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342년 겨울, 「半흉노」의 일파인 鮮卑族 모용황은 5만5천의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했다. 험준한 길인 南路에 4만을, 평탄한 길인 北路엔 1만5천을 투입했다. 거꾸로 고구려는 수비병력의 전부를 北路방어에 쏟았다.
결국 고구려는 대패했고 반면 北路로 침공했던 선비족 기마군단 1만5천은 고구려군에 의해 모두 죽은 것으로 기록됐다. 그러나 그때 그들 가운데 일부가 고구려軍에 ?겨 들어간 곳이 지금의 新羅였다고 추정한다.
================================================================================================ [편집자 注] 신라계와 가야계, 크게 두 줄기로 대별되는 한국 金씨의 뿌리가 흉노족의 피가 이어진 기마민족, 「선비족 모용씨(鮮卑族 慕容氏)」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이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최근 「신라 법흥왕은 선비족 모용씨의 후예였다 (풀빛출판사)」를 쓴 KBS 장한식 기자는 신라 김씨 왕족과 가야 김씨 왕실이 서기 342년 고구려를 침공한 모용씨 군대 가운데 낙오한 무리의 후예라는 가설을 펼치고 있다.
기존의 역사 지식으로는 선뜻 수긍하기 힘들지만 문헌에 근거한 주장을 펼치고 있다는 점에서 나름의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한국인 가운데 20%나 차지한다는 金씨의 뿌리를 탐색한다는 의미에서 「金씨의 기원은 흉노족의 후예 모용 선비」라는 그의 가설을 소개한다.
<張漢植 한국방송공사 보도국 TV 편집부 기자> 경주와 말의 문화 / 積石木槨墳 ===============================================================================================
慶州(경주)에서는 최근 몇년째 「말(馬) 싸움」이 심각하다. 보문관광단지 인근에 약 29만 평 규모의 경마장을 건설하겠다는 경주시의 방침에 대해 전국의 문화계 인사들이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市(시) 당국과 대다수 시민들은 수백억원은 족히 될 馬券稅(마권세) 수입에다 관광객도 연간 1백만명 정도 늘어나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며 적극 추진하자는 입장이다. 반면 문화계 인사들은 천년 古都(고도) 경주가 말이 뛰노는 투기장으로 전락해서는 안된다며 결사반대다.
게다가 경마장 부지로 지정된 지역에서 白炭(백탄) 숯가마 10여 기가 확인되고, 토기 工房(공방)이 발굴되고 있는 등 보호가치가 높은 역사유적지란 점을 들어 경마장 건설은 안된다고 버티고 있다.
문화유적 보존과 경건한 역사·문화도시의 명성 유지를 위해 경마장 설치를 반대하는 논리에 필자 역시 동의하는 편이다. 하지만 『경주와 말(馬)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주장만큼은 再(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경주는 한동안 騎馬文化(기마문화)가 꽃을 피웠던 곳이기 때문이다.
4세기 중반의 어느 날, 말을 탄 一團(일단)의 무사들이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경주 땅에 밀려들었다. 아무도 초대하지 않은 불청객이었지만 그들은 우세한 武力(무력)으로 경주 땅을 정복하고는 신라의 지배층이 되었다.
그리고는 한 동안 馬上(마상)에서 권력을 휘두르다 기마족의 문화를 짙게 남겨둔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다. 匈奴(흉노)의 피를 이어받은 「鮮卑族 慕容氏(선비족 모용씨)」, 훗날 金(김)으로 성을 바꾸는 신라 왕족들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4세기께 신라 땅 경주에는 積石木槨墳(적석목곽분)이 출현하고 있다. 바닥에 냇돌을 깔아 목관을 안치하고 그 주위에 통나무로 상자모양의 목곽, 즉 방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그 위에 돌을 쌓아 올리고 바깥에는 흙을 부어 거대한 봉분을 조성하는 방식이다.
적석목곽분은 경주 시내 곳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그 대표적인 곳이 황남동의 大陵園(대릉원)이다. 경주로 수학여행을 갔다 왔으면 틀림없이 이곳을 둘러보았을 것이다. 작은 동산을 연상케 하는 천마총과 황남대총 등 23기의 고분들로 공원이 조성돼 있다.
적석목곽분에 앞서 조성된 고분은 「낙랑형 토광목곽묘」다. 많은 학자들은 두 묘제 사이에는 계승 관계가 없다고 보고 있다. 즉 적석목곽분을 조성한 사람과 토광목곽묘를 만든 사람들의 뿌리가 서로 다르다는 말이다.
경주 땅에서 적석목곽분을 조성한 세력은 4세기 중반 이후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金씨 왕족이란 것이 정설이다. 이 적석목곽분이 匈奴族(흉노족)을 비롯한 중앙아시아의 기마민족이 조성했던 무덤과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조성됐다는 점이 밝혀지면서 이를 만든 金씨 왕족의 뿌리가 대초원지대의 기마민족임을 알게 해 주었다.
무덤 형식만 바뀐 것이 아니라 적석목곽분에서 나온 출토물도 과거와 크게 달라진다. 신라 적석목곽분은 가히 「騎馬文化의 타임캡슐」이라 할 만하다. 중앙아시아 대초원지대의 기마유목민족들이 즐겨 사용했던 각종 제품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금관과 장신구, 금으로 만든 허리띠, 띠 고리(버클), 각배(뿔잔), 보검, 유리제품 등은 스키타이族과 흉노族 등의 기마민족들이 즐겨 사용한 것과 비슷하거나 동일한 제품들로 밝혀졌다.
게다가 말을 순장한 무덤을 비롯해 안장과 등자(발걸이), 배가리개 등 호화롭게 장식한 각종 馬具類(마구류)가 다수 발굴되고 있어 적석목곽분을 조성한 金씨왕 세력이 기마족임을 거듭 확인시켜주고 있다.
4세기께 「말을 탄 사람들」이 신라 땅으로 들어와서 살았고 죽음에 이르러 아끼던 말을 순장하고 무덤 안에 마구류를 부장했다는 애기다.
이같은 적석목곽분과 그 속에서 나온 각종 출토물들을 종합해 볼 때 신라 金씨왕은 중앙아시아 대초원지대에서 이동해온 기마族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정설이라 할 정도로 힘을 얻어가고 있다.
하지만 신라의 북쪽 고구려, 백제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匈奴風(흉노풍)의 유적과 유물이 어찌하여 한반도의 동남단 신라(그리고 가야)에서만 나타나고 있는지는 한국 고대사의 오랜 수수께끼였다.
필자는 이에 대해 서기 342년 고구려를 침공한 기마민족 「慕容 鮮卑(모용 선비)」 군대의 일부가 신라로 들어가 왕권을 찬탈했고, 그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 또 하나의 무리가 가야(나아가 왜국)까지 진출했다는 가설을 내세우고 있다.
鮮卑族은 원래 東胡(동호:내몽골-만주 일대에 살던 옛 민족)의 일파로서 흉노족의 지배를 받은 민족이다. 기원 전 200년께, 좀 어리숙했던 東胡族의 임금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흉노에 싸움을 걸었다가 冒頓 單于(묵특 선우:묵특은 이름이고 선우는 왕을 뜻하는 흉노족 단어)가 거느린 흉노군에게 멸망당했다.
참고로 묵특은 왕위계승 분쟁으로 그 아비를 살해하고 선우 位(위)에 오른 뒤 30만명의 騎馬 弓兵(궁병)을 이끌고 아시아의 대초원지대를 석권한 인물이다.
漢(한)나라 창건자 劉邦(유방)도 묵특에게 도전했다가 패해 죽음의 위기를 맞자 한나라 공주를 시집보내고 매년 막대한 조공을 바치겠노라고 빌어 겨우 목숨을 건질 정도였다. 이런 묵특을 얕잡아 보고 싸움을 벌인 결과 「동호」는 망하고 그 무리는 크게 세 갈래로 흩어진다. 한 무리는 흉노로 흡수되고 하나는 烏桓(오환), 나머지는 鮮卑로 통합된다.
묵특의 흉노軍에 박살이 난 鮮卑족은 약 3백년이 지나서야 흉노에 앙갚음을 하게 된다. 기원 후 85~91년 사이, 鮮卑는 後漢조정의 부탁을 받고 南흉노, 丁零(정령:시베리아 예니세이강 유역에 살던 유목민족 국가)과 함께 北흉노 토벌에 나서 北흉노를 패퇴시켰다.
이때 10여만 落(락:한 가구를 뜻함)의 北흉노인들이 선비족으로 귀속됐다는 내용이 後漢書에 나온다. 10여만 落이라면 매 落마다 5인 정도로 계산해도 50~60만명에 이르는 막대한 인구다.
원래 선비족의 인구는 40만명 정도였는데 이때 2배 이상 커지게 된다. 필자는 선비족 가운데 절반 이상이 본래 흉노족이었다는 이 대목을 중시한다. 선비족의 인종적 특징이나 문화가 흉노의 그것과 깊은 관련을 맺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대목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 글의 제목에서 「한국 金씨의 혈관에는 흉노의 피가 흐른다」고 한 것도 흉노족이 기마민족의 대표격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는데다 鮮卑族의 절반 이상이 애초 흉노족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최근 金씨의 선조가 한나라 武帝가 藿去炳(곽거병)을 보내 흉노를 토벌했을 때 붙잡힌 흉노의 王子(왕자) 金日(김일제)라는 가설을 펼치는 사람들이 있어 흥미롭다.
김일제는 漢무제의 말치기로 생활하다 성실성을 인정받아 끝내는 무제의 총애를 받는 귀족이 되었고, 金씨 성과 侯(투후:지금의 중국 하남성 일대인 「투」지방을 다스리는 제후 벼슬)라는 작호를 하사 받은 인물이다.
김일제의 후손들은 번창해 한나라 조정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지만 왕망이 新(신)나라를 세우는데 적극 협조했다는 이유로 멸문의 지경에 이르자 한반도로 도망쳐 나왔다는 것이 「김씨 선조는 김일제」설을 펼치는 사람들의 주장이다.
신라 문무왕의 비석에 「□侯 祭天之胤傳七葉(□후 제천지윤 전칠엽)이라는 기록이 나왔는데 이들은 「侯(투후)」 즉 김일제가 문무왕의 옛 조상이었음을 기록한 증거라고 말한다.
이들의 주장에 의견을 같이하는 것은 아니지만 반가운 마음이 앞선다. 한국의 최대 성씨 金씨의 기원을 찾아보려는 진지한 노력을 평가하는 의미뿐만이 아니라 金씨의 기원을 나와 마찬가지로 흉노족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金씨 선조는 흉노족의 피가 절반 이상 섞인 선비족 모용씨」라는 필자의 가설과 「김씨 시조는 흉노 왕자 김일제」라는 주장은 시대 상황과 경로 설정에서는 서로 다르지만 한국 金씨의 뿌리를 흉노족에서 찾아보자고 하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半匈奴(반흉노)」라 할 수 있는 선비족 가운데 한 일파가 「慕容부족」이다. 모용 부족의 명칭은 서기 150년경에 활동했던 「慕容」이란 추장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선비족은 추장의 성씨나 이름을 部族名으로 하는 관습이 있었다.
선비족 내부에는 拓跋部(탁발부)와 宇文部(우문부) 등 여러 부족이 존재했지만 「모용」의 5대손쯤 되는 涉歸(섭귀)가 추장이 되었을 즈음 모용부가 汎(범)선비족 가운데 최강의 부족으로 떠오른다. 섭귀는 「선비 單于(선우)」에 올랐다.
