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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지만 그 멋진 야경을 포기한 채 파리를 떠난 시간이 대략 9시 반..... .
이제 'A4'라 부르는 '에스뜨 고속도로'를 타고 '라임스'까지 열심히 달린 후
다시 '낭시'까지 국도를 탈 것이다.
도착 예정 시간은 새벽 1시..... . -_-;;
< 거리는 300Km 조금 넘고 대략 3시간 정도 걸린다. >
애초 계획대로라면 9~10시 쯤 도착해 씻고 푸욱 자빠져 잤겠지만
파리를 스쳐가느라 경로를 약간 우회했고
게다가 루앙 근처에서 '프레 살레' 먹고
파리에서 사진 찍느라 적잖은 시간을 소비하는 바람에 결국 늦어버렸다.
하긴.. 모든 게 계획대로 진행되는 여행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때 그때 수정하고 조율하며 그렇게 여행하는 거지 머. ^^;;
'낭시'만 해도 그렇다.
원래 여행 일정상 낭시는 바람처럼 그냥 스쳐가는 도시였었다.
그러나 나랑 미들형제 셋 모두 건축을 전공했기에
이번 기회가 아니면 아르누보의 향기를 지닌 이 도시를
다시는 만나기 어렵다는데 의견을 모았고
결국 1박과 함께 오전을 '낭시'에서 보내기로 원만한 합의를 봤다.
최근.. 놈들과 이루어 낸 합의 중
가장 알흠다운 합의였다고나 할까? ㅋㅋ ^^;;
< 낭시의 상징 스태니슬라스 광장과 그의 동상이다. >
'낭시'는 독일과의 국경지대인 프랑스 북동쪽 로레인 지방의 주도로
교육의 도시로 알려진 작고 아담한 도시다.
인구라고 해봐야 2010년을 기준으로 10만을 간신히 넘어선 지방 소도시.
그러나 이 작은 도시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각별한 문화유산들이 있으며
'아르누보'양식을 꽃 피운 도시답게 프랑스 국립 미술학교인 '보자르'가 있다.
고딩때 묘지가 유학을 꿈 꿨었던 바로 그 학교다.
특히.. 아르누보에 관련된 여러 박물관들이 있는데
대표적인 박물관은 Musee des Beaux-Arts(영어로는 Fine Arts Museum)
Musee Lorrain (Lorraine Museum).. Musee de I'Ecole de Nancy (Ecole de Nancy Museum).
이 중 '에꼴 드 낭시'는 낭시의 역사와 함께 아르누보의 역사까지 함께 살펴 볼 수 있어
꽤나 흥미로운 박물관이었다. ^^
안타깝게도 이곳들 또한 사진 촬영은 금지라
그 멋진 작품들의 사진은 찍어오지 못했다.
아까비!! =_=
< '에꼴 드 낭시' 가는 길에 만났던 아르누보 양식의 건물들..... . >
이처럼 낭시에는 19세기 '아르누보' 유산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
특히 독일 접경에 위치한 알자스로렌 지방은 보불전쟁에서 프로이센에게 빼앗겼다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되찾은 땅으로 '알퐁스 도데'의 유명한 소설
'마지막 수업'의 무대가 되었던 곳이다.
그 당시 알자스로렌 지역 대부분이 독일령으로 넘어갔지만
이곳 낭시만은 프랑스령으로 남아 아르누보 양식의 꽃을 피웠다.
지금도 소호지역에는 그 당시에 지어졌던 건축물들이 그대로 많이 남아있다.
자~~!!
말나온 김에 '아르누보'에 대해 조금 알아보자. ^^
< 모두 4곳.. 광장 구석에 대칭으로 조형된 아름다운 출입문이다.
이처럼 화려하고 견고한 철구조물과 유리는 아르누보가 만들어 낸 당시의 특징적인 신소재였다.
철로 지은 파리의 상징 에펠탑 역시 아르누보의 대표적인 영향이라고 하겠다. >
우선.. 브리태니커에 아르누보(Art-Nouveau)를 검색해 보면
↓ 이 따위로 나온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이르는 서구유럽은
산업혁명으로 인해 생산량이 대량 증대되고 인구의 도시 집중 현상이 심화되며
여러 가지 사회문제가 생겨나기 시작한 불안한 시기였다.
아울러 기계생산에 따른 조잡한 질의 공산품을 만들어내던 때이기도 했다.
