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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월드♬에세이 원문보기 글쓴이: 국화사랑
스키터 데이비스의 프로필 스키터 데이비스는 미국 켄터키州의 드라이 릿지라는 농장에서 Mary Frances Penick 라는 본명으로 태어낫다. 1950년 데이비스 시스터즈에서 데이비스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 햇으며 그녀의 할아버지가 붙여준 닉네임, 마치 모기가 웅웅거리며 노래하면서 쇼맨쉽을 발휘햇다는 의미인 스키터를 조합하여 스키터 데이비스라는 예명으로 Pop 필드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 하였다.
스키터는 인근의 컨터키州 코밍턴의 딕시 고교를 다녓고 이후 베티 데이비스를 만나게 된다. 그 둘은 나중에 데이비스 시스터즈를 결성 활동을 하게되죠, 그 둘은 RCA 빅터와 음반 계약을 하게 되면서 그들의 No.1 히트송인 "I Forgot More Than You'll Ever Know"를 발효한다. 단기간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동료이자 절친한 친구사이인 베티는 불의의 교통사고로 운명을 달리 하는 아픔을 겪게 된다. 스키터 역시 당시 이 사고로 심각한 부상을 당하게 되지만 곧 회복하면서 솔로로 재기 하게 된다.
1957년까지 스키터는 컨츄리 뮤직의 최고 Top 아티스트로 명성을 날리기 시작한다. 스키터는 당시로서는 드문 오버더빙을 통하여 하모니 보컬녹음을 한걸로 잘 알려져 잇으며 친구엿던 체트 애킨스의 도움 또한 컷다고 한다.
1959년 Grand Ole Opry 라는 컨츄리 라듸오 방송국의 고정 프로그램에 출연 하기도 햇으며 "Set Him Free"라는 곡으로 그래미 시상 후보에도 오르게 됩니다. 1960년에는 스키터에게 잇어 소속사인 RCA사의 카장 성공한 컨츄리 뮤지션으로 자리를 굽히고 그때 당시 41개의 컨츄리 차트를 랭크 시켯으며 그중 13곡은 팝 차트를 기록하는 기록을 남겻다.
국내 팝메니아들 사이에 가장 알려진 "The End Of The World"는 컨츄리와 팝챠트에 2위까지 오르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그후 총 5번의 그래미시상 후보에 오르게 된다. 1970년도에는 싱카폴/스웨덴/바바도스 같은 해외공연도 나서게 되엇고 데이비스는 4번의 결혼을 하면서 1996년 NRBO베이스 연주자 엿던 Joey Spampinato와 마지막으로 이혼을 하게 된다.
1973년 데이비스 스키터는 정치적인 이유로 방송에서 퇴출 되는 수난을 겪게 된다.(어떤 체포된 크리스챤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한 헌정곡을 불럿다는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죠) 그러나 1975년 다시 방송에 참여햇으며 2004년까지 뮤지션 생활을 게속해왓죠, 1988년 이후 그녀는 유방암과 투병을 시작 하엿고 2004년 결국 Nashvill,Tennessee 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엇습니다.그녀의 대표작이엇던 "The End Of The World" 곡은 많은 아티스트를 통하여 리바이벌 되엇으며 특히 국내에 너무 잘 알려진 카펜터스에 의해 발표되기도 했다.,,,,,,,,,,,,,1998년 코리아사랑 리뷰 정리.............
*다음카페 - 월드에세이 http://cafe.daum.net/muztopia by:소다드 |
첫댓글 스크랩으로 옮겨오는 자료들은 저가 운영 하는 다음의 월드에세이 라는 카페에서 옮겨어는 자료이니 개안할지 싶은데...지킴이님 개인히죠?
갠잔을거같은디요 근디 소리가안나와서 모르것어요
저는 잘나오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