칸 장군
파키스탄처럼 기후가 더운 지역에서는 민주주의가 제대로 운영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해해야만 한다.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영국처럼 추운 기후가 있어야 한다.
장군이라서 머리도 근육인건 가요. 민주주의가 무슨 아이스크림 기계도 아니고.
1965년, 모로코의 하산 국왕
“There is no danger for the state as grave as that of the so-called intellectual.
It would be better if you were all illiterate.”
소위 말하는 “지식인”들이 국가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의견에는 동의하지만
모두 문맹이었으면 좋겠다니.
대체 역사공부는 하긴 하는 건지, 제왕학에는 역사가 없나?
국사를 정규과목에서 제외한 대한민국 7차 교과 수준의 커리큘럼인가보지-_-
스페인의 독재자 프랑코가 예수에게 드리는 기도
“충직한 제게 스페인을 맡기신 주여, 진정한 가톨릭 신도인 제가
다시는 주께 스페인을 떠맡기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
신실한 기독교인도 가톨릭교도도 뭐도 아니지만, 저런 게 신성모독이라는거겠지.
마고트 호네커 치하 동독 시절에 대해서,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 하지만 그 중 일부는 나머지보다 더 평등하다.”
그래, 하지만 너는 아니야. 평등하다면서 “더” 평등하다니, 대체 그건 독일 말에만 있는 표현인가.
나만큼이나 언어 구사 능력이 특이하시군.
∆인간의 본성과 전쟁에 대한 인용구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인간의 본성에 자리잡은 야만성에 대해
“모든 사람의 마음속엔 짐승이 있다. 분노의 짐승, 고문 받는 사람의 비명을 들으려 하는 짐승,
마구 날뛰는 무법의 짐승이 (마음속에) 숨어있다.”
고문 받는 사람의 비명을 들으려......; 극단적이시라니까, 도스토예프스키 씨.
난 좀 이상한 상상들이 되어버렸지만서도. 그나저나 카라마조프...처럼
읽고 나서 그 내용이 기억에서 바로 자동 삭제되는 책이 또 있으려나? 악령?;
노문학을 하시는 모든 분들께 심심한 존경과 조의를......
토머스 홉스의 리바이어던에서 인간의 본성과 전쟁의 관계에 대해
우리 인간을 두렵게 하는 어떤 힘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면
우리는 전쟁 상황에서 살게 된다.
그 전쟁은 모든 인간이 다른 모든 인간에 맞서 싸우는 투쟁이다.
... 우리는 인간의 본성 안에서 투쟁의 세 가지 주요한 원인을 찾아낼 수 있다.
첫째는 경쟁, 둘째는 불신, 셋째는 자만이다. 배타적인 인간성이 곧 전쟁을 낳는 것이다.
하지만 경쟁은 발전을 낳고, 자신의 능력에 대한 불(확)신이 상대에 대한 존중을 낳고,
자만에 의해 우리는 경쟁과 불신을 더욱 촉진하여 앞으로 나아갈 수 있지.
이영도님의 드래곤 라자에서 보았던 거 같은데,
나는 인간이 배타적이고 불신하는 생물이라서 에티켓과 예절을 만들어냈다는 의견에 동의해.
우리가 악수를 하려고 손을 내밀게 된 이유가, 순수하게 친구가 되고 싶어서라기보다는
상대방이 나에게 적의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에 있다는 것은 분명 씁쓸한 일이지만
결과적으로 그런 인간의 배타성이 악수라는 문화를 낳고, 그런 문화가 발전의 기반이 된다는 점에서...
긍정할 수 도 있잖아? 배타적인 인간성은 전쟁을 낳지만, 전쟁만 낳는 것은 아니야.
엠마누엘 칸트, 영구평화론에서
“전쟁은 우리 인간의 본성에 들어있는 듯하다.
심지어 전쟁은 누군가의 이기적인 동기 없이도 일어난다.
그 경우 전쟁은 오로지 명예를 위해 치러지는 존귀한 것으로까지 여겨진다.”
”영구 평화는 무덤에서나 가능하다.”
“영구 평화를 위해서는 세계국가가 성립되어야 한다.”
무덤에서 가능한지 확인하는 방법은 별로 선택하고 싶지 않고,
세계 국가가 성립되면 과연 정말 영구평화가?
칸트의 세계는 전형적인 주권국가간의 동맹과 견제의 balance of power 시대였으니까
저렇게 단언할 수 있었겠지만
우리가 사는 세계는 알 카에다와 카트리나로 대변되는 21세기라구요.
영구평화라는 것은 가르강튀아의 세계에서나 꿈꾸도록 하고,
최대 다수가 가능한 최대로 “평화스러운-안정된” 상태에서 삶을 영위할 수 있게끔
노력하는 것이 (궁상맞지만) 우리의 목표이고, 그러기 위해서 세계국가는 무리더라도
글로벌 거버넌스라던가 국제 레짐을 강화해야겠지요.
