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곧 있으면 신문사에서 부장으로 진급할 참이었는데 더 이상 못하겠더라구요.
역마살이 낀 인생이라 하루종일 회사에서 남이 쓴 기사를 고치는 게 적성에 맞지 않았어요.
멸종 위기에 처한 정향나무를 본격적으로 키워보자는 생각에 퇴직금을 털어 소백산 자락에
땅을 사서 묘목을 옮겨심기 시작했어요.
처음엔 8그루로 시작했는데 10년이 지나니 2만6000그루까지 늘었네요.
토종 라일락 복원에 바친 20년
더농부는 지난 3월 초 소백산 자락에 자리잡은 충청북도 단양군을 찾았습니다. 소백산 자락에서 홀로 10년을 버티며 멸종위기에 처한 정향나무를 비롯한 토종 라일락 7종을 대량으로 증식하는 데 성공한 토종 지킴이 김판수씨를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2007년 아무 연고도 없던 단양군 금곡리 산기슭에 농장을 꾸린 그는 지난해 정향나무 2만6000여그루와 꽃개회나무, 섬개회나무 등 다른 토종 라일락 6종, 4000여그루를 키워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해발 1300m 이상에서 주로 서식하는 정향나무 등 토종 라일락을 해발 200m 높이 남짓의 야트막한 산기슭에서 대량으로 재배하는 데 성공해 토종 라일락을 멸종 위기에서 구해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울릉도에서만 자라던 울릉도 토종 섬개회나무와 흰섬개회나무까지 키우고 있는 그의 농장은 토종 라일락들이 멸종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낙원입니다.
김 씨는 1991년부터 2007년까지 경향신문에서 기자로 일했습니다. 1996년 한국기자협회가 주관하는 '이달의 기자상'을 두 번이나 수상하는 등 모두 여섯 차례에 걸쳐 '이달의 기자상'을 받은 베테랑 기자였죠. 동시에 시인 신동문의 평전을 비롯해 3권의 책도 썼습니다. 그가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소백산으로 이사해 나무를 키우겠다고 하자 주변에선 깜짝 놀라며 말렸습니다. 그가 왜 서울을 떠나 소백산 자락에서 10년 동안 토종 라일락 복원에 매달리게 됐는지 궁금했습니다.
서울에선 슬슬 봄기운이 돌기 시작한 3월 초순이었지만 단양 산골은 아직 겨울이었습니다. 서울에서 2시간 반을 달려 단양 읍내인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했습니다. 김 씨의 농장은 읍내에서도 10분 가량 떨어진 금곡리 소백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차가 제대로 지나갈 수 있을지 걱정될 정도의 좁은 신작로를 타고 5분 여를 더 달리자 길 한 켠에 김 씨가 마중을 나와 있었습니다.
전날 내린 눈 비로 질퍽질퍽해진 흙길을 걸어가자 2000여평 규모의 산기슭에 자리잡은 그의 묘목 농장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농장 초입에 마련된 컨테이너 농막에 들어가 봉지 커피를 한 잔씩 나누며 인터뷰를 시작했습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어두컴컴한 농막 안에서 스티로폼을 깔고 앉아 대화를 나눴습니다. 다음은 대화 내용입니다.
단양에 내려와 토종 라일락인 정향나무 복원과 증식을 시작한 것이 언제부턴가요?
조금 더 다녔으면 부장으로 진급했을 2007년 회사를 그만두고 그해 가을 바로 이 곳에 2000여평의 땅을 사서 묘목 농장을 시작했습니다. 신문사에선 부장이 되면 데스크라고 해서 하루 종일 회사에 갇혀 다른 기자가 쓴 기사만 고쳐야 하죠. 내가 원래 역마살이 낀 놈이라서 20대부터 낚시한다고 전국을 돌아다니고 한 군데에서만 못 사는 체질이예요. 평기자 때야 취재한다고 여기저기 다니니 괜찮지만 부장이 된 다음부턴 책상에만 앉아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못 견디겠더라구요. 환경 담당 기자로 꽤 오랫동안 일하면서 우리 식물들이 자꾸 멸종되는 게 안타까웠었는데, 그런 식물들을 지켜내는 일을 해보고 싶단 생각도 했었어요. 우리나라에서 원종을 갖고 간 정향나무는 '미스킴 라일락'이란 이름으로 세계 곳곳으로 뻗어가는데 막상 그 뿌리인 정향나무는 멸종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도 화가 났어요.
1990년대 중반께 토종 라일락에 대해 알게 돼 야생에서 종자를 구해 남몰래 묘목을 몇 그루 키워왔고, 지리산 자락에 있는 경남 하동에서 자라 농사 짓는 법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서 해볼 만 하다고 생각했어요. 봄에는 씨앗과 묘목을 심고, 가을에는 종자를 채취해 보관하고, 겨울에는 다시 서울 집에 돌아가서 글도 쓰고 그러면서 지낸 게 벌써 10년째 입니다.
