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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념도
2. 개요
남해의 설흘산(매봉)에서 북쪽을 보면, 머리 등성이가 칼로 자른 것처럼 한 일(一)자로 반듯하게 보이는 산이 있다. 그 모습이 산꾼들의 마음을 끌기에 충분했다. 남해의 군립공원으로 ‘호구산’이란 좀 색다른 이름을 가진 산이다. 남해 금산은 국립공원으로 널리 알려져 예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오르는 산이고, 설흘산(매봉)은 바다 조명과 바위등성이가 좋으며, 망운산도 바다 조망과 철쭉이 좋은 산으로 소문이 나서 요즈음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끝없이 펼쳐지는 바다와 어울리고 조망이 좋기 때문이다. 거기에 대전~진주 간 고속도로와 서해안 고속도로 등이 뚫려 가고오기에 편리해진 것도 큰 요인이 된다.
그런데 이제 또 하나의 명물 삼천포의 남해도를 잇는 3km가 넘는 긴 연륙교 이순신대교가 놓여서 남해섬에 가기가 훨씬 쉬워졌다. 삼천포쪽에 가까운 금산, 설흘산(매봉), 호구산에 가기가 쉬워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남해 산꾼들에게 자기 고장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산이 어느 산이냐고 터놓고 말하라 하면 뜻밖에 호구산을 들먹인다. 별로 소문이 나지 않아 호젓하고 풍광도 아름다운 이 산을 남해 사람들은 몰래 좋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호구산은 소문이 퍼진데다 이순신대교가 개통되어 육지 사람들이 찾아들기 쉬워졌으나 남해 사람들만의 산이 아닌 것으로 되었다고 아쉬워한다. 숨겨 놓고 즐겨왔던 보옥이 바깥에 드러나 허전해 하는 마음들이다. 퇴계가 청량산을 호젓하게 즐기려 복사꽃이 개울에 떨어져 흘러내리지 않았으면 해서 ‘도화야 떠지지 마라 어주자 알까 하노라’하고 노래한 듯과 같다.
호구산(618m, 속칭 납산)은 뜻밖에 좋은 산이었다. 남북에서 조망할 수 있는 호구산의 일자 머리 부분은 100m 가까운 용마루(등성마루)를 위에 두고 남쪽으로 지붕처럼 생긴 비탈의 바위가 널찍했고, 그 처마 끝은 높은 벼랑을 이루고 있다. 이 고스락의 일자 용마루 북쪽과 서쪽, 그리고 동쪽이 높은 낭떠러지를 이루고 있는 거대한 바위봉우리인 것이다.
남쪽으로 앵강만이 내려다보이고, 북쪽에는 진주만이 내려다보인다. 남동쪽에 명산 금산이 보이고, 북서쪽에 남해섬에서 가장 높은 망운산과 금오산, 광양의 백운산이 조망되며, 북동쪽에는 삼천포 와룡산이 가깝다. 지리산도 그리 멀지 않아 웬만한 날씨면 천왕봉과 노고단까지 장쾌한 지리산 줄기를 볼 수 있다. 남서쪽 바다 건너로 긴 돌산도가 보이고, 동쪽 바다 건너로는 사랑도와 거제도도 볼 수 있다. 삼천포 시가도 가깝게 보인다.
호구산의 멋진 기암괴봉 지대는 두 군데다, 위에 설명한 지붕처럼 생긴 고스락 일대 외에 동쪽으로 뻗은 산줄기 끝에 돗틀바위를 중심으로 한 거대한 바위지대(돗틀바위봉)가 또 있다. 고스락 일대는 규모가 크기는 하나 지붕처럼 단순한 반면, 돗틀바위봉 일대는 가지각색의 기암 괴봉이 널려있어 아기자기하다. 벼랑 끝을 돌고 아슬아슬하게 더듬고 매달리고 엉금엉금 기어서 이 일대를 타고 넘는 재미가 짜릿하다.