선우는 최고지도자를 뜻하는 흉노의 단어. 여기서 모용부가 원래 흉노족에서 선비족으로 귀속됐거나,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흉노의 정치체제나 풍습을 대폭 수용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섭귀의 아들 慕容(모용외)가 추장이 되면서부터 모용부는 국가의 모습을 갖춰나갔고 韓(한)민족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모용외는 서기 285년 부여를 침공해 부여왕 依慮(의려)를 자살하게 만들고 부여 백성 1만여 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또 제집 안방 드나들 듯 고구려를 침공하니 고구려 봉상왕이 『모용씨는 兵馬가 精强(정강)해 걸핏하면 우리 강역을 침범하니 어찌하면 좋으냐』고 탄식할 정도였다(삼국사기).
모용외를 뒤이은 아들 慕容(모용황)은 337년 자신의 영역이 춘추전국시대 燕(연)나라와 겹친다는 점에서 제멋대로 국호를 燕(연)이라 정하고는 왕위에 오르니 바로 「5호16국 시대」 모용씨 왕조가 탄생한 것이다.
慕容의 고구려 침공과 모용씨의 신라 진출
모용황은 꿈이 컸던 인물이다. 요서와 요동지방을 삽시간에 아우르고는 中原(중원)을 도모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모용황이 중원 공략에 나서려 하자 동방의 고구려가 눈엣가시로 다가왔다. 고구려를 그대로 두고 대륙 깊숙이 진출했다가는 등 뒤에서 칼을 받을 위험성이 있었던 것이다.
훗날 後金(후금)이 中原을 석권하기에 앞서 조선을 침략(정묘호란, 병자호란)한 것과 같은 이치에서 모용황은 고구려를 정복해 굴복시키고자 했다. 342년 겨울, 드넓은 만주 벌판이 두터운 눈으로 뒤덮였을 즈음 모용황은 5만5천명의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기마족이었던만큼 대부분이 騎兵(기병)이었을 것이다.
당시 모용황의 군대가 고구려 수도 환도성을 침공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 南路(남로)와 北路(북로)가 있었다. 남로는 험준하고 좁은 산악지대였던 반면 北路는 평탄한 개활지였다. 따라서 주력부대가 평탄한 北路를 택하고 험준한 南路에는 조력부대가 진출하는 것이 병법의 상식이었다. 그러나 모용황은 이같은 병법의 상식을 거부하는 전략을 세웠다.
삼국사기에는 모용황의 서자 형 慕容翰(모용한)이 「고구려는 분명 우리 대군이 北路로 쳐들어올 줄 알고 북쪽만을 엄중히 막고 남로를 소홀히 할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대군을 南路에 집중시켜야 할 것이다」고 주장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모용한의 작전은 제2차 포에니전쟁 때인 기원 전 218년경 알프스 산맥을 넘어 로마를 기습공격한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의 전략을 떠올리게 한다.
모용황은 형 모용한과 동생 慕容覇(모용패)를 선봉장으로 삼아 자신이 4만 대군을 이끌고 험준한 南路로 침공하고 北路에는 1만5천 병력을 보냈다. 이 작전은 그대로 고구려의 허를 찔렀다. 고구려 고국원왕은 아우 高武(고무)왕자에게 5만 병력을 맡겨 北路를 방어하게 하고, 혹시나 싶어 예비대 1만명으로 하여금 南路를 지키게 했던 것이다.
4만의 기병군단을 1만명으로 막기에는 역부족, 전투는 삽시간에 끝나고 모용황의 大軍은 환도성으로 물밀 듯이 쳐들어갔다. 형세가 다급해진 고국원왕은 단웅곡이란 깊은 산골짜기로 달아났고 고구려 백성 5만명이 포로로 잡혔다. 모용황은 고구려 수도 환도성에 불을 질러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본국 사정이 궁금해진 모용황은 고국원왕의 항복을 받지 못한 채 철수 길에 올랐다.
모용황은 고구려가 뒤에서 공격하는 것을 막기 위해 왕비와 왕대비를 볼모로 잡아갔고 왕의 부친 미천왕의 무덤을 파헤쳐 屍身(시신)까지 꺼내가는 파렴치한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모용황의 공격을 받아 나라가 쑥대밭이 되자 고구려는 어쩔 도리 없이 연나라에 머리를 숙여야 했고 모용황은 이때부터 고구려의 배후공격 위험에서 벗어나 中原도모에 주력할 수 있었다.
모용황의 주력군이 고구려에 대승을 거뒀지만 北路로 간 1만5천명의 운명은 정반대였다. 삼국사기는 「왕우(북로 침공군 대장) 등은 북쪽 길에서 싸우다가 패하여 모두 죽었다(會王寓等戰於北道, 皆敗沒)」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의 이 기록은 중국 역사서인 자치통감의 기록을 다소 축략해 전재한 것이다. 자치통감은 물론 모용황측이 전한 기록을 담았을 것이다.
「(고구려 군에게)패하여 모두 죽었다」는 말은 북로로 진군한 1만5천명이 아무도 본진으로 귀환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1만5천의 병력으로 5만 대군을 맞아 싸웠으니 전투에서 패했을 것은 분명한데 아무도 돌아오지 않으니 자세한 내용은 담지 못하고 「모두가 죽었다(皆敗沒)」고 간주해 이런 짧은 기록만을 남긴 것이다. 하지만 燕나라로 귀환한 모용황의 병사가 없다고 해서 北路로 진군한 1만5천명 모두가 전사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1만5천명의 별동대는 자신들이 버림받은 처지임을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고구려 주력군의 눈을 속이기 위해 전선에 투입되고 있다. 5만명의 고구려 군대와 맞서 싸우면 질 것이 뻔하다. 모용황은 우리가 죽어도 괜찮다는 생각에서 북쪽 길로 보낸 것이다』
임금에게서 버림받은 데 대한 울분과 질 것이 뻔하다는 불안감을 갖고 출전한 1만5천명. 이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을 리가 있을까?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고구려군과의 전투에서 패하자마자 살기 위한 목적에서 도주했을 가능성이 높다.
처음부터 방향을 정하고 달아났다기보다는 대오를 갖추기 힘든 상태에서 고구려 軍의 추격을 받다보니 고구려 지경을 벗어나 신라 땅으로까지 밀렸을 개연성을 상정해본다.
고구려와 신라를 잇는 동해안 루트는 예부터 열려 있었다. 4세기 중반 이후 기마族의 신라 진출 흔적이 뚜렷이 발견된다는 점에서 1만5천명 가운데 적어도 수천명의 군단이 신라에 들어갔을 것으로 추정한다.
내물왕 26년, 즉 서기 381년 신라는 북중국의 유목민족 국가 前秦(전진)에 사신을 보낸다. 삼국사기에는 이때 전진의 황제 符堅(부견)과 신라 사신 衛頭(위두) 간의 대화가 기록돼 있다.
<부견이 위두에게 묻기를 『그대의 말에 海東(해동:신라)의 형편이 옛날과 같지 않다고 하니 무엇을 말함이냐』고 하니 위두가 대답하기를 『이는 마치 중국의 시대변혁·명호개역과 같은 것이니 지금이 어찌 예와 같을 수 있으리오』라고 하였다. (符堅問 衛頭曰, 卿言海東之事, 與古不同, 何耶, 答曰, 亦猶中國 時代變革 名號改易, 今焉得同)>
이 기록에 대해 지금까지는 신라가 내물왕 들어 나라가 크게 발전했음을 보여주는 답변이라고 풀이해 왔지만 시대변혁·명호개역은 단순히 나라의 체제가 정비된 수준을 넘어선다. 이전까지의 昔(석)씨 임금 시대가 끝장나고 외부세력이 정권을 장악해 모든 면에서 과거와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됐음을 내포한 말로 해석할 수 있다.
사실 내물왕 이후 昔(석)씨는 신라 역사의 주류에서 사라진다. 왕은 물론 왕비나, 재상, 학자, 장군 가운데서 昔씨는 찾아볼 수 없다. 신라 金씨보다 역사가 오래된 昔씨지만 현대 한국사회에서 昔씨는 대단한 희성이다. 이는 내물왕 집권기에 昔씨가 철저히 제거됐음을 암시한다.
昔씨가 사라지는 것과 위두가 밝힌 시대변혁이라는 문구를 통해 이 시기에 강력한 군사력에다 선진적 국가체계를 경험한 새로운 세력이 신라 땅을 정복했음을 거듭 시사받을 수 있다. 사실 4세기경 고구려 땅을 뚫고 신라로 진출할 수 있는 기마족은 선비족 모용씨 외는 달리 거론하기 힘들다.
신라 김씨왕이 선비족 모용씨였다는 결정적 문헌은 있을 수 없다. 金씨왕들은 기존의 신라인들과 힘을 합쳐 새 나라를 건설하는 입장이었던 만큼 「우리는 대대로 신라 땅에서 살아온 사람들이다」는 기록을 남기는 게 정상이지 「원래는 모용 선비였는데 석씨 임금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는 기록을 남길 리 만무하다. 하지만 金씨왕의 기원이 모용선비임을 알게 해주는 약간의 단서는 있다.
1. 법흥왕의 본명은 慕秦(모진)
신라 법흥왕에게는 두 개의 姓(성)과 이름이 있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4권 법흥왕의 기록을 그대로 옮겨본다.
<법흥왕이 즉위하니 이름은 원종이다. 『책부원구란 옛 책에는 성은 募(모), 이름은 泰(태)라 했는데, 태는 遺事(유사:책 이름) 王曆(왕력)에는 秦(진)이라 돼 있다』 지증왕의 원자로서 어머니는 연제부인이요 왕비는 박씨, 보도부인이다.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저술하면서 법흥왕 김원종의 성과 이름을 募泰(모태) 또는 募秦(모진)으로 괴상하게(?) 적고 있는 고기록의 출처를 밝혀두었다. 金씨로 알고 있는 법흥왕의 성과 이름을 이런 식으로 표기하고 있는 사례는 삼국사기뿐만 아니고 중국의 다른 역사서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姚思廉(요사렴)이란 당나라 학자가 쓴 梁書(양서)에는 신라 법흥왕이 즉위 8년, 서기 521년 중국 강남에 자리잡고 있는 漢族의 나라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친 사정을 기록하면서 신라 임금의 성은 「募(모)」요 이름은 「秦(진)」 이라고 적고 있다. 그 뒤 이연수란 당나라 학자가 편찬한 南史(남사)란 역사책에는 법흥왕의 성을 「募(모)」 이름을 「泰(태)」로 기록하고 있다. 秦과 泰는 글자 모양이 비슷하기 때문에 梁書(양서)의 기록을 南史(남사)에서 옮겨 적다 오기한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중국역사서 通典(통전)에는 법흥왕의 성명을 「慕秦」으로 적고 있다. 梁書와 南史에서는 법흥왕의 성을 「모을 募」로 쓴 데 반해 통전에서는 「사모할 慕」를 쓴 것이 차이점이다. 「사모할 慕」와 「모을 募」는 발음이 같고 글자 모양도 극히 비슷한 탓에 옮겨 적다 혼동이 생긴 것으로 여겨진다. 법흥왕 김원종의 성명이 慕秦≒募秦(모진)이라니… 지금껏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로 치부해왔다. 이병도 박사는 그의 「삼국사기 역주」에서 「어떤 오해로 인한 것인 듯하다」고 풀이한 바 있다.
그러나 중국 역사서에서 발견되고 있는 「모진」은 법흥왕의 성명이 맞는 것으로 드러났다. 법흥왕의 성을 모(MO)로 적고 있는 사례가 국내 문헌에서도 발견됐기 때문이다. 1988년 경북 울진군 봉평리에서 발견된 「봉평 신라비」는 법흥왕 즉위 11년, 서기 524년에 세운 비석이다. 여기서는 법흥왕을 「牟卽智(모즉지)」로 적고 있으니 牟는 성이요 卽은 이름 智는 존칭이다.
