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자갈치시장 그리고 요산 김정한
강진호 (문학평론가, 성신여대 교수)
길이만큼 사연도 깊은 낙동강의 풍경
안개가 짙다. 열차를 타고 여러 곳을 다녀 보았지만 이렇듯 짙은 안개가 낀 들판과 만나기는 처음이다. 들판의 나무들이 흐린 물감처럼 희미한데 온통 무채색 사이로 고흐 그림의 불타는 들판처럼 간혹 눈부신 황금색이 출렁인다. 그것은 가을걷이를 아직 끝내지 않은 논들이었다. 열차는 안개 낀 가을들판을 가로지르며 남쪽으로 남쪽으로 달려간다. 얼마나 달렸을까. 문득 눈을 뜨자 차창 밖으로 유장한 물줄기의 흐름이 시야에 가득하다. 낙동강이었다. 태백의 황지에서 시작된 저 물줄기는 경상북도와 남도의 중앙을 남류하며 밀양, 삼랑진을 지나 이제 바다가 보이는 최남단 도시인 부산을 향하여 흐르고 있었다. ‘가락의 동쪽'이라는 데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낙동강'의 물결은 깊고도 묵묵하다. 낙동강 1,300리라 했던가. 그 길이만큼 사연도 깊고 많을 터. 억새풀의 표정이 질기게 느껴지는 것도 그 강과 함께 흘러온 인간의 역사를 닮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부산에 머문 이틀 동안 나는 바다보다도 낙동강을 가까이, 더 많이 보았는데 지금도 다리 밑으로, 차창 밖으로, 평야를 끼고 흘러가는 강의 빛깔과 윤곽이 선명하게 떠오를 정도이다. 낙동강 물이 실어 나른 토사들은 강 하구에 이르러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하여 넓은 모래톱을 형성해 놓았다. 그 모래톱이 철새도래지로 유명한 ‘을숙도'이다. 부산 태생의 소설가 김정한의 대표작인 「모래톱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이 고장 사람들이 젖줄 같이 믿어 오는 낙동강 물이 맨들어 준 우리 조마이섬"도 을숙도를 일컫는 것이었다. 을숙도는 수심이 얕고 해수와 담수가 교차하기 때문에 각종 동식물성 플랑크톤, 갑각류, 소형어류 및 해조류가 풍부하다. 겨울은 온화하고 여름은 서늘하여 겨울 철새의 월동지이자 여름철새의 번식지로 적합하다. 그래서 사철 10여만 마리의 철새가 찾아오는 세계적인 철새 도래지로 꼽혔으나 낙동강 중류와 부산 주변 공단에서 배출되는 여러 오염물질과 농업, 축산, 생활폐수의 유입 및 무분별한 남획 등으로 인해 철새 도래지로서의 명성이 퇴색해 가는 중이었다. 게다가 1987년에 명지동과 하단동을 낙동강 하구둑이 들어서면서부터는 더더욱 옛날 모습을 잃어버렸다. 하구둑이 놓이기 전의 풍경은 이제 소설 속에서나 찾아 볼 수 있을 듯하다. 길가 수렁과 축축한 둑에는 빈틈없이 갈대가 우거져 있었다. 쑥쑥 보기 좋게 순과 잎을 뽑아 올리는 갈대청은, 그곳을 오가는 사람들과는 판이하게 하늘과 땅과 계절의 혜택을 흐뭇이 받고 있는 듯, 한결 싱싱해 보였다…길바닥까지 몰려 나왔던 갈게들이, 둔탁한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에 놀라 이리저리 황급히 구멍을 찾아 흩어지는가 하면, 어느 하늘에선지 종달새가 재잘재잘 쉴 새 없이 재잘거리고 있었다.(「모래톱 이야 기」, 『김정한 소설 선집』, 창작과 비평사, 1974, 146-147) 경부선의 종착역인 부산역은 바다에 인접해 있다. 열차에서 내리면 어쩐지 서울역과 별다를 것 없이 느껴지지만 귓전에 꽂히는 부산 사투리에 문득 눈길을 돌리면 담장 너머로 부산만에 정박중인 선체들의 일부가 불현듯 시야에 들어오고 그제서야 이곳이 남한 제일의 항구 도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부산의 소문난 명소들
