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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지난밤 비바람에 씻긴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다. 남편은 배낭에 산행 준비물을 챙겨 넣느라 분주하다. 주말은 나와 함께 하려고 시간을 비워 두었으니 빨리 준비하라고 채근이다. 그러나 나의 행동은 굼뜨기만 하다. 작년 말에 아버님 제사장을 봐오다가 발목을 다쳤다. 회복되기는 했지만, 아직 산행은 무리가 될 것 같아 주저했더니 걷기 편한 산에 올라가서 바람이나 쐬고 오자고 앞장선다.
남편은 산행을 좋아한다. 맞선본 당일에 치마 입고 구두 신은 나를 데리고 앞산으로 향했다. 두 번째 만나는 날엔 함께 지리산을 올랐다. 그 뒤로도 우리 둘의 데이트 장소는 거의 산이었다. 첫아이 임신 소식들 듣자, 남편은 등산용 베이비 캐리어를 준비해 두고 출산을 기다렸다. 덕분에 큰아이는 걸음마도 하기 전부터 아빠 등에 매달려 등산을 시작했다.
돌이 겨우 지난 아이는 정오가 되면 어김없이 낮잠을 잤다. 산에서도 그 시간만 되면 잠이 들었다. 편편한 바위에 자는 아이를 눕히고는 잠들어 있는 모습이 귀하고 예쁘다며 사진을 찍어 와 자랑했다. 차가운 곳에서 자면 어른도 입이 돌아가는데 하물며 어린애를 서늘한 바위에 재웠다고 남편은 시어머님께 혼이 났다. 칠십이 넘어 얻은 맏손자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어른이셨다.
시댁은 위로 시누이가 네 분, 아래로 시동생이 둘이었다. 막내 시동생까지 결혼하자 남편은 가족 산행을 시작했다. 본인이 산 대장이 되어 앞장섰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가족 행사이니 빠지지 말고 모두 함께하기를 종용했다. 겨우 대여섯 명이 참석해 승용차 한 대에 타고 간 적도 있었고, 조카네 가족까지 모여 25인승 버스를 빌려서 갔던 때도 있었다.
더운 여름이면 산행 대신 냇가나 계곡으로 물놀이를 갔다. 추운 겨울이면 밥솥, 국솥까지 보따리에 싸고 음식을 준비해서 자연휴양림으로 갔다. 마치 직장의 연수회 팀이나 갈 법한 규모가 제일 큰 방을 빌려 대식구가 몰려갔다.
겨울 나들이 준비는 국 끓이기로 시작한다. 초보 주부인 나는 돼지등뼈를 사골국처럼 뽀얗게 고아놓고 무청 시래기를 부드럽게 삶아서 국 끓일 준비를 해둔다. 그러면 시어머님은 등뼈 시래깃국을 한 찜통 가득 구수하게 끓여낸다. 국 한 찜통에 김장 김치 한 통이면 준비는 다 한 것이나 진배없다. 찬바람을 맞으며 산꼭대기를 다녀온 식구들은 금방 지은 밥에 시래깃국과 김장 김치만으로 몸이 풀리고 행복해진다. 요즘도 남편은 그때의 시래깃국을 먹고 싶어 한다. 배운 대로 국을 끓여보지만, 그 맛이 나질 않는다. 내 솜씨로는 시어머님의 연륜 깊은 손맛을 흉내 낼 수가 없는 까닭이다.
시어머님은 우리들 산행에 종종 함께 하셨다. 큰 시누이와 산 아래에서 나물을 뜯고 하산하는 가족을 기다리셨다. 봄이면 냉이, 달래, 쑥, 머위를 뜯어 집집이 한 봉지씩 가져가도록 갈라 담아 놓으셨다. 여름이면 보드라운 명아주 잎을 뜯어와 말려놓으셨다. 묵나물이 일품인 명아주는 시어머님 덕분에 들풀이 아니라 먹는 나물인 줄 알게 되었다.
큰 시누이와 둘째 시누이가 돌아가셨다. 그새 아이들도 다 장성해서 독립하고 칠 남매의 가족 산행도 막을 내렸다. 그 대신 요즘은 일흔이 넘으신 시누이 두 분을 모시고 식사하고 차 마시며 옛날이야기를 나눈다. 스무 해가 넘도록 함께 산을 오르내린 만큼 수많은 추억의 이야기꽃을 피운다.