하지만 명예를 위해 치뤄지는 존귀한 전쟁이라는, 그런 막되먹은 개념과 인식은
얼른 얼른 인류 역사 저 뒤편으로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네......
세르비아의 왕 페타르 1세에게, 제 1차 세계대전에서 여섯 아들을 잃은 농부가
“아닙니다. 전 제게 닥친 불행에 대한 책임을 폐하께 여쭐 생각은 없습니다.
책임을 묻는다면 수백 년 전에 이곳으로 정착해 온 저의 조상을 탓해야겠지요.
하고 많은 곳 중에 왜 하필이면 발칸 반도였는지 말입니다.
이 놈의 땅에 눈독 들이지 않는 나라가 없고
하다못해 어딜 가려 해도 여길 통과해가려고들 하니,
이런 곳에 정착한 조상이 가장 큰 잘못이지요.”
인간의 본성이 이기적이고, 역시 이기적인 국가가 추구하는 것이 more power, more interest라면
역시나 빠질 수 없는 것이 지정학적 고려.
그리고 지정학적 고려라는 얘기가 나올 때 슬픈 국가는 발칸뿐만이 아냐.
늘상 말하지만, 지구과학을 보다 연구해서 한반도를 뚝 떼어 저 호주 옆이라던가,에 옮겨 주고파.
반만년 역사 동안 미국, 러시아, 중국, 일본에 둘러싸여 있어서 좋았던 거 뭐 있었나?
이놈의 땅에 눈독 들이지 않는 나라가 없고 하다못해 지들끼리 싸울 때도 꼭 우릴 걸고 넘어지니,
이런 곳에 정착하신 조상님들 나빠요-_-;
∆사회제도와 지도자의 덕목에 대한 인용구들
시오노 나나미, 로마인 이야기 중에서
로마 황제의 책무는 “안전”과 “식량”의 보장이다. 하지만 안전 보장이 우선이다.
안전만 보장되면, 사람들은 자기한테 필요한 식량을 스스로 생산할 수 있다.
그것이 가능한 상태로 세상을 만들어 주는 것이 통치자의 책임이다.
“식량”보장은 개인의 노력으로도 이룰 수 있지만,
“안전”보장은 개인의 노력을 넘어서는 과제이기 때문이다.
나나미 씨의 베네치아 공화국 이야기를 읽고 반한 이후로, 상당부분 나나미 씨의 정치적-_- 의견에
동조하는 쪽인데 말이지.
(물론 나나미 씨가 일본인인건 아쉽... 경쟁국가의 일원이 저렇게 생각하는 건 또 싫어)
안전 보장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난 경제가 아닌 정치를-그것도 국제정치- 공부하고 있는 거지만
때때로 우리 “존경하는” 통치자들께서 안전 보장이라는 명분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 대는
작태는 용서할 수가 없어.
책임이라는 건 “책임지다” 라고 사용되는 단어이지
“(책임이 있다는 것을) 생색내다; 이용하다”라고 쓰는 게 아니라고!
시스템이란 남보다 뛰어난 능력을 타고난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보통사람의 능력에 맞추어 그 사람들의 필요까지 충족시켜주는 것이어야 한다.
이 글, 짤막하고 어찌 보면 당연한 구절인데. 처음 읽었을 때 울컥, 감동했었더랬지.
부끄럽지만, 한번도 이렇게까지 난 생각해본 적이 없었네.
단순하지만 가슴을 파고드는, 이런 게 진리이고 명문인 거겠지.
“moles necessarie”
사람이 사람다운 생활을 하기 위해 필요한 대사업
“Firmitas, utilitas, venustas”
견고함 편리함 아름다움
선정(善政)은,
요컨대 정직한 사람이 무참한 꼴을 당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정직한 사람이 무참한 꼴을 당하지 않는 사회에는 “재미있는” 뉴스거리는 없겠지만, 말이야.
어제 TV 뉴스에서, 한 공중 화장실의 두루마리 휴지 두 개를 훔치는 바람에 감옥에서 2년째 수감중인
미국인 여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물론 그 여자가 비록 정직하지는 않더라도,
덜 정직한 이들이 수없이 많다는 걸 감안한다면......부시는 역시 선정과는 거리가 멀어?
인간이란 참으로 복잡미묘한 존재여서,
호평을 받은 일은 계속하고 악평을 받은 일은 그만두면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다.
호평을 받았다고 해서 계속 하면 싫증을 내고,
악평을 받은 정책을 관두고 정반대의 정책을 택하면
그때까지 비난을 퍼붓던 이들이 뒤늦게 이전 정책의 부활을 요구하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무슨 논지인가는 이해하지만ㅋ 포퓰리즘을 조장하는 것 같이 읽히기도 하는군,
특히 지금처럼 마음이 비딱할 때에는.
하드리야누스 황제의 순행의 어려움에 대하여, 한 로마인 풍자작가가
“ego nolo caesar esse
Ambulare per Britannos
Latitare per...