서울로 치면 남산 격인, 용두산 공원에 오르면 우리 나라 최대 항구로서의 부산의 전모가 시야에 잡힌다. 부산 시내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118미터의 부산 타워 앞에 서면 부산만이 환하게 들어온다. 국제적으로도 태평양 연안의 유수한 항구 중 하나임을 증명하듯 부산만에 정박중인 배들은 대부분 큰배들이다. 25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일본 시모노세키와는 페리로, 그 밖에 도쿄, 오사카 등지와도 항공로로 연결되는 국제도시답게, 외국인 관광객들이 전망 좋은 벤치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며 담소를 나누는 모습도 공원 곳곳에서 눈에 띈다. 부산만을 등지고 뒤를 돌아보면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구릉들이 눈에 들어온다. 구릉들 중 한 가닥은 금정산에서 다대포 몰운대로 뻗어나가고, 또 한 가닥은 해운대의 장산으로 뻗어 나간다. 서쪽으로는 물금 부근에서 낙동강 하구를 향해 드넓게 평야지대가 펼쳐진다. 부산은 남쪽과 동쪽으로 바다에 면하고, 서쪽으로 김해시, 진해시, 북쪽으로 양산시, 울산시에 접한다. 한반도 남동단의 관문으로 꼽히지만 개항장이 된 것은 1876년 일본에 의해서였다. 1945년에는 해외동포들이 조국으로 들어오는 귀환항이었고, 1950년 전쟁이 났을 때는 임시수도가 되기도 했다. 직할시로 승격한 것이 1963년, 이후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여 현재에는 서울권에 버금가는 부산권을 형성하고 있고 국제적인 해양도시로 성장하였다. 이러하니, 자랑하는 것도 많고, 갈 곳도 많다. 맑은 물과 모래, 그리고 아름다운 파도가 한국 제일이라고 자랑하는 대한 팔경 해운대, 넓은 바다와 낙동강 하구를 안고 있는 다대포, 세계적인 철새 도래지 을숙도, 부산의 대표적인 명승지로 꼽히는 태종대, 마치 잔구슬을 깔아놓은 듯한 모래톱을 자랑하는 송정, 광안리, 오륙도… 얼마나 귀에 익은 지명들인가. 욕심 가는 곳은 많지만 아쉬움을 접고 영도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영도다리를 건너 반시간 여 달리다 보면 왼쪽으로 해양대학교가 보이고 조금 더 가 남동쪽 끝에 이르게 된다. 그곳에 아름다운 바다가 기다리고 있었다. 절벽 위에 섰을 때 좌, 우 전면으로 펼쳐지는 망망한 바다. 바로 대한해협이다. 조오련이 대마도까지 헤엄쳐 갔던 그 대한해협. 시야 왼쪽으로 보이는 섬이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 등장하는 오륙도이고 오른 쪽으로 주전자 모양으로 생긴 섬이 주전자섬이다. 이곳에서는 안개가 끼지 않으면 대마도까지 볼 수 있다. 영도 등대에서 절벽을 따라 자갈마당으로 내려가는 길은 어쩐지 외국영화의 한 장면 속으로 걸어 들어간 것처럼 이국적 풍취가 가득하다. 503촉광의 빛을 18초 간격으로 바다를 비추어 세계 각지에서 오는 배들의 뱃길을 밝혀주고 있는 ‘영도 등대'는 언덕 위의 하얀 성채처럼 신비롭게 서 있어서 사람의 마음을 이상하게 설레게 만든다. 아마도 등대와 바다와 하얀 색깔이 어우러져 기묘한 아우라를 빚어내고 있는 탓이다. 망부석이 서 있는 해안선의 기암절벽 위에는 바다를 바라보며 두 손을 꼭 잡고 마치 풍경의 일부처럼 못 박힌 연인들로 가득하고 절벽 아래 자갈마당에는 파도와 바람과 절벽에 마음이 흔들린 여행객들이 횟감과 소주를 앞에 놓고 객기를 달래며 지나가는 유람선을 향하여 이따금 손을 흔들어 준다. 신라 태종 무열왕이 전국의 명승지를 돌다가 그만 이곳의 풍광에 사로잡혀 수레를 멈추었다던가. 이곳에 서면 모두들 과연 그럴 법하다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등대에서 조금 내려오면 해방 후부터 애달픈 사연을 지닌 뭇 사람들이 떨어져 내렸다는 사연 많은 ‘자살 바위' 자리가 있는데, 지금은 그 위에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태종대는 도보로 오르기엔 벅찬 거리여서 순환열차가 돌고 있다. 부산에 처음 와 보았던 20년 전에는 없던 것들이다. 입구의 기념품 가게에서 어른 주먹만한 크기의 고동 하나를 사 들고 나오는데 가을 해가 벌써 기울고 있었다. 8-1번 버스는 영도에서 빠져 나온 나를 일주일 전에 부산영화제가 열렸던 남포동 인근에 내려 주었다. 지하철 자갈치역 표지를 보며 도로 맞은 편으로 시선을 주니 그곳이 한국 최대 생선시장으로 유명한 ‘자갈치 시장'이다. 마침 해마다 10월에 한 차례 열린다는 ‘자갈치 축제' 기간이어서 길을 건너가 본다. 