일반인들 대부분은 토종 라일락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 같은데요.
정향나무는 원래 백두대간 높은 능선에서만 자라는 아고산식물(고산식물과 유사한 식물)입니다. 야생에선 해발 1300m 이상 높은 지대에서만 자라다 보니 일반인들은 이 나무를 접할 기회가 거의 없어요. 국립수목원 등에 표본수로 몇 그루 심어져 있는 게 전부죠. 수수꽃다리속에 속하는 토종 라일락에는 정향나무를 비롯해 흰정향나무, 개회나무, 꽃개회나무, 흰섬개회나무 등 모두 7종이 있습니다.
인터넷 등에선 미국에서 들여온 '미스킴 라일락'을 정향나무로 부르기도 하는데 왜 그런가요?
'미스킴 라일락'은 1947년 미국인 식물학자가 서울 북한산에 자라던 정향나무 종자를 가져다가 키가 작아지도록 품종을 개량한 식물입니다. '미스킴 라일락'이나 키가 작은 왜성(矮性) 라일락을 정향나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 이건 잘못된 정보입니다. '미스킴 라일락'이 정향나무에서 갈라져 나온 식물이긴 하지만 특성도 많이 달라요. 정향나무는 다 자라면 높이가 2m가 넘는데 '미스킴 라일락'은 1m를 넘지 않습니다. 원예 식물로 키우려면 화분에서 재배해야 하는데, 그러면 키가 너무 크면 안 되기 때문이죠. 정향나무가 최장 20일 가까이 꽃을 피우는 데 비해 '미스킴 라일락'은 개화기가 열흘 안팎입니다.
김 씨와의 인터뷰는 컨테이너 농막을 나와 비탈이 진 산기슭 농장을 걸으며 계속 이어졌습니다. 농막에서 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갑자기 작은 눈 알갱이들이 쏟아졌습니다. 저는 갑작스러운 눈에 깜짝 놀랐지만 그는 소백산 기슭에선 4월은 돼야 조금씩 봄 기운이 돌기 시작한다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길을 걷는 내내 김 씨는 자신의 발자국을 그대로 밟고 따라와 달라고 말했습니다. 농장 곳곳에 얼핏 보면 잘 보이지도 않은 작은 묘목들이 심어져 있어 혹시나 제 발길에 묘목이 상할까 걱정됐던 것입니다.
정향나무를 처음 알게된 건 언제인가요?
군대를 제대한 뒤에 문예지 창작과비평 사장을 지내셨던 신동문 시인이 단양군에서 운영하던 침술원을 여러 번 찾을 기회가 있었어요. 1980년대인 당시 신동문 시인은 가난해서 치료를 받지 못하는 농민들에게 무료로 침을 놔줬다고 합니다. 입원해서 장기간 치료를 받아야 하는 환자들은 신 시인의 집 옆에 있는 작은 오두막 요양원에 머물며 치료를 받았어요. 그때 요양환자들을 위해서 야생화 꽃봉오리를 따다 말려 천장에 매달아 뒀는데 향기가 참 좋았어요. 물어봤더니 그게 정향나무라고 하더라구요. 은은하게 향기가 퍼지니까 치료 받는 환자들도 다 좋아했고, 마음이 안정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 이후에 경향신문사에 입사해 환경담당 기자로 일하게 되면서 정향나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게 됐어요. 우리나라 야생 꽃나무인 정향나무가 미국으로 건너가 '미스킴 라일락'으로 개량됐다는 건 그때 처음 들었습니다. 우리 종자가 넘어가 버렸다는 사실이 안타까웠죠.
언제부터 정향나무를 심었나요?
1996년 가을에 설악산으로 취재를 갔는데, 그곳에서 정향나무를 발견했습니다. 거기서 씨앗 100여개 정도를 가져왔어요. 높은 산뿐만 아니라 고도가 낮은 곳에서도 정향나무가 잘 자랄 수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만약 저지대에서도 정향나무를 키울 수 있다면 전국 곳곳에 나무를 심어 멸종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가져온 씨앗을 잘 보관했다가 이듬 해 낚시하러 자주 다니던 제천 인근 남한강가에 뿌렸어요. 씨앗 100개 중에 9개에서 싹이 나서 자라기 시작했는데 중간에 한 그루는 죽고 여덟 그루가 끝까지 살아남아서 2001년에 꽃을 피우고 열매가 맺혔습니다. 그렇게 얻은 정향나무에서 다시 씨앗을 채취해 심으니까 나무가 자라기 시작했어요. 1997년에 처음 심었을 땐 싹이 트는 발아율이 10%에도 못 미쳤는데 점점 싹이 나는 비율이 높아져 지금은 30% 정도에 이릅니다. 20년 가까이 낮은 곳에서 자라다 보니 정향나무도 새로운 환경에 익숙해진 겁니다. 해발 1300m 이상 고지대에서만 자라던 나무가 해발 200m에서도 잘 자라게 됐으니 정향나무를 우리 일상에서 볼 수 있는 길이 열린 셈이죠.
