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아가면서 가끔 마음을 꼭꼭 닫아건 채 심술만으로 무장한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영화 ‘그랜 토리노’의 주인공 윌트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윌트는 한국 전쟁에서 어린 소년병을 죽인 상처를 평생 마음에 담고, 살고 있지만 죽은 것과 같은 폐쇄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윌트가 평생 차고 속에 모셔둔, 아끼는 자동차 ‘그랜 토리노’를 훔치러 온 동양인 소년 ‘타오’를 만나면서 서서히 마음을 열어가는 과정을 영화 ‘그랜 토리노’는 보여줍니다.
결국 동양인 소년 ‘타오’는 ‘그랜 토리노’를 훔치는 데는 실패 했지만, 꼭꼭 닫아건 윌트의 마음을 조금쯤 훔치는데는 성공했다고나 할까요?
이제껏 동양인을 동물 취급하던 윌트는 이제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삶을 함께하는 친구가 되어갑니다. 그리고 살기위해 소년병을 죽였던 상처를 치유라도 하듯 ‘타오’를 지키기 위해 새로운 삶의 방식을 보여줍니다.
그 새로운 삶의 방식에 영화를 보는 우리는 충격을 받게 됩니다.
“터프가이라고 해서 항상 피를 봐야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윌트의 대사가 나올 때만 해도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결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유난히 강한 ‘우리끼리’ 문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같은 지역 사람끼리’, ‘같은 학교 출신끼리’, ‘우리가족 끼리’, 심지어는 ‘우리 성당끼리, 같은 레지오팀 끼리’ 라는 말로 신앙 안에서조차 존재하는 ‘끼리끼리’문화는 배타적인 분위기로 서로의 융합을 방해합니다.
‘그랜 토리노’에서는 윌트를 통해 ‘우리끼리’의 문화를 지역과 혈연을 뛰어넘는 큰 그림으로 보여줍니다.
윌트에게서의 ‘우리’라는 개념은 ‘혈연’이 상위개념이 아니라, 한마디로 얼마나 ‘싸가지(싹수)가 있느냐’는 거에 달려있습니다.
그래서 윌트에게는 싸가지 있고, 착한 동양인들이 우리요, 친구요, 가족입니다.
그것은 윌트의 재산 분배 방식에서도 한 번 더 증명됩니다.
부모의 유산문제로 형제간의 싸움이 신문을 오르내리는 우리나라에서는 수용하기 어렵더라도 윌트의 재산분배는 참 멋있고, 훌륭합니다.
살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죽음을 선택했던 상처로 평생 고통스러웠던 윌트가 이제는 친구를 살리기 위해 선택한 삶의 방식에서 예수님을 떠올려보는 것은, 그리고 영화 ‘그랜 토리노’가 너무나 복음적이라는것은 이 영화를 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설명으로 ‘그랜 토리노’가 너무 진지하고 무거운 영화라고 오해하실 분들에게 한마디 덧붙입니다.
‘타오’에게 터프가이를 가르치는 크린트 이스트우드의 절제된 유머는 너무 재미있고 연기는 너무 훌륭합니다. 그리고 영화의 감동은 라스트 신에서 ‘타오’가 타고 달리는 ‘그랜 토리노’의 멋진 영상과 주제곡과 함께 오래오래 기억에 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