봉평 신라비에는 모두 35명의 이름이 나오는데, 임금 모즉지를 비롯해 葛文王(갈문왕:신라 왕족) 牟心智(모심지), 비문을 적은 牟珍斯利公(모진사리공), 비문을 조각한 牟利智(모리지) 등 4명의 이름이 「牟」로 시작되고 있다. 그렇다면 「牟」를 姓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姓을 쓰지 않고 이름만 기록했다면 이렇게 여러 사람이 같은 글자로 시작할 리 없다.
봉평 신라비의 법흥왕 성명 「牟卽(모즉)」은 중국 역사서의 慕秦≒募秦(모진)과 비교할 때 글자 모양은 다르지만 발음은 「모(MO)」로 동일하다. 삼국시대의 경우 인명이나 지명을 표기할 때 발음이 같거나 비슷한 한자가 넘나들면서 쓰이는 경우가 흔하다. 한 예로 가야를 加耶, 伽倻 또는 加羅(가라), 駕洛(가락) 등으로 다양하게 기록하고 있다.
중국 역사서의 慕秦과 봉평 신라비의 牟卽 또한 이런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결국 중국 역사서와 봉평 신라비가 공통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은 봉평 신라비를 세운 524년까지는 법흥왕이 「미스터 김(Mr. KIM)」이 아니라 「미스터 모(Mr. MO)」였다는 사실이다.
또 법흥왕은 지증왕의 큰아들로서 신라 金씨 왕조의 뚜렷한 자손이니, 결국 법흥왕 이전까지의 신라 金씨 왕들의 姓이 상식과는 달리 「모(MO)」였다고 믿지 않을 수 없다. 사실 법흥왕 때까지 중국 역사서에서 신라 왕의 姓을 金(김)으로 기록한 사례는 없다. 신라 왕의 姓을 金으로 적고 있기는 법흥왕을 뒤이은 진흥왕 때부터이다.
진흥왕이 在位(재위) 25년(서기 564년) 北齊(북제)에 사신을 보냈을 때 중국 역사서 北齊書(북제서)는 신라왕의 성명을 「金眞興(김진흥)」으로 적고 있다. 중국 史書에서 신라 왕의 姓을 金씨로 기록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또 隨書(수서)에서 「수나라 문제 14년(서기 594년, 신라 진평왕 16년) 신라왕 金眞平(김진평)이 사신을 보냈다」고 기록하는 등 564년 이후에는 신라 왕의 姓을 金으로 분명히 적고 있다.
2. 慕씨는 慕容氏
법흥왕의 성씨가 모씨라고 하더라도 慕와 慕容이 직접적인 관련이 없을 수도 있지 않느냐는 반론이 나올 수도 있지만 모=모용으로 볼 수 있는 단서는 충분하다.
첫째 신라로 들어간 모용씨가 혼동을 피해 모씨라는 단성을 썼을 가능성이 있다. 참고로 모용씨는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하나는 慕容(모용)이요 또 하나는 「慕輿(모여)」이다. 모용황의 부하 장수 가운데 慕輿(모여니)란 인물이 고국원왕의 모친과 왕비를 사로잡아갔다는 기사가 삼국사기에 나오는 것을 비롯해 절충장군 慕輿根(모여근)과 慕輿蓋(모여개) 등 「모여」란 성씨를 가진 인물들을 모용씨 왕국에서 여럿 찾아볼 수 있다.
慕輿씨 역시 慕容씨와 비슷한 위치의 귀족이었다. 같은 慕容씨가 漢字(한자)로 성씨를 표기하면서 慕容과 慕輿로 나뉜 데 대해 구구한 억측이 많지만 나는 원래 선비족의 말이 한문으로 꼭 맞아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으로 풀이해 본다.
어쨌든 慕씨의 성을 漢字로 표기하다 보면 「慕容」이 되기도 하고 「慕輿」가 되기도 했으니 혼동의 소지가 있다. 간단히 「慕」로 표기하면 더욱 분명한 성씨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두 글자 複姓(복성)을 한 글자 單姓(단성)으로 쓸 수 있다.
또한 복성을 단성으로 표기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으니 그 예는 백제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수서」 백제조에 나오는 백제의 8대 귀족 성씨 가운데 沙(사)씨는 원래 沙咤(사타) 혹은 沙宅(사택)씨였고, 眞(진)은 眞慕(진모), 木(목)은 木(목협)이라는 복성이었지만 모두 단성으로 표기하고 있다. 복성은 부를 때나 표기할 때나 효율성이 떨어진다.
더구나 당시 신라는 복성이 아니라 단성을 쓰는 문화였다. 朴(박)-昔(석)-李(이)-鄭(정)-孫(손)-薛(설) 등 유력 귀족의 성씨가 모두 단성이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복성 「慕容」 또는 「慕輿」를 단성 「慕」로 표기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런 일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삼국사기와 중국 역사서, 봉평 신라비를 토대로 할 때 법흥왕은 우리의 상식과 달리 「미스터 모(MO)」였고 이는 慕容씨에서 나왔을 개연성이 충분하다. 또 법흥왕이 분명 신라 中古代(중고대) 金씨 왕실의 嫡統(적통)이었다는 점에서 그 이전의 왕들도 성을 「慕」로 썼을 것이란 결론에 이르게 된다.
중국 역사서에서 신라왕의 성씨를 金(김)으로 적기 시작한 것이 진흥왕 시대부터라고 한다면 법흥왕이나 진흥왕 때 비로소 金씨 성을 썼다고 봐야 한다. 나는 법흥왕이 慕容씨 성을 金으로 바꿨다고 보는데 이 점은 뒤에서 다룬다.
3. 慕容씨 시조신화와 신라(가야) 시조신화의 유사성
慕容씨가 신라 지배층이었다는 또다른 증거로 慕容씨의 시조신화와 신라의 시조신화-건국신화가 유사한 점을 들 수 있다. 다음은 慕容씨의 시조신화다.
<乾羅(건라)는 모용외의 12대 조상이다. 어느 날 저녁에 그는 금은으로 된 갑옷과 안장을 한 백마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왔다>(晋書 권108)
우선 乾羅(건라)란 이름이 新羅(신라), 加羅(가라)와 비슷한 점이 예사롭지 않다. 앞서 밝혔지만 선비족은 위대한 추장이나 조상의 이름을 「부족의 명칭」으로 삼는 관습이 있었다. 그렇다면 국호로 삼지 못할 이유가 없다. 新羅(신라)는 「새로운 乾羅(건라)」라고 풀이해보면 딱 떨어진다. 소설적 추리를 발휘하고픈 유혹을 받는 대목이다.
또 乾羅의 신화는 신라 박혁거세의 개국신화와 김알지 천강신화와 유사하다. 하늘에서 사내아이가 든 알이나 금궤짝이 내려오고 백마가 알을 지키고 있다가 하늘로 올라갔다는 내용의 박혁거세 신화와 김알지 설화는 잘 알려져 있어 여기서 재론하지 않겠다.
다만 慕容씨의 시조 신화가 담담하다면 박혁거세 신화와 김알지 설화는 내용이 극적인 차이가 있을 뿐 하늘에서 내려오는 현상, 백마의 출현, 흰색 분위기(흰닭이나 흰말의 등장), 몸통을 금은 갑옷으로 보호한 乾羅와 금 상자(금 알) 속에 보호된 사내아이 등 신화의 모티브가 상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박혁거세 신화는 모용씨와 무관하지 않느냐는 지적을 할 수도 있겠지만 혁거세 신화가 후대에 창작-채록됐을 가능성이 많다.
사실 혁거세 신화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만 나오지 중국 正史書(정사서)에 기록된 사례가 없다. 부여와 고구려, 백제의 시조신화가 일찍부터 중국 역사서에서 발견되는 것과 대조적이다. 아마도 신라 金씨(모용씨) 왕실 내에 「시조 백마 天降 신화」가 전승돼 오다 진흥왕 시절 「國史(국사)」를 편찬할 즈음 개국시조 박혁거세와 金씨 왕실의 조상 김알지 설화에 적당히 배분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덧붙이자면 가야 수로왕의 下降설화도 신라 김알지 설화는 물론 모용씨 시조 乾羅설화와 유사성이 높다.
4. 모용씨 步搖冠과 신라-가야 금관
모용 부족 명칭의 유래에 관련해 모용부의 한 추장이 걸을 때 관의 장식이 흔들리는 것을 좋아해서 부족사람들에게 그런 관, 즉 步搖冠(보요관)을 쓰게 하니 걸을 때 흔들린다는 뜻으로 「步搖」라 했으며, 이 보요가 와전돼 「모용」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모용 부족 기원설로는 별 설득력이 없어 보이지만 모용 부족이 보요관을 즐겨 썼다는 것은 알 수 있다.
걸음을 걸을 때 흔들린 것으로 보아 새 깃이나 나뭇가지 등의 길다란 장식을 달았을 것이다. 여기서 신라·가야의 금관 또는 금동관을 다시 한번 살펴보자. 鳥羽冠(조우관)이나 樹木型 立飾들은 걸음을 걸을 때 흔들리게 돼 있다. 모용부의 큰 특징이 보요관을 착용한 데 있다면 신라와 가야의 관모도 같은 선상에서 파악할 근거가 충분하다.
이밖에도 모용씨의 나라에서 활약한 사람들의 묘에서 발견된 장신구와 유리그릇 등 각종 출토물이 신라와 가야, 나아가 일본의 고분에서 발견되는 것과 유사한 점이 많아 선비족 모용씨가 신라-가야-왜국으로 진출하는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신라 金씨왕 뿐만 아니라 금관가야 金씨왕, 나아가 5세기 초 일본열도에 거대한 고분을 조성하는 왜국왕들도 선비족 모용씨의 일파로 보고 있다. 서기 42년 하늘에서 김해 구지봉으로 首露王(수로왕)이 下降해 155년을 다스렸다는 가락국기 기록은 신화로 본다.
「新撰姓氏錄」(신찬성씨록)이란 일본의 옛 책에는 수로왕으로 보이는 임나(=가야) 임금의 성명을 「牟留知(모류지)」로 적고 있으니 신라 법흥왕의 성명 牟卽智(모즉지)와 통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필자의 책 「신라 법흥왕은 선비족 모용씨의 후예였다(풀빛출판사)」에 나오니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慕容씨가 언제 어떻게 해서 金씨로 성을 바꿨는지 알아볼 차례다. 서기 521년 법흥왕이 사신을 보냈을 때 중국 정사서에서 신라왕의 성을 모(慕, 募)로 적고 있고 그로부터 3년 뒤인 524년 봉평신라비에 법흥왕의 성을 牟(모)로 적고 있다고 할 때 적어도 524년까지는 신라왕의 성이 「慕」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564년 진흥왕이 사신을 보냈을 때 중국측은 왕의 성을 金으로 적고 있으므로 「慕」에서 「金」으로의 성씨 변화가 일어난 때는 524~564년 사이 40년간으로 좁혀진다.
법흥왕 시절일 수도 있고 진흥왕 在位기간일 수도 있다. 그러나 법흥왕은 모진과 김원종 두 개의 성명이 전해지는 반면, 진흥왕은 金으로 시작하는 이름뿐이므로 법흥왕 시절 창씨개명이 단행됐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모(용)씨란 기마민족의 성을 버리고 중국식 金씨 성을 취한 배경은 殉葬(순장)의 금지(법흥왕의 아버지 지증왕 때 일), 율령제 실시, 불교 公認 등을 통해 기마족의 나라 신라를 농경문화민족으로 바꾸고자 했던 법흥왕의 개혁정책에서 찾아볼 수 있다(위에서 든 필자의 책 2부 참고).
