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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원재]
남원시 운봉과 이백면을 잇는 고개로 일명 연재라고도 한다. 고개 서편으로 평원을 이룬 구릉이 운봉면이다. 섬진강 상류가되고 섬진지류는 남원시가지를 거처 광양만으로 빠진다.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의 국경 이었다.
왜구의 손길이 거쳐 간 자신의 왼쪽 가슴을 도려내고 자결하였다는 이 고갯마루 주막여인의 전설이 있는 곳이다. 자결한 이 여인의 원혼은, 고려 말 우왕 때 이성계가 운봉과 함양 등지에서 노략질 중이던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 운봉읍 한복판의 황산으로 진군할 때, 백발의 노파로 나타나 승전의 전략을 일러주었다 한다. 왜장 아지발도를 무너뜨린 이성계가 돌아가는 길에 여원(女院)이란 사당을 지어놓아 이 고개이름이 여원재가 되었다는 것. 주민들은 흥부에게 박씨를 물어다준 제비가 넘나들던 고개라 하며 연재라고 부른다.
여원재 남원쪽 고갯마루의 암벽에는 왼쪽 가슴이 없는 마애불이 있다고 하는데, 전설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 동학과 남원
반봉건 반외세를 기치로 1894년 농민들이 활화(活火)하였던 동학농민혁명의 한 축을 김개남이라는 농민군 지도자가 맡고 있었다. 김개남은 그해 6월 하순에 남원시내 서쪽의 교룡산성에 입성하여, 또 다른 농민군 지도자 전봉준과는 별도로 독자적인 군세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은 9월 말 동학농민군 2차 거병 때 전봉준의 동시 출병요구를 거부하였다가, 10월 말에 이르러서야 공주회전(公州會戰)을 위해 남원을 떠났으니, 그 사이 약 4개월간 영남지역으로의 새 확장을 도모하고 있었다. 그러나 농민군은 이 여원재를 넘지 못해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아쉬운 발길을 돌려야 했다. 농민군은 진주와 함양 등에서 원병을 받아 군세를 늘린 민보군(民保軍)과 이 여원재 인근 방아치와 관음치에서 두 차례의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모두 지고 말았다. 일어서면 온통 농민군의 흰옷이어서 ‘서면 백산’, 앉으면 농민군의 죽창만 보여 ‘앉으면 죽산’이라 했던, 1894 갑오년 3월 부안군 백산결집에서 보았던 그 농민군의 기세를 너무 과신했는지도 모른다. 김개남이 지휘하는 동민농학군 1만명이 외눈박이 박문달이 지휘하는 관군의 습격을 받아 농민군이 패퇴한 곳이기도 하다.
그 뒤 이성계가 조선 왕조를 건국한 뒤, 이 산의 이름을 태조봉 또는 제왕봉으로 불렀다. 고남산 아래에 주둔할 때 군사와 말들의 식수로 썼던 샘터 주변에 터를 잡은 권씨 마을은 권세가 하늘에 닿도록 끊임이 없다 하여 권포리(權布里)라 하였다.
- 남원의 환경 및 역사
전북 동남부에 위치, 기후가 온난하고 토지가 비옥할 뿐 아니라 수리시설이 잘되어 농업이 발달했다. 천혜의 자연환경과 수많은 문화유산을 갖고 있어 관광도시로 각광을 받는다. 지리산의 서북 관문인 남원은 예로부터 ‘천부지지(天府之地) 옥야백리(沃野百里)’라
했고,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옥한 땅 중에 전라도 남원은 벼 한 말을 심으면 140말을 추수할 수 있다’고 하였다. 조선시대 전라감사를 지낸 김달순은 ‘기상풍영(沂上諷詠) 융중산수(隆中山水)’라 하여 ‘남원의 산천경계는 중국의 기수(沂水)와 같이 아름답고 사람들은 제갈공명이 때를 기다린 곳과 같다’고 극찬하였다.
마한의 54국 중 고렵국과 불운국이 남원 땅을 발판으로 삼았다. 신라 때 소경을 설치하면서 남원이 되었다. 고려에서는 남원부, 조선시대에서는 남원도호부와 남원관찰부를 설치하였다. 1981년 시로 승격되었다.
지리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돼 있고, 유명한 광한루와 오작교, 실상사가 있다. 황산대첩비와 남원성터, 교룡산성, 용담석탑, 원천폭포 등을 찾는 관광객이 많다.
부패한 관아에 항거한 춘향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춘향제를 매년 5월5일부터 열린다. 1931년 춘향사당을 건립하고 제사를 지낸 것이 춘향제의 시초였는데 전국 10대관광문화축제로 선정될 만큼 남원의 문화를 대표하는 향토축제로 자리 잡았다.
또한 흥부제는 인월면 성산리와 아영면 성리가 흥부전의 발상지로 고증되면서 ‘착한 사람들의 큰 잔치’란 주제로 1992년 처음으로 열었다. 흥부의 착한 마음씨와 형제애를 널리 본받기 위해 매년 음력 9월 9일 제비가 강남으로 떠나는 날에 남원시민의 날 행사로 치러진다.