지난주 남편이 산에서 뜯어온 다래 순을 말려서 양파망에 담아 뒤베란다에 걸어 두었다. 하산길에 뜯어온 머위는 삶아서 쓴맛을 조금 덜어내고 된장을 넣고 무쳐 먹었다. 들나물에는 문외한이던 나도 봄이면 쑥 한 줌 뜯어와 쑥국을 끓여 먹으며 봄을 느낀다. 쇠비름을 된장 고추장과 참기름을 두른 양념에 무쳐 먹으며 여름을 지난다. 이름도 모르던 낯선 나물 반찬이 특별한 제철 음식이 된 건 시어머님과 함께한 세월 덕분이다.
남편은 여전히 산행을 재촉하지만, 아직 내 발목 상태로는 힘들 것 같다.
“여보! 오늘은 산에 가지 말고 어머님 산소나 다녀옵시다. 어머님 좋아하시던 작약꽃 한 다발 구해서.”
금 선생 고마워(10분의 시간 길)
나는 승용차를 타고 출근한다. 근무지가 집과 멀어서 아침마다 남편이 운전해서 데려다준다. 평소에는 정한 시간에 집에서 출발하면 제때 출근이 가능하다. 같은 시간에 집에서 나가도 도로 사정 때문에 아슬아슬하게 직장에 도착할 때가 종종 있다. 그래서 우리는 10분 일찍 집을 나서기로 했다. 혼잡한 시간을 비껴간 덕분인지 사무실에 들어서면 이삼십 분이나 여유가 있었다. 그렇게 도착하는 대로 업무를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함께 일하는 직원이 내가 일찌감치 와서 일을 하는 것이 자신은 불편하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들으니 난감했다.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집에서 출발은 그대로 하고 여유시간만큼 걷다가 시간 맞춰 사무실에 들어가기로 했다. 혼자 걷기가 심심해서 남편을 졸라 함께 하기로 했다.
내 일터는 동변동이고 가까이에 동화천이 흐르고 있다. 차 타고 다닐 때는 몰랐는데 산책로를 따라 걸어보니 동화천은 계절 따라 풍경이 다채롭다.
바람이 찬 늦겨울 아침, 마른풀 사이로 먹이 찾아 물 위를 가로지르는 오리 가족과 고고한 척, 한 다리로 서 있는 두루미가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봄이면 줄지어 선 벚꽃의 개화와 바람을 이기지 못한 낙화가 아름답다. 초여름인 요즘은 산책로 따라 만발한 금계국이 주단을 깔아 놓은 듯 곱다. 노란 꽃잎과 연둣빛 줄기를 보노라면 어떻게 저런 색을 만들어 낼 수 있는지 자연 앞에서 경이로움을 느낀다.
제방 따라 늘어선 왕 버드나무 그늘에 앉아본다. 늠름한 자태만큼이나 풍성한 초록의 나뭇잎을 쳐다보노라면 나도 마치 초록의 한 부분이 되는듯하다. 나뭇잎 사이로 바라보는 하늘은 선명한 쪽빛이다. 아침 햇살을 머금은 버들잎은 반짝반짝 빛이 난다.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하는 시간은 마음이 넉넉해진다.
삼십여 년의 세월을 별 탈 없이 살아 온 우리 부부는 가장 편한 친구다. 퇴직 후 일상이 여유로운 남편은 나와 함께하는 시간이 적다고 투덜거린다. 이즈음은 같이 걸을 수 있어 좋아한다. 하루하루 달라지는 자연의 변화를 보고 느낄 수 있는 아침 산책은 우리 두 사람에게 귀한 선물이다. 이 행복한 시간을 벌어 준 동료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한다.
" 금 선생, 고마워!"
이사
베버선이다. 보자기에 싸여 있는 게 무엇인가 펴 보니 베버선 한 켤레가 반으로 접혀있다. 작은 새와 제비꽃을 수놓은 양복 덮개도 모서리의 자국이 진하게 눌린 채로 밑에 깔려있다. 아흔을 앞둔 엄마가 스물여섯이던 해 시집올 때 가지고 온 혼수품이다.
뻣뻣한 버선에 발을 억지로 밀어 넣어 본다. 부잣집 맏딸이 이런 버선만 혼수로 가져왔냐는 물음에 그 당시 혼수는 저고리가 몇십 벌, 치마가 몇십 벌, 버선은 몇 죽 이렇게 옷을 많이 지어 오는 게 소문난 혼수였단다. 많이 준비해 와서 팔촌 동서들까지 혼수품을 하나씩 다 안겼다며 우쭐해한다. 새색시의 엄마가 보였다가 사라진다.