< 엔틱한 멋이 가득한 아르누보 양식의 가구 >
가내수공업을 이어받은
전통의 장인들이
전통의 방식을 고수하며
한땀한땀 정성으로 만든 가죽신이나 꽃신 대신
규격화 되고 획일화 된 껌정 고무신을
마구마구 찍어내던
초기 산업사회란 이야기다. ^^;;
한편 사회 구조적으로는 기존의 전통 귀족계급 대신
산업화로 부를 거머쥔 신흥 부르주아의 탄생으로 인한
여러 가지 복잡한 사회적 변화와 세기말적 혼란이 가중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의 고도화와 제국주의로 인한 정치적 안정
그리고 과학.. 산업 기술의 발전에 따라 물질적으로는 풍요롭고 평화스러운 생활을 누리게 만든
현대 자본주의 산업문명의 전성기라는 시대적 양면성이 공존하는 시기였다.
바로 이 시기에 새로운 예술양식으로 등장한 것이 '아르누보'로
이처럼 혼돈스러운 시대를 배경으로 19세기의 역사주의에서
20세기의 기능주의에로의 전환기에 나타난 독특한 장식적 예술운동이다.
이런 아르누보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19세기말 예술사조였던 상징주의, 유미주의, 퇴폐주의, 인상주의였다.
거기에 라파엘 전파의 경향과 중세 켈트인의 예술적 특성, 로코코적 양식까지 받아들여
유기적인 장식적 형태에 집착함으로써 결과적으로 19세기 역사주의 양식에 속하게 되었다.
크게 구분하자면
식물지향의 비대칭적인 곡선을 주 모티브로 하는
유기적 아르누보와
직선형태를 위주로 단순화된 기하학적 패턴을 지향하는
기하학적 아르누보로 구분된다.
그러나 아르누보의 대표적인 스타일이라면
역시 ← 이 사진에서 보여지듯
꽃과 줄기 그리고 유기적인 생명체를 모티브로 하여
서로 교차되고 합쳐지면서 리듬감을 형성하는데
그 특징이 있다고 하겠다.
윤곽이 뚜렷하고
유기적인 운동표현이 용이한
식물의 꽃봉오리와 줄기.....
자연과 함께 어우러진 여인의 나체....
나부끼듯 날아오르는 새들....
휘몰아치는 물결과 격동하는 동물들 등등이
주요 소재가 되어 여러 형태와 선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식물과 동물은 인간의 신체와 일체가 되어 다양하게 표현되기도 했는데
요정.. 인어.. 동식물이 혼성된 것 같은 공상적 생물이나 반인반수.. 반남반녀 등의 형태는
세기말적 병폐를 고스란히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신화적 공상적 형태에서의 아르누보는
자기도취적이며 탐닉적인 특징까지 보여주여
현실에 대한 나태와 권태 그리고 깊은 불만을 나타내기도 한다.
'구스타프 클림트'와 '무사'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겠다.
혹시 클림트의 ↓이 '포옹'을 기억하신다면 아르누보와 연관시켜 다시 한번 잘 살펴보시길 바란다.
몇 해 전.....
오스트리아 빈으로 여행가는 칭구놈의
멱-_-살을 잡고
크림트 기념관에서 모작 하나 사오라고
강력히 협박해 득한 그림이다.
얼마 후.. 이 그림이 본인 방에서 사라져
집안을 발칵 뒤집고
온 동네를 이 잡듯 살폈으나
끝내 되찾는데 실패했었다.
어느 날.. 누님 집에 와보니
거실에 턱하니 걸려 있두만.... .
- 이보쇼 누님! 이게 머하는 짓꺼리요!? -0-
- 퀴퀴한 니 방구석에서 먼지만 쌓여가길래
내가 구출해 줬다. 왜!?
- 닭-_-치고 얼렁 내 놓으쇼. 신고하기 전에!! -0-
- 잔정 없는 식히 같으니라구.... 꺼져 이식햐!! -0-
잔정 없는 묘지....
결국 다시 들고와 퀴퀴한 내방구석에서
먼지만 드시고 계신다. -_-;;
암튼.. 기품있고 세련된 작품들을 많이 탄생시키기는 했지만
직선이 주는 편리함과 합리성 등을 무시하였기 때문에
세월이 흐르며 모양보다는 기능과 사회성을 중요시하는 실용주의와 기능주의 풍조가 강해지면서
결국 아르누보는 그 짧은 생을 마치고 소멸해 가기 시작한다.