운봉지역은 판소리 동편제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그 전에는 신라 때의 옥보고라는 사람이 바래봉 북쪽 옥계동계곡에서 제자들에게 거문고를 가르쳤다고 한다. 동편제의 창시자인 송흥록은 운봉의 화수리에서 태어났다. 판소리를 본격적인 창으로 발전시킨 대가들은 모두 송흥록의 제자들이었다. 수제자인 김정근은 ‘중고제’를 만들고, 주상환과 박유전은 ‘서편제’를 창시했다. 송흥록의 자손이자 판소리의 대가였던 송광록과 송우룡, 송만갑 등도 화수리에서 태어나 음악의 경지를 개척했다.
[운봉읍 비전마을]
이성계의 황산대첩을 기념해 세운 황산대첩비가 있는 곳이 인월과 이웃한 운봉읍 비전마을이다. 지명만 놓고 보면 언뜻 외래어처럼 들리지만 ‘비(碑)가 전해져 내려온 마을’ 혹은 ‘비가 마을 입구에 있다.’ 해서 그러한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지척에 1000m 이상의 지리산 고봉들을 두고 있는 터라 황산(697m)은 그야말로 동네 뒷산 격이지만, 고려 우왕 6년(1380년) 이성계와 휘하 장수들이 수많은 왜구를 물리친 역사적인 곳이자 이성계의 조선 개국을 도운 마을이기도 하다.
당시 왜장은 아지발도였는데 두꺼운 갑옷을 입어 섣불리 죽일 수 없었다고 한다. 아지발도는 나이가 어렸지만 키가 7척에 힘이 장사라 온몸을 무거운 무쇠갑옷으로 두른 탓에 불사신과 같았다. 그를 죽이려면 화살을 이용해 얼굴의 급소를 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이름도 그의 본 이름이 아니다. 그에 대한 두려움이 소문에 소문을 더하면서 만들어졌다는 설이 있다. ‘아리’는 어린아이를 이르는 말이고, ‘발도’는 용맹하다는 뜻을 지닌 몽고말이라고 한다.
날이 저물고 그믐밤인데다 피아의 분별이 어려워 싸움을 할 수가 없다. 바로 그것이었다.
당연히 아지발도도 방심하고 있었을 것이다.
잠시 망설이던 이성계는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는지라 하늘을 향하여‘천지신명이시어 이 나라 백성을 굽어 살피시어 달을 뜨게 해주소서’ 라고 간절히 기도를 올린다. 그런데 갑자기 칠흑 같은 밤하늘에 어디서 솟았는지 보름달이 휘영청 떠올라 대낮같이 비추어 주었다. 깜작 놀라는 적장 아지발도의 얼굴이 달빛에 훤히 빛났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부원수 통두란으로 하여금 먼저 아지발도의 투구를 쏘게 했다. 그 화살이 어김없이 투구를 날리자 아지발도는 벗겨지는 투구의 끈을 입으로 잡으려고 얼른 입을 벌리고 말았다. 그 순간을 놓칠세라 이성계의 화살이 이번에 아지발도의 입속으로 들어가 목구멍을 관통한다. 결국 아군보다 왜구의 수가 10배가 많았지만 모두 섬멸되었고 아지발도가 흘린 핏자국이 지금도 황산 광천에 있는 피 바위에 남아 있으며 이것이 유명한 황산대첩인 것이다. 지금도 운봉 토박이의 열 가운데 아홉은 읍장 이름은 몰라도 아지발도는 다 안다고 한다. 거의 ‘아스팔또’에 가까운 발음으로 기억하는 그 어린 왜장 이름을 어려서부터 듣고 자라 아예 귀에 박힌 탓이다.
이 때 이성계 장군이 달을 끌어 올렸다하여 인월(引月)이라고 지명이 생겨났다고 한다.
◆[장치(장동마을)]
남원시에서 출발, 24번 국도를 타고 운봉 여원재를 올라서면 좌측으로 첫 번째 바라보이는 곳이 연재마을이며 그 마을 안쪽으로 장치부락(장동)이 있다. 예부터 노루가 한가로이 낮잠을 즐기는 형국이라 하여 ‘노루골’이라 불렀는데 이것을 한문으로 표기해서 장동(獐노루장洞)이 되었다. 이 마을의 이름을 딴 여원재에서 고남산으로 가는 길에 있는 작은 고개이다.
[합민성] 641m
합민성(장교산성, 할미성, 합미성, 방학산성)은 남원 시내를 내려다보고 있는 산성으로, 기록에 의하면 동학농민혁명 때 운봉 민보군의 거점이었다고 한다. 조선 말 일목장군 박봉양이 동학군에게 참패를 안긴 곳이 운봉. 농민군이 패전하였다는 방아치와 관음치의 위치 또한 이곳 장치(방아치)와 합민성의 서북쪽 까막재(관음치)로 추정된다. 운봉읍 장교리의 합민성(合民城)은 이 때 쌀을 저장해 뒀던 곳이라 하여 합미성(合米城)으로도 불린다.