호구산에는 나라를 지켜낸 의승병의 본거지였던 역사 깊은 큰 절 용문사가 자리잡고 있고, 봉화터와 곳곳에 산성터도 있어서 더욱 뜻있는 산행을 할 수 있다.
호구산 고스락에 세운 지 얼마 안되는 표석이 있다. 호구산으로 알고 올라갔는데 듯밖에도 납산(猿山=원산)이라 새겨져 있다.
‘납’이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지만 이 산이 북쪽에서 보면 원숭이처럼 보인다고 한다. 언뜻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원숭이를 ‘잔나비’라 하는데 ‘잔나비(납이)’를 줄여 ‘납’으로 단순화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국어대사전(이희승 저, 민중서관)에서 ‘납’이 원숭이의 옛말이며 방언이라 써있고, 훈예(訓例)로 풀이까지 덧붙여져 있는 것을 찾아낸 것이다. 옛날에는 원숭이를 ‘납’이라 했던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남해현 산천조에 ‘원산(猿山)현 남쪽 16리 지점에 있다’했고, 봉수조에도 원산봉수가 나온다. 납산은 바로 원숭이 산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산을 호구산이라 하는 것도 남쪽에서 보면 호랑이가 엎드려 있는 형국이어서 ‘호랑이의 언덕’이라는 뜻으로 호구산(虎丘山)이라 한 것이다. 납산과 호구산 두 가지 이름이 모두 산 모습에서 유래된 것이다.
비록 공식 지도에는 표기되어 있지 않으나 ‘납산’으로 표석을 다시 만들어 세웠지만 언제부터인지 많은 사람들이 호구산으로 불러온 것은 사실이다. 지리산 호랑이가 이 산으로 건너와 살았다는 전설도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원산(猿山)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호구산이란 이름은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닌 것 같다.
산 이름의 유형에는 가리산과 여기 납산 등 어떤 모양을 따서 지은 이름이 많고, 치악산 금산처럼 전설과 관계되는 것, 구봉산 팔영산처럼 봉수에 의한 것 등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호구산처럼 한 산이 두 동물의 모양으로 보이고 그 모양에 따라 두 개의 이름을 가진 산은 찾기 힘들다. 한자화로 잘못 전해진 이름들을 바로잡아 나가야 할 요즈음에 ‘납산’처럼 옛날의 바른 이름을 찾아서 표석을 다시 세운 일은 매우 뜻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3. 코스가이드
호구산 등산 기점은 남쪽 용문사 방향이 좋다. 도로변에 용문사 표지만이 있어 쉽게 입구를 찾을 수 있다. 이동면 용소리에서 시작해 콘크리트 포장도로를 따라 2km 거슬러 오르면 용문사 주차장까지 올라오면 된다.
호구산 남쪽 기슭에 자리잡은 용문사는 남해군 최고 최대의 사찰이다. 절 주위엔 큰 은행나무와 아름드리 소나무, 단풍나무, 키큰 측백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어 풍광이 매우 뛰어나다.
용문사에서 백련암을 거쳐 염불암을 오르는 데는 10여분 밖에 걸리지 않는다. 대웅전 앞뜰에는 갈수기인데도 시원한 물이 나오는 샘터가 있다. 산행에 들어가기 전 이곳에서 반드시 식수를 준비해야 한다. 호구산 등산로에서 물을 구할 수 있는 마지막 장소이기 때문이다.
등산로는 대웅전 오른쪽 뒤로 정상까지 또렷이 나 있다. 50분이 소요되는 울창한 숲길은 가족끼리 또는 친구끼리 호젓한 산행을 하기에 아주 좋은 길이다. 길 또한 순하다. 새소리를 벗하며 천천히 오르면 푸른 시누대군락이 반긴다. 이어 갈림길이 나온다. 나뭇가지에는 이정표 팻말이 걸려 있는데, 왼쪽(북)의 짧은 바위벽을 타고 올라가면 정상이고, 오른쪽(동) 길은 남동릉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큰 암봉으로 이뤄진 정상에는 옛 봉화터가 있으며, 한 키 정도의 돌탑 세 개가 쌓여 있다. 그리고 정상 동쪽엔 금년 봄에 세워 놓은 정상 표지석이 있다(높이 560m로 표기되어 있음).