공예운동의 영향을 받아 일상 생활 환경의 혁신을 지향하였으나
본질적으로는 유미적이고 탐미적이었기 때문에 개인주의적인 경향이 짙어져
기능 및 기계 생산에 진정한 대응을 못한 채 결국 20세기 초 상업주의의 비속화 속에서
스스로 자멸하고 만 것이다.
이렇게 아르누보는 1895년경부터 짧고 굵게 전성기를 누린
대단히 매력적인 양식이었으며 당시에는 가장 새로운 예술이자 아름다운 양식이기도 했다.
작금의 모든 공예 장식 건축 디자인 패션 미술 등등
모든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하겠다.
< 탐미적 아르누보의 극명한 예라고나 할까? ^^ 2011년 10월 파리 퐁투와즈역 근처.... . >
'건축은 살아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살아있는 생명의 복잡함과 유기성을 갖추지 않으면 안된다.'
학부시절.. 나름 신조처럼 떠받들던
빅토르 오르타(Victor Horta 벨기에)의 저 고마운 충고란
아마도 그런 의미일 것이다.
그것이 아르누보든 로코코든 혹은 신고딕이나 로마네스크든
결국 그런 양식을 만들고 발전시키는 주체이자 객체는 바로 당시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어울려 살고 역사를 만드는 장소가 건축물이다.
고로.. 사람 = 건축이란 이야기가 된다.
복잡하고 유기적일 수밖에..... . ^^
천천히 낭시의 거리를 걸으며 바라보는 오래고 낡은 건물들.....
이 거리에는 19세기를 살았던 선각자들의 꿈과 희망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리고 그 꿈과 희망이란 또 다른 수 많은 예술가들에게
타오르는 예술혼과 불멸의 창조로 다시 승화되었을 것이다.
그 영욕의 거리를 이제 조심스레 걸어 본다.
낭시를 걷다 보면....
정말 아무 거리 아무 건축물에서나 이렇듯 쉽게 아르누보를 만날 수 있다.
한 도시에서.. 한시대를 풍미했던 시대의 조류를 이렇게 처절하게 느낄 수 있다는 건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그만큼 19c 당시의 시대정신과 예술혼이 고스란히 살아 있는 도시.
그게 바로 이 낭시다.
본래의 태동인
공예와 혁신으로서의 아르누보는
이후 산업사회가 요구하는
기능과 필요의 조건을 어느 정도 만족시키며
← 이렇게 미듐의 형태로 발전하기도 했지만
결국 시대가 요구하는 급진적이고
획일적인 대량생산을 결코 만족시킬 수는 없었다.
이후 한동안 우리는 아르누보를 다시 만나기 어려워졌다.
가장 극명한 예를
박정희 정권 시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군인이었던 그에게 예술과 건축에 대한
깊은 인식과 조예까지 바라지는 않는다.
그러나 배울만큼 배운 그 아랫 것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다.
새마을 운동이라는 명목하에
전국의 심심산골 마다 빠짐없이 지어 놓은
노인정이며 마을회관을 한 번 기억해 보라.
군인답게 마치 각을 잡은듯
천편일률적인 단층 직선 구조에
촌스러움의 극치를 자랑하는 미색 수성 페인트가 전국 팔도에 칠해졌다.
그것 뿐이 아니다.
군부 정권을 강화하기 위해 새로 지은
전국의 기념관이니 승전관이니 하는 건물들.....
몽조리 그 미색 수성 페인트로 아낌없이 칠해 버렸다.
학교는 어떻고 하물며 농협이 관리 하는 창고는 어떠했는가?
오로지 대한민국에는 미색만 사용하도록 만든 법이 있는 것처럼
미친듯이 미색 수성 페인트만 칠해 댔었다.
그에 관련된 엄청난 비밀을 나중에야 알았다.
박영수 여사께서 끔찍히 좋아하는 색이었단다.
결국.. 총애를 받기 위한 아랫 것들의 분탕질이었던 거다.
이렇게 우리는....
자율성과 창조.. 예술을 억압 받으며
획일화와 강제의 기류 속에서 눈 멀고 귀 멀어가며
숨 쉬는 기계처럼 살았던 시절이 있었던 거다. ㅠ_ㅠ
그건 결코 배부름과 풍요로 대체할 만한 것들이 아니다.
열 사람의 배를 불리기 위해
한 사람의 고혈을 빠는 일 따위도
나는 절대 동의할 수 없다.
지난 아픈 과거들이 내게 그렇게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낭시.. 이 거리를 걸으며 또 한 번 그런 생각을 해 본다.