또한 남원시 이백면 주민들은 방학산성이라 부른다. ‘남원지’에 ‘재장교리 후 나제시고루(在長矯里 後 羅濟時古壘)’라 하였고 ‘합민성은 석축으로 주위 약 200간(약300미터)이며 산정에 있다’고 하였다. 성내 최고봉은 645m다. 성곽은 능선을 따라 서남 방향으로 누에고치 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으며, 성벽 주위는 319.6m다. 성곽의 서남각(西南角)에 우루(隅樓)를 세워 폭 6m, 길이 8m의 돌출된 적대가 있고, 그 동편에 남문, 북편에 우루대 서북각에 서문 등 세 군데의 성문 유지가 있고 서북편 중앙에 샘터가 남아 있다. 성내에서는 다수의 기와조각, 토기조각 등 삼국시대의 유물이 채집되었다.
◆[까막재(관음치)]
간엄치, 혹은 간암재라고도 하며 덤몰(가동)에서 산동면 대기리로 가는 고개이다. 고종 31년(1894) 11월 김개남 남원 접주가 이는 동학군이 운봉 관군에게 패퇴한 곳이다.
◆[고남산] 846.4m
정상의 조망은 매우 훌륭하여 서부지리: 덕두산-바래봉-팔랑치-부운치-고리봉의 기맥과 반야봉아래의 크고 작은 무수한 봉우리와 도도히 뻗치는 대간의 능선이 대 장관이다. 북동으로 보면 봉화산 백운산 덕유산 자락이 한눈에 들어오고 서편으로 정읍 내장산과 광주의 무등산이 날씨 따라 오락가락 한다. 지형을 살펴보면 이곳 고남산이 남원 함양일대의 중추적인 방위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다. 고남산 정상 부근과 함양읍 성터 부근의 지금도 남아있는 옛 성터 자리들과 작은 고을 너른 들판에 우뚝 솟은 범상치 않는 산세의 기운이 봉화대의 상징 이였지 않나 짐작된다. 고남산 산불순찰 촌노(村老)의 귀뜸이 이성계 장군이 고남산에 제단을 쌓고 큰 제를 지낸 후 왕위에 등극했다 한다. 정상 바로 아래에는 백여평의 H장과 통신시설물이 자리하고 있음도 이 일대 시원하게 열려있는 고남산의 조망 덕이 아닐까 한다.
이성계가 황산벌 대첩을 하기 전, 멀리 운봉쪽을 바라보니 고남산이 유난히 뾰족하여 이곳에 올라 제단을 쌓고 서쪽 기슭에 있는 창덕암 약수터에서 목욕재계하고 3일간의 산신제를 올려 천지신명께 승리를 기원하고, 황산(荒山)에서 대승을 거두고 왜장 아지발도를 사살하였다. 왜장 아지발도는 일본에서 출발할 때 애첩이 조선 황산의 산신이 크게 노하여 불길하다 하여 출정을 만류하였으나 애첩의 목을 단칼에 베었다. 때문에 사람들은 아지발도가 황산에서 죄 값을 받은 것이라고 하였다.
◆[통안재] 작은 독골재 670m
권포에서 산동 월석리 독골로 넘어가는 고개. 독골재에 비하여 동네 안쪽에 있는 고개란 의미. 동리 안 고개.
[매요마을]
이 마을은 원래 풍수설에 의하면 옛부터 말의 허리처럼 형국이 생겼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말마(馬)자와 허리요(腰)자를 합하여 마요리라 하였는데 임진왜란 때에 고승 유정대사(사명당)가 산천을 유람하다가 마요리에 당도하여 매화는 눈속에서도 시들지 않고 피는 꽃이며 향기가 순결하여 이 마을에서 낳은 사람들은 매화같이 순결하고 선량할 것이니 마요리를 매요리(梅要里)로 고치는 것이 지형과 인심에 합당하다고 한 후에 마을 이름을 지금의 매요리로 부르게 되었다.
◆[유치재]
매요리와 가산리의 중간, 사치마을과 연결되는 삼거리다. 인근의 마을은 모두 남원이지만 유치재 자체는 장수군 지역이다.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간다. 유치재를 매요마을 서쪽의 언덕으로 표시한 지도는 착오다. ‘흐름고개’, 즉 경사가 거의 없는 고개라는 의미다. ‘버드나무 고개’로도 부른다.
◆[사치재(아실재)] 498m
697봉과 618봉 중간인데 현재는 88올림픽고속도로가 지나간다. 서는 사치마을이고, 동은 인월면 아곡리다. 조심스럽게 88올림픽고속도로를 횡단하여 원래의 대간길을 따라가라 수도 있고, 사치마을로 우회하는 도로를 따라 유치재로 직접 갈 수도 있다. 유치마을에는 장수시내버스가 들어오고, 아곡리에는 남원시내버스가 들어온다. 동쪽 1Km 지점에 88올림픽고속도로 지리산 휴게소가 있다. ‘모래언덕고개’라는 뜻이다. 이 지역은 암릉은 전혀 없고 고속도로 주변과 사치재 아래로 논과 밭이 있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풍수설에 의하면[飛雁落沙비안낙사] 기러기(雁)가 모래밭에 앉은 형국이라 한다.