모용씨에서 金씨로의 성씨 변화는 엄청난 사건인데 전혀 기록이 없다는 데 대해 의문이 들 수 있다. 이에 대해 나는 법흥왕이 숨지고 6년이 지난 진흥왕 6년 이사부와 거칠부 등 왕실 종친이 주축이 되어 꾸민 「國史(국사)」에 그 혐의를 둔다. 국사는 신라 金씨왕실의 정통성을 반석 위에 두고자 했던 일종의 통치이념서다.
이런 책을 통해 신라 金씨 왕실은 하늘이 보낸 선택된 종족이며 신라 초기부터 대대로 살아온 것처럼 역사를 조작(?)했다고 본다. 「國史」는 그 책이 전해지지 않아 구체적인 내용을 알 길이 없지만 삼국사기 등에 그 기록이 전해졌다고 볼 때 역사 날조의 증거들은 수없이 찾아볼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엉성한 왕의 계보이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모용씨≒金씨 세력에 의해 타도된 것으로 짐작되는 마지막 昔씨 임금이 흘해이사금이다. 그는 아버지 昔于老(석우로)가 서기 249년에 죽고 61년이 지난 310년에 즉위하는데 그때부터 46년을 왕위에 있었다고 돼 있다.
昔于老가 살았을 때 『우리 집안을 일으킬 아이다』고 칭찬했다니 아버지 昔于老가 숨질 때 적어도 열 살은 됐을 것이다. 그렇다면 왕위에 오른 310년에 흘해는 70세쯤 됐을 것인데 46년간이나 왕위에 있었다니 선뜻 믿기 어렵다.
내물왕은 미추왕의 조카이자 사위인데 미추왕은 284년에 숨진다. 그 사위 내물왕은 402년에 숨진다. 장인과 사위의 사망 연대가 1백18년이나 차이날 수는 없다. 또 제3대왕과 14대 임금은 둘 다 儒理(유리), 또는 儒禮(유례)로 그 이름이 똑같다.
삼국사기 저자 김부식 조차도 「두 임금의 이름이 같으니 어느 편이 옳은지 모르겠다」고 불평할 정도다. 왜 그럴까? 국사를 편찬한 김씨 왕족이 자신들의 조상이 昔씨 왕실을 몰아낸 사실을 숨기려고 昔씨 임금으로 이어지는 계보 한가운데 미추왕을 끼워넣다 보니 이같은 엉성한 王曆(왕력)이 나왔다고 여겨진다.
즉 성씨를 모(용)씨에서 金씨로 바꾼 법흥왕이 숨진 뒤 얼마 되지 않아 신라 金씨 왕실은 자신들의 뿌리를 감추는 일종의 「알리바이 조작 작업」을 펼쳤으니 바로 국사의 편찬인 것이다. 이 때문에 金씨의 뿌리가 모용씨였다는 사실은 철저히 인멸됐을 것이다.
다만 중국의 몇몇 역사서와 경주에서 머리 떨어진 울진 봉평리의 돌비석 정도에서 김씨의 뿌리가 모(용)씨였다는 단서가 남아 있을 뿐이다.
어쨌든 법흥왕이 모(용)씨 성을 포기하고 金이란 중국식 姓을 채택하면서 기마족의 신라통치는 막을 내렸다. 金씨왕들은 스스로를 기마족이 아닌 농경족의 임금으로 자리매김하고는 유교적 관료체제로 나라를 다스려 나갔다.
그 이후 한국인들은 1천4백년 이상 기마족의 기억을 망각한 채 철저히 농경민족으로 바뀌고 말았다. 핏줄 속에 흐르는 기마족 특유의 진취적인 유전인자를 애써 억눌러 가면서…●
황남대총 남분 피장자에서 주목되는 것은 신라식관, 허리띠, 목걸이 등 장신구와 환두대도가 일정한 세트를 이루고 착장되고 있다.
경주 황남 큰 무덤(황남대총) 북분에서 출토된 신라금관
신라 금관은 황남대총 북분, 금관총, 서봉총, 천마총, 금령총에서 발견된다. 이들 금관은 모두 3단 직각 맞가지식 입식 3개와 녹각형 입식 2개가 대륜 위에 장식된 같은 모습이다. 직각 맞가지식 신라관이 처음 확인되는 것은 황남대총 남분이다.
신라(5∼6세기), 관높이 27.5cm, 드리개 길이 30.3cm, 경주시 황남동 황남대총 북분 출토,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국보 제191호.
3단으로 된 출자형(出字形) 입식(立飾) 대륜(臺輪) 전면과 그 좌우에 각각 세우고 뒷면 양끝에 녹각형(鹿角形) 입식(立飾)을 세웠다. 입식의 각 단에는 푸른 빛을 내는 양질의 경옥제(硬玉製) 곡옥(曲玉)을 5개씩 균형있게 배치시켰다. 곡옥이 많이 달려 있고 드리개 장식이 많아 신라 금관 중에서 가장 화려하다.
대륜(臺輪) 앞면에는 입식을 중심으로 좌우에 각각 3개씩 합계 3쌍의 태환수식(垂飾)이 대칭으로 병렬되어 있다. 각 태환에는 긴 수식이 달려 있으며 바깥쪽에서 안으로 들어오면서 길이가 짧아져 균형미를 보이고 있다. 안쪽의 수식은 태환에 2개의 수식을 달았고 긴 수식 끝에는 역시 경옥제 곡옥을 달았다.
황남대총 발굴모습
천마총 금관
천마총에서 발견된 신라 때 금관이다. 천마총은 경주 고분 제155호 무덤으로 불리던 것을 1973년 발굴을 통해 금관, 팔찌 등 많은 유물과 함께 천마도가 발견되어 천마총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금관은 천마총에서 출토된 높이 32.5㎝의 전형적인 신라 금관으로 묻힌 사람이 쓴 채로 발견되었다.
머리 위에 두르는 넓은 띠 앞면 위에는 山자형 모양이 3줄, 뒷면에는 사슴뿔 모양이 2줄로 있는 형태이다. 山자형은 4단을 이루며 끝은 모두 꽃봉오리 모양으로 되어있다. 금관 전체에는 원형 금판과 굽은 옥을 달아 장식하였고, 금실을 꼬아 늘어뜨리고 금판 장식을 촘촘히 연결하기도 하였다. 밑으로는 나뭇잎 모양의 늘어진 드리개(수식) 2가닥이 달려있다.
금관 안에 쓰는 내관이나 관을 쓰는데 필요한 물건들이 모두 널(관) 밖에서 다른 껴묻거리(부장품)들과 함께 발견되었다.
금령총 금관
금령총 금관이란 1924년 경주시 노서동 금령총에서 발굴된 금으로 된 관(冠)을 말한다. 이 금관에는 내관(內冠)이 없는데 발굴자의 소견으로는 비단으로 된 모(帽)가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외관은 관테〔臺輪〕위에 5개의 가지를 붙인 것으로 신라시대 관의 전형적 양식이며, 하나의 특징을 이루고 있다. 대륜은 너비 2.7㎝, 지름 약 16.5㎝로 가장 소형에 속한다. 표면에는 아래·위에 두 줄씩 점문(點紋)이 찍혀있고 3단으로 원좌(圓座)를 만든 다음 금줄로 원형 영락(瓔珞)을 상하에 16개씩, 중앙에 15개씩 달았다.
중앙 정면과 그 좌우에 산(山)자형을 4단으로 연결하고 가지 끝에는 보주형(寶珠形)으로 된 가지를 1장의 금판에서 오래 내고, 가장자리에는 대륜에서와 같이 2줄의 점문을 찍었으며, 전면(全面)에 36개씩 원좌를 찍은 가운데 원형 영락을 달았다.
이 산(山)자형 가지 좌우에는 사슴뿔 모양의 가지를 붙이고 가장자리에는 점문이 있으며, 각각 23개씩의 원좌 위에 영락을 달고 있다. 산(山)자형 높이 23.95㎝, 녹각형 높이 25.75㎝ 이다.
이 금관의 특징은 지금까지 발견된 3구의 금관 중에 가장 작고 간단한 형식이며, 다른 금관에서 볼 수 있는 비취(翡翠) 곡옥(曲玉)의 장식이 없는 금으로만 이루어진 점이다.
금관총의 금관
경주시 노서동에 있는 금관총에서 발견된 신라의 금관으로, 높이 44.4㎝, 머리띠 지름 19㎝이다.
금관은 내관(內冠)과 외관(外冠)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금관은 외관으로 신라금관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즉, 원형의 머리띠 정면에 3단으로 ‘출(出)’자 모양의 장식 3개를 두고, 뒤쪽 좌우에 2개의 사슴뿔모양 장식이 세워져 있다.
머리띠와 ‘출(出)’자 장식 주위에는 점이 찍혀 있고, 많은 비취색 옥과 구슬모양의 장식들이 규칙적으로 금실에 매달려 있다. 양 끝에는 가는 고리에 금으로 된 사슬이 늘어진 두 줄의 장식이 달려 있는데, 일정한 간격으로 나뭇잎 모양의 장식을 달았으며, 줄 끝에는 비취색 옥이 달려 있다.
이 같은 외관(外冠)에 대하여 내관으로 생각되는 관모(冠帽)가 관(棺) 밖에서 발견되었다. 관모는 얇은 금판을 오려서 만든 세모꼴 모자로 위에 두 갈래로 된 긴 새날개 모양 장식을 꽂아 놓았다. 새날개 모양을 관모의 장식으로 꽂은 것은 삼국시대 사람들의 신앙을 반영한 것으로 샤머니즘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금관은 기본 형태나 기술적인 면에서 볼 때 신라 금관 양식을 대표할 만한 걸작품이라 할 수 있다.
금관총의 금관
서봉총 금관
경주 노서동 신라 무덤인 서봉총에서 출토된 높이 30.7㎝, 지름 18.4㎝, 드리개(수식) 길이 24.7㎝인 금관이다. 넓은 관 테 위에 5개의 가지를 세웠고, 상하에 점선으로 물결무늬를 찍고 나뭇잎 모양의 원판과 굽은 옥으로 장식했다. 관 테에 못으로 고정시켜서 세운 5개의 가지 중 중앙과 그 좌우의 3가지는 山자형 장식을 3단으로 연결하고, 가지 끝은 꽃봉오리 모양으로 마무리 했다.
이 가지 주위에는 2줄씩 점선을 찍어 금판이 휘지 않도록 했고, 나뭇잎 모양의 원판과 굽은 옥을 달았다. 山자형 장식의 좌우에는 끝이 꽃봉오리 모양으로 마무리 된 사슴뿔 장식을 세웠고, 이 곳에도 원판과 옥으로 장식했다.
내부의 골격은 2개의 금판대를 전후·좌우에서 관 테에 연결하여 반원을 그리면서 교차시켰고, 그 위에 3가닥이 난 나뭇가지를 붙이고 가지 끝에 새 모양을 하나씩 붙였다. 관 테 좌·우에 길게 굵은고리(태환식) 귀고리 드리개를 달아 늘어뜨렸다.
서봉총 발굴에는 당시 고고학자로 이름난 스웨덴의 구스타브 아돌프 왕태자가 참가했다. 일본을 방문하고 있던 그는 경도(京都)제국대학 고고학과 주임교수의 권유로 10월 9일 경주에 도착해 이튿날인 10일 오전 납작해진 금관을 목관 속에서 소중하게 들어올렸다. ‘서봉총’이란 이름도 스웨덴의 한자표기 ‘서전(瑞典)’에서 ‘서’자를, 금관에 장식된 ‘봉황(鳳凰)’에서 ‘봉’자를 땄다.
