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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과 중산층
훔볼트대학의 음악사 교수인 게오르그 크네플러는 이렇게 말했다. `재능있는 위대한 음악가들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당시의 정치적.사회적 흐름을 훨씬 더 잘 알고 있었다.'
베토벤(1770-1827)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베토벤과 빈악우협회의 관계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우선 당시 빈의 음악생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또 베토벤의 정치적 사회적 의식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이해하려면 시대적 상황에 대한 설명이 앞서야 한다.
1797년 빈에 정착한 이후부터 빈 회의가 열린 1814년까지 베토벤은 이 음악도시가 제공하는 좋은 여건들을 최대한 활용했다. 그는 당시의 다른 연주가들과 마찬가지로 맨처음 공개 자선음악회에 비르투오소로 활약한 다음, 권력과 부를 가진 귀족의 가정에서 직업 연주회로 활동하고 나서, 다시 이 귀족들을 자신의 후견인으로 삼는데 성공한다. 예를 들면 페르디난드 킨스키공, 롭코비츠 공작, 루돌프 대공 등의 귀족은 베토벤에게 신분을 보장해 주었으며, 경제적인 뒷받침을 제공해 주었고,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베토벤에게 음악을 배웠다.
베토벤은 자신의 경제적 수입원을 빈의 상류층 귀족에게 구했으나, 귀족계급의 지위가 흔들림으로써 경제적 기반이 약화될 때는, 기꺼이 대중취미에 영합하는 아마추어용의 피아노 소품이나 민요 편곡, 춤곡, 군대행진곡, 실내악, 쉽게 부를 수 있는 가곡 등을 작곡하여 대중적인 고전음악 시장에 내놓았다. 예를 들면, 피아노 바가텔 엘리제를 위하여 (1808), 기쁨의 손으로 잔을 높이 들라 (1787), 오스트리아 전쟁찬가 (1797), 음악시계를 위한 척탄병 행진곡 등의 소품이 그것이다.
베토벤이 한가할 때는 빈의 다른 부르조아 시민들이 가장 이상적인 생활로 여겼던 것처럼, 공원과 도시 근교를 한 바퀴 돌아 산보를 즐겼다. 그는 또 다른 직업 음악가들처럼 피아노 수공업자의 살롱과 커피 하우스에서 긴 시간을 보내면서, 새로 이 도시를 방문하는 연주가들, 최근의 연주회 소식, 새로 작곡된 공연작품, 악보출판에 대한 최신 뉴스와 소문을 듣곤 했다.
한편 베토벤이 활동하던 시기에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시민혁명을 성공으로 이끈 프랑스는 유럽의 진보적 지식인들에게 동경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독일 신문들은 연일 프랑스혁명에 대한 기사를 1면 톱으로 보도했다. 1792년 9월 22일 프랑스 혁명공화군은 7년 전쟁의 명장이었던 브룬스비크 공작이 이끄는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을 격퇴시켰다. 1809년 빈은 프랑스군에 의해 두번째 함락되었다. 왕족과 귀족들은 헝가리의 성으로 피신했다. 프랑스 혁명에 은근히 동조했던 베토벤은 자신의 사회적 이상을 영웅 교향곡과 코리올란 피델리오 , 운명 교향곡에 담아 내었다. 이러한 혁명적 분위기가 초기의 작품에 반영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베토벤은 아직 오스트리아 제국의 영광을 찬양하는 작품을 쓰고 있었다.
‘요제프 2세 추모 칸타타’ (1790) ‘터키행진곡’ ‘빗토리아의 승리’ 일명 ‘전쟁교향곡’ ‘웰링턴의 승리’ , 칸타타 ‘게르마니아’ (1814), 프랑스 혁명 이후 오스트리아 제국의 입지를 강화시키고 보수정치를 강화한 메테르니히의 독재를 승인한 빈 회의를 축하하고 여기에 참석하는 유럽 각국의 국빈들을 영접하기 위해 베토벤이 작곡한 ‘그 영광스러운 순간’ (1814) 등의 작품에서 우리는 조국 황제가 지배하는 오스트리아에 대한 애국적인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1814년 11월 29일 이 칸타타는 프로이센의 군주를 포함한 유럽 각국의 대표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열린 음악회에서 베토벤의 ‘웰링턴의 승리’ 와 제7번 교향곡 사이에 연주되었다. `회의는 춤춘다'라는 말을 탄생시킨 빈 국제회의는 연일 술과 음악회로 진행되었다. 이때 베토벤의 유일한 오페라 ‘피델리오’도 상연되었다.
