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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문무의 조선사 원문보기 글쓴이: 문 무
반도사(半島史)와 조선사(朝鮮史)
며칠 전 인터넷 뉴스를 보다가 “고조선(古朝鮮) 뿌리는 숙신(肅愼)”이라는 글을 보았다. 그것은 "중앙 선데이, 오피니언 리더의 신문"에 게재된 『김 00의 新고대사 : 단군을 넘어 고조선을 넘어 ⑤고조선의 실체Ⅱ』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라고 하니 아마도 그 내용 중의 일부가 아닐까 추측이 된다. 오늘 이 글은 이 분의 주장(主張)이나 논리(論理)를 비판(批判)한다거나, 비난(非難), 비방(誹謗)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쓰는 글이 아니다. 다만 너무나 아쉬운 점이 많고, 같은 옛 고전【古典 : 원문으로 된 옛 역사서】을 보면서, 인용(引用)하고, 참고(參考)하는 부분이 왜 이렇게 달라야만 할까? 하는 문제와 결론부분으로 가는 곳에서는 왜 꼭 반도(半島)에 맞추려하는 것인지 아쉽고, 안타까운 점을 말하려 하는 것이다.
일제 식민지 통치 36년! 『길다고 생각한다면 긴 세월이요, 짧게 생각하면 그리 긴 세월은 아니다.』라고 제각각 생각할 것이다. 공식적인 합병일로부터 해방(解放)될 때까지의 기간(其間)이다. 그 이전(以前)의 기간까지 합하면, 50년, 70년, 80년???????????????
본인【A. D 1,950년에 태어났음】의 대선배(先輩)이신, 형님, 누님들로부터 들은 생생한 체험 이야기는 이랬다. 『소학교(小學校)를 가서야 “언문(諺文)”과 “산수(算數)”를 배웠다.』는 것이다. 이때 생활의 어려움 때문에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던 분들은 소위 “한글”을 몰랐다.
본인의 어린 시절 동네엔 “서당(書堂)이 있었고, 그곳엔 훈장(訓長)님과 한문(漢文)을 배우는 서동(書童)들이 있었다.” 그리고 당시 이러한 시골의 형편은 다른 지방의 시골과 거의 비슷했을 것이며, 마을의 이름은 한문(漢文)이 아닌 대부분 “언문(諺文)”이란 순수한 말이었다. 『아래 뜸. 중 틈. 윗 틈. 가 재 울. 새 터. 장골. 아래장골. 위 장골. 여술. 갬 발 등등이었고, 행정 구역은 수시로 변했으며, 정식 행정 구역 명칭은 일제(日帝)들이 만들어 놓은 그것 그대로 사용됐다. 또한 당시의 신문을 보면, 대부분 한문(漢文)으로 되어 있었다. 』
어르신들의 말씀을 들어보면, 누구 네는 성(姓)이 없었고, 누구 네는 이웃 양반집의 하인 출신이며, 누구는 장돌 백이인데 이곳에 정착했으며, 하여튼 어린 나이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숱하게 들었다.
초등학교시절, 유난히 역사와 지리분야에 관심이 많았던 본인은 역사와 지리분야에서만은 중학교, 고등학교 참고서나 책을 보고 있었다. 얼마나 자랑스럽게 생각했었지 모른다. 평화와 문명만을 사랑하며, 외침을 수없이 당했지만 스스로 남의 나라를 침탈치 않은 민족, 백의민족, 한겨레를 자랑스럽게 가슴 뿌듯하게 여겼던가!!!!!!!!!!!!!!!!
조선(朝鮮)을 개국(開國)하신 단군(檀君) 할아버지, 수십만 대군을 물리친 양 만춘, 수십만 당(唐)병을 물리친 연개소문, 살수의 영웅 강감찬 장군이며, 삼국 통일을 이룩한 김춘추와 김유신 장군, 황산벌 싸움의 계백장군과 5천 결사대! 왜적들을 물리친 권율, 이 순신, 사명대사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았던 수많은 구국의 영웅들 이야기는 어린 새가슴을 벅차게 하였다. 평화(平和)를 사랑하는 백의민족(白衣民族)! 그 땅 역시 온순(溫順)한 토끼의 모습과 흡사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성년(成年)이 되어가면서 조선(朝鮮)의 역사가 무언가 이상하지 않은가? 그러나 그 근거(根據)가 없지 않은가? 탐구열 하나만 가지곤 해결(解決)할 수 없었다.
그 제서야 눈을 떠 대만(臺灣)과 대륙(大陸)의 원전(原典)에 관심(關心)을 갖게 되었다. 또한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절요 등의 원문(原文)과 해설(번역)본을 갖고 대조해보기 시작했다. 그 후 대륙의 원전(原典)을 보면서............말하지도 않아도 다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반도사관(半島史觀)과 식민사관(植民史觀)!!!!!!!!!!!!!!!초등학교로부터 그 이후의 모든 교육은 바로 반도사관(半島史觀)과 식민사관(植民史觀)의 세뇌(洗腦)였다. 대부분의 것들이 일제(日帝)의 통치시절에 식민지(植民地) 백성(百姓)들을 지배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그들과 그들의 하수인들이 만들어 놓은, 그것을 복사(複寫)하여, 만들어 놓은 소위 교과서(敎科書)와 참고서(參考書)로 선생님들은 가르치고, 학생들은 배워, 뇌(腦)속에는 온통 그 영상(映像)만이 가득할 뿐, 다른 사고(思考)를 할 수 있는 뇌세포는 없었다. 대만(臺灣)에서 출판된, 대륙(大陸)에서 나온 원전(原典)을 보기 전(前) 까진 말이다.
인터넷 뉴스에 요약된 몇 가지를 살펴보자.
㈠ 『숙신(肅愼)』에 대해여, 설명하시기를 ; 【숙신은 한(漢)나라 이전에는 허베이(하북) 지역과 남만주 지역에서 나타나고, 한 이후에는 만주와 한반도에서 나타난다. 이는 고조선의 영역과도 일치한다. 고조선 기원을 연구했던 러시아의 “L. R. 콘제비치”도 한국의 역사적 명칭에서 “사료에 나타나는 고대 조선족과 숙신족의 인구 분포가 지리적으로 서로 일치하고, 숙신과 조선족의 종족 형성 과정이 유사하며 새를 공동 토템으로 가지고 있으며 두 민족 모두 백두산을 민족 발상지로 보고 있다”는 점 등을 토대로 조선이라는 말이 숙신에서 나왔다고 했다. 그러므로 숙신의 역사를 바탕으로 보면, ➡➊ 고조선은 전설의 시대부터 역사에 뚜렷이 존재해온 민족이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고조선은 은나라의 방계 국으로 주나라 초기에는 사신을 보낼 만큼 일정한 국체를 가졌으며, 황하 유역 이북을 지배하다 은나라 멸망 후 은의 유민과 결합해 보다 확대된 고조선을 건설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초기 고조선의 모습이다. 숙신과 조선이 동계(同系)라는 점을 대표적 선각인 신채호도 지적했다. 신 채 호는 “발 숙신(發 肅 愼)이 발조선(發 朝鮮) 대신 사용되었기 때문에 ‘조선=숙신’인데, 만주원류 고에서 건륭대제가 숙신의 본음을 주신(珠申)으로 인정하였기 때문에 조선의 음도 결국은 주신이 된다.”고 했다. 고대 문헌에서는 조선·숙신·식신 등이 구분 없이 사용되고 있어 ‘조선=숙신=식신’이라고 봐야 한다. ➡➋ 그러나 고조선 연구에서 더 중요한 부분은 숙신(肅愼)이다. 고조선 그 자체이거나 고조선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숙신은 물길(勿 吉)· 말갈(靺鞨) 등으로 불리다 후일 여진족·만주족이 됐다고 알려져 있지만 조선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삼국지에는 “정시(240~248) 때 위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하자 고구려왕 궁(동천 왕)은 매 구 루(買 溝 婁)로 달아났고, 관구검은 현도태수 왕기를 파견해 추격하게 했는데 옥저를 1000여 리 지나 숙신 씨의 남쪽 경계에까지 이르렀다(<6BCC>丘 儉 傳)”고 나온다. ➡➌ 옥저는 현재 함흥· 신포지역, 매 구 루는 현재 원산에 가까운 문 천이다. 그러므로 숙신 씨의 남방 한계선은 최소 금강산 일대 또는 강릉까지로 추정할 수 있다. 당시 위나라에서는 한반도를 숙신의 나라 가운데 남부 지역으로 지칭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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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와 같은 조선(朝鮮)의 고대사(古代史) 설명은 다른 것은 제쳐두고라도 “반도(半島)에 그 목적지(目的地)가 정해져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반도(半島)에 모든 것이 맞춰져 있다. 본인은 여기서 몇 가지 사항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가 없다. 곧,