나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
아르누보....
그나마 예술이니 장인정신이니 명품이니 따위의 존대를 받으며
이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시대를 앞서 살았던 그들의 예술혼을
조용히 묻어둔다.
선조장인 여러분들.. 수고 하셨습니다. (__*)
쓰다보니 온통 아르누보 구만. =_=
그럼.. 낭시의 자랑 스타니슬라스 광장과 주변 풍경들은 다음편으로..... . ^^/
PS - 여행 다녀온 게 8월인데 아직도 진행중이다.
가끔 독촉하시는 분들.. 미안하다. 그리고 죄송하다. (__*)
아주 오래 전 써두었던 글을 파일로 보관 중이었는데
새놋북 사고 백업하는 과정에서 일부 폰트가 깨져
그거 복원하느라 제법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짬나면 술 처먹고 다니느라..... . ^^;;
< 아~ 쓰기 구찮아 =_= 그냥 화면에 드래그 하세여. 곡명 음악가 잘 나옴. 그냥 듣기 좋으면 그게 짱임. =_= >
첫댓글 이런 지식까지 고루 섭렵하는데 앉아서 동참하고 있는 방울이는 뱃살만 늘어나네.
다 좋은데 늘어나는 살덩어리가 불만이얌.
넉넉한 인심살이라 생각하삼. ^^/
다음에 와서 자세히 한번 더 봐야 할 것같아요
좋은글 감사해요 묘지님~~
넵! 짬날때 놀러오세여. ^^/
이제 나두 누보에 대해 아러..가아니구..아르누보..ㅋ
쇼핑.. 뇨셩들의 큰 즐거움이죠.
즐~~즐거움하세여. ^^
아직도 쇼핑중이시겠지?
거바여.. 남자로 살아가기 그 글이 딱 맞지? -_-
전 쇼핑 별로 안좋아해요.
벌써 집왔죠.
여자로 살아남기..전 그게 쉽지않더라고요..걍..삐삐가 좋아요.^^*
개인적으로는 아르누보 양식이 마음에 들어요
내려오다 보니 클림트가 있네요
그것만 좋아하는거 아니에요
거의 모두 좋아하는 편이라서요
재미있게 잘 읽었네요
음악도 좋구요
오늘은 늦잠 주무시나?
써니님 등장이 늦네요. ^^
푸욱 주무시고 또 싱싱하게 살아나시길요.
댓글 거마워요. ^^/
마지막 수업을 중2 국어 교과서에서 읽었는데..
...긋참..알자스 로렌지방이 독일, 프랑스로 왔다리 갔다리했던 곳인데...
네이버 기사 하나를 리플로 달아볼께요...다시 함 더, 긋참....
여튼, 알자스 로렌은 마지막 수업이란게 .시대에 따라 아이러니해여..
지리에선 알사스로렌의 철 라인강의 수운 루르의 석탄..
운반비가 많이 나가는 석탄이 나는 독일 쪽에 제철공업 발달 운운...ㅋ
허나 프랑스에도 루르의 탄을 가져와 약간은 제철공업을 하기도 해야하는데 그 중심지가 낭시,메츠 우짜고...ㅋ
바로 그 낭시가...아르,아르~!! 이젠...ㅋㅋㅋㅋ
한 나라의 역사의 문화를 온전히 다 알기엔 프랑스는 우리처럼 방대하고 긴 역사를 지니고 있죠.
도데 형님의 삶이야 머 그양반이 알아서 살아오신 거니 그닥..... ^^;;
문학이나 예술이 참여성을 띨때 그 여파가 어떤지 한번 더 생각해 봅니다.
그러기엔 하늘은 점점 높아지고 바람도 시원한데 말이죠. ^^
참 좋다. 어느 하나 좋지 않은 것이 없다.
아르누보에는 아마도 이런 생각이 깃들었을거라 생각드네요.
당시 유럽은 세계대전이 발발전까지 큰전쟁이 없었는데
그 것은 정치와 외교의 소산이었던 바, 그럼에도 늘 전화의 불안감이 있었기에
아울러 소소한 이념의 대결 또한 극명히 존재하였기에, 예술에 이런 기운이 반영된 것은 아닐까 싶네요.
마치 중국 오호 16국 시대에 한편으로는 염세주의와 소위 죽림칠현으로 대표되는 현교가 더욱 발현하였듯이 말입니다.
그래도 참으로 아름다운 사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