서기 342년 겨울, 「半흉노」의 일파인 鮮卑族 모용황은 5만5천의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했다. 험준한 길인 南路에 4만을, 평탄한 길인 北路엔 1만5천을 투입했다. 거꾸로 고구려는 수비병력의 전부를 北路방어에 쏟았다.
결국 고구려는 대패했고 반면 北路로 침공했던 선비족 기마군단 1만5천은 고구려군에 의해 모두 죽은 것으로 기록됐다. 그러나 그때 그들 가운데 일부가 고구려軍에 ?겨 들어간 곳이 지금의 新羅였다고 추정한다.
================================================================================================ [편집자 注] 신라계와 가야계, 크게 두 줄기로 대별되는 한국 金씨의 뿌리가 흉노족의 피가 이어진 기마민족, 「선비족 모용씨(鮮卑族 慕容氏)」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이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최근 「신라 법흥왕은 선비족 모용씨의 후예였다 (풀빛출판사)」를 쓴 KBS 장한식 기자는 신라 김씨 왕족과 가야 김씨 왕실이 서기 342년 고구려를 침공한 모용씨 군대 가운데 낙오한 무리의 후예라는 가설을 펼치고 있다.
기존의 역사 지식으로는 선뜻 수긍하기 힘들지만 문헌에 근거한 주장을 펼치고 있다는 점에서 나름의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한국인 가운데 20%나 차지한다는 金씨의 뿌리를 탐색한다는 의미에서 「金씨의 기원은 흉노족의 후예 모용 선비」라는 그의 가설을 소개한다.
<張漢植 한국방송공사 보도국 TV 편집부 기자> 경주와 말의 문화 / 積石木槨墳 ===============================================================================================
慶州(경주)에서는 최근 몇년째 「말(馬) 싸움」이 심각하다. 보문관광단지 인근에 약 29만 평 규모의 경마장을 건설하겠다는 경주시의 방침에 대해 전국의 문화계 인사들이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市(시) 당국과 대다수 시민들은 수백억원은 족히 될 馬券稅(마권세) 수입에다 관광객도 연간 1백만명 정도 늘어나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며 적극 추진하자는 입장이다. 반면 문화계 인사들은 천년 古都(고도) 경주가 말이 뛰노는 투기장으로 전락해서는 안된다며 결사반대다.
게다가 경마장 부지로 지정된 지역에서 白炭(백탄) 숯가마 10여 기가 확인되고, 토기 工房(공방)이 발굴되고 있는 등 보호가치가 높은 역사유적지란 점을 들어 경마장 건설은 안된다고 버티고 있다.
문화유적 보존과 경건한 역사·문화도시의 명성 유지를 위해 경마장 설치를 반대하는 논리에 필자 역시 동의하는 편이다. 하지만 『경주와 말(馬)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주장만큼은 再(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경주는 한동안 騎馬文化(기마문화)가 꽃을 피웠던 곳이기 때문이다.
4세기 중반의 어느 날, 말을 탄 一團(일단)의 무사들이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경주 땅에 밀려들었다. 아무도 초대하지 않은 불청객이었지만 그들은 우세한 武力(무력)으로 경주 땅을 정복하고는 신라의 지배층이 되었다.
그리고는 한 동안 馬上(마상)에서 권력을 휘두르다 기마족의 문화를 짙게 남겨둔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다. 匈奴(흉노)의 피를 이어받은 「鮮卑族 慕容氏(선비족 모용씨)」, 훗날 金(김)으로 성을 바꾸는 신라 왕족들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4세기께 신라 땅 경주에는 積石木槨墳(적석목곽분)이 출현하고 있다. 바닥에 냇돌을 깔아 목관을 안치하고 그 주위에 통나무로 상자모양의 목곽, 즉 방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그 위에 돌을 쌓아 올리고 바깥에는 흙을 부어 거대한 봉분을 조성하는 방식이다.
적석목곽분은 경주 시내 곳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그 대표적인 곳이 황남동의 大陵園(대릉원)이다. 경주로 수학여행을 갔다 왔으면 틀림없이 이곳을 둘러보았을 것이다. 작은 동산을 연상케 하는 천마총과 황남대총 등 23기의 고분들로 공원이 조성돼 있다.
적석목곽분에 앞서 조성된 고분은 「낙랑형 토광목곽묘」다. 많은 학자들은 두 묘제 사이에는 계승 관계가 없다고 보고 있다. 즉 적석목곽분을 조성한 사람과 토광목곽묘를 만든 사람들의 뿌리가 서로 다르다는 말이다.
경주 땅에서 적석목곽분을 조성한 세력은 4세기 중반 이후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金씨 왕족이란 것이 정설이다. 이 적석목곽분이 匈奴族(흉노족)을 비롯한 중앙아시아의 기마민족이 조성했던 무덤과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조성됐다는 점이 밝혀지면서 이를 만든 金씨 왕족의 뿌리가 대초원지대의 기마민족임을 알게 해 주었다.
무덤 형식만 바뀐 것이 아니라 적석목곽분에서 나온 출토물도 과거와 크게 달라진다. 신라 적석목곽분은 가히 「騎馬文化의 타임캡슐」이라 할 만하다. 중앙아시아 대초원지대의 기마유목민족들이 즐겨 사용했던 각종 제품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금관과 장신구, 금으로 만든 허리띠, 띠 고리(버클), 각배(뿔잔), 보검, 유리제품 등은 스키타이族과 흉노族 등의 기마민족들이 즐겨 사용한 것과 비슷하거나 동일한 제품들로 밝혀졌다.
게다가 말을 순장한 무덤을 비롯해 안장과 등자(발걸이), 배가리개 등 호화롭게 장식한 각종 馬具類(마구류)가 다수 발굴되고 있어 적석목곽분을 조성한 金씨왕 세력이 기마족임을 거듭 확인시켜주고 있다.
4세기께 「말을 탄 사람들」이 신라 땅으로 들어와서 살았고 죽음에 이르러 아끼던 말을 순장하고 무덤 안에 마구류를 부장했다는 애기다.
이같은 적석목곽분과 그 속에서 나온 각종 출토물들을 종합해 볼 때 신라 金씨왕은 중앙아시아 대초원지대에서 이동해온 기마族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정설이라 할 정도로 힘을 얻어가고 있다.
하지만 신라의 북쪽 고구려, 백제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匈奴風(흉노풍)의 유적과 유물이 어찌하여 한반도의 동남단 신라(그리고 가야)에서만 나타나고 있는지는 한국 고대사의 오랜 수수께끼였다.
필자는 이에 대해 서기 342년 고구려를 침공한 기마민족 「慕容 鮮卑(모용 선비)」 군대의 일부가 신라로 들어가 왕권을 찬탈했고, 그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 또 하나의 무리가 가야(나아가 왜국)까지 진출했다는 가설을 내세우고 있다.
鮮卑族은 원래 東胡(동호:내몽골-만주 일대에 살던 옛 민족)의 일파로서 흉노족의 지배를 받은 민족이다. 기원 전 200년께, 좀 어리숙했던 東胡族의 임금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흉노에 싸움을 걸었다가 冒頓 單于(묵특 선우:묵특은 이름이고 선우는 왕을 뜻하는 흉노족 단어)가 거느린 흉노군에게 멸망당했다.
참고로 묵특은 왕위계승 분쟁으로 그 아비를 살해하고 선우 位(위)에 오른 뒤 30만명의 騎馬 弓兵(궁병)을 이끌고 아시아의 대초원지대를 석권한 인물이다.
漢(한)나라 창건자 劉邦(유방)도 묵특에게 도전했다가 패해 죽음의 위기를 맞자 한나라 공주를 시집보내고 매년 막대한 조공을 바치겠노라고 빌어 겨우 목숨을 건질 정도였다. 이런 묵특을 얕잡아 보고 싸움을 벌인 결과 「동호」는 망하고 그 무리는 크게 세 갈래로 흩어진다. 한 무리는 흉노로 흡수되고 하나는 烏桓(오환), 나머지는 鮮卑로 통합된다.
묵특의 흉노軍에 박살이 난 鮮卑족은 약 3백년이 지나서야 흉노에 앙갚음을 하게 된다. 기원 후 85~91년 사이, 鮮卑는 後漢조정의 부탁을 받고 南흉노, 丁零(정령:시베리아 예니세이강 유역에 살던 유목민족 국가)과 함께 北흉노 토벌에 나서 北흉노를 패퇴시켰다.
이때 10여만 落(락:한 가구를 뜻함)의 北흉노인들이 선비족으로 귀속됐다는 내용이 後漢書에 나온다. 10여만 落이라면 매 落마다 5인 정도로 계산해도 50~60만명에 이르는 막대한 인구다.
원래 선비족의 인구는 40만명 정도였는데 이때 2배 이상 커지게 된다. 필자는 선비족 가운데 절반 이상이 본래 흉노족이었다는 이 대목을 중시한다. 선비족의 인종적 특징이나 문화가 흉노의 그것과 깊은 관련을 맺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대목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 글의 제목에서 「한국 金씨의 혈관에는 흉노의 피가 흐른다」고 한 것도 흉노족이 기마민족의 대표격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는데다 鮮卑族의 절반 이상이 애초 흉노족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최근 金씨의 선조가 한나라 武帝가 藿去炳(곽거병)을 보내 흉노를 토벌했을 때 붙잡힌 흉노의 王子(왕자) 金日(김일제)라는 가설을 펼치는 사람들이 있어 흥미롭다.
김일제는 漢무제의 말치기로 생활하다 성실성을 인정받아 끝내는 무제의 총애를 받는 귀족이 되었고, 金씨 성과 侯(투후:지금의 중국 하남성 일대인 「투」지방을 다스리는 제후 벼슬)라는 작호를 하사 받은 인물이다.
김일제의 후손들은 번창해 한나라 조정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지만 왕망이 新(신)나라를 세우는데 적극 협조했다는 이유로 멸문의 지경에 이르자 한반도로 도망쳐 나왔다는 것이 「김씨 선조는 김일제」설을 펼치는 사람들의 주장이다.
신라 문무왕의 비석에 「□侯 祭天之胤傳七葉(□후 제천지윤 전칠엽)이라는 기록이 나왔는데 이들은 「侯(투후)」 즉 김일제가 문무왕의 옛 조상이었음을 기록한 증거라고 말한다.
이들의 주장에 의견을 같이하는 것은 아니지만 반가운 마음이 앞선다. 한국의 최대 성씨 金씨의 기원을 찾아보려는 진지한 노력을 평가하는 의미뿐만이 아니라 金씨의 기원을 나와 마찬가지로 흉노족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金씨 선조는 흉노족의 피가 절반 이상 섞인 선비족 모용씨」라는 필자의 가설과 「김씨 시조는 흉노 왕자 김일제」라는 주장은 시대 상황과 경로 설정에서는 서로 다르지만 한국 金씨의 뿌리를 흉노족에서 찾아보자고 하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半匈奴(반흉노)」라 할 수 있는 선비족 가운데 한 일파가 「慕容부족」이다. 모용 부족의 명칭은 서기 150년경에 활동했던 「慕容」이란 추장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선비족은 추장의 성씨나 이름을 部族名으로 하는 관습이 있었다.
선비족 내부에는 拓跋部(탁발부)와 宇文部(우문부) 등 여러 부족이 존재했지만 「모용」의 5대손쯤 되는 涉歸(섭귀)가 추장이 되었을 즈음 모용부가 汎(범)선비족 가운데 최강의 부족으로 떠오른다. 섭귀는 「선비 單于(선우)」에 올랐다.