➡➊ 【고조선은 전설의 시대부터】 라는 말에서 “전설(傳說)”이란, 『전부터 전(傳)하여 오는 이야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고조선(古朝鮮)을 개국(開國)시킨 “단군(檀君)”은 정사(正史)로써의 역사(歷史)가 아닌 전설상의 인물(人物)인 것으로 묘사(描寫)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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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➋ 【그러나 고조선 연구에서 더 중요한 부분은 숙신(肅愼)이다.】 라고 하셨다. 만약 이 분이 고조선(古朝鮮)연구에 더 중요한 부분이 “숙신(肅愼)”이라고 했을 때, 산 해 경(山海經)에 기록된 내용은 뭐란 것인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산 해 경(山海經)”의 숙신(肅愼)에 대한 원전(原典)기록을 보자!!!!!!!!!!!!!!!!!!!!!!!! 『숙신(肅愼)』에 관한 내용은 <山 海 經 第 七. 海 外 西 經> 편에 있는데, 해외서경(海外西經)의 방향(方向)은,
ⓐ 【<本文> : 海 外 自 西 南 陬 至 西 北 陬 者 1. 라 하여 “서남(西南)구석으로부터 서북(西北)구석까지”를 말하고 있다. <주석(註釋)>을 보면 : 1 畢 沅 云 : 淮 南 子 墬 形 訓 云 : 自 西 北 至 西 南 方 , 起 修 股 民 肅 慎 民 , 此 文 正 倒 。: “필원”이 말하기를, 회남자(淮南子)전 지형 (墬 形)훈에서 이르기를, “서북(西北)으로부터 서남(西南)방에 이르는데, 수 고 민(修 股 民), 숙신 민(肅愼 民)이 일어났다. 이 글은 거꾸로 이다(정반대라는 뜻). 知 此 經 是 說 圖 之 詞 , 或 右 行 則 自 西 南 至 西 北 起 三 身 國 , 或 左 行 則 自 西 北 至 西 南 起 修 股 民 。 是 漢 時 猶 有 山 海 經 圖 , 各 依 所 見 為 說 , 故 不 同 也 。: 이 경을 설명한 그림의 말씀에, 혹 우행 측의 서남으로부터 서북에 이르기까지 삼신(三 身)국이 있어났다. 혹은 좌 행 측의 서북으로부터 서남에 이르러 수고민이 일어났다. 때 한나라 때의 산해 경 그림에 따르면, 각각의 소견에 따라 설이 있어, 본래 같지 않다.】
● <수고 민(修股民)과 숙신 민(肅愼民)은 본시 서남(西南)방에서 서북방에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다만 정반대라는 것은 『수고 민과 숙신 민』중에서 어떤 나라가 먼저 서남쪽에서 일어났는가? 하는 정도일 뿐이다. 반도사관(半島史觀)과 식민사관(植民史觀)에서는 반도(半島) 동북방의 현 ‘길림성’과 ‘흑룡강 성’ 쯤에 있었다고 하는데, 여기에 “알파”를 더하여 『반도가 숙신의 남부지방』이라고까지 한다면, 산해 경(山海經)을 기록한 중심지가 현 열도(列島)의 대판(大阪:오사카)이나 구주(九州)쯤 되었다는 것인가?
ⓑ 【肅 慎 之 國 1 在 白 民 北 : 有 樹 名 曰 雄 常 , 先 入 伐 帝 , 于 此 取 之 。: 숙신(肅愼)의 나라는 백민(白民)의 북쪽에 있으며, 】 라 하였는데, <주석(註釋)>을 보면 :1 珂 案 :大 荒 北 經 云 :大 荒 之 中, 有 山 名 曰 不 咸. 有 肅 慎 氏 之 國. 淮 南 子 墬 形 篇 有 肅 慎 民, 周 書 王 會 篇 云 :稷 慎 大 麈. 孔 晁 注 云 :稷 慎, 肅 慎 也. : 가【珂 : 원가(袁珂)를 말한다.】상고하면 : 대 황 북경(大 荒 北 經)에서 이르길 : 대 황(大 荒) 가운데, 불 함 산(不 咸 山)이 있고, 숙신(肅愼)씨 나라가 있다. 회남자 지형 편에, 숙신(肅愼)민이 있는데, 주서(周 書) 왕 회 편에 이르기를 : 직신(稷愼)의 속사며, 공조(孔 晁)의 주(注)에서 이르기를 : “직신(稷愼)은 숙신(肅愼)이다.”라 하였다.
▣ 위의 말처럼 “대 황 북경(大荒北經)”에 『불 함 산(不咸山)과 숙신 국(肅慎 國)이 있다.』고 했다면, 대 황 북경(大荒北經)지방이 반도(半島) 동북(東北)방이란 말인가?
▣ 대 황 북경(大荒北經)이라면 분명 산해 경(山海經)의 중심에서 북쪽의 아주 먼 거칠고 황폐한 땅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곳이 반도(半島)나 그 북방지대라면 산해경의 중심지는 열도(列島) 또는 반도(半島) 남해(南海) 바다 깊은 곳의 용궁(龍宮)속이리라!
ⓒ <本文> : 女 子 國 1 在 巫 咸 北 ,兩 女 子 居 ,水 周 之 。一 曰 居 一 門 中. : 여자국은 무함의 북쪽에 있는데, 양쪽에 여자가 살고 있으며, 이들은 물 주위이다. 이중 하나는 한 문중에 살고 있다.
<주석(註釋)> :1 珂 案 : ➡ 淮 南 子 墬 形 篇 有 女 子 民 。大 荒 西 經 云 : 有 女 子 之 國 。 三 國 志 魏 志 東 夷 傳 云 :( 沃 沮 ) 耆 老 言 : 有 一 國 亦 在 海 中 , 純 女 無 男 。 後 漢 書 東 夷 傳 云 : 或 傳 其 國 有 神 井 , 窺 之 輒 生 子 。即 此 類 也 。 : <원가(袁 珂)가 상고하기를, 회남자 지형 훈(墬 形 訓)에 『여자 민』이 있으며, 대 황 서경(大荒西經)에 여자 국(女子 國)이 있다. 삼국지 위지(魏志) 동이(東夷)전에 의하면, 『옥저(沃沮)』의 나이 많은 노인(현인)이 말에 따르면, 『한 나라가 바다 가운데 있으며, 남자(男子)는 없고, 여자(女子)만 있다.』고 하였다. 후한서(後漢書) 동이(東夷)전에 따르면, 혹 전하는 말로는 그 나라에 ‘신정(神井)’이라는 샘이 있는데, 그곳을 몰래 엿보니 곧 아이가 태어났는데, 곧 이 종류이다.
▣ 위 주석(註釋)은 < 산해 경(山海經) 해외서경(海外西經)>편이다. 산해경은 누가 언제 어떻게 써진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는 말이다. 수천 년 전(前)에 써진 기록에 “곽 박”이 주석(註釋)을 하여 오늘날에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을 뿐이다.
위 “대 황 서 경“ 은 방위로 보면 <서남(西南)지역으로부터 서북(西北)지역까지>라고 설명하고 있다. 《 이곳에 <여자 국>이 있는데, 이에 대한 것은 옥저(沃沮)의 나이 많은 노인 또는 현인(耆老)들에 의해 알려졌다. 》는 것이다. 이는 대륙(大陸)사에서 근거한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대륙의 산해 경(山海經) 중심지에서 『서남(西南)에서 서북(西北)』방향의 아주 먼 곳(海外)에 『여자들만이 사는 나라』가 있었으며, 이러한 나라에 대한 지식은 『옥저(沃沮)』의 현인들로부터 전해 들었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잘 생각해 보면, 옥저(沃沮)란 나라는 산해 경(山海經) 중심에서 볼 때 『서쪽지방 아주 먼 곳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조선(朝鮮)의 일원(一員)이었던 “옥저(沃沮)”는 현 대륙의 감 숙성(甘肅省) 동쪽지방에는 없었다는 이야기다.