어둠이 내려 주위가 거뭇거뭇한데도 어시장은 불야성을 이루고 있다. 억척스러운 자갈치 아지매들의 활기찬 목소리와 파닥거리는 고기들의 물 튀기는 소리, 흥정하는 소리 대신 축제 소문을 듣고 전국의 엿장수는 다 몰린 듯, 여기저기서 각설이 분장을 한 호박엿 장수들이 북을 치며 분위기 메이커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작은 목선들이 어둠 속에서 출렁대는 남항 바닷가 근처에서는 ‘오이소! 보이소! 사이소!' 정겨운 문구의 플래카드 밑으로 무대가 차려져 있고, 요리경연대회가 끝물을 장식하는 중이다. 뒤로는 임시 수족관까지 차려 놓았다. 능성어, 노래기, 도도바리, 돌돔, 병어, 방어들이 어항 속에서 꿈벅거리며 노닌다. 태종대 좌판에서 사온 어른 주먹만한 크기의 고동은 위고동이었는데 고동은 상상 외로 종류가 많은 것이 아닌가. 둥근 뼈 고동, 도깨비 고동, 통통이침 고동, 나팔 고동, 회 고동, 절피 고동, 야자 고동, 송곳 고동…. 어른의 손을 잡고 수족관 구경을 온 아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시장 안 쪽 좌우로 늘어선 생선가게에서는 도미, 넙치, 방어, 전복, 멍게, 오징어, 낙지 등을 입맛에 따라 사서 즉석에서 먹을 수 있다. 바닥에 줄지어 있는 포장마차들에서 파는 것들도 죄 어물들이다. 이곳에선 부산사람들의 숨결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그래서 부산의 대명사로 불리는 모양이다. 남포동 남항 바닷가에 위치하고 신동아 시장, 건어물 시장과 어우러져 대규모 수산시장을 이루면서, 노상에는 생선을 파는 아낙네들의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를 질리지 않게 들을 수 있고 한국 최대 어항 특유의 번잡함을 경험할 수 있다. 그 번잡함 한 가운데 끼어 들어 등 없는 의자에 앉아 조개구이와 함께 소주 한 잔을 기울이다 보면 부산의 밤은 소리 없이 깊어진다.
‘문학의 현장' 부산은 어떤 모습인가
부산은 큰 도시이고 해운대, 태종대…등으로 이어지는 소문난 명소들을 내세운다. 그것들은 부산의 외형에 해당하는 것이다. 문학을 하는 입장에서는 보이지 않는 유적들에 더 관심이 간다. ‘문학의 현장'으로서 부산은 어떤 모습인가. 부산에서의 둘째 날, ‘낙동강의 파숫꾼'이자 ‘부산의 지킴이'로 꼽히는 작가, 요산(樂山) 김정한(金廷漢)의 문학 현장을 찾아가기 위해 길을 나선다. 김정한은 1932년에 단편 「그물」을 『문학건설』에 발표한 뒤, 1936년에 「사하촌(寺下村)」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됨으로써 등단하였지만 40년대 이후에는 거의 절필 상태로 지내었다. 25년 동안 창작을 중단하였으니 세간의 이목에서도 멀어지고 작가의 생명도 시든 것처럼 여겨졌지만 환갑을 앞 둔 나이(59세)에 「모래톱 이야기」(66)를 내놓아,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다. 이후 「수라도(修羅道)」, 「인간단지」, 「산거족」 등 빛나는 작품들을 연이어 내놓음으로써 요산의 문단 복귀는 문학사적 사건이 되었다. 개인적으로 단편소설 「산거족」에 나오는 한 대목을 한동안 외고 다녔던 적이 있다. 요산이 작고한 현재로서는 마치 유언처럼 장엄한 구절이다. “사람답게 살아가라! 비록 고통스러울지라도 불의에 타협한다든가 굴복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람이 갈 길이 아니다." 이 글귀는 80년대에는 죽비소리처럼, 90년대에는 산사의 범종소리처럼 가슴을 울리곤 했다. 부산에 올 때도 요산의 생가를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하니 그 구절이 다시 울렸다. 요산 정신의 정수가 그 문장 속에 압축되어 있는 듯 했다. 김정한의 이력을 보면 특이한 점이 있다. 서울 유학과 일본와세다 대학 시절을 빼고는 부산을 떠나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일생을 보낸 유일한 문학인으로 김정한을 꼽는 부산문학인들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부산문학, 특히 소설문학은 요산의 그늘 아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김정한이 태어나 스무 해가 넘도록 살았다는 ‘생가'는 ‘부산 금정구 남산동 663-2번지'에 아직도 보존되어 있다. 안내 표지판 하나 없이 골목길 안쪽에 소리 없이 묻혀 있는 낡은 기와집 한 채, 요산이 1908년 생이니 집의 오랜 연륜을 짐작할 수 있다. 당연히 낡고 그나마 손이 가지 않아 폐가와도 같은 몰골이다. 뒷마당에는 잡초가 무성하다. 다행히 이 집은 생가 복원을 앞두고 있다.