프랑스혁명에 동조하여 영웅 교향곡을 작곡했던 베토벤은 빈 국제회의 이후 왕정복고 시대의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에 더 이상 편승하지 않고 빈의 사교계 중심부로부터 점점 멀어져 갔다. 1820년대 이후부터 전에 그를 경제적으로 도와주던 귀족들이 파산선고를 하는 등 경제적으로 몰락하게 되자, 베토벤은 자신의 음악적 위상에 대해 심각한 고민에 빠져 든다.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는 이러한 극단적 자기고립의 한 단면이다.
이제 더 이상 빈의 청중들은 베토벤의 음악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아니 베토벤이 빈의 청중들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편이 옳을지도 모른다. 세기말을 향해 가면서 몰락해 가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사치스러운 궁정생활 이면에는 미래에 대해 불안해 하는 대다수의 빈 시민들이 있었다. 이들은 현실의 고통을 잊기 위해 로시니의 오페라와 요한 시트라우스의 왈츠에 탐닉했다.
베토벤의 작품은 꾸준히 살롱 음악회에서 연주되고 있었으나, 그의 새로운 작품들은 이미 빈 청중들의 음악취향을 벗어났다. 당시 빈의 분위기는 얄팍하고 감성에 호소하는 육욕적인 로시니의 음악이 잘 어울렸다고나 할까. 베토벤은 프랑스 혁명이 제시하는 인본주의적 이상주의의 희망찬 미래를 믿고 있었다. 이에 반해 빈 사람들의 대부분은 갈수록 심해지는 경제적인 위기와 정치적 압박에 시달리면서 세기말적인 징후들을 보여 주었다.
베토벤의 후기 작품에 속하는 합창 교향곡과 장엄미사 에 담겨있는 심오한 혁명의 이상과 종교적 이상이 실의에 빠져있던 당시 빈 청중들의 귀에 호소력이 강하게 전달될 리가 만무했다. 합창 교향곡에 나타난 낙관적인 세계관은 당시 비관적인 왕정복고 시대의 정신과 일치할 수 없었다. 대부분의 빈 사람들은 파가니니나 요한 시트라우스가 제공하는 기교적인 음악적 여흥을 필요로 했다. 이들 비르투오소들은 바이올린 연주와 작곡만 잘 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청중들을 꾀어 이용할 수 있는지 잘 아는, 대중적 취미에 영합하는 음악가들이었다.
베토벤의 연주회가 실패하는 곳에서 파가니니의 연주회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제 음악회는 아마추어 음악가 출신의 귀족계급의 손으로부터 벗어나 영리를 추구하는 중산층 출신의 `장사꾼 에 의해 좌우되었다. 베토벤은 더 이상 빈의 새로운 중산층에게 기대를 걸 수 없었다. 그는 아직 귀족사회가 붕괴되지 않은 프로이센과 러시아, 영국의 귀족사회와 음악계에 진출하려고 시도했지만, 그 성공은 매우 미미한 것이었다. 1825년 그가 영국으로 건너가려고 마음먹었던 것도 이런 데에서 연유한 것이다.
빈 악우협회와 베토벤
1812년 빈에서 조직된 `악우협회'(Gesellschaft der Musikfreunde)는 베토벤의 후원자이며 오스트리아 황제 레오폴트 2세의 아들이자 프란시스 2세의 막냇동생인 루돌프 대공의 후원을 받았던 음악단체다. 음악회를 주최하고 음악원을 설립하고 음악도서관을 운영하면서 음악잡지를 발간하는 등 빈의 음악문화를 주도해 나갔다. 빈악우협회가 1817년에 설립한 음악원이 바 오늘날의 빈 음악원의 전신이다. 이 뒤를 이어 오스트리아의 각지에 많은 음악협회가 만들어졌다. 정관에 명시된 설립 목적은 `모든 음악분야의 향상'이었다.
이 단체는 1812년부터 1816년까지 매 시즌마다 1회의 대규모 음악제를 개최하고, 4회의 협회 음악회, 16회의 `저녁오락음악회 Abendunterhaltungen'를 개최했다. 이 음악회에는 협회 회원들이 참석했는데, 회원들은 전문음악가와 아마추어 음악가들로 구성되었다. 이들 귀족으로 구성된 아마추어 오케스트라는 순회공연중인 오케스트라나 지방 오케스트라와 연합으로 연주회를 구성하기도 했다.