대륙(大陸)왕조일 경우, 당연히 서역(西域)지방을 제후국(諸侯國)으로 다스렸다는 기록이 수없이 많으니, 그곳 지방 또는 그 서쪽지방의 지식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서역(西域)지방에 살고 있던 자들이 가장 잘 알 수 위치에 있었다. 이러한 정보(情報)를 일만(一萬) 수천(數千)리도 넘는 위치에 있었던 반도(半島) 옥저(沃沮)의 현인(賢人)들로부터 들었다는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동이(東夷)전의 내용은 한 마디로 무식(無識)의 극치(極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옥저(沃沮)”를 《대륙(大陸)의 서쪽으로 옮겨 놓으면》,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동이(東夷)전의 내용은 정사(正史)로써의 값어치를 제대로 끌어 올릴 수 있는 고전(古典)이 될 수 있다.
(3) 山 海 經 海 經 新 釋 卷 十 二 . 山 海 經 第 十 七 . 大 荒 北 經
<本文> : 大 荒 之 中 , 有 山 , 名 曰 不 咸 。 有 肅 慎 氏 之 國 1 。 有 蜚 蛭 , 四 翼 。 有 蟲 , 獸 首 蛇 身 , 名 曰 琴 蟲 。: 대 황(大荒)의 땅 가운데 “불 함”이란 산이 있다. 숙신(肅愼)씨의 나라가 있다. 바퀴벌레와 거머리(蛭)가 있는데 네 개의 날개가 있다. 벌레가 있는데, 머리는 짐승이며, 몸은 뱀인데, 이름이 “금충”이다.
<주석(註釋)> :1 郭 璞 云 : 今 肅 慎 國 去 遼 東 三 千 餘 里 , 穴 居 , 無 衣 , 衣 豬 皮 , 冬 以 膏 塗 體 , 厚 數 分 , 用 卻 風 寒 。 其 人 皆 工 射 , 弓 長 四 尺 , 勁 彊 。: 곽박이 이르기를 : 숙신국은 요동에서 3천리를 가야하며, 굴속에서 살고, 옷이 없어, 돼지가죽을 입는다. 겨울에는 몸에 기름을 바르고 두텁게 하여, 후 수분동안 바람과 추위를 물리친다. 그 사람들은 화살과 활을 만드는데 활 길이가 4척이요, 단단하고 강건하다. 箭 以 楛 ( 宋 本 楛 下 有 木 字 — — 珂 ) 為 之 , 長 尺 五 ( 藏 經 本 五 作 八 — — 珂 ) 寸 , 青 石 為 鏑 , 此 春 秋 時 隼 集 陳 侯 之 庭 所 得 矢 也 。晉 太 興 三 年 平 州 刺 史 崔 毖 遣 別 駕 高 會 , 使 來 獻 肅 慎 氏 之 弓 矢 , 箭 鏃 有 似 銅 骨 作 者 。 問( 藏 經 本 問 下 有 之 字 , 是 也 — — 珂 )云 , 轉 與 海 內 國 , 通 得 用 此 。 今 名 之 為 挹 婁 國 , 出 好 貂、 赤 玉 。 豈 從 海 外 轉 而 至 此 乎 ? 後 漢 書 所 謂 挹 婁 者 ( 宋 本 、 吳 寬 抄 本 者 作 國 — — 珂 ) 是 也 。 」 郝 懿 行 云 : 肅 慎 國 見 海 外 西 經 。: 학의행에 따르면 : 숙신국은 해외서경에 있다. 郭 說 肅 慎 本 魏 志 東 夷 傳, 但 傳 本 作 『用 楛 長 尺 八 寸 』 , 與 郭 異 , 餘 則 同 也 。 今 之 後 漢 書 , 非 郭 所 見 , 而 此 注 引 後 漢 書 者 , 吳 志 嬪 妃 傳 云 : 『 謝 承 撰 後 漢 書 百 餘 卷 。 』 其 書 說 挹 婁 ,即 古 肅 慎 氏 之 國 也 。 隼 集 陳 侯 之 庭 , 魯 語 有 其 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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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➌ 【옥저는 현재 함흥· 신포지역, 매 구 루는 현재 원산에 가까운 문천이다. 그러므로 숙신 씨의 남방 한계선은 최소 금강산 일대 또는 강릉까지로 추정할 수 있다. 당시 위나라에서는 한반도를 숙신의 나라 가운데 남부 지역으로 지칭한 것이다. 】라고 아주 자위적인 표현이며, 원전을 자신의 논리 위주로만 설명하고 있다.
【참고】산해 경(山海經)을 보자. 산해 경(山海經)을 주석(註釋)한 곽박(郭璞)이란 학자는 『대륙의 서진(西晉) 말에서 동진(東 晉) 초의 학자이며, 관리 및 시인(276~324)으로 알려져 있으며, 산해 경(山海經)외에도 목 천 자 전(穆天子傳), 초사, 이아(爾雅) 등의 주석(註釋)으로도 유명한 사람이다.
<본문> : 蓋 國 1 在 鉅 燕 南 , 倭 北 。 倭 屬 燕 。: 개국(蓋國)은 거연(鉅燕)의 남쪽에 있으며, 왜(倭)의 북쪽에 있다. 왜는 연(燕)에 속하였다.
<註釋> : 1 郝 懿 行 云 : ( 三 國 志 ) 魏 志 東 夷 傳 云 : 東 沃 沮 在 高 句 麗 蓋 馬 大 山 之 東 。 後 漢 書 東 夷 傳 同 。 李 賢 注 云 : 蓋 馬 , 縣 名 , 屬 玄 菟 郡 。 今 案 蓋 馬 疑 本 蓋 國 地 。: 학의행【청(淸)의 학자(1757-1825)】 이 이르기를 : (삼국지) 위지(魏志) 동이(東夷)전에 따르면 : 동옥저(東沃沮)는 고구려(高句麗)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쪽에 있다. 후한서(後漢書) 동이(東夷)전과 같다. 이 현(李 賢)의 주(注)에 따르면 : 개마(蓋馬)는 현(縣)의 이름으로, 현토(玄菟)군에 속해있다. 이에 상고하면, 개마(蓋馬)는 본래 개국(蓋國)의 땅이 아니었을까 의심스럽다.
▣ 위 주석(註釋)에 후한서(後漢書) 동이(東夷)전과 같다(同)고 하였으니, 후한서(後漢書) 동이(東夷)전 동옥저(東沃沮) 본문을 보자. <東沃沮,在高句麗蓋馬大山之東,蓋馬縣名屬玄菟郡,其山在今平壤城西,平壤卽王儉城也. : 동옥저는 고구려의 개마대산 동쪽에 있다. 개마는 현의 이름으로 현토(玄菟)군에 속했다. 그 산(즉 개마대산)은 지금 평양성(平壤城)의 서(西)쪽에 있다. 평양(平壤)은 즉 왕검성이다.>라 하였다.
▣ 조선(朝鮮)사를 말할 때, 사기(史記).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 삼국지(三國志)위지(魏志) 또는 산해 경(山海經)등을 잘도 인용(引用)하면서 왜 지리(地理), 지형(地形)적인 면을 쏙 빼놓고 설명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어떤 지리적인 면이, 어떤 지형적인 면이 반도(半島)와 어울리는지를 살펴보라!!!!!!!!!!!!!!!!!!!!!!!!!평양(平壤)이 반도 북부지방에 있다. 평양(平壤)을 중심으로 놓고 위의 후한서(後漢書)기록을 살펴보라. 산해 경(山海經)기록을 살펴보라. 이렇게 답답한 일이 또 있을까??????????????????