호구산 정상에서의 조망은 사위가 막힘 없이 시원하다. 남쪽으로는 호수같이 잔잔한 앵강만과 작은 섬 노도가 그림같이 내려다보인다. 노도는 서포 김만중이 이곳으로 귀양와 ‘구운몽’을 집필한 뒤 숨을 거둔 곳이라고 한다.
북쪽으로는 남해읍내와 남해의 최고봉 망운산이 보이고, 동쪽으로는 강진해 건너 창선도의 대방산 너머 고성의 청량산, 사천의 와룡산이 보인다. 그리고 서쪽으로는 봉긋하게 솟은 송등산 괴음산이 바라 보인다.
호구산에서 송등산으로 가려면 서릉을 타야 한다. 정상 서편 바위 사이를 통과하여 내려가면 곧 갈림길을 만나게 된다. 작은 시누대군락이 보이는 왼쪽 숲길로 들어서면 송등산으로 가는 길이다. 오른쪽 길은 아마도 다정저수지로 내려가는 길인 듯하다.
숲길로 20분 가량 걷다보면 하늘이 열리며 갈림길이 나온다. 서쪽 능선길로 직전하면 송등산으로 오르게 된다. 남쪽 길은 염불암으로 곧장 내려가는 길이다. 호구산만 가볍게 구경하고 하산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갈림길에서 완만한 능선길을 따라 50분 정도 쉬엄쉬엄 오르면 송등산에 닿는다. 오름길의 1km 구간은 진달래 꽃길이라 불릴 만큼 등산로를 따라 키가 큰 진달래 나무가 계속 이어지며, 소담스럽게 핀 진달래꽃이 분홍빛을 발하고 있다. 북쪽 사면 저 아래까지도 진달래가 많이 눈에 띈다. 개화기가 이른 탓인지 아직 꽃망울을 터뜨리지 않는 나무가 많다.
꽃길을 오르며 뒤를 돌아보면 마치 뿔난 듯 돌탑 2개를 머리에 이고 있는 호구산 바위봉이 웅장하게 바라보인다. 억새와 관목지대를 지나면 곧 송등산 정상이다. 삼각점과 작은 돌탑 1개가 서 있는 정상은 밋밋한 봉우리로 작은 풀밭을 이루고 있다.
4. 주변의 문화유적 및 명소
(1) 용문사
남해가 자랑하는 세 절이 있는데, 남해군은 '남해 삼사 순례'라는 소책자까지 내놓고 있다. 호구산 용문사, 고현면 망운산 화방사, 상주면 금산 보리암이 그것이다. 세 절 모두 남해의 명산에 자리잡고 있고, 또 세 절 모두 원효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남해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배경으로 각각 독특한 멋을 지니고 있다.
그 가운데 용문사는 조계종 제13교구 본산인 쌍계사 말사로 호구산 군립공원의 아름다운 계곡에 자리잡고 있다. 원효대사는 금산에 보광사를 짓고 산 이름도 '광산'이라 불렀으며, 호구산에는 첨성각을 세웠다. 뒤(1661년)에 학진 스님이 보광사를 호구산으로 옮겨 지었다. 용문사의 전신인 셈이다. 조선조 현종 대 백원당 대사가 용이 하늘로 올라갔다는 용소 위에 다시 터를 잡아 없어진 절도 또다시 세우고 이름을 용문사라 한 뒤 오늘에 이르렀다.