김정한 문학속의 불교
생가 뒤편으로 보이는 산자락이 금정산이었다. 그리고 가까이에 천년 사찰인 ‘범어사'가 있다. 김정한 문학의 배경은 이 범어사 언저리에서 출발하고 있다. 「사하촌」의 보광사 뿐만 아니라 「옥심이」의 백암사, 「추산당과 곁 사람들」에 나오는 백련암, 「묵은 자장가」에 나오는 청운사 등이 모두 범어사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김정한이 증조부가 세운 서당을 다니며 한학을 배우다가 12세에 들어간 명정학교도 바로 이 범어사에서 세운 사립학교였다. 범어사와 명정학교는 만해 한용운과도 관련이 있다. 만해의 불교활동의 중심지였고 『불교대전』을 간행한 곳도 이 절이기 때문이다. 또한 만해의 제자인 김법린이 범어사에서 중이 되어 명정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3.1운동에도 관여하다가 투옥되는데, 김정한은 1919년에 이 학교에 입학했고 3.1운동 당시 상급생들이 범어사와 범어사 입구를 오가며 만세를 부를 때 그도 함께 했다는 기록이 있다. 『낙동강의 파숫꾼』에서 “내가 절 학교에 이태 동안 다니면서 소위 신학문이란 걸 배운 이외에 그 당시의 불교라기보다는 절이나 중들에 대한 일들을 직접 눈으로 많이 보았다."는 구절이 나오는 것을 보면 소설 속의 절학교가 사실은 명정학교이고 이렇게 절학교를 다니면서 겪은 부정적인 체험이 「사하촌」이래 중들에게 비판적인 시선을 갖게 한 배경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절과의 인연이 깊다 보니 1936년에 「사하촌」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을 때는 범어사 측으로부터 테러를 당할 만큼 심한 반감을 샀다. 물론 「사하촌」에 묘사된 ‘천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무려 백여 명의 노소승이 우글거리는 사찰 대본산 보광사'는 범어사 자체라기보다는 비슷한 처지의 사하촌을 객관화시키는 과정에서 형상화된 것이지만 범어사 측으로서는 오해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범어사 자락에 세워진 ‘김정한 문학비'는 묵묵히 말이 없다. 수많은 등산객들과 행락꾼들이 오가지만 어느 하나 문학비에 눈길을 돌리는 사람이 보이지 않아 빗돌의 문구가 무색하게만 느껴진다. 김정한은 다른 작가에 비해서 매우 선이 굵고 선명한 인상을 주는 작가로 평가된다. 그는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투철하고 일관된 삶의 자세를 견지하여 왔고, 작품을 통해서 이를 성공적으로 형상화시켜 왔다. 또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단어와 문장을 대하는 정확하고 성실한 태도이다. 1936년 창작에 필요한 단어들을 이리저리 수집하다가 보니 한 권의 책이 되어 소규모의 『조선어사전』을 만들었을 정도다. 또 경상도 일대의 식물을 채집하여 모양, 이름, 생태를 자세히 기록한 일종의 식물도감 격인 『향토식물조사록』을 작성하기도 했다. 그의 책상서랍에는 늘 이런 단어와 식물도감이 가득 차 있었다한다. 이런 성실한 관찰과 조사, 과학적 태도를 바탕으로 집필했던 탓에 당연히 문장은 정확하고 빈틈이 없었던 것이다. 이렇듯 기록과 자료를 중시하는 태도는 평생 일관되어, ‘그는 작품 목록은 물론 일반 전집에 수록된 작품목록, 그리고 돌아오는 인세까지 꼼꼼하게 적은 노트를 갖고 있는가 하면, 어떤 사소한 글들도 모두 보관하고 있는' (조갑상) 드문 작가였다.