㈡ 청(淸)나라 학자인 “호위(胡 渭)”의 “우공추지(禹 貢 錐 指)”를 인용하면서, 【청나라 고증학자 호위(胡 渭)는 우공추지(禹 貢 錐 指)에서 “산동 반도는 요(堯) 임금 때부터 조선의 땅”이라고 썼다. 사기에 “요(堯)임금은 의중을 시켜 우이(<5D4E>夷:또는 욱 이[郁 夷])의 땅, 즉 해 뜨는 곳(양곡·暘谷)에서 일출을 경건히 맞게 하였다(卷1 五帝本紀 堯)”고 하는데 주석에 “우이(<5D4E>夷)의 땅은 청주(靑 州)”라고 했다. 청주는 현재의 산동 반도다. 이 기록은 서경(書經) 요전(堯 典)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우이는 누구인가. 우공추지에 “동이 9족은 우이이고, 우이는 조선의 땅(四庫全書. 經部. 禹 貢 錐 指 4卷)”이라고 했다. 나아가 사기에서 “양곡은 바로 해 뜨는 곳(日 所 出 處 名 曰 陽 明 之 谷)”이라고 한다. 양곡을 매개로 산둥반도=양곡=조선의 관계가 성립하는 것이다. 일단 이 기록이 고조선과 관련된 가장 오래된 시기, B. C 2400년경의 기록이다.】라 설명하고 있다.
● 山 海 經 海 經 新 釋 卷 四. 山 海 經 第 九. 海 外 東 經 : 海 外 自 東 南 陬 至 東 北 陬 者 。: 산해 경 해경 신석 권 4 . 산해경제9. 해외동경 : 해외의 동남(東南)구석으로부터 동북(東北)구석까지이다.
<본문> : 下 有 湯 谷 1 。 湯 谷 上 有 扶 桑 2 , 十 日 所 浴 3 , 在 黑 齒 北 。 居 水 中 , 有 大 木 , 九 日 居 下 枝 , 一 日 居 上 枝 4 。: 아래에 탕 곡(湯谷)이 있고, 탕 곡(湯谷) 위에 부상(扶桑)이 있으며, 10일을 가면 소욕(所浴)이 있다. 흑치(黑齒)의 북쪽에 있다. 물 가운데 살아가는데, 큰 나무가 있어, 9일은 아래 가지에 살고, 1일은 가지 위에서 산다.
<註釋> : 1 郭 璞 云 : 谷 中 水 熱 也 。 珂 案: 湯 谷 , 或 作 暘 谷 ; 淮 南 子 天 文 篇 : 日 出 于 暘 谷 , 浴 于 咸 池 。 書 堯 典 ; 分 命 羲 仲 , 宅 嵎 夷 , 曰 暘 谷 。 史 記 五 帝 本 紀 作 暘 谷 。 索 隱 云 : 史 記 舊 本 作 湯 谷 , 又 引 淮 南 子 舊 本 亦 作 湯 谷 。(中略) : 곽박(郭璞)에 따르면 : 골짜기 속의 지열이 나는 곳의 더운 물이다. 원가(袁珂) 안(案) : 탕 곡(湯谷)은 혹 양곡(暘谷)이다. 회남자 천자 편에, 태양이 떠오르는 곳이 양곡이며, 욕(浴)은 함지(咸池)에서 행한다. 서 요전(書 堯 典) : <分 命 羲 仲 , 宅 嵎 夷 , 曰 暘 谷>이라 하였다. 사기오제본기에는 양곡(暘谷)이다. 색은(索 隱)에 따르면, 사기의 옛 본 책에는 탕 곡(湯 谷)이다. 또 인용한 회남자의 옛 본 역시 “탕 곡(湯 谷)”이다. (중략).
▣ 위의 구절에서 인용한 <書 堯 典 ; 分 命 羲 仲 , 宅 嵎 夷 , 曰 暘 谷>중에서 <우이嵎夷>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산해 경으로부터 나온 설명이니, 우이(嵎夷)를 설명하기 전에 우이(嵎夷)와 함께했던 래 이 (萊 夷) 먼저 설명하면서 본론으로 들어가 보겠다.
(1) 우선 <산해 경(山海經) 서산 경(西 山 經)> 기록 중에서 <萊 山 = 來 山>부터 알아야 다음 내용을 설명할 수 있다. 《又 西 三 百 五 十 里, 曰 萊 山 ,其 木 多 檀 楮 ,其 鳥 多 羅 (羅),是 食 人 : 또 서쪽 350 리에 래 산(萊 山)이 있다. 그곳에는 박달나무와 닥나무가 많고, 그곳에는 새와 라라 (羅羅?)가 많은데, 사람의 고기를 먹는 일을 옳게 여겼다.》라 하였다.
“서 산 경”을 보면 ; 즉 섬서(陝西)성 화음 현 서남(西南)에 있는 서악(西 岳)이라 칭하던 <화산(華山)>을 설명하고 있으며, 또 <파 총 산>으로부터 서쪽으로 200 리 지역에 <용 수 산>이 있으며, 이곳으로부터 서쪽으로 200 리를 가면 <록 대 산>이 있고, <옥 대 산>으로부터 서남쪽으로 200 리를 가면 <조위산>이 있고, 서쪽으로 400 리를 가면 <소 차 산>에 이르고 또 서쪽으로 300 리를 가면 <대 차 산>에 이른다. 또 서쪽으로 400 리, 또 서쪽으로 400 리, 또 서쪽으로 250 리, 또 서쪽으로 500 리를 가면 <황 인 산>이 있다. 이곳에는 청 웅 황【주 : 감 숙성 계주의 산중에 있다】 이 있으며, 황수가 발원하여 서쪽으로 흘러 “적수”에 들어간다. 또 서쪽으로 300 리를 가면 <중 황산>이 있고, 또 서쪽으로 350 리를 가면 <서 황 산>이 있다. 이곳으로부터 또 서쪽으로 350 리를 가면 『래 산 (萊 山)』이 있다. 【현 대륙의 화산(華山)이 산해 경(山海經)에 기록된 화산(華山)이라고 했을 때를 말하는 것이다.】
(2) 결국 화산(華山)으로부터 서(西)쪽으로 약 2,000-3,000 리쯤 떨어져 있던 곳에 “래 산 萊 山”이 있었다는 말이며, 이 ‘래 산’은 바로 <래 산 국(萊 山 國)=래 자 국>이 있었던 곳에 있었으며, <래 산 국>이라는 나라의 이름은 <래 산>이라는 산의 이름으로부터 유래(由來)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연燕이라는 국가의 명칭이 연 나라에 “연산燕山”이라는 산이 있어 이 산의 이름을 취하여 나라 이름으로 하였다는 사기의 기록을 볼 수 있다】 결국 <래 산>이 있었고, 이 산 주위에 ‘래 산국’이 있었으며, 이곳 즉 “래 산 국 = 래 자 국” 지역이 후대에 “래 주(萊 州)”가 되었던 것이다. <“래 주”는 산동 성 바닷가 지역에 있다.> 고 역사를 해설하고 있으나, 이는 20세기 이후의 역사 해설일 뿐이다.
(3) 그렇다면 아래의 우이(嵎夷)와 래 이(萊 夷)의 기록을 보면서 다시 한 번 그려보고 생각해 보자.
● 우이(嵎 夷)와 래 이(萊 夷)...............사기(史記) 및 기타 사서(史書)를 보면 北狄북적, 山戎산융등에 대해 대륙(大陸)의 사가(史家)들이 설명한 것을 보면 “이들은 모두 鮮卑선비이다” 라 설명하고 있다. 선비(鮮卑)는 동호東胡이며, 동이東夷이다. 또한 이들은 <요동군공>을 역임했고 <조선(朝鮮)왕>을 역임했다. 東夷동이라 해서 특별히 하늘에서 떨어진 종족(種族)들은 결코 아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를 보더라도 중국(中國)의 북지(北地)에서 점차 동쪽으로 이주(移住)했다고 써져 있다. 중국(中國)의 북지(北地)가 ‘하 북 성’이나 ‘동북삼성의 북쪽’이라는 뜻은 근대 즉 20 세기 이후의 해설일 뿐, 옛 역사서에 기록되어진 것은 결코 아니다. 간단히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사기(史記)>에 기록되어진 해설자들의 설명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㈠ 集 解 孔 安 國 曰 : 北 稱 幽 都, 謂 所 聚 也. : 집해 ‘공 안 국’에 따르면 ; 북쪽을 칭하는 것이 유도(幽都)이며, 이곳으로 모이는 것을 이른다.