엄마는 단독 주택의 이층에서 35년을 살아왔다. 이제는 걷기가 힘들어 경로당 나들이도 몇 번을 쉬어야 갈 수 있다. 계단을 오르내리기 힘들어 마침, 이사 나간 아래층으로 내려오기로 했다. 한 곳에서 서른 해를 넘게 살아온지라 묵은 살림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아랫집은 좁아서 살림 정리를 해야 이사를 할 수 있다. 성격이 깔끔해서 남이 당신 살림 손대는 것은 참지 못하는데 앉아 계시는 것도 힘들어 내 손을 빌리게 되었다
장롱 정리부터 시작했다. 첫 월급 탄 기념으로 백화점 세 군데를 다니면서 고르고 골라서 내가 사준 긴 코트가 보인다. 색깔도 길이도 마음에 든다고 좋아하시던 그 코트가 아직도 자개농 한쪽에 떡 하니 자리 잡고 있다. 서른일곱에 먼저 가신 아버지 모시 바지저고리를 뜯어서 허리만 달면 되도록 주름까지 잡아놓은 모시치마도 있다. 우리 아들들이 외갓집에 가면 베고 자던 바둑이 베개도 여전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다. 내 아이들의 흔적을 엄마의 장롱에서 만나 나는 한참이나 기억을 더듬었다.
옷 하나를 보여주고 버릴 것인지 말 것인지를 물어본다. 엄마는 대답은 하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간다. 동네 아낙들이 호롱불 아래 모여 누구네 집 딸이 시집간다고 옷을 짓는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와 한 번은 들어 본 적이 있음 직한 엄마네 사촌오빠가 재 너머로 성묘하러 간다. 외할아버지와 우리 세 식구가 주문진 가서 산 오징어 회를 먹고 온다. 바람 부는 해변에서 머리카락 날리는 수줍던 아이는 나였던 것 같다. 어느새 흑백사진 속의 주인공들이 모두 다 살아난다. 엄마의 기억 속 그때는 어제인 듯 생생하다.
잊고 있었던 내 유년도 덩달아 살아난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다. 급식으로 받은 옥수수빵이 찌그러질까 봐 손에 받쳐 들고 온다. 한 입 베어 물면 입안에 알갱이가 동글동글 구르는 고소한 빵이지만 집에 가서 엄마와 같이 먹겠다고 아껴서 들고 온다. 그런데 어떤 남자애가 뒤에서 뛰어와 빵을 채간다. 울면서 집에 돌아와 엄마에게 이른다. 맛있는 빵을 먹고 오지 왜 들고 오면서 뺏기느냐며 내 눈물 자국을 닦아준다. 그때 우리 엄마는 참 고왔다.
암만 아까워도 버려야 할 것은 골라내야 한다. 예순 해를 넘도록 엄마를 따라다닌 버선도, 양복 덮개도 분리수거 박스로 들어간다. 고운 꽃무늬 한복도 아깝다고 따로 보자기에 싸놓은 가죽 코트도 엄마를 떠난다. 동생결혼식에서 입은 쪽빛 치마와 옥색 저고리는 챙겨놓으신다. 영감님 곁으로 가실 때 입고 가신다고 골라놓았다. 마흔이 넘도록 장가를 가지 않아 애를 태우던 외아들 잔칫날 입으신 옷이다. 당신 가장 행복한 날을 함께한 옷이리라. 젊어서 먼저 가신 영감님이 늙은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면 어쩔까 걱정이 된다고 한숨이다. 그래도 ‘귀신이니 귀신같이 알아볼 것’이라 농을 하니 그렇기도 하겠다며 벽에 걸린 아버지 사진을 쳐다본다.
큰방은 엄마의 갤러리다. 젊고 잘생긴 아버지가 가장 높이 계시고 우리 결혼식 사진이 그 밑에 있다. 동생이 결혼하기 전까지 우리 아이들의 백일사진과 돌사진이 좋은 자리를 차지했다. 동생이 결혼하고 엄마가 친손자 손녀를 보게 되면서 우리 아이들 사진은 구석 자리로 밀리더니 이젠 아예 엄마의 보물들에 자리를 다 내줬다. 50일 된 아기 때부터 태권도복을 입은 늠름한 모습까지 엄마 눈길 가는 곳엔 온통 엄마 보물들 사진이다. 혼자서 사진을 보면서 이름을 불러보고 대화한단다. 멀리 있는 자손들을 대신해 저 사진들이 효도하고 있었던가 보다.
건넌방에 있는 재봉틀 이야기를 또 하신다. 옷을 직접 지어 입어야 하는 그 시절에 손바느질을 대신해 준 엄마의 자존심이자 자랑거리였던 귀한 물건이다. 작은 밥상보부터 내 고무바지, 엄마의 속바지와 통치마를 만들어 내던 재봉틀 소리는 늘 꿈결에 들었던 듯하다. 온종일 골목을 뛰어다니며 놀다 돌아와 저녁만 먹으면 곯아떨어졌다. 탈탈거리는 재봉틀 소리에 눈을 떠보면 백열등 아래 엄마가 바느질하고 계셨다. 새벽인지 저녁인지 몰라 벌떡 일어나 앉으면 '얼른 아침 먹고 학교 가야지' 하고 놀리던 엄마의 웃음이 떠오른다.