김정한 문학속의 근대화
금정산 뒤로는 낙동강이 흐른다. 김정한은 어렸을 때부터 낙동강을 보고 자랐다. 구포다리가 놓이기 전에는 나룻배를 타고 김해 등으로 건너다녔다. 그러나 낙동강이 그의 소설 무대 속으로 흘러 들어간 것은 「모래톱 이야기」부터이다. 김정한이 오랜 절필 끝에 이 작품을 쓰게 된 동기는 순수문학의 언저리를 맴돌던 당대 문단에 대한 강한 부정이었고, 이후 작가의 문학적 지향을 보여주는 이정표였다. 이십 년이 넘도록 내처 붓을 꺾어 오던 내가 새삼 이런 글을 끼적거리게 된 건 별 안간 무슨 기발한 생각이 떠올라서가 아니다. 오랫동안 교원노릇을 해오던 탓으로 우연히 알게 된 한 소년과, 그의 젊은 홀어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그들이 살아오던 낙동강 하류의 어떤 외진 모래톱― 이들에 관한 그 기막힌 사연들조차, 마치 지나가는 남의 땅이 이야기거나, 아득한 옛날 이야기처럼 세상에서 버려져 있는 데 대해서 까지는 차마 묵묵할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모래톱이야기」, 앞의 선집, 143) 김정한은 1947년 마흔의 나이에 부산중학교 교사로 근무했는데 거기서 만난 제자 중의 한 명이 소설 속에 나오는 건우이다. 건우는 비가 오는 날이면 지각을 면치 못했는데, 왜냐하면 ‘나릿배 통학생'이었기 때문이다. 건우가 사는 조마이 섬은 몇 백년, 아니 몇 천년 갖은 풍상과 홍수를 겪어오는 동안에 모래가 밀려서 된 나라땅인데, 일제 때 억울하게도 일본 사람의 소유가 되어 있다가 해방 후부터는 어떤 국회의원의 명의로 둔갑이 되었는가 하면, 그 뒤로는 어떤 유력자의 앞으로 넘어가 있었다. 말하자면 선조 때부터 거기에 발을 붙이고 살아오던 사람들과는 무관하게 소유자가 도깨비처럼 바뀌고 있었다. 홍수가 나 엉터리로 쌓은 둑 때문에 섬이 물에 잠길 위험에 처하자 건우 할아버지인 갈밭새 영감은 앞장서 둑을 허물다가 유력자 하수인의 방해를 받고 결국 살인죄로 감옥으로 간다. 그리고 다음 학기부터 건우의 얼굴은 학교에서 보이지 않게 된다.