선우는 최고지도자를 뜻하는 흉노의 단어. 여기서 모용부가 원래 흉노족에서 선비족으로 귀속됐거나,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흉노의 정치체제나 풍습을 대폭 수용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섭귀의 아들 慕容(모용외)가 추장이 되면서부터 모용부는 국가의 모습을 갖춰나갔고 韓(한)민족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모용외는 서기 285년 부여를 침공해 부여왕 依慮(의려)를 자살하게 만들고 부여 백성 1만여 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또 제집 안방 드나들 듯 고구려를 침공하니 고구려 봉상왕이 『모용씨는 兵馬가 精强(정강)해 걸핏하면 우리 강역을 침범하니 어찌하면 좋으냐』고 탄식할 정도였다(삼국사기).
모용외를 뒤이은 아들 慕容(모용황)은 337년 자신의 영역이 춘추전국시대 燕(연)나라와 겹친다는 점에서 제멋대로 국호를 燕(연)이라 정하고는 왕위에 오르니 바로 「5호16국 시대」 모용씨 왕조가 탄생한 것이다.
慕容의 고구려 침공과 모용씨의 신라 진출
모용황은 꿈이 컸던 인물이다. 요서와 요동지방을 삽시간에 아우르고는 中原(중원)을 도모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모용황이 중원 공략에 나서려 하자 동방의 고구려가 눈엣가시로 다가왔다. 고구려를 그대로 두고 대륙 깊숙이 진출했다가는 등 뒤에서 칼을 받을 위험성이 있었던 것이다.
훗날 後金(후금)이 中原을 석권하기에 앞서 조선을 침략(정묘호란, 병자호란)한 것과 같은 이치에서 모용황은 고구려를 정복해 굴복시키고자 했다. 342년 겨울, 드넓은 만주 벌판이 두터운 눈으로 뒤덮였을 즈음 모용황은 5만5천명의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기마족이었던만큼 대부분이 騎兵(기병)이었을 것이다.
당시 모용황의 군대가 고구려 수도 환도성을 침공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 南路(남로)와 北路(북로)가 있었다. 남로는 험준하고 좁은 산악지대였던 반면 北路는 평탄한 개활지였다. 따라서 주력부대가 평탄한 北路를 택하고 험준한 南路에는 조력부대가 진출하는 것이 병법의 상식이었다. 그러나 모용황은 이같은 병법의 상식을 거부하는 전략을 세웠다.
삼국사기에는 모용황의 서자 형 慕容翰(모용한)이 「고구려는 분명 우리 대군이 北路로 쳐들어올 줄 알고 북쪽만을 엄중히 막고 남로를 소홀히 할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대군을 南路에 집중시켜야 할 것이다」고 주장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모용한의 작전은 제2차 포에니전쟁 때인 기원 전 218년경 알프스 산맥을 넘어 로마를 기습공격한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의 전략을 떠올리게 한다.
모용황은 형 모용한과 동생 慕容覇(모용패)를 선봉장으로 삼아 자신이 4만 대군을 이끌고 험준한 南路로 침공하고 北路에는 1만5천 병력을 보냈다. 이 작전은 그대로 고구려의 허를 찔렀다. 고구려 고국원왕은 아우 高武(고무)왕자에게 5만 병력을 맡겨 北路를 방어하게 하고, 혹시나 싶어 예비대 1만명으로 하여금 南路를 지키게 했던 것이다.
4만의 기병군단을 1만명으로 막기에는 역부족, 전투는 삽시간에 끝나고 모용황의 大軍은 환도성으로 물밀 듯이 쳐들어갔다. 형세가 다급해진 고국원왕은 단웅곡이란 깊은 산골짜기로 달아났고 고구려 백성 5만명이 포로로 잡혔다. 모용황은 고구려 수도 환도성에 불을 질러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본국 사정이 궁금해진 모용황은 고국원왕의 항복을 받지 못한 채 철수 길에 올랐다.
모용황은 고구려가 뒤에서 공격하는 것을 막기 위해 왕비와 왕대비를 볼모로 잡아갔고 왕의 부친 미천왕의 무덤을 파헤쳐 屍身(시신)까지 꺼내가는 파렴치한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모용황의 공격을 받아 나라가 쑥대밭이 되자 고구려는 어쩔 도리 없이 연나라에 머리를 숙여야 했고 모용황은 이때부터 고구려의 배후공격 위험에서 벗어나 中原도모에 주력할 수 있었다.
모용황의 주력군이 고구려에 대승을 거뒀지만 北路로 간 1만5천명의 운명은 정반대였다. 삼국사기는 「왕우(북로 침공군 대장) 등은 북쪽 길에서 싸우다가 패하여 모두 죽었다(會王寓等戰於北道, 皆敗沒)」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의 이 기록은 중국 역사서인 자치통감의 기록을 다소 축략해 전재한 것이다. 자치통감은 물론 모용황측이 전한 기록을 담았을 것이다.
「(고구려 군에게)패하여 모두 죽었다」는 말은 북로로 진군한 1만5천명이 아무도 본진으로 귀환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1만5천의 병력으로 5만 대군을 맞아 싸웠으니 전투에서 패했을 것은 분명한데 아무도 돌아오지 않으니 자세한 내용은 담지 못하고 「모두가 죽었다(皆敗沒)」고 간주해 이런 짧은 기록만을 남긴 것이다. 하지만 燕나라로 귀환한 모용황의 병사가 없다고 해서 北路로 진군한 1만5천명 모두가 전사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1만5천명의 별동대는 자신들이 버림받은 처지임을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고구려 주력군의 눈을 속이기 위해 전선에 투입되고 있다. 5만명의 고구려 군대와 맞서 싸우면 질 것이 뻔하다. 모용황은 우리가 죽어도 괜찮다는 생각에서 북쪽 길로 보낸 것이다』
임금에게서 버림받은 데 대한 울분과 질 것이 뻔하다는 불안감을 갖고 출전한 1만5천명. 이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을 리가 있을까?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고구려군과의 전투에서 패하자마자 살기 위한 목적에서 도주했을 가능성이 높다.
처음부터 방향을 정하고 달아났다기보다는 대오를 갖추기 힘든 상태에서 고구려 軍의 추격을 받다보니 고구려 지경을 벗어나 신라 땅으로까지 밀렸을 개연성을 상정해본다.
고구려와 신라를 잇는 동해안 루트는 예부터 열려 있었다. 4세기 중반 이후 기마族의 신라 진출 흔적이 뚜렷이 발견된다는 점에서 1만5천명 가운데 적어도 수천명의 군단이 신라에 들어갔을 것으로 추정한다.
내물왕 26년, 즉 서기 381년 신라는 북중국의 유목민족 국가 前秦(전진)에 사신을 보낸다. 삼국사기에는 이때 전진의 황제 符堅(부견)과 신라 사신 衛頭(위두) 간의 대화가 기록돼 있다.
<부견이 위두에게 묻기를 『그대의 말에 海東(해동:신라)의 형편이 옛날과 같지 않다고 하니 무엇을 말함이냐』고 하니 위두가 대답하기를 『이는 마치 중국의 시대변혁·명호개역과 같은 것이니 지금이 어찌 예와 같을 수 있으리오』라고 하였다. (符堅問 衛頭曰, 卿言海東之事, 與古不同, 何耶, 答曰, 亦猶中國 時代變革 名號改易, 今焉得同)>
이 기록에 대해 지금까지는 신라가 내물왕 들어 나라가 크게 발전했음을 보여주는 답변이라고 풀이해 왔지만 시대변혁·명호개역은 단순히 나라의 체제가 정비된 수준을 넘어선다. 이전까지의 昔(석)씨 임금 시대가 끝장나고 외부세력이 정권을 장악해 모든 면에서 과거와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됐음을 내포한 말로 해석할 수 있다.
사실 내물왕 이후 昔(석)씨는 신라 역사의 주류에서 사라진다. 왕은 물론 왕비나, 재상, 학자, 장군 가운데서 昔씨는 찾아볼 수 없다. 신라 金씨보다 역사가 오래된 昔씨지만 현대 한국사회에서 昔씨는 대단한 희성이다. 이는 내물왕 집권기에 昔씨가 철저히 제거됐음을 암시한다.
昔씨가 사라지는 것과 위두가 밝힌 시대변혁이라는 문구를 통해 이 시기에 강력한 군사력에다 선진적 국가체계를 경험한 새로운 세력이 신라 땅을 정복했음을 거듭 시사받을 수 있다. 사실 4세기경 고구려 땅을 뚫고 신라로 진출할 수 있는 기마족은 선비족 모용씨 외는 달리 거론하기 힘들다.
신라 김씨왕이 선비족 모용씨였다는 결정적 문헌은 있을 수 없다. 金씨왕들은 기존의 신라인들과 힘을 합쳐 새 나라를 건설하는 입장이었던 만큼 「우리는 대대로 신라 땅에서 살아온 사람들이다」는 기록을 남기는 게 정상이지 「원래는 모용 선비였는데 석씨 임금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는 기록을 남길 리 만무하다. 하지만 金씨왕의 기원이 모용선비임을 알게 해주는 약간의 단서는 있다.
1. 법흥왕의 본명은 慕秦(모진)
신라 법흥왕에게는 두 개의 姓(성)과 이름이 있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4권 법흥왕의 기록을 그대로 옮겨본다.
<법흥왕이 즉위하니 이름은 원종이다. 『책부원구란 옛 책에는 성은 募(모), 이름은 泰(태)라 했는데, 태는 遺事(유사:책 이름) 王曆(왕력)에는 秦(진)이라 돼 있다』 지증왕의 원자로서 어머니는 연제부인이요 왕비는 박씨, 보도부인이다.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저술하면서 법흥왕 김원종의 성과 이름을 募泰(모태) 또는 募秦(모진)으로 괴상하게(?) 적고 있는 고기록의 출처를 밝혀두었다. 金씨로 알고 있는 법흥왕의 성과 이름을 이런 식으로 표기하고 있는 사례는 삼국사기뿐만 아니고 중국의 다른 역사서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姚思廉(요사렴)이란 당나라 학자가 쓴 梁書(양서)에는 신라 법흥왕이 즉위 8년, 서기 521년 중국 강남에 자리잡고 있는 漢族의 나라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친 사정을 기록하면서 신라 임금의 성은 「募(모)」요 이름은 「秦(진)」 이라고 적고 있다. 그 뒤 이연수란 당나라 학자가 편찬한 南史(남사)란 역사책에는 법흥왕의 성을 「募(모)」 이름을 「泰(태)」로 기록하고 있다. 秦과 泰는 글자 모양이 비슷하기 때문에 梁書(양서)의 기록을 南史(남사)에서 옮겨 적다 오기한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중국역사서 通典(통전)에는 법흥왕의 성명을 「慕秦」으로 적고 있다. 梁書와 南史에서는 법흥왕의 성을 「모을 募」로 쓴 데 반해 통전에서는 「사모할 慕」를 쓴 것이 차이점이다. 「사모할 慕」와 「모을 募」는 발음이 같고 글자 모양도 극히 비슷한 탓에 옮겨 적다 혼동이 생긴 것으로 여겨진다. 법흥왕 김원종의 성명이 慕秦≒募秦(모진)이라니… 지금껏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로 치부해왔다. 이병도 박사는 그의 「삼국사기 역주」에서 「어떤 오해로 인한 것인 듯하다」고 풀이한 바 있다.
그러나 중국 역사서에서 발견되고 있는 「모진」은 법흥왕의 성명이 맞는 것으로 드러났다. 법흥왕의 성을 모(MO)로 적고 있는 사례가 국내 문헌에서도 발견됐기 때문이다. 1988년 경북 울진군 봉평리에서 발견된 「봉평 신라비」는 법흥왕 즉위 11년, 서기 524년에 세운 비석이다. 여기서는 법흥왕을 「牟卽智(모즉지)」로 적고 있으니 牟는 성이요 卽은 이름 智는 존칭이다.