임진왜란 때 이 절 스님들이 의승장 서산대사와 사명당의 뜻을 받들어 왜군과 싸웠기 때문에 호국사찰의 명성을 얻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조선조 숙종은 ‘수국사’라는 패와 연옥 촛대 번 등을 내려주었다 한다. 일본인들이 연옥 촛대 등을 빼앗아가고 지금은 금패와 궁중매듭인 번(幡-표기)만 남아 있다 한다.
이 절에는 그 밖에도 대웅전을 비롯해 석불좌상, 천왕각, 명부전, 촌은선생 집책판, 구멍이 셋인 화승총인 삼혈총 등의 문화재가 있다.
용문사 위에 백련암과 염불암이 있다.
(2) 용문사의 문화재
용문사는 문화재가 많은 가람이다. 대웅보전 뜰에서 법회를 가질 때 부처님상을 내걸었던 괘불대와 거대한 나무 구시통(설거지통). 임진왜란 때 사용했던 삼혈포, 숙종이 내린 수국사금패, 촌은집 책판 52집이 남아 있다. 국보급이라 평가받는 고려시대에 만든 석불은 빼어난 조각미를 지니고 있다. 삼혈포와 수국사금패, 촌음집은 도난을 우려해 공개하지 않으므로 삼고초려해야 볼 수 있다.
※ 천왕각 (도 문화재자료 제150호) : 이동면 용소리에 있는 신라의 고찰 용문사 계곡을 따라 오르면 일주문을 지나 세부대중을 처음 맞이하는 곳이 천왕각이다. 천왕각은 임진왜란때 소실되었으나 재건 후 조선 숙종28년(1702)에 지은 건물로 용문사의 관문이다.
천왕각에 모시고 있는 사천왕은 부처님의 도량과 법을 수호하는 신으로서 동쪽은 지국천왕, 남쪽은 증장천왕, 서쪽은 광목천왕, 북쪽은 다문천왕이 각자 비파, 칼, 용, 창을 들고 눈을 부라리고 서 있다. 사천왕은 불법에 입문하는 사람들을 수호하는 호법신이고 성스러운 도량에 잡인들의 출입을 통제하는 문지기이다.
용문사 천왕각은 천왕각은 정면3칸, 측면2칸이고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천왕각의 사천왕들은 양반이나 관리들을 밟고 있다. 부정을 한 탐관오리들이 꼼짝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용문사를 찾는 사람들은 이곳 천왕각에서 이 사찰이 민중의 형제, 나라를 지키는 호국사찰이라는 느끼게 된다.
※ 석불 (도 유형문화재 제138호) : 용문사 경내에 들어서면 돌로 만든 보살이 앉은 자세로 사부대중을 맞고 있다. 이 석불은 본래 돌로 되어 있었으나 누군가가 회를 발라 하얀 모습으로 변했다. 손에 연꽃을 들고 자애롭고 온화하면서도 존엄한 표정을 하고 있다.
이 석불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약 30년 뒤에 용문사를 중건할 때 용문사 마당 땅 밑에서 발견 되었다고 전한다. 가슴으로는 목, 팔등에 두르는 구슬을 꿴 장식품이 둘러져 있고 관을 쓰고 있어 고려초나 고려 중엽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불상은 단칸으로 된 맞배지붕 목조 기와집에 앉아 있다. 신도들은 이곳에서 정성을 모아 기도를 드린다. 바로 옆에는 명부전이 있다. 용문사는 죽고난 후에도 극락세계를 갈수 있도록 기도하는 지장보살을 모시는 지장도량으로도 유명하다.