㈡ 索 隱 山 海 經 曰 : 北 海 之 內 有 山 名 幽 都, 蓋 是 也. ; 색은 산해 경에 따르면 ; 북해(北海)의 안(內)에 유도(幽都)산이 있다. 모두 옳다.
㈢ 正 義 案 : 北 方 幽 州, 陰 聚 之 地, 命 和 叔 居 理 之。北 方 之 官, 若 周 禮 冬 官 卿。: 정의를 상고하면 ; 북방의 유주(幽州)는 모두 모이는 음(陰)이다. ‘화숙(和 叔)’이 살면서 다스린 곳이며, 북방의 벼슬아치며, 주례(周禮)의 ‘동 관 경(冬 官 卿)’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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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嵎夷(우이)........ 嵎夷(우이)에 대해서는 여러 해설(解說)들이 있기 때문에 모두를 알아보자.
❶ 孔 傳(공전)에는 東 表 之 地 稱 隅 夷 즉 동쪽의 땅을 지칭하며,
❷ 釋文(석문)에는 隅(우)는 海 隅(해우) 즉 바닷가 또는 하河, 夷는 萊 夷(래 이)를 뜻한다고 하며,
❸ 후한서동이전 속의 구이 중 陽 夷양이 즉 暘양을 의미한다고 하며,(暘 : 해 돋는 동쪽을 뜻함) <여기서 胡 渭(호위 : 역사학자)는 朝鮮(조선)을 지칭한다고 해설하고 있다. 그러나 그 조선이 한반도 또는 동북삼성이라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❹ 說文에는 隅 山(우산)은 遼 西(요서)지역에 있다 했으며, 曰(왈) 隅 銕우이, 暘谷양곡이라 했고,
❺ <薛 土 龍 書 古 文 訓>에는 嵎夷우이는 海 隅 諸 夷(해우제이), 今 登 州(등주)라 했고, 【이곳의 海는 바다를 의미한다고 하는 것은 현대의 일이다.】
❻ 東 坡 書 傳(동파서전)에는 當 在 東 方 海 上(동방해상)이라 했다.
▣ 위의 설명을 알기 쉽게 풀어보자.........양(暘:해돋이 양)은 결국 “해 돋는 동쪽지방”을 말하고, 그 “해 돋는 동쪽에 조선(朝鮮)이 있었다.”는 말이다. “우이(隅 夷)”는 즉 “양곡(暘谷)”이다. 『우산(隅 山)은 요서(遼 西)에 있으며, 우산(隅 山)지역에 사는 이(夷)들을 동이(東夷)라 했고, 우이(嵎夷=隅 夷)라 했으며, 이곳이 양곡이란 말이다.』 양(暘)은 결국 <해 돋는 동쪽을 말하고, 그 해 돋는 동쪽지방에 “조선(朝鮮)”이 있었다.>라는 것이다. 위의 설명을 보면, 요서(遼 西)지역에 우산(隅 山 = 嵎 山)이 있고, 우산을 중심으로 사는 夷 族(이족)들이 우이嵎 夷 = 隅 夷였으며, 우이(嵎夷)는 바로 “조선(朝鮮)”이었다는 말이다.
● 萊 夷래이는 우공서(禹貢書)를 보면, <萊 夷 作 牧>이라 했으며, <호위우공추지(胡渭禹貢錐指)>를 보면 《今 登 州, 萊 州 之 地, 皆 禹 貢 萊 州 之 地, 三 面 濱 海, 皆 爲 斥 鹵, 五 穀 不 生.(중략).亦 稱 萊 子 國.》이라 했다. 이를 올바르게 번역하면 ; 【‘등주, 래 주’는 모두 우공의 ‘래 주’ 땅이다. 삼면이 바다(해?)에 붙어있다. 이 지역 모두는 소금기가 땅위에 드러나는 곳으로 오곡(五穀)이 자라지 못한다. 이곳이 ‘래 자 국’이다. 】 여기서 우공서(禹貢書)에 기록되어 있는 <萊 夷 作 牧(래 이 작 목)> 이라는 글귀를 되새겨 보면 “래이(萊夷)” 들의 땅이 척박하고 염기가 있어 농사는 지을 수 없는 곳이기 때문에, 축목(畜牧) 즉 가축을 기르며 살아가는 유목(遊牧)민들이라는 말이다. 현재의 역사 해설대로 산동(山東)성 해안가 래주(萊州) 또는 등주(登州)에 위의 기록을 대입해보면 황당(荒唐)한 이야기가 되어 버린다. 산동(山東)성 해안가를 삼면(三面)이 바다라는 것은 이곳의 지리적인 모양새를 본다면 웃기는 일이며, 여기서 鹵(로)는 해안가 하고는 상관이 없는 西方(서방) 염지 로(鹵)이다. 즉鹵(로)는 내륙(內陸)지대에서 산출(産出)되는 소금을 말하는 것이다. 오곡(五穀)불생(不生)이라면 산동(山東)성 래 주, 등주지역이 오곡(五穀)이 자라지 않는 불모지(不毛地)란 말인가?
▣ 서방 염지 로와 萊 夷(래 이)는 牧(목)이라는 해설을 덧붙인다면, 서방지역의 鹵(로)와 畜牧(축목)을 생으로 하는 隅 山(우산)지역에 터를 잡았던 동이族(족)을 말하는 것이다.
○ 또 嵎 夷(우 이)에 대해 아래의 <후한서와 사기 오제본기> 기록을 보자.
後 漢 書(후한서) 卷 十 一 . 劉 玄 劉 盆 子 列 傳 第 一 : (中略).( 得 )〔 後 〕 二 十 餘 日 , 赤 眉 貪 財 物 , 復 出 大 掠。 城 中 糧 食 盡 , 遂 收 載 珍 寶 , 因 大 縱 火 燒 宮 室 , 引 兵 而 西 。 過 祠 南 郊 , 車 甲 兵 馬 最 為 猛 盛 , 眾 號 百 萬 。 盆 子 乘 王 車 , 駕 三 馬 ,從 數 百 騎 。 乃 自 南 山 轉 掠 城 邑 ,與 更 始 將 軍 嚴 春 戰 於 郿 , 破 春 , 殺 之 , 遂 入 安 定 、 北 地。 至 陽 城 、 番 須 中 , 逢 大 雪 , 坑 谷 皆 滿 , 士 多 凍 死 , 乃 復 還 , 發 掘 諸 陵 , 取 其 寶 貨 , 遂 汙 辱 呂 后 屍 。 凡 賊 所 發, 有 玉 匣 殮 者 率 皆 如 生 ,故 赤 眉 得 多 行 婬 穢 。 大 司 徒 鄧 禹 時 在 長 安 , 遣 兵 擊 之 於 ➡郁 夷 ,{三} 反 為 所 敗, 禹 乃 出 之 雲 陽 。 九 月 , 赤 眉 復 入 長 安 , 止 桂 宮 。〔 四〕
注〔 三 〕 ➡ 郁 夷, 縣, 屬 右 扶 風 也 。: 욱 이(郁 夷)는 현(縣)으로, 우부풍【右扶風 : 섬서(陝西)성 장안(長安) 서쪽지방에 있으며, 전한(前漢)의 무제(武帝)때 설치한 “3보”중의 하나였다. 장안(長安)을 중심으로, 좌풍익(左馮翊)우부풍(右扶風)이라 하였다. 】에 속하였다.