◆[새목이재]
시리봉과 ▲697의 중간에 허리를 낮춘 곳이다. 남동쪽 임도와의 사이에 샘터가 있다. 인월면 아곡리인 남쪽 2Km 지점 88올림픽고속도로 옆에 시내버스가 들어온다. 새목이는 ‘새의 목’에 해당되는 고개라는 뜻이다.
◆[아막성]
동국여지승람에 보면 '운봉은 신라 때 모산현이라 하였으며 따로 이 아막성(阿莫城), 아영성(阿英城), 경덕(景德), 운성(雲星)이라 이름하였다'고 하였다. 이를 보면 운봉은 신라 후기에 생긴 것을 알 수 있다. 이 무렵에 백제의 군사기지는 남원에 있고, 신라의 군사기지는 모산(雲峰)에 있어 이때 신라는 백제를 막기 위해 수정산성(水晶山城), 준향산성(準香山城), 합민성(合民城) 가산산성(佳山山城), (성리산성)城里山城의 여러 성을 두었고 백제는 운봉 가산으로부터 정령치에 이르기까지 이중으로 순라로(巡羅路)를 설치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두 나라 사이에 국경분쟁이 치열했음을 알 수 있다.
그 중 아막산성은 옛날 백제에서는 아막성, 신라에서는 모산성으로 불렀던 곳으로, 백제와 신라가 주도권을 잡기 위해 쟁탈전을 벌였던 곳이다. 백제 무왕3년 4만의 백제군사가 이 곳에서 신라군에게 전멸당했다고 한다. 성 둘레는 약 630여m에 이르고, 성주변에서는 기와조각과 백제 토기편들이 발견되고 있다. 현재 북문지와 수구가 있었던 곳으로 보이는 동쪽에 직경 1.5m의 정호지가 있다 (전북지방 기념물 제38호).
모산성은 삼국사기에서 아막산성(阿莫山城)이라고도 하며 지금의 운봉으로, 신라 때 모산현 또는 ‘아영성(阿英城)·아막성’이라고도 적었다. 판소리 동편제의 발상지인 운봉의 옛이름은 지금도 땅이름에 널리 쓰이는 ‘아막’이란 말과 잇닿아 ‘아막골/아막재’였던 것으로 보인다.
◆[복성이재] 550m
기인 변도탄이 天氣를 보니 삼년내에 국가에 큰 전란을 예시 국방을 튼튼히 할 것을 상소하였으나 평화로운 기운을 어지럽게 한다 하여 삭탈관직을 당하고 전란을 대비, 피난처를 탐색하던 중 천기의 기운이 북두칠성 중에 복성이 남쪽으로 비처 별빛을 따라 지리산으로 향하는데 복성별빛이 멈추는 지라, 멎은 곳에 자리를 잡고 움막을 지었다 하여 복성이재로 유래되었다 함.
◆[치재]
치재마을의 서쪽 언덕 위에 있는 고개다. 흔히 이용하는 교통로는 아니다. 동쪽 가까이에 임도가 올라와 있다. 이 지역은 각종 버섯류와 산과일, 산채나물, 고랭지채소 등을 많이 생산하는 지역으로 주로 대간의 동쪽 사면에서 이루어진다. 고개라는 뜻의 ‘峙’와 ‘재’가 합쳐져 지명이 되었다.
치재에 서면 흥부마을로 유명한 아영리 성리마을도 내려다보인다. 이 마을에는 판소리에 나오는 화초장 바윗거리, 흰죽배미, 노리다리 등의 지명이 실제로 있다고 한다.
◆[꼬부랑재]
자료 못 찾음.
◆[다리재]
자료 못 찾음.
◆[봉화산]919.8m
봉화산(919.8m)은 남으로 뻗은 백두대간이 남해 바다에 이르기 전 장중하게 꿈틀대며 솟아오른 곳에 위치해 있다. 고적조사자료(古蹟調査資料)에 따르면 "번암면 동화리 장안산 주(周) 140 간(間) 석축(石築) 남원 함양 계(界)"라 하여 곧 봉수대는 번암면 동화리 장안산에 있고 봉수대의 둘래 약 140칸(약252m)이 되는데 돌로 쌓은 것으로 남원과 함양 간의 경계선에 있다. 이 봉수대는 대체로 통일신라이후부터 폐지된 것으로 보이며 백제와 신라의 국경 분쟁이 잦았던 운봉과 아영면 부근에 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봉화산은 위 기록에서와 같이 봉화산은 전에는 장안산으로 불리워졌고 봉화, 봉수대가 봉화산으로 불리운 것이 확실하다. 지금은 다만 봉화산 정상에서 동북쪽으로 1km 정도 가면 도착하는 무명봉에서 ‘봉화산 봉화대’라는 팻말로 옛 자취를 짐작해 볼 뿐이다. 봉화산은 비록 이름만 남았지만, 대신 5월이면 철쭉 군락이 봉수대에 횃불이 타오르는 듯이 펼쳐진다.
