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면 한 그릇
서민들이 즐겨 찾는 음식 가운데 냉면만큼 꾸준한 사랑을 받는 음식도 흔치 않다. 지역 이름을 앞세운 채 오랜 명맥을 이어 온 오늘에도 세대를 초월한 남녀노소 모두의 입맛을 아우르고 있으니 말이다.
이북의 대표적 향토음식인 냉면이 남한에 등장한 것은 한국전쟁이 끝난 뒤다. 고향의 맛을 그리워하는 실향민들의 향수를 달래느라 냉면집 간판이 하나둘 내걸리기 시작했다. 메밀의 원산지는 시베리아 남부의 바이칼 호· 아무르 강· 만주 등지로 알려져 있다. 한반도에 들어온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처음 재배된 지역은 함경도 지방이다. 메밀은 냉면 외에도 메밀국수· 메밀묵· 막국수· 메밀부침개· 메밀수제비 등 쓰임새가 다양하다.
메밀가루에 녹말가루를 섞은 반죽으로 뽑아내는 평양냉면의 면발은 함흥냉면에 비해 굵고 부드러우며 갈색이다. 육수는 소뼈를 애벌 고은 국물에 사태나 양지머리를 넣고 푹 삶은 후 국물을 걸러 차갑게 준비한다. 사골육수에 동치미 국물을 섞어 좀 더 담백한 맛을 내기도 한다. 면 사리 위에 편육과 삶은 달걀· 초절임한 납작 무 등을 고명으로 얹고 육수를 부으면 끝이다. 식초나 겨자는 취향껏 첨가한다. 시원한 국물과 함께 목젖을 타고 미끄러지듯 넘어가는 면발이 지친 여름 무더위를 달래기에는 그만이다.
함흥냉면의 면발은 함흥 특산물인 감자 전분을 사용한 예전과 달리 지금은 고구마 전분을 사용한다. 뽀얀 색깔에 질기고 가는 것이 특징이다. 원래는 가자미식해 고명을 올렸지만 단가를 맞추려다 보니 점차 명태무침이나 쥐치고기로 교체되었다. 이북 사람들이 감자농마국수 혹은 회를 얹었다 하여 회국수라고 부르는 음식이 바로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함흥냉면의 원형이다. 농마는 녹말의 이북 사투리다.
신의주냉면의 특징은 꿩고기 육수와 꿩고기 완자 고명이다. 꿩고기를 총총 다져 완자를 빚은 후 끓는 물에 익혀 면 사리 위에 얹는다. 살을 바르고 남은 뼈로 육수를 낸다. 꿩고기는 지방질이 적어 국물 맛이 담백하고 깔끔하다. 꿩이 귀한 요즘은 꿩고기 육수도 옛말일 듯하다. 이북지방의 지역 이름이 들어간 냉면과는 별도로, 남한 식 냉면의 대표 주자는 진주냉면이다. 진주냉면은 멸치나 다시마 등 해물로 육수를 내어 맛이 진하다. 얇게 포 뜬 소고기에 달걀 물을 입혀 지져 낸 소고기육전 고명이 이색적이다.
서울에서 냉면으로 내로라하는 곳은 오장동 함흥냉면 골목이다. 지금은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르겠으나 내가 그곳을 드나들던 때는 여름이고 겨울이고 냉면 철을 잊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세월의 더께가 고스란히 내려앉은 좁고 허름한 냉면집 방에 앉았노라면, 여기저기서 연로한 실향민들의 질척한 이북 사투리가 귀에 착착 감긴다. 새콤달콤하면서도 칼칼한 비빔장을 넣고 살살 면을 비빈 후 젓가락 바쁘게 먹다 보면 어느새 이마와 콧잔등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힌다. 냉면집 필수 아이템인 만두로 얼얼해진 뱃속을 달래는 재미를 비단 식도락가들만의 호사라 할 수는 없다.
몇 해 전 겨울, 열흘 넘도록 뱃속으로 밥 한 술 못 들이고 기진맥진해 있었다. 그때 유일하게 생각난 것이 시원한 냉면 국물이다. 근방에 냉면집도 없고 궁여지책으로 동네 슈퍼에서 인스턴트 냉면을 수배했지만 그마저도 허사였다. 마누라의 마지막 소원인가 하여 애끓는 심정이 된 남편이 차를 끌고 나가 어렵사리 봉지 냉면을 사들고 돌아왔다. 그러고는 평소 물만 붓고 끓이는 라면도 무슨 대단한 요리로 알고 엄두를 못 내는 터에 주방으로 들어갔다. 역시나 난생 처음 남편에게서 대접받은 냉면은 죄다 퍼져 있었다. 그마저도 비몽사몽간에 두어 젓가락밖에 넘길 수 없었던 그때 일을 떠올리면 아직도 가슴 한켠이 아리다.
냉면 사발을 마주할 때면 동지섣달 긴긴 밤, 집 마당 한 귀퉁이에 묻어 놓은 동치미 항아리에서 사각사각 살얼음 진 국물을 퍼다, 삶은 국수를 후루룩 말아 먹던 유년의 추억이 떠오른다. 냉면은 입맛 잃은 여름철 한 끼니 때우기에 부담 없는 음식이다. 냉면의 시고 달고 매운 맛은 인생의 맛과 흡사하다. 그래서 더욱 애착이 가는 마음의 음식이 된 게 아닌가 싶다.
2016. 8.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