개량 한복을 입으면 편할 것 같다는 남편의 말에 얼른 사위 옷 한 벌을 지어 주시는 데 기여한 것도 저 재봉틀이다. 세월이 지나면서 다리를 훤히 내놓고 있던 재봉틀은 자개로 모양을 낸 통속에 들어앉았다. 자개농과 구색을 갖춰 큰방 살림살이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더니 큰방에 침대가 들어오면서 밀려나 건넌방에 가 있다. 아끼시는 물건이라 당신 아들이 가져가길 바라신다. 양복도 맞춤옷보다 기성복을 더 많이 입는 세월이라 가지고 갈 당사자의 의견을 들어볼 일이다
부엌살림은 미리 많이 줄여 놓으셨다. 싱크대 구석에 아까워 버리지 못한 스테인리스 제기가 정리되어 있다. 아들네 집으로 제사를 보낼 때 남원목기로 제기를 장만해 보낸 덕에 쓰던 스테인리스 제기는 남아있다. 빈 상자에 담아내니 그래도 아깝다며 국그릇 밥그릇 세 벌을 골라 챙기신다. 서랍을 정리한다. 은수저는 아들 줄 것이라며 수저통을 고무줄로 꽁꽁 묶어 놓으셨다. 꽁지 달린 묵직한 놋 주걱도 있다. 가마솥에 밥해 먹던 시절에 쓰던 것이란다. 어릴 때 할머니 댁에서 본 듯하다. 할머니도 쓰시고 엄마도 쓴 저 놋 주걱은 나이가 얼마나 될까? 한쪽 모서리가 닳은 놋숟가락도 있다. 감자 긁던 숟가락이란다. 거무스름한 녹이 낀 놋숟가락의 나이도 가늠하기가 어렵다.
코 고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잠이 드신듯하다. 부잣집이라고는 하지만 맏딸이 살림 밑천이던 시절, 자라면서 동생들을 돌보고 조카들을 보살피고 시집와서는 시할머니까지 계신 층층시하 시집살이를 하셨다. 손아래 시누이가 넷씩이나 되는 시집살이였지만 시어머니보다 시할머니의 사랑이 커서 견딜 만했다고 한다.
아버지를 따라나선 객지 생활은 없는 살림이었지만 엄마 기억 속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광부였던 아버지를 돕겠다고 점방 딸린 집을 얻어 국숫집을 차렸다. 국수를 끓여 파는 국숫집이 아니라 수동기계로 국수를 만들어 마른국수를 파는 집이었다. 내 기억에 남아있는 국숫집은 국수 마르는 냄새다. 젖은 국숫발 사이로 살랑이는 바람에 묻어오던 그 향수 어린 냄새는 지금도 내 코는 기억하는데 말이나 글로 설명하기가 어렵다.
이모부의 탄광 사고 이후 겁이 난 엄마는 아버지를 설득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생활이 안정되면서 기다리던 아들도 낳았다. 다시 시작한 객지 생활 3년여 만에 남편을 여의고 아이 둘을 데리고 살아야 했던 세월의 무게를 우리가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 잠든 모습을 내려다보니 뽀얀 얼굴이 고우시다. 피부도 곱고, 주름도 많지 않다. 그 어렵고 힘든 세월을 지나오셨는데 어찌 저리 고울 수 있을까? 버리지 못한 물건들보다 더 많은 사연과 이야기가 쌓여있는 엄마는 이제 좀 쉬고 싶은가 보다. 다리가 아파 못 걷겠다 하심은 여태껏 걸어온 그 힘든 걸음들을 좀 쉬어도 된다는 몸의 이야기일 것이다. 뭔가를 자꾸 잊어버린다는 엄마의 머리는 이제 걱정과 근심을 그만해도 된다는 몸의 이야기는 아닐까?
화초에 물 주기도 버겁다며 엄마는 별 수국 화분만을 곁에 두었다. 작년 어버이날, 카네이션 대신 사다 드린 꽃 화분이다. 줄기까지 말라버려 죽은 줄 알았더니 올해 꽃을 피웠다고 좋아하신다. 내년에도 꽃을 볼 수 있을런가 하시는 말씀에 '당연하지!'라고 맞장구친다. 무심하게 물어보고 무심하게 대답한다. 엄마와 함께 할 수많은 오늘을 수국꽃잎에 총총히 심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