◆[광대치]
장수군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지지리계곡과 함양군 대안리를 나누는 고갯길이다. 광대치 쉼터에서 대안리 대상동으로 내려서는 길이 갈라진다. 봉화산을 앞두고 만나는 ▲870에서 대간은 경상남도와 헤어져 전라북도 땅으로 진행한다. 다시 경상도를 만나는 것은 지리산 반야봉 남쪽의 삼도봉이다. 광대치는 ‘넓고 큰 고개’라는 뜻이다. 동서 양족에 계곡을 거느리고 있는데, 이 계곡을 사이에 두고 서쪽의 능선과 동쪽의 능선도 해발이 높아 산 속에 갇혀 있는 형상이다.
◆[월경산] 해발 981.9m
대간이 백운산을 거치면서 중치에서 그 기운이 잠시 떨어지는 듯하다가 월경산에서 다시 원상을 회복한다. 정상은 대간에서 150m쯤 벗어나 있다. 백운산을 한 발치 떨어져서 관찰 할 수 있는 곳이다. 동북쪽에 위치한 백운리에서의 시각으로 ‘달이 기우는 산’이란 뜻이다.
◆[중치(중재)]
서쪽으로 장계와 번암면을 연결하는 비포장도로가 남북으로 진행한다. 백운산의 남쪽 사면과 중치 부근은 목장이 여러 군데 여서 목초를 나르기 위한 임도가 어지럽게 흩어져있다. 중치와 중기마을은 임도로 연결괴어 있다.
‘가운데에 있는 고개’라는 뜻인데 이곳에서는 ‘백운산과 월경산의 가운데’라는 의미다. 운산리에 이 고개 이름을 딴 중재마을이 있다.
◆[중고개재]
고개의 동쪽 백운산 자락은 신라 영은조사(靈隱祖師)가 창건한 영은사지를 비롯해 많은 암자가 있는데. 특히 선농일치(禪農一致)에 의한 선농불교를 제창한 용성스님이 평소 선사의 지론인 선농일치를 몸소 실천하기 위해 스스로 호미를 들고 세운 농장인 화과원이 이곳에 있다. 그래서 화과원 동쪽 백운산을 넘는 고개는 절고개이며, 중들이 많이 넘나들었다는 이 고개는 중(衆)고개라는 이름이다. 용성스님은 기미독립선언서 대표 33인중 한 분이다.
◆[백운산]1278m
백운산은 전북 장수군 번암면 지지리와 경남 함양군 서상면, 백전면에 경계를 하고 있다. 백운산의 이름은 흰백(白), 구름운(雲)을 써서, 산이 높아서 산봉우리에 항상 흰 구름을 감싸 안고 있는 산이라 뜻이다. 백운산의 물줄기는 서쪽은 백운천을 통하여 섬진강으로 흘러들고, 동쪽은 옥산천을 통하여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백운산 정상에서 바라보면 서쪽으로는 장안산과 괘관산, 북쪽에는 깃대봉과 남덕유산, 남쪽으로는 월경산과 봉화산 등이 보인다.
백운산을 만산홍엽의 가을 단풍과 금상첨화로 산허리마다 흐드러진 갈대와 싸리나무, 그리고 산죽이 한데 어우러져 비경의 극치를 이루는 산으로 유명하다.
◆[암봉]
자료 못 찾음.
◆[선바위고개] 해발 1040m
백운산에서 영취산을 가다보면 만나게 되는 작은 고개. 고개 위에 큰 바위 하나 있음.
◆[영취산]1075.5m
장수 영취산((靈鷲山)은 백두대간에서 금남호남정맥 분기점으로 함양 진산인 백운산에서 백두대간이 육십령으로 북상하는 도중에 거치는 산이다. 정상에서 서쪽으로 금남호남정맥줄기가 갈라져 나간다. 바로 무령고개를 지나 장안산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또한 영취산의 물줄기는 동으로는 낙동강, 남으로는 섬진강, 북으로는 금강을 가른다. 북으로 남덕유산이, 서쪽으로 장안산이, 남으로 백운산이 조망된다.
장수영취산은 신령령(靈), 독수리취(鷲)를 쓰는데, 그뜻은 산세가 '빼어나다'. '신묘하다'. 신령스럽다는 뜻으로 산줄기와 물줄기의 요충지인 이름에 걸맞은 이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지도상에는 영취산의 이름이 없다. 혹자들은 장안산을 영취산으로 부르고 있는데, 이는 장안산이 주변의 산줄기중에서 주산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영취산은 13개 정맥 중 3개의 정맥을 가지 친 중요한 지점이다. 장안산-팔공산을 뛰어넘어 진안의 명산 마이산의 금남호남정맥, 대둔산을 경유 부여부소산으로 빠지는 금남정맥, 내장산을 경유 광주무등산-순천조계산-광양백운산으로 떨어지는 호남정맥 이다. 동으로 낙동강 서남으로 섬진강, 서북으로 금강을 발원하는 삼강 분수령이다. 영험한 수리취는 무엇을 의미할지 아마도 호남3대정맥 발원지(發源地)영취산(靈鷲山) 영험한 독수리 산으로 당당함을 표현함이 아닐까? 장수군, 함양군 도 군계의 백운산-영취산은 이 지역 정신적 지주의 산이다.