● 만약 우이【 隅 夷는 욱 이 (郁 夷)와 같다. 】가 현 산동(山東)성 지역에 있었다고 했을 때 옛 기록에 따라 보면 ; 산동(山東)성 ‘래주’나 ‘등주’지방이 우부풍(右扶風)에서 관할(管轄)하는 현(縣)이라는 말이 되는데, 이러한 역사(歷史) 전개(展開), 또는 지리적 배치는 존재할 수 없다. 즉 우부풍(右扶風)은 중원(中原) 황도(皇都)의 서쪽지방의 가장 중요한 요새(要塞)지역으로 이곳은 삼보(三輔)중의 하나로서 강력한 이민(移民)족들의 침략(侵略)과 약탈(掠奪)에 대비하여 왕조(王朝)의 정예(精銳)병들이 항시 주둔(駐屯)하고 있었던 곳이다. 욱 이 (郁 夷)는 전한(前漢)과 후한(後漢)시절에 이러한 곳의 우부풍(右扶風)에서 다스리던 속현(屬縣)이었다. ➡➡이러한 『<욱 이 (郁 夷)현은 바로 우이(嵎夷)현>이었다.』
● 역사(歷史)란 흘러가는 물과 같다. 흐르는 물줄기가 낮은 곳을 향해 흐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태고(太古) 적부터 이러한 자연 법칙은 21세기라고 해서 예외(例外)일 수 없다. 그러나 조선(朝鮮)의 역사(歷史) 현장(現場)에서는 이렇게 낮은 곳을 향해 흘러가는 물줄기가 갑자기 거꾸로 높은 곳을 향해 흐른다. 물줄기가 높은 곳으로 흘러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인위적(人爲的)으로 인간(人間)이 수로(水路)를 만들고 물을 끌어 올릴 수 있는 기계(器械)를 사용해야 가능하다. 이처럼 조선(朝鮮)의 역사 역시 자연스럽게 인간(人間)이 이해(理解)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함에도 인위적(人爲的)으로 특정(特定) 집단(集團)의 인간(人間)들에 의해 기계적(機械的)으로 왜곡(歪曲), 조작(造作)한 것이기 때문에 자연(自然)의 법칙(法則)이 통하지 않는 눈에 보이지 않고, 만물(萬物)을 창조(創造)했다는 신(神)들의 이야기처럼 해설(解說)되어 전설(傳說)로 치부되어 버린다.
● 사기 오제 본기 편을 보면 ;
<史 記> ; <堯 命 “義 仲” 居 郁 夷> 五 帝 本 紀.
<集 解> ; “駰” 案, 郁 夷, “尙 書” 作 “嵎 夷.” 孔 安 國 曰, 東 表 之 地 稱 (嵎 夷).
<索 隱> ; 郁 夷 亦 地 之 別 名 也. (五 帝 本 紀) 嵎 夷, "今 文 尙 書 及 帝 命 驗 竝 作“. “禺 銕”, 在 遼 西. “銕” 古 “夷”字 也.
<正 義> ; 禹 貢 靑 州 云. 嵎 夷 旣 略. 按, 嵎 夷, 靑 州 也. (五 帝 本 紀)
➡ 곧(卽) 《郁 夷(욱 이)는 嵎 夷(우 이)다.》
○ 郁 夷(욱 이)縣 = 嵎 夷 縣(우 이 현)은 섬서(陝西)성 장안(長安) 서쪽 우부풍(右扶風)의 속현이었다. 즉 <욱 이(郁夷)>는 “상서(尙書)”에서 말하는 <우이(嵎夷)>인데, 이 말은 동쪽의 땅을 지칭하는 말로써 또한 그곳의 땅 이름이라는 말이다. 즉 욱 이【郁夷)=우이(嵎夷)】로써 동쪽의 땅을 말하는데, 이곳은 우부풍(右扶風)지역에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즉 당시(當時)의 동쪽지방은 우부풍(右扶風)의 속현인 욱 이 (郁夷)지역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 당시(當時) 이 기록(記錄)을 남긴 분은 최소한 신강(新疆)성 지방이나 그 동쪽 돈 황(燉煌) 쯤에서 중심【산해 경(山海經), 사기(史記),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등을 편찬, 또는 주석(註釋)을 남기신 옛 학자(學者)분들!】을 잡고, 동서남북(東西南北) 방향으로 기록(記錄)을 남겼다는 알 수 있는 것이다. 》
○ 이 말은 당(唐) 고종(高宗)이 백제(百濟)를 공격(攻擊)할 때 신라(新羅) 무열 왕(武烈王) 김 춘추(金春秋)에게 내렸다는 <우이도 행군총관(嵎 夷 道 行軍總管)>이라는 직책의 <우이嵎夷>와 같은 말로서 우리는 그동안 산동省 지역쯤에 있었다는 역사(歷史) 해설(解說)로 두리 뭉실 넘어가고 있으나, 사기(史記) 및 후한서(後漢書)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內容)은 이곳이 대륙(大陸)의 옛 중심지 즉 중국(中國)의 요충지(要衝地) 중 요충지(要衝地)였던 장안(長安)의 서쪽지역에 있었던 삼보(三輔)중의 하나였던 <우부풍(右扶風)>의 속현(屬縣)으로 있었던 것을 말해주고 있다. 사기(史記) 색은(索隱)의 주석(註釋)을 보면 ; 욱 이(郁 夷)는 우이(嵎夷)이며, 옛 고자는 “禺 銕”로써 이곳은 “요서(遼 西)” 지방에 있었으며, “銕”은 “夷”의 옛 고자(古字)라는 것이다. 여기서 요서(遼西)지방이란 말은 이 지방을 흐르는 하(河)의 서쪽지방을 말하는 것이며, 글 첫머리에서 설명한 산해 경(山海經)에서 설명한 “래 산(萊 山)”의 위치와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는 것이다.
○ 여기서 사기(史記) 정의(正義) 편을 보면 ; 우공(禹貢)이 나눈 청주(靑 州)에 우이(嵎夷)가 있었다고 했다. 결국 요서(遼西)지방에 “우이(嵎夷)”들이 살고 있었으며 이에 현(縣)의 이름도 함께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애시 당초 “요서(遼西)지방”은 <우부풍(右扶風)>이 있었던 섬서(陝西)성 서(西)쪽 내지 서북(西北)쪽지역이라는 말이며, 현 하 북(河北)성 지방이 <요서(遼西)>지방이라는 그동안의 주장(主張)과 역사(歷史) 해설(解說)은 잘못 해설된, 왜곡(歪曲)되고, 조작(造作)된 해설이라는 결론으로 밖에 볼 수 없다는 말이다.
○ 우리는 그동안 우이(嵎夷)하면 산동(山東)성 청주에 있었다는 식으로 근거(根據)없는 역사 해설로 이어져 왔으나, 대륙의 사서(史書)의 기록을 보면, 우이(嵎 夷)들이 있었던 곳은 바로 중원(中原)의 서쪽지방 곧 옛 황도의 서북쪽 삼보(三輔)중의 하나였던 <우부풍>의 속현으로 있었으며, 요서(遼西)지방이라고 했으니, 바로 하【河 : 하(河=황하)를 요수(遼水)라 하였다.】의 서쪽지방에 있었으며, 이곳이 <요서(遼西)지방>이며, 또 <청주(靑 州)지방이었다>는 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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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호위우공추지(胡渭禹貢錐指)”를 인용한다면 왜 아래와 같은 가장 중요한 대목은 빠뜨린 것일까?