음악제에서는 특히 헨델의 오라토리오가 많이 연주되었다. 몰락해 가는 귀족층들이 개인적으로는 음악후원이 불가능하므로 함께 모여 배타적인 협회를 결성함으로써 센세이셔널한 로시니와 파가니니의 작품이 연주되는 일반 상업적 연주회와 구분하려고 했던 것이다. 당시에는 특히 악보가 희귀했는데, 늘어나는 아마추어의 음악적 수요에 비해 악보출판업은 영세성을 면치 못했다. 이 악우협회에서는 악보를 상당히 많이 소장하고 있으면서, 회원가족들에게 한해 악보를 대출해 주었다.
빈 악우협회 회원의 한명이었던 유태인 은행가 아른슈타인은 일찍이 모차르트를 자신의 집에서 8개월 동안 데리고 있으면서 음악을 연주하게 한 사람이다. 그는 베토벤에게 돈을 대출해주기도 하고 악우협회의 재정적인 문제를 처리한 사람이다. 그는 빈 국제회의 당시 외국에서 온 손님들을 초청하여 음악회, 무도회, 파티를 열었던 장본인이기도 하다.
빈 악우협회가 없었던들 베토벤의 교향곡이 생전에 자주 연주되지 못했을 것이다. 베토벤의 교향곡을 출판하도록 주선한 것도 이 악우협회이다. 그의 교향곡은 이미 ‘제3번 영웅’에서부터 고전주의 교향곡의 전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를 보이면서, 청중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다. 빈악우협회가 1815년부터 1830년까지 연주한 레퍼토리 중에서 베토벤의 관현악곡이 연주된 연도(각 1회)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작품제목 연도
교향곡 제1번 1815,1819,1822,1827,1829
교향곡 제3번 영웅 1820,1825,1829,1830
교향곡 제7번 1817,1821,1826, 1829
에그몬트 서곡 1815,1822, 1823, 1829
교향곡 제2번 1815, 1823, 1826
교향곡 제4번 1821, 1825, 1829
교향곡 제5번 1820, 1822, 1828
교향곡 제8번 1820, 1824, 1828
코리올란 서곡 1818, 1830
교향곡 제6번 1827, 1830
교향곡 제9번 1827(1,2악장)
베토벤의 관현악곡은 빈 악우협회에서 비교적 자주 연주한 작품에 속한다. 특징적인 것은, 베토벤의 말기 점차 연주빈도가 낮아진다는 것이며, 합창 교향곡은 1, 2 악장만 연주되었을 뿐이었다.
베토벤이 살던 당시 빈은 프랑스 대혁명 정신과 반동보수적인 왕정복고로 인한 세기말적 비관주의가 교차되는 상황에 처해 있었으며, 음악적으로는 중산층의 경제 능력의 성장으로 대중적인 고전음악의 보급이 이루어졌으며, 악보출판업과 악기제조업이 발달했다. 귀족사회에서 부르조아 사회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베토벤은 일정한 일자리가 없이 고독한 천재음악가로 일생을 마치게 된다. 귀족계급으로 구성된 아마추어 음악가협회인 빈 악우협회는 베토벤의 관현악곡을 연주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 경제적 도움도 주었다. 이제 음악가는 소수의 귀족에 고용되기 보다는 익명성의 다수에 의한 집단 패트런 제도에 의존하여 음악활동을 계속한다. 합창 교향곡의 실패와 파가니니, 로시니, 시트라우스의 등장은 좋은 대조를 이루면서 `미래를 위한 음악'과 `현재에 봉사하는 음악' 사이의 틈새가 점점 심화되어 가는 과정이다.
베토벤과 편곡
편곡은 특히 낭만주의 시대에 성행했던 것으로 아마추어 연주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인쇄술과 음악출판업이 발달과 함께 업라이트 피아노와 같은 중산층 가정용 악기가 대량생산되고 중산층의 경제적 부가 증대됨에 따라 음악적 수요가 급격히 팽창되었는데, 이 엄청난 음악적 수요는 기존의 음악작품을 아마추어 수준에 맞게 편곡된 악보에 의해 충족되었다. 악보인쇄술의 발달은 처음부터 상업적인 이윤과 맞물려 있었다. 베토벤과 같은 위대한 작곡가가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아마추어 연주자들을 위한 피아노 편곡에 손을 댔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낭만주의 시대에 가장 널리 보급된 악기는 무엇보다도 피아노였다. 관현악곡이 피아노 독주 또는연탄곡으로 편곡된 것은 바로 이러한 사회적 상황 때문이다. 아마추어로서는 매우 어려운 기교를 필요로 하는 기존의 피아노곡이 아마추어용으로 다시 개작되기도 했다.