봉평 신라비에는 모두 35명의 이름이 나오는데, 임금 모즉지를 비롯해 葛文王(갈문왕:신라 왕족) 牟心智(모심지), 비문을 적은 牟珍斯利公(모진사리공), 비문을 조각한 牟利智(모리지) 등 4명의 이름이 「牟」로 시작되고 있다. 그렇다면 「牟」를 姓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姓을 쓰지 않고 이름만 기록했다면 이렇게 여러 사람이 같은 글자로 시작할 리 없다.
봉평 신라비의 법흥왕 성명 「牟卽(모즉)」은 중국 역사서의 慕秦≒募秦(모진)과 비교할 때 글자 모양은 다르지만 발음은 「모(MO)」로 동일하다. 삼국시대의 경우 인명이나 지명을 표기할 때 발음이 같거나 비슷한 한자가 넘나들면서 쓰이는 경우가 흔하다. 한 예로 가야를 加耶, 伽倻 또는 加羅(가라), 駕洛(가락) 등으로 다양하게 기록하고 있다.
중국 역사서의 慕秦과 봉평 신라비의 牟卽 또한 이런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결국 중국 역사서와 봉평 신라비가 공통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은 봉평 신라비를 세운 524년까지는 법흥왕이 「미스터 김(Mr. KIM)」이 아니라 「미스터 모(Mr. MO)」였다는 사실이다.
또 법흥왕은 지증왕의 큰아들로서 신라 金씨 왕조의 뚜렷한 자손이니, 결국 법흥왕 이전까지의 신라 金씨 왕들의 姓이 상식과는 달리 「모(MO)」였다고 믿지 않을 수 없다. 사실 법흥왕 때까지 중국 역사서에서 신라 왕의 姓을 金(김)으로 기록한 사례는 없다. 신라 왕의 姓을 金으로 적고 있기는 법흥왕을 뒤이은 진흥왕 때부터이다.
진흥왕이 在位(재위) 25년(서기 564년) 北齊(북제)에 사신을 보냈을 때 중국 역사서 北齊書(북제서)는 신라왕의 성명을 「金眞興(김진흥)」으로 적고 있다. 중국 史書에서 신라 왕의 姓을 金씨로 기록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또 隨書(수서)에서 「수나라 문제 14년(서기 594년, 신라 진평왕 16년) 신라왕 金眞平(김진평)이 사신을 보냈다」고 기록하는 등 564년 이후에는 신라 왕의 姓을 金으로 분명히 적고 있다.
2. 慕씨는 慕容氏
법흥왕의 성씨가 모씨라고 하더라도 慕와 慕容이 직접적인 관련이 없을 수도 있지 않느냐는 반론이 나올 수도 있지만 모=모용으로 볼 수 있는 단서는 충분하다.
첫째 신라로 들어간 모용씨가 혼동을 피해 모씨라는 단성을 썼을 가능성이 있다. 참고로 모용씨는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하나는 慕容(모용)이요 또 하나는 「慕輿(모여)」이다. 모용황의 부하 장수 가운데 慕輿(모여니)란 인물이 고국원왕의 모친과 왕비를 사로잡아갔다는 기사가 삼국사기에 나오는 것을 비롯해 절충장군 慕輿根(모여근)과 慕輿蓋(모여개) 등 「모여」란 성씨를 가진 인물들을 모용씨 왕국에서 여럿 찾아볼 수 있다.
慕輿씨 역시 慕容씨와 비슷한 위치의 귀족이었다. 같은 慕容씨가 漢字(한자)로 성씨를 표기하면서 慕容과 慕輿로 나뉜 데 대해 구구한 억측이 많지만 나는 원래 선비족의 말이 한문으로 꼭 맞아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으로 풀이해 본다.
어쨌든 慕씨의 성을 漢字로 표기하다 보면 「慕容」이 되기도 하고 「慕輿」가 되기도 했으니 혼동의 소지가 있다. 간단히 「慕」로 표기하면 더욱 분명한 성씨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두 글자 複姓(복성)을 한 글자 單姓(단성)으로 쓸 수 있다.
또한 복성을 단성으로 표기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으니 그 예는 백제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수서」 백제조에 나오는 백제의 8대 귀족 성씨 가운데 沙(사)씨는 원래 沙咤(사타) 혹은 沙宅(사택)씨였고, 眞(진)은 眞慕(진모), 木(목)은 木(목협)이라는 복성이었지만 모두 단성으로 표기하고 있다. 복성은 부를 때나 표기할 때나 효율성이 떨어진다.
더구나 당시 신라는 복성이 아니라 단성을 쓰는 문화였다. 朴(박)-昔(석)-李(이)-鄭(정)-孫(손)-薛(설) 등 유력 귀족의 성씨가 모두 단성이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복성 「慕容」 또는 「慕輿」를 단성 「慕」로 표기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런 일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삼국사기와 중국 역사서, 봉평 신라비를 토대로 할 때 법흥왕은 우리의 상식과 달리 「미스터 모(MO)」였고 이는 慕容씨에서 나왔을 개연성이 충분하다. 또 법흥왕이 분명 신라 中古代(중고대) 金씨 왕실의 嫡統(적통)이었다는 점에서 그 이전의 왕들도 성을 「慕」로 썼을 것이란 결론에 이르게 된다.
중국 역사서에서 신라왕의 성씨를 金(김)으로 적기 시작한 것이 진흥왕 시대부터라고 한다면 법흥왕이나 진흥왕 때 비로소 金씨 성을 썼다고 봐야 한다. 나는 법흥왕이 慕容씨 성을 金으로 바꿨다고 보는데 이 점은 뒤에서 다룬다.
3. 慕容씨 시조신화와 신라(가야) 시조신화의 유사성
慕容씨가 신라 지배층이었다는 또다른 증거로 慕容씨의 시조신화와 신라의 시조신화-건국신화가 유사한 점을 들 수 있다. 다음은 慕容씨의 시조신화다.
<乾羅(건라)는 모용외의 12대 조상이다. 어느 날 저녁에 그는 금은으로 된 갑옷과 안장을 한 백마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왔다>(晋書 권108)
우선 乾羅(건라)란 이름이 新羅(신라), 加羅(가라)와 비슷한 점이 예사롭지 않다. 앞서 밝혔지만 선비족은 위대한 추장이나 조상의 이름을 「부족의 명칭」으로 삼는 관습이 있었다. 그렇다면 국호로 삼지 못할 이유가 없다. 新羅(신라)는 「새로운 乾羅(건라)」라고 풀이해보면 딱 떨어진다. 소설적 추리를 발휘하고픈 유혹을 받는 대목이다.
또 乾羅의 신화는 신라 박혁거세의 개국신화와 김알지 천강신화와 유사하다. 하늘에서 사내아이가 든 알이나 금궤짝이 내려오고 백마가 알을 지키고 있다가 하늘로 올라갔다는 내용의 박혁거세 신화와 김알지 설화는 잘 알려져 있어 여기서 재론하지 않겠다.
다만 慕容씨의 시조 신화가 담담하다면 박혁거세 신화와 김알지 설화는 내용이 극적인 차이가 있을 뿐 하늘에서 내려오는 현상, 백마의 출현, 흰색 분위기(흰닭이나 흰말의 등장), 몸통을 금은 갑옷으로 보호한 乾羅와 금 상자(금 알) 속에 보호된 사내아이 등 신화의 모티브가 상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박혁거세 신화는 모용씨와 무관하지 않느냐는 지적을 할 수도 있겠지만 혁거세 신화가 후대에 창작-채록됐을 가능성이 많다.
사실 혁거세 신화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만 나오지 중국 正史書(정사서)에 기록된 사례가 없다. 부여와 고구려, 백제의 시조신화가 일찍부터 중국 역사서에서 발견되는 것과 대조적이다. 아마도 신라 金씨(모용씨) 왕실 내에 「시조 백마 天降 신화」가 전승돼 오다 진흥왕 시절 「國史(국사)」를 편찬할 즈음 개국시조 박혁거세와 金씨 왕실의 조상 김알지 설화에 적당히 배분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덧붙이자면 가야 수로왕의 下降설화도 신라 김알지 설화는 물론 모용씨 시조 乾羅설화와 유사성이 높다.
4. 모용씨 步搖冠과 신라-가야 금관
모용 부족 명칭의 유래에 관련해 모용부의 한 추장이 걸을 때 관의 장식이 흔들리는 것을 좋아해서 부족사람들에게 그런 관, 즉 步搖冠(보요관)을 쓰게 하니 걸을 때 흔들린다는 뜻으로 「步搖」라 했으며, 이 보요가 와전돼 「모용」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모용 부족 기원설로는 별 설득력이 없어 보이지만 모용 부족이 보요관을 즐겨 썼다는 것은 알 수 있다.
걸음을 걸을 때 흔들린 것으로 보아 새 깃이나 나뭇가지 등의 길다란 장식을 달았을 것이다. 여기서 신라·가야의 금관 또는 금동관을 다시 한번 살펴보자. 鳥羽冠(조우관)이나 樹木型 立飾들은 걸음을 걸을 때 흔들리게 돼 있다. 모용부의 큰 특징이 보요관을 착용한 데 있다면 신라와 가야의 관모도 같은 선상에서 파악할 근거가 충분하다.
이밖에도 모용씨의 나라에서 활약한 사람들의 묘에서 발견된 장신구와 유리그릇 등 각종 출토물이 신라와 가야, 나아가 일본의 고분에서 발견되는 것과 유사한 점이 많아 선비족 모용씨가 신라-가야-왜국으로 진출하는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신라 金씨왕 뿐만 아니라 금관가야 金씨왕, 나아가 5세기 초 일본열도에 거대한 고분을 조성하는 왜국왕들도 선비족 모용씨의 일파로 보고 있다. 서기 42년 하늘에서 김해 구지봉으로 首露王(수로왕)이 下降해 155년을 다스렸다는 가락국기 기록은 신화로 본다.
「新撰姓氏錄」(신찬성씨록)이란 일본의 옛 책에는 수로왕으로 보이는 임나(=가야) 임금의 성명을 「牟留知(모류지)」로 적고 있으니 신라 법흥왕의 성명 牟卽智(모즉지)와 통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필자의 책 「신라 법흥왕은 선비족 모용씨의 후예였다(풀빛출판사)」에 나오니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慕容씨가 언제 어떻게 해서 金씨로 성을 바꿨는지 알아볼 차례다. 서기 521년 법흥왕이 사신을 보냈을 때 중국 정사서에서 신라왕의 성을 모(慕, 募)로 적고 있고 그로부터 3년 뒤인 524년 봉평신라비에 법흥왕의 성을 牟(모)로 적고 있다고 할 때 적어도 524년까지는 신라왕의 성이 「慕」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564년 진흥왕이 사신을 보냈을 때 중국측은 왕의 성을 金으로 적고 있으므로 「慕」에서 「金」으로의 성씨 변화가 일어난 때는 524~564년 사이 40년간으로 좁혀진다.
법흥왕 시절일 수도 있고 진흥왕 在位기간일 수도 있다. 그러나 법흥왕은 모진과 김원종 두 개의 성명이 전해지는 반면, 진흥왕은 金으로 시작하는 이름뿐이므로 법흥왕 시절 창씨개명이 단행됐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모(용)씨란 기마민족의 성을 버리고 중국식 金씨 성을 취한 배경은 殉葬(순장)의 금지(법흥왕의 아버지 지증왕 때 일), 율령제 실시, 불교 公認 등을 통해 기마족의 나라 신라를 농경문화민족으로 바꾸고자 했던 법흥왕의 개혁정책에서 찾아볼 수 있다(위에서 든 필자의 책 2부 참고).