《 胡 渭 禹 貢 錐 指 : 弱水出山丹衛西南窮石山.東北入居延澤.其下流不知所歸.似弱水自居延澤東北流.歷夫餘.挹婁之北境而歸於東海. : 호위우공추지 : 약수(弱水)는 산단(山丹 : 장액)위 서남쪽 궁 석(窮 石)산에서 나온다. 동북(東北)의 거 연 택(居延澤)에 들어간다. 그 하류(下流)는 어디로 돌아가는 지 알 수 없는데, 잇 달은(이은, 같은) 약수(弱水)는 거 연 택(居延澤) 동북(東北)으로 흘러, ➡부여(夫餘)를 지나(歷) 읍루(挹婁)의 북쪽 지경에서 동해(東海)로 돌아간다. 》
● 위의 기록으로 보면, 《“부여(夫餘)”가 있었던 곳은 반도(半島)나 그 북방(北方)지대로부터 “5천리이상” 서(西)쪽 지방에 있었다. 》약수(弱水)가 흐르는 유역이 “부여(夫餘)”의 영토(領土)이다. 【이것은 약수(弱水)가 현 거연 택(居延澤)으로 흘러드는 하천(河川)이라고 할 때이다. 】위의 설명에서 “산단 위(山丹 衛)”는 장액(張掖)지방이며, 궁 석산(窮石山) 역시 장액(張掖)지방에 있다고 지도에 그려져 있다. 결국 이러한 지리적 환경을 감안하면 ; 당시 《부여(夫餘)는 하서회랑(河西回廊)을 보호(保護)하기 위한 쌓은 장성(長城)의 북쪽지방에 있었으며, 이곳은 현 내몽골 최 서쪽지방이며, 외몽골과 접경지대이다. 이러한 “조선의 땅”【 朝鮮 : 부여(夫餘)는 조선(朝鮮)의 일원(一員)이었다. 】 을 반도(半島)나 그 북방(北方)에 있었다고 주장(主張)한다면, 그에 합당한 이동(移動)사를 세밀하게 밝혀야 하는 책임(責任)과 의무(義務)가 당연히 뒤따르는 것이다. 》
● 이러한 기록(記錄)은 너무도 중요(重要)한 구절(句節)이다. 그러나 반도(半島)인들은 수없이 대륙(大陸)사서(史書)를 인용(引用)하면서도 조선(朝鮮)과 관계있는 중요한 기록은 다 빼고, 오직 하 북(河北)성 동쪽지방으로만 인식될 수 있는 것만 인용(引用)하고 참고(參考)한다. 그러나 조선(朝鮮)사는 ‘하 북 성’ 동쪽지방에서 시원(始原)할 수 없기 때문에 기록(記錄)을 거꾸로 짜 맞추는 것이다.
㈢ 산 해 경(山海經)을 인용하시면서,【중국 최고(最古) 지리서인 산해 경(山海經 : B. C3~4C로 추정)에는 “열수 동쪽에 열 양(列 陽)이 있고 그 동쪽에 조선이 있는데 바다의 북쪽, 산의 남쪽에 위치해 열 양은 연나라에 속한다(卷12 海 內 北 經).” 고 한다. 같은 책에 “동해의 안, 북해의 모퉁이에 나라가 있고 이 나라를 조선이라고 부른다(卷18 海 內 經).” 고 한다.】고 설명한다.
● <本文> : 山 海 經 海 內 北 經 : <朝 鮮 在 列 陽 東 , 海 北 山 南 。 列 陽 屬 燕 1. : 조선은 열 양(列 陽)의 동쪽에 있는데, 바다의 북쪽이며, 산의 남쪽이다. 열 양(列 陽)은 연나라에 속하였다. >
○ 위 본문에서 “조선(朝鮮)”의 위치를 설명하고 있다. ➊ <열 양(列陽)의 동쪽에 있다.>라 했는데, 과연 “열 양(列陽)”이 어디에 있는, 무엇이냐? 가 중요한 것이며, ➋ <해(海)의 북쪽, 산(山)의 남쪽이다.>라 했으니, 해(海)가 현재의 의미인 “바다”인지, 옛 고전(古典)에서 보이듯, 큰 하천, 또는 큰 평야지대를 말하는 것인지가 중요하며, 산(山)의 남쪽이라 했으니, 어디에 있는 어떤 산을 말하는 것인가? 이것이 핵심(核心)이다. ➌ <열 양(列陽)은 연(燕)에 속했다.>에서 과연 옛 “연(燕)나라”는 어디에 있었는가? 당연한 의문이다. ➡ 위 구절에서 “조선(朝鮮)”의 영토(領土)를 알고 싶다면 3가지 의문을 풀어야 한다.
<註釋> : 1 郭 璞 云 : 朝 鮮 今 樂 浪 縣 , 箕 子 所 封 也 。 列 亦 水 名 也 , 今 在 帶 方 , 帶 方 有 列 口 縣 。 郝 懿 行 云 : ( 漢 書 ) 地 理 志 云 : 樂 浪 郡 朝 鮮 又 吞 列 分 黎 山 , 列 水 所 出 , 西 至 黏 蟬 入 海 。 又 云 : 含 資 帶 水, 西 至 帶 方 入 海 。 又 帶 方 列 口 並 屬 樂 浪 郡 。 晉 書 地 理 志 列 口 屬 帶 方 郡 。 : 곽박에 따르면 ; 조선(朝鮮)은 낙랑(樂浪)현이며, 기자(箕子)가 봉 받은 곳이다. 열(列)은 또 물 이름이며, 대방(帶方)에 있는데, 대방(帶方)에 열구(列口)현이 있다. 학의행에 따르면 : (漢書)지리지에서 이르기를 : 낙랑(樂浪)군은 조선(朝鮮)이며, 또 탄 열(呑列)에 분려 산(分黎山)이 있다. 이곳에서 열수(列水)가 나와, 서쪽 점선(黏蟬)에 이르러 해(海)로 들어간다. 또 이르기를 : 함자(含資)의 대수(帶水)가, 서쪽 대방(帶方)에 이르러 해(海)로 들어간다. 또 대방(帶方) 열구(列口)는 나란히 낙랑군에 속했다. 진서(晉書)지리지에 열구(列口)는 대방(帶方)군에 속하였다.
● 위 본문(本文)이나 주석(註釋)어디에도 당시 조선(朝鮮)이 반도(半島)에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證據)가 없다. 낙랑(樂浪)과 대방(帶方)이 반도(半島)에 있었다는 말은 해설서에만 존재(存在)하는 유령(幽靈)과도 같은 것이다.
㈣ 사기(史記)를 인용하시면서,【갈 석 산의 전경. 『사기』에 “연나라는 발해와 갈 석 산의 틈새에 하나로 모이는 곳으로, 동북으로는 오랑캐와 접하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오랑캐는 동이, 즉 고조선이다. 그래서 이 지역은 고조선 연구에서 중요하다. 】고 하셨는데 ;
● 이 구절 역시 연(燕)나라가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것이 핵심이다. <연나라는 발해(渤海)와 갈 석(碣石)산의 틈새에 하나로 모이는 곳에 있다.>라는 말인데, 산해 경(山海經)의 갈 석(碣石)산은 《 曰 碣 石 之 山. 繩 水 出 焉, 而 東 流 注 于 河. : 이르기를 “갈 석(碣石)산”이다. 승수(繩 水: 繩-줄 승. 새끼)가 나와 동쪽으로 흘러 황하(河)에 들어간다.》고 하였다. <갈 석(碣石)산에서 승수(繩 水)가 발원하여, 동쪽으로 흘러 하(河)로 물을 댄다.>란 말은 이 갈 석(碣石)산은 현 산해 관(山海關) 갈 석(碣石)산과는 해당사항이 없다.
옛 “연(燕)”나라에 대해서는 수십 차례도 더 언급한 것이기 때문에 재론치 않으나, 반도(半島)의 국민들이 알아야 할 것은 현 “하 북 성” 지방에는 옛 연(燕)나라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리(地理), 지형(地形)적으로 이미 밝혀진 것이다. 사기(史記) 주석(註釋)을 보면, 《연나라는 봉 받은 땅에 연산(燕山)이란 큰 산이 있어 나라이름을 이 산의 이름에서 취한 것이다.》라 했기 때문이며, 연산(燕山)은 연연(燕然)산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최소한 대륙 측이나 조선(朝鮮)의 유학자들이 저술한 문집 속에서도 연산(燕山)은 연연(燕然)산이라고 했다. 이러한 것을 왜 굳이 현 “하 북 성”에 있는 “연산(燕山)”이란 산을 중심으로 이곳이 옛 연나라 땅이라 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疑問) 정도는 갖아야 한다. 이는 “조선(朝鮮)”땅을 반도(半島)에 집어넣기 위한 것이다. 본래의 연산(燕山)주위에 옛 연나라가 있었다고 하면 중원(中原) 천지(天地)가 “조선(朝鮮)”의 땅이 되기 때문이다. 진실 된 조선사를 연구한다면 최소한 이 정도는 알아야 되지 않을까!!!!!!!!!
㈤ 산 해 경(山海經)을 인용하시면서, 【따라서 산 해 경에 나오는 동해는 현재의 서해, 북해는 발해인 것이다.】라고 기막힌 설명을 하셨다.