특히 민요가 피아노곡 또는 독창과 피아노를 위한 곡으로 편곡되어 아마추어 음악시장을 휩쓸었다는 사실을 지적해야 할 것 같다. 베토벤은 64 곡의 아일랜드 민요, 26 곡의 웨일즈 민요, 55 곡의 스코틀랜드 민요, 4 곡의 러시아 민요 등 유럽 각국의 민요를 피아노 3 중주 반주가 붙은 것으로 편곡했다.
작곡자 자신에 의해 직접 다른 악기편성을 위해 편곡되는 경우도 있는데, 이 것은 바쁜 일정 때문에 많은 작품의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 개작되는 면도 없진 않으나 작곡자가 곧 편곡자라는 점에서, 즉 작곡자의 원래 의도를 침해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점에서 가장 이상적인 편곡이라고 할 수 있다. 베토벤이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피아노 협주곡으로, 교향곡 제 2 번을 피아노 3 중주로 편곡한 것은 유명하다. 그는 또한 현악 3 중주를 위한 세레나데 작품 8 을 피아노와 비올라를 위해, 피아노 소나타 작품 14 의 1을 현악 4 중주 F 장조로 각각 편곡했다.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은 연말에 한번 연주되는 것에 그칠 뿐 비교적 연주빈도가 높은 베토벤의 다른 교향곡들 중에서 가장 연주빈도가 낮다. 또한 연주하기에 가장 난해한 특징도 갖고 있다. 이 음악은 원래 초연 당시 23 명의 오케스트라가 지휘자 없이 연주한 음악이다. 합창이 곁들여진다는 점 또한 낮은 연주빈도와 관련이 있다. `합창' 교향곡의 연주빈도는 합창운동의 발전단계와 밀접한 연관성을 맺고 있다. 다시 말해서 합창음악의 쇠퇴와 더불어 이 작품의 인기도 떨어졌다.
이 작품에 대한 구구한 해석과 그것이 연주된 역사적 상황을 살펴보면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은 나폴레옹 전쟁과 유럽 정복에 대한 항거였으며, 강자와 약자, 권력을 가진자와 못가진자의 차별에 대한 저항이었다. 니체에 의하면 `합창`은 "노예가 자유인이 됨을 선언하며 사람들 사이에 굳게 세워졌던 벽들이 허물어짐을 세상에 알린다". 로망 롤랑의 해석에 따르면, "인류애와 사해동포주의, 이성과 환희로 건설된 이땅위의 천국 복음"을 선포한다. 그러나 베토벤의 `합창'이 휴머니티와 이성, 사회질서를 찬미하고 있는 점도 부정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합창' 교향곡에는 저항의 요소와 기존질서에 대한 긍정적 요소가 동시에 포함되어 있다. 이 곡이 원래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3 세에게 헌정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현세적으로 주어지지 않은 그 무엇, 보이지 않는 희구의 대상, 아직 밝혀지지 않는 심원한 진리, 꿈꾸는 유토피아의 세계, 인류와 세계 평화, 지상 낙원에 대한 염원의 뜻도 담겨 있다. 그래서 이 곡의 초연 당시 베토벤은 상당한 재정적 타격을 입을 정도로 연주회에서 실패를 거듭했다.' 합창` 교향곡에서 나타난 낙관주의와 인본주의적 정신은 당시 보수적인 왕정복고 정치 치하에 신음하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팽배하던 세기말적 자포자기의 분위기와는 맞지 않았던 것이다.
레닌과 엥겔스가 베토벤의 음악을 좋아했고 그중에서도 특히 `합창' 교향곡을 즐겨 들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바쿠닌은 "모든 것이 지나가 버리고 온 세상이 사라진다고 해도 9 번 교향곡은 영원하리라"고 말했다. 1846 년 바그너는 당시까지만해도 난해한 곡으로 알려져 있던 `합창' 교향곡을 모두 150 명에 이르는 연주자를 포함하는 3 관 편성으로 편곡하여 드레스덴에서 자선금 조성을 위한 음악회에 연주함으로써 이후로 `합창` 교향곡은 자선음악회의 단골 메뉴가 되었고 연말연시에 이 곡이 연주되는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이다.
-일반회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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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본 "작곡가의초상" 글을 올린이는 일반회원임을 알립니다.(본글 내용과 적합한 메뉴를 찾다가 이곳에 올렸습니다.)
박민님 감사합니다. 우리 카페를 채워주셔서... 만일 적당한 코너가 아니라면 카페지기가 옮길테니까 걱정마시고 수고해 주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