모용씨에서 金씨로의 성씨 변화는 엄청난 사건인데 전혀 기록이 없다는 데 대해 의문이 들 수 있다. 이에 대해 나는 법흥왕이 숨지고 6년이 지난 진흥왕 6년 이사부와 거칠부 등 왕실 종친이 주축이 되어 꾸민 「國史(국사)」에 그 혐의를 둔다. 국사는 신라 金씨왕실의 정통성을 반석 위에 두고자 했던 일종의 통치이념서다.
이런 책을 통해 신라 金씨 왕실은 하늘이 보낸 선택된 종족이며 신라 초기부터 대대로 살아온 것처럼 역사를 조작(?)했다고 본다. 「國史」는 그 책이 전해지지 않아 구체적인 내용을 알 길이 없지만 삼국사기 등에 그 기록이 전해졌다고 볼 때 역사 날조의 증거들은 수없이 찾아볼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엉성한 왕의 계보이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모용씨≒金씨 세력에 의해 타도된 것으로 짐작되는 마지막 昔씨 임금이 흘해이사금이다. 그는 아버지 昔于老(석우로)가 서기 249년에 죽고 61년이 지난 310년에 즉위하는데 그때부터 46년을 왕위에 있었다고 돼 있다.
昔于老가 살았을 때 『우리 집안을 일으킬 아이다』고 칭찬했다니 아버지 昔于老가 숨질 때 적어도 열 살은 됐을 것이다. 그렇다면 왕위에 오른 310년에 흘해는 70세쯤 됐을 것인데 46년간이나 왕위에 있었다니 선뜻 믿기 어렵다.
내물왕은 미추왕의 조카이자 사위인데 미추왕은 284년에 숨진다. 그 사위 내물왕은 402년에 숨진다. 장인과 사위의 사망 연대가 1백18년이나 차이날 수는 없다. 또 제3대왕과 14대 임금은 둘 다 儒理(유리), 또는 儒禮(유례)로 그 이름이 똑같다.
삼국사기 저자 김부식 조차도 「두 임금의 이름이 같으니 어느 편이 옳은지 모르겠다」고 불평할 정도다. 왜 그럴까? 국사를 편찬한 김씨 왕족이 자신들의 조상이 昔씨 왕실을 몰아낸 사실을 숨기려고 昔씨 임금으로 이어지는 계보 한가운데 미추왕을 끼워넣다 보니 이같은 엉성한 王曆(왕력)이 나왔다고 여겨진다.
즉 성씨를 모(용)씨에서 金씨로 바꾼 법흥왕이 숨진 뒤 얼마 되지 않아 신라 金씨 왕실은 자신들의 뿌리를 감추는 일종의 「알리바이 조작 작업」을 펼쳤으니 바로 국사의 편찬인 것이다. 이 때문에 金씨의 뿌리가 모용씨였다는 사실은 철저히 인멸됐을 것이다.
다만 중국의 몇몇 역사서와 경주에서 머리 떨어진 울진 봉평리의 돌비석 정도에서 김씨의 뿌리가 모(용)씨였다는 단서가 남아 있을 뿐이다.
어쨌든 법흥왕이 모(용)씨 성을 포기하고 金이란 중국식 姓을 채택하면서 기마족의 신라통치는 막을 내렸다. 金씨왕들은 스스로를 기마족이 아닌 농경족의 임금으로 자리매김하고는 유교적 관료체제로 나라를 다스려 나갔다.
그 이후 한국인들은 1천4백년 이상 기마족의 기억을 망각한 채 철저히 농경민족으로 바뀌고 말았다. 핏줄 속에 흐르는 기마족 특유의 진취적인 유전인자를 애써 억눌러 가면서…●
황남대총 남분 피장자에서 주목되는 것은 신라식관, 허리띠, 목걸이 등 장신구와 환두대도가 일정한 세트를 이루고 착장되고 있다.
경주 황남 큰 무덤(황남대총) 북분에서 출토된 신라금관
신라 금관은 황남대총 북분, 금관총, 서봉총, 천마총, 금령총에서 발견된다. 이들 금관은 모두 3단 직각 맞가지식 입식 3개와 녹각형 입식 2개가 대륜 위에 장식된 같은 모습이다. 직각 맞가지식 신라관이 처음 확인되는 것은 황남대총 남분이다.
신라(5∼6세기), 관높이 27.5cm, 드리개 길이 30.3cm, 경주시 황남동 황남대총 북분 출토,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국보 제191호.
3단으로 된 출자형(出字形) 입식(立飾) 대륜(臺輪) 전면과 그 좌우에 각각 세우고 뒷면 양끝에 녹각형(鹿角形) 입식(立飾)을 세웠다. 입식의 각 단에는 푸른 빛을 내는 양질의 경옥제(硬玉製) 곡옥(曲玉)을 5개씩 균형있게 배치시켰다. 곡옥이 많이 달려 있고 드리개 장식이 많아 신라 금관 중에서 가장 화려하다.
대륜(臺輪) 앞면에는 입식을 중심으로 좌우에 각각 3개씩 합계 3쌍의 태환수식(垂飾)이 대칭으로 병렬되어 있다. 각 태환에는 긴 수식이 달려 있으며 바깥쪽에서 안으로 들어오면서 길이가 짧아져 균형미를 보이고 있다. 안쪽의 수식은 태환에 2개의 수식을 달았고 긴 수식 끝에는 역시 경옥제 곡옥을 달았다.
황남대총 발굴모습
천마총 금관
천마총에서 발견된 신라 때 금관이다. 천마총은 경주 고분 제155호 무덤으로 불리던 것을 1973년 발굴을 통해 금관, 팔찌 등 많은 유물과 함께 천마도가 발견되어 천마총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금관은 천마총에서 출토된 높이 32.5㎝의 전형적인 신라 금관으로 묻힌 사람이 쓴 채로 발견되었다.
머리 위에 두르는 넓은 띠 앞면 위에는 山자형 모양이 3줄, 뒷면에는 사슴뿔 모양이 2줄로 있는 형태이다. 山자형은 4단을 이루며 끝은 모두 꽃봉오리 모양으로 되어있다. 금관 전체에는 원형 금판과 굽은 옥을 달아 장식하였고, 금실을 꼬아 늘어뜨리고 금판 장식을 촘촘히 연결하기도 하였다. 밑으로는 나뭇잎 모양의 늘어진 드리개(수식) 2가닥이 달려있다.
금관 안에 쓰는 내관이나 관을 쓰는데 필요한 물건들이 모두 널(관) 밖에서 다른 껴묻거리(부장품)들과 함께 발견되었다.
금령총 금관
금령총 금관이란 1924년 경주시 노서동 금령총에서 발굴된 금으로 된 관(冠)을 말한다. 이 금관에는 내관(內冠)이 없는데 발굴자의 소견으로는 비단으로 된 모(帽)가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외관은 관테〔臺輪〕위에 5개의 가지를 붙인 것으로 신라시대 관의 전형적 양식이며, 하나의 특징을 이루고 있다. 대륜은 너비 2.7㎝, 지름 약 16.5㎝로 가장 소형에 속한다. 표면에는 아래·위에 두 줄씩 점문(點紋)이 찍혀있고 3단으로 원좌(圓座)를 만든 다음 금줄로 원형 영락(瓔珞)을 상하에 16개씩, 중앙에 15개씩 달았다.
중앙 정면과 그 좌우에 산(山)자형을 4단으로 연결하고 가지 끝에는 보주형(寶珠形)으로 된 가지를 1장의 금판에서 오래 내고, 가장자리에는 대륜에서와 같이 2줄의 점문을 찍었으며, 전면(全面)에 36개씩 원좌를 찍은 가운데 원형 영락을 달았다.
이 산(山)자형 가지 좌우에는 사슴뿔 모양의 가지를 붙이고 가장자리에는 점문이 있으며, 각각 23개씩의 원좌 위에 영락을 달고 있다. 산(山)자형 높이 23.95㎝, 녹각형 높이 25.75㎝ 이다.
이 금관의 특징은 지금까지 발견된 3구의 금관 중에 가장 작고 간단한 형식이며, 다른 금관에서 볼 수 있는 비취(翡翠) 곡옥(曲玉)의 장식이 없는 금으로만 이루어진 점이다.
금관총의 금관
경주시 노서동에 있는 금관총에서 발견된 신라의 금관으로, 높이 44.4㎝, 머리띠 지름 19㎝이다.
금관은 내관(內冠)과 외관(外冠)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금관은 외관으로 신라금관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즉, 원형의 머리띠 정면에 3단으로 ‘출(出)’자 모양의 장식 3개를 두고, 뒤쪽 좌우에 2개의 사슴뿔모양 장식이 세워져 있다.
머리띠와 ‘출(出)’자 장식 주위에는 점이 찍혀 있고, 많은 비취색 옥과 구슬모양의 장식들이 규칙적으로 금실에 매달려 있다. 양 끝에는 가는 고리에 금으로 된 사슬이 늘어진 두 줄의 장식이 달려 있는데, 일정한 간격으로 나뭇잎 모양의 장식을 달았으며, 줄 끝에는 비취색 옥이 달려 있다.
이 같은 외관(外冠)에 대하여 내관으로 생각되는 관모(冠帽)가 관(棺) 밖에서 발견되었다. 관모는 얇은 금판을 오려서 만든 세모꼴 모자로 위에 두 갈래로 된 긴 새날개 모양 장식을 꽂아 놓았다. 새날개 모양을 관모의 장식으로 꽂은 것은 삼국시대 사람들의 신앙을 반영한 것으로 샤머니즘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금관은 기본 형태나 기술적인 면에서 볼 때 신라 금관 양식을 대표할 만한 걸작품이라 할 수 있다.
금관총의 금관
서봉총 금관
경주 노서동 신라 무덤인 서봉총에서 출토된 높이 30.7㎝, 지름 18.4㎝, 드리개(수식) 길이 24.7㎝인 금관이다. 넓은 관 테 위에 5개의 가지를 세웠고, 상하에 점선으로 물결무늬를 찍고 나뭇잎 모양의 원판과 굽은 옥으로 장식했다. 관 테에 못으로 고정시켜서 세운 5개의 가지 중 중앙과 그 좌우의 3가지는 山자형 장식을 3단으로 연결하고, 가지 끝은 꽃봉오리 모양으로 마무리 했다.
이 가지 주위에는 2줄씩 점선을 찍어 금판이 휘지 않도록 했고, 나뭇잎 모양의 원판과 굽은 옥을 달았다. 山자형 장식의 좌우에는 끝이 꽃봉오리 모양으로 마무리 된 사슴뿔 장식을 세웠고, 이 곳에도 원판과 옥으로 장식했다.
내부의 골격은 2개의 금판대를 전후·좌우에서 관 테에 연결하여 반원을 그리면서 교차시켰고, 그 위에 3가닥이 난 나뭇가지를 붙이고 가지 끝에 새 모양을 하나씩 붙였다. 관 테 좌·우에 길게 굵은고리(태환식) 귀고리 드리개를 달아 늘어뜨렸다.
서봉총 발굴에는 당시 고고학자로 이름난 스웨덴의 구스타브 아돌프 왕태자가 참가했다. 일본을 방문하고 있던 그는 경도(京都)제국대학 고고학과 주임교수의 권유로 10월 9일 경주에 도착해 이튿날인 10일 오전 납작해진 금관을 목관 속에서 소중하게 들어올렸다. ‘서봉총’이란 이름도 스웨덴의 한자표기 ‘서전(瑞典)’에서 ‘서’자를, 금관에 장식된 ‘봉황(鳳凰)’에서 ‘봉’자를 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