낙동강에 삶의 터전을 두고 있으면서도 낙동강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건우 가족이었고 그 척박한 현장을 작가는 소설을 통해 통렬하게 고발하고 있는 것. 이 작품이 높게 평가되는 것은 가난하고 헐벗은 ‘따라지'들에 대한 애정과 함께 작가의 치열한 비판정신 때문이다. 작품이 발표된 60년대 중반은 4.19로 분출된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군사정권에 의해서 무참하게 짓밟히면서 개발 독재의 신화가 본격적으로 닻을 올린 시기였다. 문단에서는 남정현의 ‘<분지> 필화 사건' 등으로 반공주의의 혹한이 몰아쳤고, 작가들은 숨을 죽인 채 사회와 정권의 비리에 대해서 침묵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김정한은 ‘유력자'로 대표되는 정권을 비판하고, 초개처럼 목숨마저 내던지는 과감한 저항의 기치를 올린 것이다. 그리하여 「모래톱 이야기」는 전쟁과 더불어 사라지다시피 한 민족문학의 맥을 부활하고, 리얼리즘의 대하로 문학의 줄기를 바꾸는 중요한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70년대 이후 우리 문학이 리얼리즘이라는 큰 흐름을 일구고 민족문학의 힘찬 도약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김정한의 이런 가교적 역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김정한은 그때까지 ‘농민문학' 혹은 ‘농촌작가'로 알려져 있었으나, 「모래톱이야기」 이후부터는 농촌 문제보다는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되고 희생된 가난한 민중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작품을 줄곧 발표하였다. 당시 김정한이 보기에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근대화 정책이었다. 근대화가 민중들의 실제적인 삶을 외면한 채 일부 잘사는 사람들만을 위한 정책으로 변질된 데 대한 반감은 작품 곳곳에서 나타난다. 가령, 「제3병동」의 강남옥 처녀의 시선을 통해서 제시된 근대화정책은 단적으로 “천하고 안타까운" 모습으로 비쳐진다. 멀리 보이는 들 끝 초가집들은 게딱지처럼 다닥다닥 땅에 붙어 있는데, 철길 가의 집들은 거의 일률적으로 시멘트나 기와, 슬레이트로 고쳐 이어졌다. 그런데 어떤 집들은 철길에서 보이는 쪽만 기와나 슬레이트고 나머지는 찌그러져 가는 초가 그대로 방치되어 있고, 벽도 보이는 쪽만 회칠이 되어 있다. “우리들을 도와줄 수 있는 외국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한 과시용이었던 때문이다. 외형과 성장만을 추구한 근대화는 민중들의 실제적인 삶을 외면한 채 오히려 그들의 희생만을 강요하였다. 그래서 작가는 「유채」의 허생원의 입을 빌어서, “근대화 두 번만 했으면 집까지 뺏아 갈 거 앙이가!"라는 자조어린 탄식을 내놓는데, 이는 근대화에 대한 당대 민중들의 반감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김정한이 보기에 근대화 정책의 가장 큰 문제는 인간성의 왜곡과 타락이었다. 근대화 정책은 “훨씬 본질적인 것, 어쩜 과학 따위에 의해서, 혹은 현대인의 그 약삭빠른 비굴성이랄까, 거짓 이기주의……아무튼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런 것들에 의해서 말살되어 가고 있는, 그런 무엇”(「제3병동」에서)을 박탈했다는 것. 「제3병동」의 한 처녀의 삽화는 그것을 고발하는 사례가 된다. 곧, 만신창이가 되어 죽기 직전에 ‘죽어도 한이나 없게' 병원을 찾은 심작은돌 노파를 치료하던 김종우 의사는 그 노파를 간병하던 딸마저 장질부사에 감염된 것을 발견한다. 어머니 곁에는 가지 말라고 그렇게 주의를 줬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어머니 곁에 붙어서 잠을 잤고, 자신이 사용하던 숟가락으로 어머니에게 미음을 떠 먹이는 태연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모습에서 김종우 의사가 큰 충격을 받았던 것은, 그런 모습이 약삭빠르고 계산적인 시속에서는 도저히 찾을 수 없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병이라든가, 죽음마저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모친의 간병에만 매달리는 그녀의 태도는 합리성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원초적 인간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김종우 의사가 병원장의 문책을 무릅쓰면서 그녀를 치료해 준 것이나 규율을 어기면서까지 침상을 마련해 주는 등의 배려를 아끼지 않았던 것은 이와 같은 인간의 순수한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고, 그것을 통해서 작가는 천박한 세태에 맞서는 대안적 힘을 발견한 것으로 보인다. 김정한의 문학이란 바로 이 인간 본연의 모습을 억압하고 왜곡하는 제반 사회적 비리에 대한 저항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의 인물들이 하나 같이 과감하고 투쟁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이 소중한 가치를 지키려는 단호한 작가의 의지였던 셈이다. 「모래톱 이야기」의 갈밭새 영감이나 「수라도」의 가야부인이나 오봉선생, 「뒷기미 나루」의 ‘속득이', 「지옥변」의 울산이 아저씨 등은 현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피동적 인물들이 아니다. 가야부인은 기울어져 가는 양반집안의 맏며느리로서 가문과 시부모, 남편, 그리고 자식들을 위해 끊임없는 봉사와 자기희생의 일생을 보내는, 한국 여성의 온갖 미덕을 갖춘 전형적인 여인상으로 그려지지만, 결코 유교적 인종의 규범에 얽매여 사는 인물이 아니다. 그의 전통적 부덕(婦德)은 일본의 식민지주의,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에 연결되어 있고(백낙청, 「문화연구의 자세와 민족문학」,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창작과 비평사, 1978, p.257), 또 가부장적 권위에 맞서 자신의 합리적 주장을 포기하지 않는 적극성을 보여준다. 가야부인의 막내아들은 해방이 되자 농민조합을 만든다고 주변 사람들을 찾아다니고, 그 아버지 명호양반은 나라가 통일되지 못한 것을 한탄한다. 울산이 아저씨는 관공서와 신문사를 찾아다니며 일제에 착취당한 체불임금을 받으려고 백방으로 노력중이며, 「유채」의 허생원은 허구적 근대화를 통탄하면서 포플라 숲에 불을 지른다. 말하자면 이들은 상황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인물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맞서면서 그것을 변화시키려는 진취적 성격의 소유자들이다. 근대화의 부정적 면모들이 한층 본격적으로 드러나고 인간의 이기적 욕망이 더욱 고양된 현재에도 김정한이 읽힐 수 있는 것은 이런 문제성에 있다고 할 것이다.
