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례 1. 머리말 2. 생애와 사승관계 3. 교육의 형태 4. 교육의 내용 5. 맺음말 【 국문초록 】 孫處訥은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반에 걸쳐서 대구 지역에서 활동하였던 대표적인 학자였다. 그는 趙光祖와 金宏弼로부터 내려온 학문적 영향을 받으며, 李 滉의 학문을 鄭逑를 통해 전해 받았다. 그래서 小學이나 心經, 近思錄 등과 같은 교재를 講學에서 가장 중시하였다. 일기에서 가장 시간을 많이 들여 읽은 책 들이 위의 교재였던 것에서 손처눌의 학문적 지향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이라는 일찍이 겪어보지 못했던 전란을 경험한 이후 손처눌은 새로운 사회 재건의 목표를 교육을 통해 해결하려고 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임 진왜란 이전부터 이미 조선을 혁신하려고 시도하였던 사림들의 학문적 지향을 계 승하면서도 이를 지역의 현장에서 실천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이었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 대구 지역에서는 이전과는 달리 많은 과거 합격자를 배출할 수도 있 었고, 학문의 전통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손처눌, 이황, 정구, 모당일기, 소학, 심경, 근사록, 1. 머리말 慕堂 孫處訥(1553~1634)은 명종~인조 연간에 대구 지역을 거점으로 활동한 대표적인 학자이다. 그는 당대의 정치 현실에 실망하고 정계로의 진출을 포기한 이래 한 평생 부모님의 무덤가에 시묘살이를 하면서 효를 몸소 실천하였다. 그런 한편으로 求道의 일념으로 한 평생 학문에만 전념 함으로써 당대에 이미 명망이 높았다. 그러나 비단 손처눌은 일평생 학문에만 몰두한 것만이 아니었다.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의 국가적 위기를 맞았을 때는 일신의 평안함을 뒤로 하고 과감히 서책을 덮고 의병을 일으킴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된 인물이다. 이 때문에 손처눌 이후 대구지역에서는 그에게 영향을 받은 인물들이 적지 않게 등장하였다. 그의 교육활동의 결과 講學에 참여하였 던 인물들은 202명을 헤아리게 되었다.1) 그의 스승은 退溪 李滉의 제자였던 溪東 全慶昌(1532~1585)과 寒岡 鄭逑(1543~1620)이다. 손처눌은 그 문하에 출입하여 성리학적 학풍을 1) (국역)영모당통강제자록(永慕堂通講弟子錄) 2001, 靑湖書院 간행 참조.
본고에서는 이러한 손처눌의 학문과 그의 위상을 고려하여 16세기 후반~17세기 전반의 시기에 지역에서의 사족의 역할에 대해 주목하고 자 한다. 이 점과 이 시기의 시대적 특성과 사족의 향촌사회에서의 역할이라는 두 가지 점을 염두에 두고 설명하고자 한다. 주지하다시피 16세기 후반은 사족들이 향촌사회에서 일정하게 자리를 잡으면서 향촌의 주도세력으로 성장하던 때이다.
이 시기 사족들은 정치, 경제, 사회적인 여러 측면에서 향촌에서의 일정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손처눌의 대구지역에서의 활동은 이러한 사족활동 가운데 특히 사족들이 어떻게 강학을 통해 지역에서 자기 정체성을 확보해 나갔는지를 살펴볼 수 있 는 좋은 사례이다. 따라서 손처눌의 강학 활동을 통해서 이 시기 사족들의 교육활동, 이를 통한 사족들의 ‘자기 만들기’에 관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2. 생애와 사승관계 손처눌의 가계를 살펴보면 그의 비조(鼻祖)는 신라인 순응(荀凝)이며, 고려에서 손씨 성을 하사받았다. 공민왕대에 11대조 홍량(洪亮)은 좌리공신을 지냈으며, 5대조가 집현전 한림이었던 조서(肇瑞)는 단종에 대한 절의로써 이조참판에 추증되기도 하였다. 고조인 순무(荀茂)는 음직으로 주부를 역임하였고, 증조인 세경(世經)-은 효행으로 천거되어 참봉으로 제수되었다. 조부인 치운(致雲)도 효행으로 천거되어 永同과 比安 두 고을의 현감을 역임하였다. 특히 처음 효행으로 寢郞(능 참봉)에 제수되었을 때 당시 권신인 김안로의 전횡을 비판하다가 파직된 사실로 미루어 효행과 더불어 불의에 항거하는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였음을 알 수 있다. 손처눌의 조상은 대대로 안동의 一直縣에서 살다가 7대조인 손관(孫寬)이 밀양으로 이주하였다가 증조부인 세경이 다시 대구의 수성현(壽城縣)으로 이주하였 다. 손세경이 달성 사람인 徐震元의 女壻였기에 처향을 따라 이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손처눌의 부친은 宣務郞을 지낸 수(遂)이고, 모친은 한산이씨 이탄(李坦)의 딸로서 이색의 후손이다. 이탄은 旅軒 張顯光(1554~1637)의 5대조인 張俁의 外後孫이므로 손처눌은 장현광과도 인척 사이이다. 손처눌의 아우와 종숙도 모두 임란과 호란에 의병을 일으켜 우국충정의 정신을 볼 수 있다. 고모부인 湖叟 鄭世雅(1535-1612)의 경우에 영천에 거주하였으 며 당시 명망이 있는 학자였다. 손처눌은 자주 영천에 들려 고모부에게 수학을 하기도 하였다.