Scythicas pati pruinas”
황제는 되고 싶지 않아
브리타니아인들 사이를 싸돌아다니고
(변경)을 헤매고
스키티아의 혹한에 살을 찔리니
이거 처음 읽었을 때, 지도자에게 있어서-특히 로마제국의 황제라는, 세계의 일인자 지위의-
최고의 찬사라고 생각했어. 최고의 찬사가 “네 자리는 줘도 안 가져” 라는 뉘앙스를 풍긴다는 건
웃기는 아이러니이지만.
지도자란 이렇듯 평범한 (그래서 행복한) 국민이라면 관심도 없는 자리여야 한다고 생각해.
현명한 사람은 역사에서 배우고 어리석은 사람은 경험에서 배운다.
훌륭한 지도자는 역사와 경험에서 모두 배울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 탄생하시고 2천 년이 넘도록 세계의 역사와 경험이 쌓이고,
지구촌 사회화 되어 그 모든 것을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오늘날에도
...훌륭한 지도자가 이토록 드문 이유는?
논리구조 상, 역은 참이 아니라서? 역이 항상 참이 아니라는 사실은 늘 나를 아쉽게 한단 말이지.
아리스티데스, BC 2세기의 그리스 철학자
대지는 만인의 것이라고, 호메로스는 노래했다.
로마는 호메로스의 꿈을 현실로 만들었다.
로마인들이여, 그대들은 로마 제국의 모든 땅을 측량하고, 기록했다.
강에는 다리를, 평지와 산지에는 도로를 놓았다.
제국의 그 누구라도 쉽게 왕래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인종이 다르고 민족이 달라도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법률도 정비했다.
로마인들이여, 그대들은 로마시민이 아닌 우리 모두에게도
질서 있고 안정된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의 중요성을 가르쳐주었다...
그 중요성을 잘 배우지 못한 몇몇 불량학생들이 세계 질서의 물을 흐리고 있어서 안타깝지만......
그나저나 로마인 이야기를 읽다가 내 이탈리아 친구들을 보면 도대체가 매치가 안 된단 말이지.
시간이 지났다고 민족성이랄까나, 그런 특성마저 그렇게 달라져도 되는 거니?
고대의 그리스∙로마 제국과 기독교의 로마의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두 가지 격언
페리클레스,
“가난은 수치가 아니다. 하지만 가난에 안주하는 것은 수치다.”
예수,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나는 뭐 진지한 종교인이 아니지만, 그래도 가장 가까운 종교가 기독교-카톨릭인데
이 두 유명한 격언을 나나미 여사가 로마인 이야기에서 교묘하게 함께 제시한 걸 보고
하하하 웃을 수 밖에 없었지.
응, 물론 예수님의 말씀을 저렇게 시니컬하게만 해석해서는 안된다고(의도 해석의 차이?) 생각하지만
그래도 배우는 사람의 유형이 항상,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거나 제 멋대로 받아들이거나 하는 두 타입인 걸 감안할 때-
나나미 여사의 지적은 아주 허를 찔렀어.
그런 의미에서, 부를 열심히 뒤쫓는 우리 사회에서 최대의 종교가 기독교라는 것은,
우리가 제멋대로 받아들이는 타입의 제자라는 뜻인가?
도로테 죌레, 독일의 신학자, 아이들의 행복이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서
“나는 그것을 설명해주지 않을 겁니다.
대신 아이들에게 가지고 놀 수 있는 공을 하나 던져 주겠습니다.”
이 글을 처음 읽은 것은 [아내가 결혼했다]라는 작년의 화제작-_-에서였던 걸로 기억.
행복이란 그래, 설명이 아닌 추구-실행 그 자체에서 의미를 가지는 거지.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유고슬라비아를 통치하는 자신의 능력을 표현하며
“난 두 개의 글자체계와 세 개의 공용어를 사용하며, 네 개의 종교를 가진,
다섯 민족을 통치하고 있소. 게다가 이 나라는 모두 여섯 개의 공화국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일곱 나라에 둘러싸여 있고 소수 민족이 여덟이나 되지요.”
나는 티토 씨를 잘 모르고 그의 독재의 잔인함도 잘 모르고 그의 나라도 잘 몰라.
하지만 그가 살아있는 동안 일어나지 않았던 전쟁이, 엄청난 비극이,
그의 죽음과 동시에 일어나서 수 만 명이 죽고 아직도 그 여파가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지.
압제자에 대한 의심? 외세의 지배에 대항한 정당한 폭력?
죽은 사람과, 사랑하는 이를 잃은 그 사람들 앞에서 한번 말해보시지.
왕은
백성들의 가슴에 단
꽃
군대는
백성의 고용한
문지기
앞마을 뒷마을은
한식구
두레로 노동을 교환하고
쌀과 떡, 무명과 꽃밭
아침 저녁 나누었다.
...
언제부터였을까
살림을 장식하기 위해 백성들 가슴에
달았던 꽃이, 백성들 머리 위 기어 올라와
쇠항아리처럼 커져서 백성 덮누르기
시작한 것은
- 신동엽 시인의 <금강>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