근대문학 현장으로서의 부산
김정한은 일평생을 반식민, 반독재와 싸우는 반골의 생애를 살아왔다. 현실과 타협하지 않은 성품 때문에 위정자로부터는 경계의 대상이었으나, 문단과 사회로부터는 깊은 존경을 받았다. 노후에 협심증과 폐기종에 시달리다가 염수봉 아래녘 ‘신불산 공원묘지'에 묻힌 것이 96년, 그의 나이 89세였다. 그는 고향에서 일평생을 살다가 죽어서도 고향 땅에 묻힌 보기 드문 문학인이다. 부산의 2세대 소설가들이 한결같이 리얼리즘 정신에 투철한 것도 이 지역에서 김정한의 영향력이 크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물금에서 원동을 지나 삼랑진에 이르는 길은 낙동강 줄기를 따라 흐른다. 삼랑진을 더 거슬러 올라간 상류께에서, 소설 「뒷기미 나루」의 창작무대인 ‘뒷기미 나루터'를 만날 수 있다. 김정한의 낙동강 소설 중 「모래톱 이야기」가 낙동강의 하구를 무대로 한다면 「뒷기미 나루」는 낙동강이 밀양강으로 갈라지는 지점을 담아내고 있다. 지방도로를 타고 가다가 낙동교를 바로 앞에 두고 차를 멈추면 오른쪽으로 차 한 대가 간신히 드나들 정도의 길이 나 있는데, 그 길을 따라 쉬엄쉬엄 걸어가면 ‘나루터 횟집' 바로 뒤편에 놓인 나루터에 이를 수 있다. 이 길은 낙동강을 따라 부산의 외곽을 돌면서 문학의 현장을 훑어 볼 수 있는 훌륭한 문학기행 코스이다. 또 하나 놓칠 수 없는 것은 근대소설의 첫 장을 연 『무정』(이광수)의 감동적인 현장인 ‘자선 음악회'가 열린 곳도 삼랑진이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이곳은 근대문학의 현장이었던 것. 소설 후반에서 이형식과 선형, 영채 등이 동경으로 유학을 떠나는 도중에서 홍수를 만나 기차에서 내려 음악회를 열었던 곳이 이 삼랑진 철교 근처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느 곳에도 표지석이나 안내판을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뒷기미 나루 역시 유장한 낙동강을 배경으로 그 풍광이 그림처럼 아름다운 공간이지만 사전에 알고 가지 않으면 의미 없이 흘러가고 말 풍경이다. 부산은 최근 국제 영화제를 유치하여 문화도시로서의 면모를 일신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영화뿐만 아니라, 자기 지역 출신 문인들을 발굴하고 기념하는 일에도 소홀히 하지 않아야 진정한 문화도시로서 거듭날 수 있지 않을까. 문화란 하루 이틀에 축적될 수 있는 게 아니다. 당국의 지속적인 관심과 문화 종사자들의 열의가 어우러졌을 때 완성되는 종합예술작품 같은 것. 이런 점에서 본다면 최근 민족문학작가회의 부산지회를 비롯한 요산문학회 등 여러 단체들이 각종 문학행사를 주관하며 활발한 활동을 벌이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