17세 때에 遁村 李集의 후손 李遠慶의 딸인 광주이씨와 혼인을 하였다. 이원경은 石潭 李潤雨(1569-1634)의 종조부이다. 이런 인연으로 이윤우는 어려서 손처눌에게 배웠으며 뒤에는 정구의 문인이 되었다. 손처눌의 후처는 창녕조씨로서 曺應義의 딸이다.
19세 때에는 장인인 松巖 李遠慶의 장례에 나갔다가 평생의 스승인 정구와 대면하게 되었다. 이때 정구는 “독서는 많이 하는 것을 바라기 보다는 정밀하고 익숙하기를 바라야 한다. 익숙하지 못한다면 그 의리를 얻을수 없고 정밀하지 못하면 그 이치를 살필수 없다.”고 조언하였다. 이 후 정구와는 직접 수학하지는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 당시에는 정구가 관직에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정구를 본격적으로 만난 것은 손처눌이 50세 되던 1602년이다. 손처눌은 21세에 鄕解(향시)에 합격하나 禮圍(文科 覆試)에는 불합격하였다. 이를 계기로 하여 당시의 정치, 사회의 현실을 비판하고 과거를 포기하였다. 손처눌은 33세 되던 해에 스승인 전경창의 부고를 접하고, 이어 35세에 부인 이씨의 상을 겪음으로써 개인적으로 매우 힘든 시기를 보내게 되었다. 이후 40세에 임진왜란이 발발, 동생과 함께 창의할 뜻을 천명하고 의병을 일으켰다. 정유재란 때에는 부모님의 상을 마치고 45세에 당시 관찰사에게 軍務 7조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후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는 다시 학자로 돌아와 47세부터 학문에 정진하였다. 48세에는 난중에 親喪을 당하여 상례를 다하지 못함을 평생 의 한으로 여겨 黃靑洞(지금의 수성구 황금동) 묘소 아래에 집을 짓고 편 액을 ‘永慕堂’이라 하여 평생 시묘살이를 하며 부모에게 못 다한 효를 행 하는 동시에 이곳을 중심으로 제자들과 강학 활동을 통해 후학을 양성하 였다. 모당이라는 그의 호는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한강 정구와의 사제의 인연이 다시 이어졌다. 정구는 1602년, 손처눌이 50세 되던 때 정월에 충주목사로 부임하였다가 휴가를 내서 고향으로 잠시 와 있었는데, 손처눌은 당시 旅軒 張顯光과 樂齋 徐思 遠 등과 함께 星州의 寒岡精舍로 가서 만났던 것이다. 다시 정구와 만난 것은 1604년으로 東岡 金宇顒에게 조문한 뒤였다. 1605년 이후로 손처눌 은 서사원, 장현광 등과 함께 강회를 자주 여는데, 여기에 정구가 참여하 였고, 이후 정구가 蘆谷, 泗水洞으로 옮기면서 더욱 가까운 관계를 이어가 게 되었다. 손처눌은 59세 때 정인홍이 차자를 올려 회재, 퇴계의 문묘 배향을 저지하자