- 영취산 기슭의 의암 주논개
충절의 여신 주논개는 1574년 영취산 북쪽의 대곡리 주촌마을에서 태어났으며 왜장을 껴안은 채로 죽은 논개의 묘는 백두대간 육십령 동남쪽으로 십리쯤 떨어진 함양 서상면 금당리 방지마을 뒷산에 있다. 대간에서 나고 대간에 묻힌 것.
논개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보통 경상우도의 병마 절도사인 최경회(崔慶會)의 후처로, 임진왜란 때 최경회가 전사하자 촉석루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본군의 잔치에 참석하여 일본 장수인 게야무라 로구스케(毛谷村六助)를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한 정도까지만 알고 있다.
성은 주씨(朱氏)이고, 본관은 신안(新安:중국)이며, 전북 장수(長水)에서 태어났다. 원래 양반가의 딸이었으나 아버지가 사망하고 집안에 어려움이 겹쳐 가산을 탕진하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최경회(崔慶會)의 후처가 되었다고 전한다. 그 밖의 자세한 성장과정은 알 수가 없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5월 4일에 이미 서울을 빼앗기고 진주성만이 남았을 때 왜병을 맞아 싸우던 수많은 군관민이 전사 또는 자결하고 마침내 성이 함락되고 최경회는 일본군에 의해 전사한다(제2차 진주성 싸움). 일본군 왜장들은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촉석루(矗石樓)에서 주연을 벌이는데 논개는 최경회의 원수를 갚기 위해 기생으로 위장하여 참석하게 된다.
이 자리에 있던 그녀는 계획대로 열손가락 마디마디에 반지를 끼고 술에 취한 왜장 게야무라 로구스케[毛谷村六助]를 꾀어 벽류(碧流) 속에 있는 바위에 올라 껴안고 남강(南江)에 떨어져 적장과 함께 죽었다. 훗날 이 바위를 의암(義岩)이라 불렀으며, 사당(祠堂)을 세워 나라에서 제사를 지냈다. 1846년(헌종 12) 당시의 현감 정주석(鄭胄錫)이 장수군 장수면(長水面) 장수리에 논개가 자라난 고장임을 기념하기 위하여 논개생향비(論介生鄕碑)를 건립하였다. 그가 비문을 짓고 그의 아들이 글씨를 썼다. 1956년 '논개사당(論介祠堂)'을 건립할 때 땅 속에 파묻혀 있던 것을 현 위치에 옮겨놓았다. 비문에는 "矗石義妓論介生長鄕竪名碑"라고 씌어 있다.
[영취산성]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 교리에 있는 가야시대 성곽으로, 1983년 12월 20일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85호로 지정되었다. 성 둘레는 1.5㎞, 높이는 3m, 너비 약 4.5m로 창녕군에서 관리한다. 신라 지마왕(祗摩王) 때 신라와 가야의 국경에서 전쟁이 자주 일어나자 가야가 신라의 침범을 막으려고 축성했던 것으로 보이며 임진왜란 때에는 왜적과 접전한 곳으로 전해진다. 《영산군지》에는 현감 김봉수(金鳳洙)가 1875년에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주변에 영산 고분군이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사용했던 성이다.
영축산 능선의 병풍 형태의 자연암반을 북벽으로 하고 서남쪽의 계곡을 성내로 하는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다. 남쪽이 좁은 계곡을 성문으로 삼고 낮은 지역에는 자연석으로 성벽을 쌓았는데 높은 암벽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능선을 따라 축조하였다. 북쪽과 전면 동부는 비교적 완만한 편이나 서부는 자연 풍화로 붕괴되었다.
- 영남 알프스
영남 알프스는 '산경표'(조선 영조 때 신경준이 편찬한 것으로 알려진 조선의 산맥 체계를 도표로 정리한 책)에 따라 백두대간이 태백지역의 매봉산에서 갈라져 부산 앞바다 쪽으로 이어지는 낙동정맥에 위치한 1천m 이상의 산들을 얘기한다. 이곳의 산들이 사계절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각종 문화재 등을 간직하고 있어 알프스에 비견할 정도로 아름다워 붙여진 이름이다.
우리나라의 산지는 대체로 태백산맥과 함경산맥을 중심으로 하는 경동지형으로 구분된다. 이 두 산맥을 기준으로 동쪽의 경사는 급하고 서쪽의 경사는 완만한 동고서저 지형을 이루고 있는데, 태백산맥의 가장 남쪽에 위치한 것이 바로 영남 알프스라고 불려진다. 영남 알프스의 정상 부분이 평탄한 고위평탄면으로 나타나는 이유도 경동성 요곡운동(신생대 제3기의 중기 이후 넓은 범위에 걸쳐 지각이 휘는 운동으로 동쪽의 상승이 크게 나타남)에 의한 경동지형의 영향으로 형성된 것이다. 신불산과 영취산 사이의 신불평원도 이에 해당한다.
