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부터 영화를 볼 때마다 공포영화를 보자고 조르는 학생들이 몇 명 있었습니다.
[시실리 2Km](이하 '시실리')는 순수하게 공포영화 쟝르로 분류될 성격의 영화가 아니라, '조폭영화', '코믹영화', '귀신영화' 등 한국영화에 있어서의 여러 전통쟝르가 혼합되어 있는 영화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꽤 무서웠습니다. 30명 정도의 학생들이 보러 왔었는데, 그 중 몇몇은 중간에 무섭다며 나갔습니다.
짜식들, 뭐가 무섭다고......
[시실리]에는 임창정과 권오중 김윤식 등이 출연하는데, 개인적으로 임창정의 코믹연기를 오랜만에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노래와 연기 모두 좋아하지만, 예전이나 지금이나 노래와 연기 모두 변화가 별로 없다는 게 흠이라면 흠일 수 있겠습니다.
인간의 키는 스무살도 되기 전에 다 자라버리지만, 일과 공부, 경험등을 통해 성장하는 '내면의 사람'은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고 자랍니다.
노래와 연기 등 예능 쪽 일은 특별한 재능을 필요로 하고, 그 재능은 노력하면 할 수록 늘 자신의 속에서 새로이 발견되고 성장해 나갑니다. 영화 감독의 주된 일들 중 하나는, 배우들의 드러난 재능을 십분 활용하고 나아가서 감춰진 재능을 찾아내는 겁니다. 임창정도 권오중도 코믹하면서도 진지함이 덜한 고정적인 캐릭터를 가지고 있고, [시실리]는 그런 배우들의 이미지에 의지해 그럭저럭 웃겼고, 전통적인 귀신영화 쟝르의 몇가지 스타일(깜짝깜짝 놀래키는 몇몇 장면들 및 원한을 가진 귀신이 등장하는 것 등등)을 따르는 것으로 해서 공포영화로서의 인상도 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특성을 통해, [시실리]의 감독이 영화를 많이 보고 이해하고 있는 감독이라는 걸 알 수 있었고, 스스로도 감독으로서 성장해 나가는 길 위에 있는 듯이 보여집니다.
프랑스에는 1970년대부터 오락영화를 주로 만들어 오던 '빠트리스 르꽁트Patrice Leconte'라는 감독이 있습니다. 코믹한 오락영화를 주로 만들었지만, 80년대에 들어서면서 르꽁트 감독의 영화에는 인간의 고독감이 진하게 묻어나기 시작합니다. '미쉘 블랑'이라는 젊은 나이에 대머리가 된 키작은 프랑스 배우가 '빠트리스 르꽁트' 감독과 오랫동안 함께 작업했었습니다. '미쉘 블랑' 역시 코믹한 캐릭터가 고정적이었지만, 80년대 이후 '르꽁트' 감독의 영화에서 '미쉘 블랑'은 현대 도시 '파리'를 살아가는 외로운 영혼을 대변하게도 됩니다. '빠트리스 르꽁트' 감독도, '미쉘 블랑'도 수십년간 영화를 만드는 일을 하면서, 예술가로서 인생을 탐구하는 길을 밟아오고 있는 것이겠지 싶습니다. '빠트리스 르꽁트' 감독의 [미용사의 남편 Le Mari de La coiffeuse](1990)에는 '르꽁트' 감독의 수많은 영화에 출연한 또 하나의 코믹배우 '쟝 로쉐포Jean Rochefort'가 출연합니다. '쟝 로쉐포'는 이 영화에서 그 때까지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평범하면서도 말수적은 노년남자(미용사의 남편 역)를 연기합니다. 프랑스 바닷가에 사는 어느 여자 미용사가,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하는데, 그 이유는 자신의 남편과 함께 있으면서 너무나도 행복한 나머지 그 행복한 순간이 지나가기 전에 죽고 싶어서였습니다. 자신의 삶에 있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간직한 채 죽은 아내를 그리워 하면서, 남편은 미용실에서 일하며 살아갑니다. 자살한 여자의 '사고방식'은, 프랑스 철학자들의 '말의 유희' 혹은 'grammatology'처럼 느껴질 수 밖에 없는 논리입니다. 그러나, 비이성적이지만 논리는 논리입니다. 그 사람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겁니다. 곧, '사랑'과 '행복'은 그 여자에게 있어서 철저하게 '개인적'이며 '내면적'인 것이고, '사랑'의 대상과 '행복'의 근거를 자신의 내면에 간직하는 것으로 해서, 물리적인 소멸을 뜻하는 죽음을 뛰어넘어 '사랑'과 '행복'을 '영생불멸'의 것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비록 그게 '말의 유희'나, '영화같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웃어 버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 여자는 스스로 만들어낸 논리와 사고대로 행동하고 죽어버리는 것으로, 보통 인간들이 가질 수 없는 '영원한 사랑과 행복'을 가질 수 있게 된 겁니다. 그런데, 결국 '사랑'이란 것도 그렇게 철저히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것이라면, 인간의 삶이란 건 사랑하는 사람 곁에 있으면서도 고독할 수 밖에 없어 보입니다.
'저 사람은 나를 사랑해. 나도 저 사람을 사랑해'
라는 말을 이렇게 바꾸면 어떨까요?
'저 사람의 내면에는 저 사람이 사랑하는 어떤 이미지가 있어. 내 안에는 내가 사랑하는 어떤 이미지가 있어'
'빠트리스 르꽁트'는 위와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한 사람의 관객으로서 '르꽁트'의 영화를 보며 위와 같은 생각들을 했던 겁니다.
[시실리]를 만든 감독과 배우들 또한 계속해서 수십년에 걸쳐 영화를 만들다 보면, 그들 역시 예술가로서 인생을 탐구해 가는 길위를 걷게 될 겁니다. 그리고, 그들의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들 역시, 그저 웃기고 무서워서 재미있는 영화만 좋아했었다가도, 언젠가는 영화를 비롯한 예술을 통해 인생을 성찰하게 되는 날도 올 겁니다.
어제는, 한 편의 영화를 보며 수많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삶을 엿보며 관찰하는 영사기사의 어느 하루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