● (海內西經. (本文) : 河 水 出 東 北 隅 , 以 行 其 北 , 西 南 又 入 渤 海 , 又 出 海 外, 即 西 而 北 , 入 禹 所 導 積 石 山 1 。: 하(河)의 물(河水)이 동북 모퉁이에서 나와, 북쪽으로 흐른다. 서남(西南)으로 흘러 다시 발해(渤海)로 들어간다. 또 나와 해외로, 즉 서쪽, 북쪽으로 흘러 우(禹)가 적석(積石)산을 통하게 한 곳으로 들어간다.
위 본문을 보면 ;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발해(渤海)』의 위치(位置)에 대해 명확한 해석(解釋)을 내놓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하(河)가 곤륜(崑崙)의 동북(東北) 모퉁이에서 나와 북쪽으로 흘러, 그 물줄기가 서남(西南)쪽으로, 또 발해(渤海)로 들어간다. 이어서 치수(治水)를 끝내주게 하여 순(舜)임금이 천자(天子)자리를 넘겨주었다는 “우(禹)”임금이 만든 적석(積石)산의 물길로 하수(河水)가 들어갔다.』고 하였으니, <적석(積石)산>에 대해서 알아보자.
● 적 석 산(積石山)
(1) 대적석산은 청해(靑海) 남쪽에 있는 자산(당서 토번 전)을 말함이요,
(2) 소적석산은 감 숙성(甘肅省) 림 하(臨 河)현 서북(西北)에 있는 “당 술 산”을 말한다. 토 곡 혼(吐谷渾)과 경계(境界)지역에 있으며, 감 숙성(甘肅省) 포한 현 서북(西北)에 있다. 산해 경(山海經)을 해설한 <필원(畢沅)>의 말에 따르면 “서 우공”에 기록되어진 “<道 河 積 石도하적석>”은 청해(靑海) 남쪽에 있는 “대적석산”이 아니고, 감 숙성(甘肅省) 림하(臨河)현 서북(西北)에 있는 “소적석산 즉 당 술산”이라 했다. 이곳은 영하(寧夏) 은천(銀川)의 직 북방지역으로 황하(黃河)가 북쪽으로 흘러 내몽골의 오해(烏 海)를 지나 림 하【臨 河 : 내몽고 ‘악 이 다 사’ 우익 후기 옛 삭방 성 서북(西北)】의 북쪽으로 흘러 옛 삭방(朔方)성 서(西)쪽으로 흐른다. 여기서부터 하(河)가 남하(南 河)와 북 하(北 河) 곧 두 개의 하(河)로 나누어져 흐르는데, ➊ 북하(北河)는 북쪽으로 흘러 넘쳐 등 격 리(騰 格 里)에 머무르다가(泊) 다시 동쪽으로 굽어져 흐른다. 옛 지명인 高 闕(고 궐)을 지나 “수 백리”를 흘러 근처에 한(漢)나라 때의 臨 河현은 북 하와 남하의 사이에 있었다. ➋ 하(河)가 북 하와 남하로 갈라져 흐르다가 다시 합류하는 지역까지에는 수 백리에 달하며, 수많은 지류(支流)들이 하(河)로 물을 유입시키며, 이곳은 수많은 지류(支流)들에 의해 운반(運搬)되어진 미세한 황토(黃土)들이 퇴적(堆積)되어진 것이며, 비가 오면 이곳은 펄 땅이 되며, 가뭄이 오면 이 황토층이 굳어져 인마(人馬)가 통행(通行)할 수 있는 지역(地域)으로 수많은 수초(水草)와 목초(木草)와 물(水)들이 풍부해서 목축(牧畜)이나 유목(遊牧), 이목(移牧)종족들에게는 하늘이 내려준 <천혜(天惠)의 땅>이라는 찬사(讚辭)를 받던 곳이다.
● “발해(渤海)”는 적석(積石)산을 흐르는 상류(上流)편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는 곧 『청해(靑海)성과 적석 산(積石山)사이』에 『발해(渤海)』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 산 해 경(山海經) 해외북경(海外北經)의 기록을 하나 더 보자. <山 海 經 海 經 新 釋 卷 三 . 山 海 經 第 八 . 海 外 北 經> : 방향은 <海 外 自 東 北 陬 至 西 北 陬 者 1. ; 동북 구석에서 서북구석까지이다.>
<本文> : 禹 所 積 石 之 山 1 在 其 東 , 河 水 所 入 2 。: 우(禹)의 적석 산(積石山)은 그 동쪽에 있는데, 하(河)의 물이 그곳으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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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문(長文)이 되겠기에 줄이고, 아래의 것도 참고 되는 것이니 참조(參照)하십시오.
<註釋> : 1 畢 沅 曰 : 當 云 禹 所 導 積 石 之 山, 此 脫 導 字 。 王 念 孫 校 同 。 珂 案 : 畢 王 之 說 疑 非 。 尋 檢 經 文 , 積 石 之 山 有 二 : 一 曰 積 石 , 一 曰 禹 所 積 石 。 大 荒 北 經 云 : 大 荒 之 中 , 有 山 名 曰 先 檻 大 逢 之 山 , 河 濟 所 入 , 海 北 注 焉 , 其 西 有 山 , 名 曰 禹 所 積 石 。即 此 禹 所 積 石 山 也 , 其 方 位 在 北 。 西 次 三 經 云 : 積 石 之 山 ,其 下 有 石 門 , 河 水 冒 以 西 流 。
海 內 西 經 云 : 河 水 出 東 北 隅 , 以 行 其 北 , 西 南 又 入 勃 海 , 又 出 海 外 , 即 西 而 北 , 入 禹 所 導 積 石 山 。
即 積 石 之 山 也 , 其 方 位 在 西 。郝 懿 行 注 此 經 以 大 荒 北 經 禹 所 積 石 即 此 禹 所 積 石 、 以 西 次 三 經 積 石 之 山 為 非 固 是 矣 , 而 以 海 內 西 經 禹 所 導 積 石 為 此 禹 所 積 石 , 則 不 知 何 所 據 也。
<註釋> : 2 郭 璞 云 : 「 河 出 昆 侖 而 潛 行 地 下, 至 嶺 , 復 出 注 鹽 澤 , 從 鹽 澤 復 行 南 , 出 於 此 山 , 而 為 中 國 河 , 遂 注 海 也 。 書 ( 禹 貢 ) 曰 : 『 導 河 積 石 。 』言 時 有 壅 塞 , 故 導 利 以 通 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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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해(北海)』는 곧 『한해(澣海)』라 한다.
산해 경(山海經) 서산(西山)경 : 주석(註釋)편을 보면 ; 郭 璞 云 : 「 百 鳥 於 此 生 乳 , 解 之 毛 羽 。 」 珂 案 : 「 解 之 毛 羽 」 不 成 文 義 , 宋 本 、 藏 經 本 作 「 解 氄 毛 羽 」 , 是 也 。 郝 懿 行 云 :此 地 即 翰 海 也 ,說 見 大 荒 北 經 。 翰 海 古 本 泛 指 沙 漠 之 地, 北 方 有 翰 海, 西 北 亦 有 翰 海, 史 記 霍 去 病 傳 : 禪 於 姑 衍, 登 臨 翰 海 。此 北 方 之 翰 海 也 。唐 岑 參 白 雪 歌 送 武 判 官 歸 京 詩 云 :翰 海 闌 干 百 丈 冰 ,愁 雲 慘 淡 萬 里 凝 。此 西 北 之 翰 海 也 。郝 以 此 處 所 記 大 澤 為 翰 海 是 也 ,然 以 之 混 同 於 大 荒 北 經 所 記 大 澤 則 非 也 。 <이미 여러 차례 설명한 것이기 때문에 원문(原文)으로 대체하고 생략합니다.>
● 인터넷. 역사서적. 신문연재. 교과서. 참고서 등등의 한국역사(통칭 조선사)에 대해 설명한 것을 보면, 놀라우리만치 반도시관 및 식민사관과 똑같다. 그렇게 짜 맞추려 해도 힘든 일이다.
대체, 왜 그렇게 해야만 했을까? 답을 찾는 것은 우리들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
2011년 02월 23일 <글쓴이 : 문 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