- 산이 물을 가르는 상징적인 곳, 장수 수분재(水分峙)
호남정맥의 시발점인 영취산에서 서진(西進)하여 완주의 주화산까지가 섬진강과 금강을 가르는 산줄기이다. 19번 국도가 호남정맥을 관통하는 곳이 수분치(水分峙)인데 이곳이 산이 물을 가르는 상징적인 곳이다. 금강의 발원지는 장수군 장수읍 수분리, 금남호남정맥의 산줄기인 신무산(896.8m) 북동계곡의 ‘뜬봉샘’으로 알려져 있다. 장수는 산고수장(山高水長), 즉, 산이 높고 물이 긴 고장이다. 이 때문에 이름도 긴장(長), 물수(水)를 쓴다.
수분치(水分峙)는 섬진강과 금강의 분수령(分水嶺)이라는 뜻이다. 이 때문에 이름이 수분재이며, 지명도 물을 나눈다는 뜻으로 장수읍 수분리(水分里)이다. 특히, 수분치에서 서쪽으로 0.5km 위치에 있는 원수분마을 뒤산인 신무산 기슭에는 금강의 발원샘인 ‘뜬봉샘’이 위치하고 있다.
실제로 옛전에 이 수분재에 집이 있었는데, 이집의 지붕에 하늘에서 떨어지는 천수(天水)가 남쪽가면 섬진강, 북쪽으로 가면 금강의 물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의 수분재는 주유소와 휴게소 등이 들어서서 분수령을 구분하기가 어렵다. 다만, 분수재 위에 있는 소나무를 정맥꾼들이 ‘수분송(水分松)이라고 부르면서 이를 분수령으로 삼고 있을 뿐, 농경지 개간으로 정맥의 능선이 뭉개져 능선 구분도 어렵게 되어 있다.
- 팔공산에서 만나는 네 줄기의 강줄기
영취산에서 서진하던 정맥(正脈)은 수분재에서 서북(西北)으로 급히 방향을 틀어 신무산을 거쳐 국도 13번과 만나는 차고개을 건너 팔공산에 이르게 된다.
팔공산은 섬진강 발원지 데미샘을 품고 있는 산이다. 팔공산은 전북의 장수군과 진안군의 경계를 이루는 산인데 팔공산을 중심으로 오른쪽인 동쪽으로 흐르면 금강의 물줄기가 된다. 호남정맥이 금강과 섬진강을 가르는 산줄기라 했으니 왼쪽으로 흐르면 당연히 섬진강의 물줄기가 된다.
그런데 팔공산에서 서진하여 분기하는 지맥이 있다. 마령치를 건너 구름재에 이르면 이 지맥은 다시 스스로 분기하는데 오른쪽으로 분기해간 지맥이 성수지맥이요, 왼쪽으로 분기해간 지맥이 개통지맥이다. 이 지맥은 장수-진안-임실군의 경계이기도 하다. 이리하여 팔공산에서 보면 네 개의 유역을 만나게 된다. 팔공산의 오른쪽을 흐르는 금강유역이 그 하나요, 성수지맥과 팔공산의 앞으로 진행하는 호남정맥사이의 섬진강이 그 둘이며, 영취산에서 팔공산을 돌아 개통지맥으로 갈리는 요천이 그 셋이며, 마지막 넷은 성수지맥과 개통지맥으로 갈리는 오수천이다.
[호남정맥]
전라북도 장수군 주화산(珠華山)에서 뻗어 내장산에 이르러 전남 지역을 동서로 가로지르며 다시 전남 광양시의 백운산에 이르는 산줄기의 옛 이름. 한반도 13정맥의 하나로, 금남호남정맥(錦南湖南正脈)의 종착지인 주화산에서 갈라져 남서쪽으로 내장산에 이르고, 내장산에서 남진하여 장흥 제암산(帝巖山)에 이르며, 제암산에서 다시 남해를 끼고 동북으로 상행하여 광양 백운산(白雲山)에 이르는 산줄기이다. 이 산줄기는 영산강 유역을 이루는 서쪽 해안의 평야지대와 섬진강 유역을 이루는 동쪽의 산간지대로 갈라놓았다. 이 산줄기의 산들은 대체로 곰재·만덕산·경각산(鯨角山)·오봉산·내장산·백암산·추월산(秋月山)·산성산(山城山)·설산(雪山)·무등산·천운산(天雲山)·두봉산(斗峰山)·용두산·제암산·일림산(日林山)·방장산(方丈山)·존제산(尊帝山)·백이산(伯夷山)·조계산·희아산(戱娥山)·동주리봉·백운산 등이다.