정향나무 말고도 다른 토종 라일락도 재배하고 있다면서요?
원래 울릉도에서만 자라는 희귀종인 섬개회나무, 흰섬개회나무를 포함해 흰정향나무, 꽃개회나무, 개회나무, 수수꽃다리 등 수수꽃다리속에 속하는 6종의 꽃나무 4000여 그루도 재배 중입니다. 특히 섬개회나무와 흰섬개회나무는 울릉도에서도 성인봉을 중심으로 해발 800m 고지대에서만 드물게 분포하는데, 점차 군락지가 줄어들고 있어요. 원래는 그보다 조금 낮은 산지에도 자랐지만 울릉도 일주도로가 건설되고 등산로가 정비되면서 불법 채집으로 지금은 씨가 말라가고 있어요. 이대로 가면 울릉도에서만 볼 수 있는 꽃나무 두 종이 멸종해버릴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야생에서 종자를 구해 농장에서 기르고 있습니다.
김판수 씨를 따라 그의 농장을 한 바퀴 돌고 난 뒤 단양 읍내로 자리를 옮겨 인터뷰를 계속하기로 했습니다. 눈발이 날리는 3월 초순의 소백산 산기슭이 너무 쌀쌀했기 때문이죠. 김판수씨는 단양 읍내에서 묵밥과 돼지고기 수육을 잘 하는 곳이 있다며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그는 식사하기 전에 한군데 먼저 들릴 곳이 있다며 정향나무 묘목 세 그루를 차 트렁크에 옮겨 심었습니다. 지난해 정향나무를 비롯한 토종 라일락 증식에 성공했다는 사실이 언론에 보도된 뒤 알음알음 주문이 들어온다고 그는 설명했습니다. 지난해 묘목 30여 그루를 팔아서 번 300여 만원이 그가 2007년 농장을 시작한 이후 벌어 들인 첫 수입이었습니다. 십 년 만에 올린 수익치고는 작은 금액이었죠. "아직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향나무와 다른 토종 라일락들이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해 주로 수목원이나 식물학자들이 연구용으로 한,두그루 씩 주문하는 데 그쳤다"고 했습니다.
토종 라일락을 보존하고 증식하면서 어려운 점은 어떤게 있었나요?
지난해 여름에 가뭄이 심하게 들었어요. 원래 정향나무 1년생 묘목이 1만 그루 정도 있었는데, 가뭄 탓에 절반 넘게 말라 죽었어요. 산골짜기까지 물을 끌어올 수도 없고 매일 농장을 돌아다니면서 발만 동동 굴렀습니다. 사실 지금도 나무들한테 많이 미안해요. 원래 야생에선 다들 떨어져서 널찍하게 자라는 데 좁은 농장에서 키우다보니 빽빽하게 심을 수 밖에 없어서... 나무들한테 미안합니다. 아내와 아들들한테도 참 많이 미안하고... 대학생 아들이 두 명 있는데, 농사 짓는다고 10년 동안, 연간 절반 넘게 떨어져 지낸 것도 미안하고 집에 제대로 돈을 가져다 주지 못한 것도 미안합니다.
토종 라일락을 포함해 멸종 위기에 처한 식물들을 지켜내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우선 토종 라일락의 종 보전을 위해서 식물의 분포 지역, 생육 특성에 대한 심층적인 조사가 필요합니다. 지금은 저향나무가 산림청의 희귀, 멸종위기 식물로만 지정이 돼있을 뿐 식물의 특성에 대해 제대로 된 연구가 거의 없습니다. 불법 채집이 이뤄질까 봐 자세한 위치는 말할 순 없지만 백두대간 곳곳을 다녀보면 아직 강원, 경북, 경남 등 내륙 지방에 소규모 정향나무 군락이 남아있어요. 남아있는 곳이라도 우선 훼손되지 않도록 잘 보존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더농부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정향나무 종자가 미국에서 품종 개량돼 다시 한국으로 들어온 미스킴 라일락을 보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 뿌리가 우리나라 식물인지 모르고 그저 예쁘다고만 할 때마다 속상합니다. 우리나라 공원, 고궁, 박물관, 공공기관 청사를 가봐도 우리나라 토종 식물보다는 외국에서 들여온 꽃나무들을 심는 경우가 많아요. 외래종을 무조건 뽑아내자는 게 아닙니다. 다만 토종을 배제한 채 굳이 외래종으로만 꽃의 아름다움과 향기를 즐기는 것도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정원수나 가로수로 적합한 토종 식물이 있다면 처음엔 조금 낯설더라도 나무를 심어 사람들에게 우리 꽃나무의 아름다움을 알리는 것도 필요합니다. 우리 꽃나무 보전에 나의 역할이 필요하다면 그동안 익힌 경함과 노하우, 지식을 기꺼이 내놓겠습니다.
FARM 에디터 홍선표
nong-up@naver.com
단양=더농부
첫댓글 대단해요끈기의인간성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