※ 촌은집 책판 (도 유형문화재 제172호) : 용문사 대웅전 불상 밑에 보관하고 있는, 모두 52매로 된 이 목판은 촌은 유희경 선생의 행적과 시가 수록되어 있다. 촌은선생, 좀 생소하다. 한번 알아보기로 하자. 촌은은 조선 인조 때 시인이다. 본관은 강화, 자는 응길 호는 촌은이라 했다. 그는 한시에 능하였고 특별히 상례법에 능통하여 나라의 큰 상(喪)이나, 관리나 사대부 집에서 초상을 당했을 때 집례를 맡아 진행하는 사람으로 유명했다. 선생은 당시 집 뒤에 침류대라는 별채를 지어 놓고 천한 신분을 가지고 있는 백대붕 등과 시를 짓고 같이 지내면서 '풍월향도'라는 모임을 조직했다. 이 모임에 시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사람까지 참여하였다고 전한다. 촌은의 시는 한가롭고 담담하여 당나라 시에 가까웠다.
훗날 국가에 헌신한 아들 일민 덕분에 자헌대부 한성판윤으로 추증되었다. 촌은의 저서로는 촌은집과 상례초가 전한다. 한시집 책판은 본래 용문사에 있던 것이 아닌데, 촌은의 증손이 되는 유태웅이 호남지방의 만호(종4품의 관리)로 재직하면서 증조의 시집 3권3책으로 된 시집을 52매의 목판으로 인쇄활자로 조각하여 이동면 화계리에 있는 곡포보성과 용문사에 보관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 대웅전 (도 유형문화재 85호) : 앵강만을 굽어보는 호구산 산자락에 깊이 파묻힌 용문사는 신라 때 원효대사가 금산에 보광사를 짓고 암자를 이곳에 둔 것으로 사찰 연기설화가 시작된다.
"세월이 지나 보광사가 없어지고 조선 현종 원년(1660)에 승려 백월당이 용문사를 현 위치로 정하고 참선할 수 있는 집을 1661년에 준공했다. 그리고 6년 뒤 1666년에 일향스님이 대웅전을 창건했고 지혜스님이 다듬고 윤택하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웅전 지붕은 팔작지붕(지붕 양쪽이 八자와 같이 생긴 것을 말함)이고 정면 3칸 측면 3칸인 목조 기와 절집이다. 작은 절집이지만 이중부연(두겹으로 긴 서까래 끝에 덧 얹어 높이 솟게 만든 서까래)으로 안전하게 자리를 잡고 장엄하고 무게가 있도록 했다. 내부 바닥에는 마루를 깔았고 뒤쪽으로 불단을 만들어 부처님을 모셨다. 부처님 머리 위에는 빛나고 엄숙하게 보이도록 관이 만들어져 있다.
대웅전에는 사찰이름에 걸맞게 용머리 조각이 많이 있어 더욱 웅장하고 화려함을 느낄수 있다. 현재에 있는 대웅전은 숙종29년(1703)에 성화스님이 낡은 대웅전을 고쳐 새롭게 지은 것이다.
용문사는 호국사찰로 많은 사부대중이 모여든 절이다. 용문사에는 법회 때 사용하는 괘불탱화(석가모니가 법화경을 설법한 영취산의 모임을 그린 영산회상도)가 있고 괘불탱화를 거는 당간지주가 대웅전 앞에 있다. 사찰 주위는 사찰을 보호라도 하듯 자연 성벽과 같이 산이 둘러싸고 있다.
맑은 물이 목탁소리와 함께 흐르는 계곡을 끼고 있어 여름이면 시원한 곳을 찾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
※ 명부전 (도 문화재자료 제151호) : 신라고찰 용문사 경내에 있는 명부전은 이 사찰이 유명한 지장도량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건물이다. 명부전을 지장전 또는 시왕전이라고도 하는데, 대원력의 상징인 지장보살을 중앙에 모시고 명부의 십왕을 좌우로 모시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지장보살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입적하신 뒤부터 미륵불이 출현할 때까지 천상에서 지옥까지 일체중생을 제도하시는 분이다. 특히 지옥중생을 가엾이 여겨 지옥문전에서 항상 눈물을 흘리시면서 중생을 제도한다. 그래서 명부전은 사후세계의 소원과 망인의 명복을 비는 곳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