[금남호남정맥]
전북 장수의 장안산(長安山:1237m)에서 서북으로 뻗어 무주의 주화산(珠華山:600 m)까지 약 65km에 이르는 옛 산줄기의 이름. 한반도 13정맥의 하나로, 백두대간(白頭大幹)에서 갈라져 금남정맥(錦南正脈)과 호남정맥으로 이어주는 산줄기이다. 장안산에서 수분현(水分峴:530m) ·팔공산(八公山:1151m) ·성수산(聖壽山:1,059m) ·마이산(馬耳山:667m) ·부귀산(富貴山:806m)으로 이어져 주화산에서 끝난다. 또 주화산에서는 금남정맥이 시작되어 호남정맥으로 이어진다. 또 이 산줄기의 팔공산 서사면(西斜面)에서 발원하는 천천(天川)이 북류하여 금강을 이루고, 남사면(南斜面)에서 발원하는 오원천(烏院川)이 섬진강을 이룬다.
[낙동강]
영남지방 전역을 유역권으로 하여 그 중앙 저지대를 남류하여 남해로 흘러드는 하천. 길이 506.17km. 유역면적 2만 3384.21㎢. 압록강(鴨綠江) 다음가는 한국 제2의 강이다. 강원 태백 함백산(咸白山:1,573m)에서 발원하여 상류부에서는 안동을 중심으로 반변천(半邊川)을 비롯한 여러 지류를 합치면서 서쪽으로 곡류하다가 함창(咸昌) 부근에서 다시 내성천(乃城川)·영강(嶺江) 등 여러 지류를 구심상(求心狀)으로 받아들이고, 유로(流路)를 남쪽으로 돌려 상주(尙州) 남쪽에서 위천(渭川)을, 선산(善山) 부근에서 감천(甘川), 대구(大邱) 부근에서 금호강(琴湖江), 남지(南旨) 부근에서 남강(南江)을 합친 뒤 동쪽으로 유로를 바꾸어 삼랑진(三浪津) 부근에서 밀양강(密陽江)을 합치고 나서 다시 남쪽으로 흘러 남해로 들어간다. 옛날에는 내륙지방의 교통동맥이 되어 조운(漕運) 등에 크게 이용되면서 강기슭에 하단(下端)·구포·삼랑진·수산(守山)·풍산(豊山)·안동 등의 선착장이 번창하였고, 또 6·25전쟁 당시에는 유엔군의 최후 방어선이 된 바 있다. 한편, 김해삼각주 말단부에 있는 을숙도(乙淑島) 일대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철새도래지이다.
[섬진강]
길이 212.3 km. 유역면적 4,896.5 km2. 전북 진안군과 장수군의 경계인 팔공산(八公山)에서 발원하여 진안군 백운면(白雲面)과 마령면(馬靈面) 등에 충적지를 만들고, 임실군 운암면(雲岩面)에서 갈담저수지로 흘러든다. 곡성읍 북쪽에서 남원시를 지나 흘러드는 요천과 합류한 후 남동으로 흐르다가 압록 근처에서 보성강과 합류한다. 그 이후 지리산 남부의 협곡을 지나 경남 ·전남의 도계(道界)를 이루면서 광양만(光陽灣)으로 흘러들어간다. 대체로 강너비가 좁고 강바닥의 암반이 많이 노출되어 있어 항해하는 데는 불편하다.
[데미샘]
데미라는 말은 더미(봉우리)의 전라도 사투리. 금남호남정맥의 산줄기인 팔공산 북서쪽의 '천상데미(하늘에 오르는 봉우리)' 서쪽 기슭, 진안군 백운면 원신암마을 북쪽 계곡 상추막이골에 위치. 천상데미에 있는 샘이라 하여 데미샘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사시사철 물이 마르지 않고 수정같이 맑고 이가 시리도록 차가우며 다른 어떤 샘에서도 맛볼 수 없는 미묘한 맛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무령고개] 900m
백두대간에서 갈라진 금남호남정맥을 넘는 첫 고개로, 마치 춤추는 용과 같다 해서 무룡이라고도 불린다.
◆[민령]
싯대봉과 영취산 사이에 있는 중요한 참고점이다. 백운산은 논개의 고향이다. 생가는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마을이고, 무덤은 경남 함양군 서상면 금당리 방지마을이다. 민령은 바로 논개의 생가와 무덤을 오가는 대간의 고갯길이다. ‘밋밋한 고개’라는 우리 이름인데, 소리에 따라 ‘岷’이라는 한자를 음차하였다.
◆[구시봉(깃대봉)]1014.8m
장수군 장계면과 경남 함양군 서상면의 경계에 있다. 옛날 임금님이 신하나 백성들 중에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땅을 하사했는데, 이를 사패지(賜牌地)라 했고, 이 땅에는 누구의 사패지라고 하는 깃대를 꽂아 놓은 데서 깃대봉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깃대봉은 특히 가을의 억새와 구절초 향으로 유명하다. 정상에 오르면 북으로 남덕유산, 동으로는 기백산, 남쪽으로는 장안산과 백화산이 보인다.
-출처
(신동길저/뫼따라 하늘까지 中)
(남원시청 홈페이지)
(다음블로그 약수산상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